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㊺ :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서철원 신학’
朴埰同 (2020.01.04.16:16)
{바른 믿음} 서철원 <능동순종, 종교개혁 허물어 다시 율법주의-로마교회로 복귀>
http://archive.fo/lfWdT
링크한 글을 읽을 때마다 ‘이 글을 개혁 교회 조직(교의)신학자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개혁 교회 조직(교의)신학자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주장들로 이뤄진 글이기 때문입니다.
새관점 신학은 개혁 교회 정통 교리 ‘그리스도께서 능동 순종(율법준수)으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義의 전가 교리’를 부정합니다. 그러함에도 링크한 글에서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능동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義의 전가’를 가르치는 개혁 신학을 두고 “이런 신학을 새관점 학파라고 하는데,” 하십니다. 개혁 교회 조직(교의)신학자답지 않은 이 엉뚱한 주장, 서철원 목사님 현재 정신건강을 의심케 하는 이 주장은 새관점 신학과 싸우시는 서철원 목사님께서 ‘새관점 신학 내용’을 모르시는 데서 나온, ‘무지몽매’에서 나온 ‘허수아비 논법’입니다.
링크한 글에서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조문들을 다 지켜서 율법을 성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신약에 전혀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신 것은 죗값을 갚으라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려고 율법대로 죽으신 것입니다.”며 “율법의 요구”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율법의 요구에는 “죗값을 갚으라.”, ‘어기지 마라. 어기면 그 죗값으로 죽는다.’는 요구만 있습니까? 서철원 목사님이 그리스도께 적용하신 이 요구만 있습니까? 서철원 목사님이 그리스도께 적용하지 않으신 ‘지켜라. 지키면 산다. 그 값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요구는 없습니까?
물론, 링크한 글에서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율법을 준수하라는 요구”라는 말로 ‘지켜라. 지키면 산다. 그 값으로 의義
(생명, 영생, 구원)를 얻는다.’는 ‘율법의 요구’를 말씀하십니다. 다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신학 때문에 이 요구를 그리스도께 적용할 수 없으십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신학 때문에 율법의 두 가지 요구에서 하나는 삭제하는 ‘절름발이 첫 언약론(창 2:17)’에 따른 ‘절름발이 인간론과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이 나온 것입니다. 이 ‘절름발이 첫 언약론과 인간론과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을 오류 없는 신학으로 여겨 이 절름발이 신학을 근거삼아 이단몰이를 일삼는 정이철 목사 말을 빌리자면 “신성모독”의 그리스도론이 나온 것입니다.
“율법준수를 강조하며 선행을 강조하면 로마 교회 가르침으로 복귀한다.”는 서철원 목사님 주장 역시 허수아비 논법에서 나온 엉뚱한 주장입니다. 이 주장 역시 개혁 교회 조직신학자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주장입니다. 로마 교회가 율법준수라는 선행을 강조한 까닭은 ‘구원을 얻는 길’로 강조했기 때문입니다.ㅡ‘구원을 얻는 길’로서 율법준수를 강조하는 것을 우리 개혁신앙인은 “율법주의”로 부릅니다.ㅡ 또한 로마 교회 율법주의를 반대한 개혁 교회가 율법준수라는 선행을 강조한 까닭은 당연히 ‘구원을 얻는 길’로서가 아닌 ‘성화의 길’로서 율법준수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ㅡ물론, 율법주의만이 아닌 반법주의도 반대한 개혁 교회 이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ㅡ 이처럼 로마 교회가 말하는 ‘율법준수’와 개혁 교회가 말하는 ‘율법준수’는 그 시작부터 다릅니다.
그 시작부터 다르다는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기독교 강요} 칼빈 선생님 구원론을 받든 예장 고신 박영돈 교수님 구원론’을 “마귀의 굵직한 빨대”라며 이단시했던 듣보잡 정이철 목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장 합동 꼴뚜기 정이철 목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시작부터 다르다는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그 허수아비를 때리며 좌충우돌 혼동을 초래하는 사고, 돈키호테 사고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혼란스런 사고는 링크한 서철원 목사님 글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종교개혁 교회가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해야 구원 얻는다는 그릇된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구원을 위해 율법을 준수하라는 요구가 제거됐습니다. 믿는 자들에게서 율법준수의 의무가 해제됐습니다.”는 서철원 목사님 주장에서 더욱 여실히 드러납니다.
개혁 신학이 “행위(생명)언약”이라고 부르는 ‘선악과 금령’이든, 시내산 율법이든,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이 지켰을 때 의義(생명, 영생, 구원)를 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부패한 사람은 그 누구도 율법을 준수할 수가 없습니다. ㅡ그 누구도 율법을 준수할 수가 없다고 해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새겨진 사람(불신자)에게 ‘구원을 위해 지켜라. 그러면 산다.’는 율법의 요구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ㅡ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구원을 위해 율법을 준수하라는 요구가 제거됐습니다.”는 서철원 목사님 주장은 옳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서 율법준수의 의무가 해제됐습니다.”는 서철원 목사님 주장은 그릇됐습니다. 이 주장은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말씀하신 바울 사도와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신 야고보 장로’를 아는 개혁 교회 조직(교의)신학자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주장입니다.
개혁 교회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義의 전가 교리’를 부정한 ‘서철원 목사님 후기 신학’은 개혁 교회 ‘행위(생명)언약’ 교리를 부정한 ‘서철원 목사님 초기 신학’이라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데서 나온 신학입니다. ‘<산상보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옛 사람”은 모세(시내산 율법)가 아닌 모세를 해석한 바리새인들 유전, 그릇된 해석을 뜻한다.’는 것은 {기독교 강요} 가르침1)이자 개혁 신학 기초2)입니다. 그러함에도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모세보다 월등한 권위로 모세의 권위를 뒤엎는 “예수의 전권 주장”을 주장하십니다. 그런데 웃픈 사실은 이 주장을 하시면서 ‘이 주장은 제임스 던(James D.G. Dunn) {Jesus and Sprit}에 인용된 케제만(Kasemann) 주장과 제임스 던 주장임’을 각주로 밝히신 점3)입니다. 그리고 나서 칼빈 선생님과 똑같이 해석하신 헤르만 리델보스 목사님을 언급하며 ‘헤르만 리델보스 해석4)은 그릇된 해석으로 “옛 사람”은 모세(시내산 율법)를 뜻한다.’고 주장하십니다. 물론, 계속 ‘새관점 대표 신학자’ 제임스 던이 각주에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 율법을 주신 주인이심에도, 이처럼 서철원 목사님에게 그리스도는 모세를 부정한 분이십니다. 자신이 준 율법을 부정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서철원 목사님에게 모세를 부정한 그리스도께서 모세 율법 몇 부분은 지키셨을지 몰라도 ‘그리스도 자신에게 해당하는 모세 율법 전체를 다 지켜 의義를 이루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믿지 않고 구원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만들어 낸 사변”일 수밖에 없습니다.
서철원 목사님께서 자신의 초기 대표작 {하나님의 구속경륜}과 {복음과 율법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모두 지키심(능동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를 서술하셨지만, 첫 단추가 ‘모세보다 월등한 권위로 모세의 권위를 뒤엎는, 시내산 율법을 뒤엎는 예수의 전권 주장’이라는 새관점 학파 대표 신학자 제임스 던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신학 초기부터 ‘개혁 신학 그리스도 능동 순종(율법준수) 공효에 따른 의義의 전가 교리 단추’와 ‘새관점 학파 교리 단추’가 한 구멍에 채워지는, 우스꽝스런 옷차림을 한 서철원 목사님 혼란스런 신학은 결국 ‘의義의 전가’ 문제에서도 개혁 신학을 버리고 ‘펠라기안 & 알미니안 신학 아류로서 새관점 신학’을 따르는, 역사상 개혁 교회에서 “그릇된 신학”으로 정죄 받은 신학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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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글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㉚ :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가르치신 게할더스 보스 목사님도 이단인가?>를 참고하십시오.
2) 제 글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⑩ :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제자 정이철 목사 주장대로 ‘그리스도 능동 순종’ 개념을 거부하셨을까?>를 참고하십시오.
3)
4) ‘헤르만 리델보스 {하나님 나라} 오광만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7)’ [제7장: 하나님의 복음(계명들)]에서 ‘<율법의 완성>(369쪽~404쪽)’을 참고하십시오. 특히, 378쪽을 보십시오. 또한 ‘헤르만 리델보스 {마태복음 주석 上} 오광만 역 (서울: 여수룬, 1990)’ 167쪽~192쪽을 참고하십시오.
첫댓글
글을 ‘글을 쓴 순서’대로 올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철원 목사님께서 ‘개혁 교회 정통 교리인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순종 교리’를 “반기독교적 이단 사상”으로 정죄하셔서, 이 글 먼저 올립니다.
참고로, 지난해 1월 4일에 쓴 이 글은, 제가 존경했던 은사님 허물을 들춰내는 이 글은 쓰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철원 목사님 제자 김만옥 목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영적 쓰레기다.”고 한 뒤 ‘박형룡 목사님과 명신홍 목사님’까지 “신학적 수준이 안 되는”이라고 모독하자, 쓸 수밖에 없는 글이었습니다.
서박사측은 루터신학의 영향으로 능동순종을 오해해서 이런 주장을 펴는것 같습니다.
예. 종교개혁 초기에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하셨던 루터 선생님, ‘루터신학 영향도 크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루터 선생님 신학’을 잘 몰라서 속단하기는 이릅니다만, ‘마르틴 루터 {갈라디아서} 김귀탁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9)’와 ‘존 칼빈 {갈라디아서 강해 (하)} 김동현 (서울: 2013, 서로사랑, 2쇄판 2013)’을 지난해 1월 말에 구입해 살펴봤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심”(갈 4:4)을 두 선생님께서 어떻게 해석하시나?’를 살펴봤습니다.
칼빈 선생님께는 율법의 두 기능, ‘사망을 선고하는 율법의 정죄 기능’과 ‘생명을 주는 율법의 축복 기능’이 모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칼빈 선생님께서는 이 책 78쪽에서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셨으며 성인이 돼서는 모세 율법이 명령한 것들을 모두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그렇게 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니고 노예와도 같은 우리 상태를 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한 것처럼 성경 말씀이 우리 자유를 언급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 자발 순종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하십니다.
그런데 루터 선생님께는 ‘사망을 선고하는 율법의 정죄 기능’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루터 선생님께서는 이 책 34쪽에서 ≪따라서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이라는 구절이 말해 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의 온갖 학정을 다 겪으셨다는 것이다. 율법의 일을 하나나 두 가지 정도 행하신 것, 곧 할례를 받거나 성전에 나타나시거나 모범적인 시민으로 율법 아래 사셨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충분한 힘을 겪으셨다.≫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