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전에도 여름은 한결같이 더웠다. 더위는 사람의 총명을 갉는다. 이를테면 흐느적흐느적. 나는 그 날도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데모 중이었다. 두달 째였다. 젊은 친구들 이끌고 주로 시위 문구를 작성하거나 언론사 기자들을 만났다. 국회 의원회관을 다니며 성명서 같은 것도 배포했다. 그때 열심히 인사드리고 면담했던 의원들 중 어떤 분은 지금 더욱 근사한 간판을 다셨고 혹자는 숨졌고 어느 분은 오명을 뒤집어쓰셨고. 하여간 그때 내 간판은 ‘사무국장’이었다. 대학생 아이들 700~1000명 쯤을 이끌고 있었다.
시위 목적은 삼분의 일 쯤은 도덕적 대의, 나머지는 직업적 이익이 걸터있었다. 이를테면 하늘 아래 우리가 신문에서 매번 보는 지극히 흔한, 그렇고 그런 싸움이었다. 그 날은 유독 더웠고 우리도 전투경찰도 모두 신경이 곤두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부청사 후문으로 공무원들이 쏟아져나왔다. 점심시간이었다. 우리가 길바닥에서 뒹굴든 말든 흰 와이셔츠를 입고 아메리카노를 빨며 나서는 발걸음이 그리 야속할 수 없었다. 그날 오후는 더위에 신경질이 날대로 났는지 어느 전투경찰이 방패로 내 가슴팍을 내려찍었다. 나는 ‘아이구구’하면서 뒹굴었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는데 주변의 카메라 기자들 생각이 와중에 스쳤다. 뒹구는 나를 동생들이 겨우 끌고와 생수통 물로 얼굴을 씻겨줬다. ‘형은 좀 쉬어요’라는 지휘부 허락을 받았다. 나는 조용히 시위 무리를 빠져나왔다. 나선 김에 시위대 점심메뉴 주문을 해야한다.
겨우 골목 한 블럭을 건너니 치열한 투쟁은 연기처럼 사라져 있었다. 스타벅스와 길거리 카드 영업사원과 심한 노출의 아가씨들이 무슨 판촉물 같은 것을 나눠주고 있었다. 이를테면 일상의 광화문이 거기 있었다. 내 또래의 너무 멋있게 생긴 어떤 젊은이가 교보문고 입구에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예쁜 데이트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걸까. 나는 평온한 세계 한 가운데 돋아난 기이한 형상의 돌기였다. 이해하기 힘든 마음이 복받쳤다. 수치감이랄까. 기묘한 모멸감이랄까. 사람의 마음은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방식으로 타격을 입는다.
핸드폰으로 도시락업체에 오퍼를 넣었다. 천명 가까운 도시락 주문이니 업체사장님은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한다. 걷다보니 미국대사관 앞까지 닿았다. 그러니까 정부종합청사 맞은 편이며 문화관광부 청사 옆 블록. 그야말로 쨍한 날이었다. 저만치 무슨 기자회견이 있는지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카메라 기자들, 신문기자들이 뒤섞인 수백명의 인파가 어디를 한참 찍고 있었다. ‘파파팍’하고 카메라 조명이 터진다. 광화문은 언제나 그렇지만 각종의 시국 최전선에 선 나같은 자들의 장이다.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우리 시위에는 오지도 않는 대한민국 일간지 기자들, 방송사 사람들은 저기 다 모인 것 같았다. 아까 방패에 맞은 가슴팍이 괜히 다시 얼얼했다. 얼마나 높은, 얼마나 대단한 명망가들이길래 저리 몰려들었을까. 속으로 비아냥했다. 가까이 가봤다. 어디서 많이 본 분들이 기자들에 둘러쌓여 있었다. 지나치는 행인들도 유심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분들은 울고 있었다. 금새 알아봤다. ‘어디서 많이 본 분들’은 ‘우리 교회에서 매주 보던 분들’이었다.
우리 교회 교인들, 그 중에서도 사랑부에서 함께 교사로 있던, 휠체어에 탄 신자 한 분이 흐느끼고 있었다. 강직된 혀를 억지로 펴가며 그는 준비한 글을 읽었다. ‘젊은이들을 부디 살려보내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몇주전 아프기나스탄에서 납치된 교회 청년들이 돌아오길 빌며 통곡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오후 내내 광화문은 눈이 시리도록 빛이 파도치고 있었다. 쨍한 빛이 날카롭고 공격적으로 직사했다. 더위에 타들어버린 내 흐리멍텅한 머리 위로 불씨를 뿌리고 있었다. 덥고 힘들었다. 그 힘듦은 더위 때문이 맞았을까.
나는 회견장의 교인들이 혹시라도 나를 알아볼까봐 조용히 기자들 틈을 빠져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광화문 지하도로를 건넜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단순하며 미칠 것 같은 예리한 질문이 뙈약볕처럼 나를 갉고 있었다. 교인들이 교인들을 살려달라고 기자회견을 하고, 몇 일째 통곡으로 기도를 하고, 예배당 밖에서는 반기독교도들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끔살한 욕설을 마이크에 담아 지르고, 교인들은 몇주째 숨죽여 우는 그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길 위에 있는거지. 어떤 대의로 뭘 투쟁하느라 길 위에서 몇달째 유숙 중일까. 지금 이곳은 어디지. 나는 어디에서 떠밀리는거지. 아니다. 지금은 생각의 때가 아니다. 무언가 골몰할 여유가 없다. 진동이 울렸다. 도시락업체 사장님이 몇번째 전화연락을 해오고 있었다.
다시 한 블록을 건너 종합청사 후문에 진치고 있는 우리의 운동원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 저 멀리 깃발들이 더위에 펄럭인다. 내가 주문한 1000명분 시위대 점심도시락이 올 시간이다. 생수도 챙겨왔는지 확인해봐야한다. 기자에게 우리 투쟁의 대의를 인터뷰도 해야 한다. 햇볕이 너무 따가웠다. 광화문 청사 앞 길바닥은 콘크리트 돌인데도 뭔가 찐득찐득했다. 모든 것을 누그러뜨리고 흐물거리게 하고 타들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심부(心府)에서부터 녹아 뭉게지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났지만, 땀줄기와 섞여서 울음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누군가 아까처럼 방패로 나를 흠씬 때려줬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내게 화를 내며 물어주십시오.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누가 날 멱살잡아 패대기쳐 주십시오. 침을 뱉어주세요. 오. 주님 나를 용서하소서. 그 여름 이후 길던 시위는 끝났다.
그 충격적이고 망망대해에 던져진듯 했으며, 버틸 수 없는 비애를 지난 교인들의 여름이 다 지났을 무렵, 청년부 목회자께서는 결국 숨져 돌아왔다. 목회의 꿈을 꾸었던 우리 장애인부 교사도 숨졌다. 장애인부에서 그가 지도했던 자폐 어린이는 내 짝이 되었다. ‘특수교육 하시는 분이라셨으니 잘 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사랑부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인의 빈자리에 내가 놓였다.
심리학자 닐 로스(Neal J Roese)는 말했다. 후회에는 '한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action)'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inaction)'가 있다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둘 다였다. 그건 아마 평생 이어질 내 인생의 고업(苦業)이 아니었을까. / 월간고신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