빈머리를 붙들어야 산다!
2023.6.4. 주일오전성찬예배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성만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12장에는 이 성만찬에 참여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어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 됨과 같이 지체들이 연합해서 몸 된 교회를 이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지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시 고린도 교회의 머리 되시고, 이 땅에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머리 되시고, 이 시간은 우리 몸 된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식구님들도 기도할 때마다 늘 빼놓지 않는 기도가 “주님! 우리 몸 된 교회의 머리 되어주세요. 우리 식구님들 한분 한분의 목자 되어주세요” 이것인 줄 압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지만 만약에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장이라도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주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어지럽고 망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머리를 붙들어야 산다’입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도 머리를 붙들어야 살 뿐만 아니라 우리 몸 된 교회도 예수님을 머리를 붙잡아야 삽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과 19절에 보면 골로새 교회에 슬그머니 들어온 율법주의와 신비주의가 성도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님이 편지를 해서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게 하시는데...”왜 머리를 붙들지 않느냐? 머리를 붙들어야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9장 말씀에 자신을 따르고 싶다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속뜻은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을 찾고 있는데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머리 되시고, 주님이 머리 되신 가운데서 몸이 붙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몸 된 교회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도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주님을 머리로 붙잡을 때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교회는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모세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그 앞길을 한 발자국도 스스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지시로 이스라엘 백성이 움직입니까? 성막 위에 떠있는 은혜의 구름! 바로 주님이 움직이시면 이스라엘 백성이 움직였고, 성막 위의 구름이 멈춰있으면 하루도 좋고 일 년도 좋고 어느 시간이라도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시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 되셨습니다. 모세는 머리 될 생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만일 모세가 머리 되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혼란에 빠지고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고 압력을 넣습니다. 사무엘이 기뻐하지 않았어요. 주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그리고서는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하면서 사무엘을 위로하고 왕을 세우는 제도를 허락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붙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많았지요.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한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어느 일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욕을 따라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은 천국에서 친히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머리로 붙잡을 때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머리로 붙들지 않고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게바 곧 베드로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라고 서로 분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선생님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오직 죄를 용서해주시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게바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느냐? 아볼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느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고 하는 무리도 나왔는데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잡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 자기들의 개념상 우리는 그리스도파라고 이야기하는 분당주의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될 수 없지요.
고린도전서 12장 말씀에는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한 분 주님께 속해서 각자의 지체의 분량대로 서로 상합하고 연락하여 아름다운 몸을 이루는 것이 교회의 영광이요 능력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그 일생의 고백을 시편 23편 1절에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님만이 나의 목자이시고, 주님만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십니다.
제가 지난주 목요일쯤인가 잠깐 힘들어서 침대에 누워있었어요. 그런데 교회를 생각하다 보니까 제가 의도하지 않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몸이 경직되었습니다. 저를 도와주시는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제 모습을 보고 “목사님, 바람도 쐴 겸 해서 밖에 나가서 걷기 운동 좀 하실까요?” 지혜롭게 물어보시더라구요. “네! 그렇게 하십시다” 저는 금방 대답하고 밖에 나가서 주차장에서 바람을 쐬며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이 몸 된 교회 목자 아닙니다. 제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천국 가신 목사님도 내가 이 교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바보 천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몸 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저는 주님을 머리로 붙잡고 내 영혼이 살고 식구들께도 주님을 머리로 붙잡아야 산다고 말할 겁니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편 24:8) 교회는 주님 모신 초대교회와 같아야 되고, 우리 목사님은 우리 교회를 개척교회라는 이름에서 떠나지 말자고 했습니다. 처음 사랑! 개척하듯이 이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누가 우리 교회를 칭찬하더라도 교회의 칭찬은 주님 한 분께로만 영광을 돌려야 될 줄 압니다.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나를 십자가에 넘겨버리고 세상과도 십자가로 못을 박아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전투 대형으로 이 광야를 이겨가는 교회! 우리 교회에 72개의 소대가 있습니다. 말로만 소대가 아니라 영적 전투에 나서는 용사들처럼 마음을 무장하고 예수님을 나의 머리로 붙잡으면서 전투하는 군사들처럼 서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무엘이 사울 왕을 책망한 때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이지요. 아말렉을 쳐부셨으나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는 그러한 어리석은 일을 범했을 때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했다 하면서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을 때는 겸손히 주님을 머리로 붙잡는 그 길에서 세우셨음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요나단과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 태어난 것이 참 기적인 것 같아요. 사울 왕은 처음에는 바른 길에 서 있었지만 왕 위에 앉다보니 그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자 요나단은 사무엘상 14장에 보니까 블레셋과의 전투를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병기 든 자 한 사람과 같이 나아가서 블레셋 산지로 올라가면서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사무엘상 17장에는 또다시 블레셋이 쳐들어왔는데 이번에는 골리앗이라는 육 척 거구가 밤낮으로 사십 일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욕하고 여호와를 모독하면서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영웅인 요나단을 찾고 요나단이 나서기를 바랬을 겁니다. 요나단 자신도 주님 앞에 물어보았을 거예요 “주님, 전에도 주님께서 감동하셔서 블레셋을 무찔렀는데 이번에도 제가 나서야 합니까?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주님은 요나단에게 답을 주지 않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겁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니고 사십 일간 밖에서 나아가서 싸우면 쉽겠는데 주님 모시고 평강 속에 기다리는 요나단을 봅니다. 용기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머리로 붙잡았을 때 주님이 허락하시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의 지시사항이 없었기 때문에 서 있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사십일 째 되었을 때 베들레헴에서 목동을 하고 있는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좇아 형들이 잘 있는가 살펴보려고 그 전장에 나왔습니다. 주님이 세운 사람은 다윗, 베들레헴의 목동이었습니다. 다윗이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뜨거운 심장을 품고 양들에게서 사자와 곰을 무찌르듯이 골리앗을 한방에 처치했습니다. 그때 기뻐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기뻐한 사람이 요나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전쟁 자체의 승리의 기쁨에 들떠있었던 반면에 요나단은 주님이 머리 되셔서 주님의 사람이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여인 사랑한 것보다 더 사랑하면서 자기의 갑옷도 허리띠도 다 주면서 다윗을 존귀히 여기고 다윗과 형제 관계의 언약을 맺습니다. “나는 네 다음이다” 왕자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사울 왕이 볼 때에도 “이 어리석은 놈아, 네가 왕자인데 네 자리를 그 촌놈한테 주고 있어”하고 핀잔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요나단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 다음이다!”
보통 집안에 불효자식이 생길 때는 부모의 마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형제들 간에 분쟁이 있는 모습을 가끔 봅니다. 그때 바른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육신의 동기들에게 잘해주고 싶을 겁니다. 제가 경험적으로 그렇더라구요. 어떨 때는 섭섭한 마음도 있고 어떨 때는 좀 짜증 나는 생각도 있었지만, 곧장 돌이킨 것은 물론 예수님도 생각하지만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니까 형들한테 누나들한테 더 잘해야겠다고 선물도 보내고 ‘잘들 계십니까’ 안부도 묻고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부모님 같은 분이 우리 몸 된 교회는 예수님이예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형제들에 대해서 뜨거운 마음이 부어집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형제의 허물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을 깊이 생각하면 허물을 덮어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장 26절과 27절! 저는 참 이 말씀을 좋아하는데요.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어제 오후 3시에 우리 몸 된 교회 식구님 중에 박OO 집사님이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요즘 연약한 식구님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제일 처음으로 기도했던 분이었는데... 그래도 가신 길이 주님 품이고 천국이라 생각하니 슬픔 중에서도 위로가 됩니다. 그분의 고통이 저의 고통이요, 우리 몸 된 교회의 십자가였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형제가 몸이 연약했다가 회복이 되면 우리도 함께 즐거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머리에 연결된 한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지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시록 2장, 3장에서 일곱 교회가 소개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이지요. 그중에서 머리를 주님으로 붙든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 그 극한 고난 속에도 주님을 머리로 붙들고 인내로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 같으나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능력이 많지 않았어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의 뜻을 잘 알지요. 바로 ‘형제 사랑’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실제로 머리로 붙들지 아니한 교회들은 다 책망 듣고 회개를 하라고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 참 주님의 일을 많이도 했던 교회입니다. 언뜻 보면 바람직하게 보입니다만 그 첫사랑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주님과의 첫사랑이 없는데 그 행하는 사역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버가모 교회, 니골라당의 교훈이 살아 있는 교회, ‘나는 성직자고 여러분들은 평신도다’ 그런 말이 성경에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가르쳤다가는 평신도가 아니라 병신도가 된다고 그랬지요. 두아디라 교회, 음녀 이세벨이 지배하는 교회, 영적으로 음란에 사로잡힌 교회이지요. 또 주님을 머리로 붙들지 않은 사데 교회, 살았다고 하나 죽은 교회라고 주님은 평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자칭 부요하다고 했지만 주님은 실상은 네가 가난하고 헐벗고 눈멀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머리로 붙드는 실제가 우리 안에 살아 있기를 원합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부터 22절 말씀에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함께 지어져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고 우리의 머릿돌이 되어주셨습니다. 서로 먼 데 있던 우리의 관계를, 남남이었던 우리의 관계를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하찮게 보이는 형제이지만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산 형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몸 된 교회는 저를 포함해서 목사님들이 머리가 아닙니다. 장로님들도 그런 생각 없으실 겁니다. 주님만이 우리 교회의 머리이시고 머리로 예수님을 새롭게 새롭게 힘있게 붙잡아야만 교회가 살아납니다. 어떤 사상이, 어떤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모신 살아 움직이는 교회, 주님을 돕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로 계속 뻗어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들판 시간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2023.5.28. 주일오후예배
마가복음 6장 30절에 보면 사도들이 주님의 지시를 받아 나아가서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마가복음 6장 31절에 나오는 이 짤막한 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 어떻게 빈들판 시간이 소중한지를 함축적으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한마디 말씀 속에서 네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따로! (분리)
주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합 왕 앞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나서 그를 따로 분리시키는 모습이 보입니다. 열왕기상 17장 3절에 보면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를 떠나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역의 현장과 우리의 삶의 근거지에서 떠나서 주님 안에 숨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역의 열매를 맺는 것이 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 안에 숨고 빈들의 사귐을 갖는 것은 보다 근본적이고도 적극적인 구원의 길이라 말씀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빈들판이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역의 모습은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빈들판 시간이 살아 있다’ 그러면 우리는 몰라도 주님은 역사하시고 주님의 나라가 부흥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뿌리가 산 즉 열매가 살아 있겠지요.
같은 마가복음 6장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허다하게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시고 그 무리를 배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재촉을 하셔요. 얼른 떠나라고! 예수님이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십니다. 거기 나와 있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가게 하시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영혼을 위하시고 말씀하신 처사이십니다. 남자만 해서 오천 명이 모였다는데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운동장에 가득 모인 관중처럼 최소한도 이 삼 만명은 모였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만약에 제자들이 일일이 악수하면서 “감사합니다. 고기랑 떡 잘 먹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좋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삼 만명한테 들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제자들의 마음은 둔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얼마나 귀가 얇아서 그러한 칭찬과 그 사역의 현장에 머물 것을 아시기 때문에 빨리 재촉해서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가르쳐주실 때도 마태복음 6장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셨어요. 이 역시 ‘따로’이고 ‘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빈들판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서 분리 속에서 주님을 묵상하는 것! 사역의 좋고 그름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분리해서 일어서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시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새벽에 제가 잠자는 방에서 일어나서 거실 한쪽으로 가고 또 어느 때는 거실에 있는 식탁 의자에 앉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건너방에 있는 의자에 앉기도 하고 날마다 새롭고 산 길로 가서 빈들판 시간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익숙한 곳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합니다. 같은 집 안에서도 말입니다. 제자된 우리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따로 분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둘째, 한적한 곳에 와서
번거로운 곳이 아니라 한적한 곳에 와서 쉬라는 것이지요.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낮 열두 시에 기도하려고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지붕 위에 무엇을 널려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아래층에 식사하는 데 번거로우니까 기도 시간도 되었고 해서 한적한 지붕을 택한 것입니다. 이 지붕 위의 삶! 사무엘 선지자가 그 지붕 위의 삶을 살았고 베드로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6장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배타고 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를 더 집중하기 위해서 아버지 앞에 일대일로 만나기 위해서 수고스럽지만 산으로 가셨습니다. 다시 제자들에게 온 시간이 사경이니까 새벽 세 시부터 여섯 시가 밤 사경인데, 그 전에 기도하셨으니까 저녁 자정 전에 산으로 올라가신 것이지요. 저녁 늦은 시간부터 새벽 세 시까지 기도하셨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주님은 성전에서도 기도하셨겠지만 산에서, 빈 들에서 또 감람산 겟세마네에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습관처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입니다.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다!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로 그 예수님의 본을 받아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해야 될 줄 압니다.
다큐멘터리 '중국의 십자가'를 우리 식구님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거기에 나와 있는 여러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 중에 상하이 음악 교사이자 가정교회 지도자인 양심비 여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양심비 여사는 문화대혁명 당시 27세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과 삼자 애국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20년형을 언도받고 계절이 바뀌는 것이 스무 번, 감옥에 들어갈 때는 27살이었는데 출옥할 때는 47살이 되어서 아가씨가 아줌마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이야기하신 것 같아요. “저는 감옥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다 깊이 잠든 후에 밤 중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감옥이라 따로 한적한 곳을 만날 수 없는데 한적한 시간을 택한 것 같아요. 그래서 깊이 있게 기도하면서도 뭐, 소리 내서 기도했겠습니까? 마음으로 주님 앞에 깊은 사귐 속에서 기도해서 그 출옥할 때 모습을 보면 얼마나 얼굴이 밝은지 몰라요.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다 얼굴이 밝습니다. 성도들도 얼굴이 밝습니다. 한국교회에도 깊은 빈들판의 시간이 살아 있다면 그 얼굴들이 내 형제처럼 가깝게 느껴지겠지요. 그런 참된 부흥이 복음 안에서 한국교회에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셋째, 잠간!
우리가 경험적으로 내 주님과의 빈들판 사귐을 가지다보면 한두 시간이 잠시 잠간인 것처럼 훌쩍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한 20분 기도한 것 같은데 두 시간이 넘어버렸어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잠간 만나서 이야기하고 서로 얼굴을 대한지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시간은 벌써 열두 시가 되는 것이지요. 히브리서 10장 3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말씀인데, 그런데 시간은 벌써 이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말씀은 베드로후서 3장 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하루가 천년 같답니다. 천년이 하루 같기도 하고요.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우리의 시간대는 영원의 시간을 약속받은 것입니다. 아니 영원한 시간에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천국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시간 속에 우리 예수님과 만나고 잠간 잠간 빈들의 사귐 속에서 그 영원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잠간!’ 동안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실 때 한 시간인데,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한다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시험에 든다는 것입니다. 잠간이라도 주님과의 사귐을 이어간다는 것은 소중한 것 같아요. 처음부터 내가 오늘 몇 시간 기도해야지 그렇게 시작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시계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 주님!’ 하면서 사귐을 하다보면 시간이 훌쩍훌쩍 지나갑니다. 예전 주님과의 사귐에 익숙하지 못할 때는 새벽 네 시에 알람을 맞추어 놓았습니다. 지금은 알람을 안 맞춘 지가 꽤 되었습니다. 밤 아홉 시 반, 열 시에 잠이 들면 열두 시에 일어나기도 하고 좀 늦게 자면 새벽 두 시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새벽 네 시 전에 일어나면 또 잤어요. 기도 시간이 안 되었다고요. 지금은 주님이 일찍 깨워주시면 깨워주시는 대로 기도를 합니다. 마음이 참 좋아요. 여유 있게! 데이트하면서 시계 쳐다보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면 만나지를 말아야지, 왜 커피 같이 마시고 있어요. 바쁘게 일을 해야지 말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서는 시계를 보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넷째, 쉬어라!
집은 가족들이 쉬는 곳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기도 생활은 집에서 쉬는 것처럼 영혼에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내 주님을 모시고 적절하게 쉬는 것도 하나님 나라에서 소중한 일이요, 삶입니다. 이렇게 쉼을 갖고 다음 길을 주님과 함께 준비하고 위로부터 힘을 입어서 새롭고 산 길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 말씀을 처음 예수님께로 돌아온 사람에게 적용하겠지만, 이것은 오래토록 주님 모시고 길 걸어온 저와 여러분에게도 새롭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빈들의 시간 속에 우리는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겨버리고 쉼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성령님 안에서 가르쳐주심에 따라서 배우고 지시를 받습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쉼을 얻지요. 내 짐을 벗기 때문에 쉼을 얻는 것도 있지만 이제는 주님의 짐을 지고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마음속에도 주님이 가르쳐주시니까 쉼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일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마음을 주시고 그 허락된 믿음을 따라서 섬김을 준비하는 것, 쉼이 있지요.
마태복음 12장 8절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주님은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식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안식이 없어요. 쉴 줄 모르고 일만 하는 중독자들을 ‘workaholic 워커홀릭’이라고 영어로 말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죽어라고 일만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보다는 내 주님 곁에서 쉬고, 주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어서 알차게 삶을 꾸려 가야 할 줄 압니다. 쉴 때 제대로 쉬고 일할 때 제대로 일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빈들판 시간은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가깝게 누려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잠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