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29일 아침 오시리아역에 내려139번 버스를 타고 신암마을 인근에 내렸다. 동부관광딘지 조성이 자꾸 늦쳐지는 가운데 이곳해변마을의 모습도 변화를 기다리며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연화리로 통칭되는 신암마을의 경우 꽤 큰 마을로 붕장어축제가 금년에도 10월28일 13회째 열린다고 한다. 한데 신암마을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듣지 못한 채로 대변항으로 향하다 척화비를 보게 되었다.
기장 척화비(斥和碑)
비의 높이:144㎝ 폭:상단61, 하단:52㎝. 두께:상단26㎝, 하단 21.5cm의 화강석.
당초에는 대변항 방파제 안쪽 동해바다가 굽어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 때 항을 넓히면서 일본관리들에 의해 뽑혀져 그 밑 바다속에 버려진 것을 1947년경 마을 유지이신 최태희씨가 교우회 마을 청년들에게 본비석이 바다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 마을 청년들이 인양하여 기장읍 대변리 수협대변지소 뒷편 노송 밑에 세웠는데(향토학자 윤태도님의 조언) 현재는 2년전에 기장읍 대변초등학교내 정문옆에 이건되어 있다.
①碑正面에는“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아만년자손 병인(1866)년作 신미(1871)년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우다 ”라고 작은 글자로 새겼다
②碑側面에는 단기四二七七年 七月 海中이라 靑年一同이
仝 年 春에 洞 이 건져내다
仝年 秋 八月十五日 立
본내용은 음각된 글자가 선명하지 못하여 본인으로서는 판독이 어려운데 전문가의 탁본해독이 요망된다.
기장.동래.양산일대 향토에 박식하신 윤태도 향토연구원 원장님에게 문의한 결과 단기 4277(1944)년은
일제치하 시절인지라 1947년경 해중에서 인양한것이 옳을것이라고 자문하신다.
척화비(斥和碑)는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전국의 주요도시에 세운 비석.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키려다가 실패한 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여 1866년 9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에 프랑스는 자국 선교사의 처벌 등을 문제 삼아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 중국이 겪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다면 나라를 파는 것이고,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여 교역을 허락한다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굳세게 싸울 것과 그들의 문호개방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병인양요에서 표출되었던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도굴사건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후 한층 더 강화되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겼는데 이것이 척화비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갔을 때 일본공사(日本公使)에 의하여 대부분 철거되었는데,
현재는 서울특별시 경복궁 등에 남아있다.
★장기 척화비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107 지정번호
★영양 서부리 척화비. 영양군청 비석군에 있다
★신창 척화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 236 호.
★홍성 척화비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산 5 (도 문화재자료 제 163 호
★신창 척화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 236 호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948-1 부산광역시립박물관
★경북 구미 구포동 척화비 유일하게 바위덩어리에 새겨졌다.
★옥천척화비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4-2번지
★가덕도 척화비 부산 강서구 성북동 344 천가초등학..
★청주척화비<시도기념물 제24호 :청주 >
★함양척화비 경남 함양군 읍 운림리 349-1 (문자 264호)
★청도척화비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창녕척화비 만옥정공원내
★여산 척화비 익산 여산 동헌내
★남해 노량마을앞 해성횟집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