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내 것이란 없고 잠시 맡아 있는 것일 뿐 ① / 법정(法頂)스님
자연과 가까이 사니 세속의 때가 벗 겨지더라
사회 : 두 분을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법정 스님께서는 전기도 전화도 없는
강원도 산골 화전민촌에 들어가서 사신다고 들었고,
또 장익 주교님 역시 94년 이후 강원도에서 춘천 교구장으로 계시니
두 분이 20여 년간 특별한 친분을 나눠오신 것과 더불어
인연이라면 참으로 깊은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그곳 생활 좀 얘기해주시지요.
🍵법정 : 송광사 불일암에서 10여 년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다보니
중노릇이 너무 단조로워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할 요량으로
그곳을 찾았는데, 떠나서 살아보니
문명의 이기가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습니다.
전기나 전화 같은 편의 시설이 갖춰지지 않아서
처음에는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고 불편했는데 이제는 편합니다.
아니 이제는 오히려 바깥 세상에 나오면 전등불이 너무 밝고
전화벨 소리가 아주 신경을 곤두서게 합니다.
명색이 수행자라고 하면서 이름이 팔려
너무 번잡하게 살다가 자연과 가까이 사니까
내 안에 묵은 때가 벗겨지는 것도 같고,
또 자연으로부터 얻은 교훈과 배움이 많습니다.
최근에는 일꾼들 몇 명과 새 방을 꾸미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장익 : 본당과 공소를 포함해 1백여 군데를 올해 들어
세 번째 방문하면서
무엇보다 여러 공동체를 사귀고 알게 돼서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강원도라고 하면 예전에 그저 놀러 다니기만해서 생소한 곳인데
이제는 그곳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려 노력합니다.
🍵법정 :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있을 때
아는 스님이 그려준 묵화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위에 돌과 난초가 그려진 단순한 그림이었는데
‘고고봉정립 심심해저림’라는,
때로는 높이높이 묏부리 위에 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는 글이 적혀 있었는데
이 내용이 주교님 마음에 든다고 해서 떼어드린 일이 생각납니다.
지금 강원도에 살고 있는 것도 그와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번다하게 살다보니까 너무 노출되고 오염되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어디엔가 묻혀서 덜 노출되고
자신의 잠재력을 더 일깨워야 한다는 의미에서
깊이깊 이 바다밑에 잠기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익 : 그림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때 다래헌에 갔을 때,
벽에 표구도 없이 압정으로 붙여놓은 그 그림이 자꾸 눈길을 끌었어요.
연신 쳐다 보았더니 스님이 서슴없이 떼어서 주시길래
고맙기도 하고 당황도 하고 한 편으로는 탄복도 했습니다.
사회 : 부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사랑은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고들 합니다.
2천 5백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부처님의 참 뜻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법정 :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단순한 한 생명의 탄생이겠지만
종교적으로 보면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겠지요.
흔히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들 말합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중생은 미자각 상태를 말하고,
보살이란 자각된 인격을 일컫는데,
중생이 몸을 받을 때는 업력수생,
즉 자신이 평소에 행동하고 마음먹고
입으로 말한 업력에 의해 몸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살은 원력수생,
즉 소망이라고 풀이될 수 있는 원에 의해 몸을 받는다고 합니다.
보살은 원력수생하고 중생은 업력수생한다는 말은 그런 뜻이지요.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원력수생을 한 분으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할 수 있지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을 받은 것이 다 의미가 있는 것처럼
종교적으로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자비를 실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장익 : 불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 하지만
조금씩 접한 불경이나 스님들을 만나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아주 깊고 넓은 대단한 가르침이
그곳에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종교에 서는 찾을 수 없는 넉넉함과 초월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서
그리스도인인 저희들도 배울 점도, 얻을 것도 많다고 여겨왔습니다.
사회 : 두 분은 종교가 다르면서도
오랫동안 많은 교분을 나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언제인지 알고 싶네요.
또 우리 종교계 에서는 간혹 대립과 반목이 표출되기도 했는데
두 분은 개인적인 만남을 떠나
종교 간의 벽을 허문 만남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이질적으로 보이는 불교와 가톨릭이 어떻게 하면
그처럼 조화롭게 만날 수 있습니까.
🍵법정 : 불교에서 만난다는 것을 흔히 ‘시절인연’으로 풀이합니다.
시절 인연이 오면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난다는 거지요.
시절 인연이란 이미 만날 씨앗이 싹터있지만
그것이 공간적, 시간적 계기가 연결이 되어야
비로소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친구간의 만남이라는 것도 종교적인 빛깔이나 의식을 넘어서
마음과 마음이 접촉될 때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만날 수 있는 잠재력이나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가
시절 인연이 와서 만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신앙연구소가 됐건 다래헌이 됐건.
사실 주교님을 만날 때는
내가 중 이라거나 상대방이 사제라는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허심탄회하게 만나다 보니 어떠한 벽도 없습니다.
만나서도 종교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신도들에게도 늘 하는 소리 인데 수행자로서,
사제로서 서로가 인간적인 교류를 이룰 수 있다면
그 안에 모든 것이 용해될 것이라는 생각이지
독단주의나 혹은 배타적인 요소가 끼이게 되면
인간 교류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종교 간의 벽이 허물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대화가 있어야 되고,
대화가 있기 위해서는
독단적인 울타리를 넘어서 모든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윤리인 공동선을 가지면 용해가 됩니다.
몇 해 전 로마에 갔을 때
당시 주교님의 안내로 몇 곳의 성지를 돌아본 일이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수행을 하던 수비아코,
또 제가 좋아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계셨던 아씨씨를 둘러보면서
마치 불교성지 순례 차 인도를 다닐 때의 성스러움,
옛 성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와
많은 것을 배우고 반성하고 덕을 입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만나면 종교 얘기 안해요. 그래도 다 이해하지요.
🍵장익 : 종교 간의 마찰이나 갈등이
종교의 독단과 독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가 구도적인 입장에 서야할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사람들을 구제하러 오신 것인데,
다시 말해 나부터 살자는 데 눈이 어두워져 있는 세상에
오히려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자는 삶을 사는 것이
참 삶이라는 것을 알고 실행 하도록 깨우치기 위해 오신 어른들인데
서로 싸워야할 까닭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법정 :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자기가 오르는 길만이 옳다고 고집하게 되면
전체 히말라야를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종파적인 종교를 통해서
보편적인 종교의 세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도 합니다.
인도의 간디가 주로 쓰던 비유에 이런 게 있기도 합니다.
종파적인 종교는 나무로 치면 한쪽으로 뻗은 가지인데
그 가지만 가지고 전부라고 생각하면
나무 전체와 줄기를 모른다는 겁니다.
종파적인 벽이라든가 독단적인 요소만 극복한다면
모든 종교가 마찰 없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날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중동 지역의 이슬람 분쟁지역은
그런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는 무시 되는 상황이 오는 파장이 아니겠습니까.
🍵장익 : 어떤 의미로는 자신이 가진 종교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그 길을 못 갈지도 모른다는 입장에서 보면
오롯이 그 길을 걷게 하는 장점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고,
또 모든 종교를 싸잡아 그게그거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종교의 길을 가는 이상
자기 나름대로의 신심과 확실한 입장이 있어야 하겠지만
남을 격하하거나 배척하는 일은 없어야지요.
그러면서도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만 서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법정 : 진짜 불교를 알려면 불교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처에 얽매여 진짜 부처를 못보고,
보살에 얽매여 진짜 보살행을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독신 수행자들에게 그런 벽이 있는데
참선하는 사람은 오로지 참선이 최고요
염불을 하면 구제를 받지 못한다,
거꾸로 염불도 마찬가지 생각으로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신념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하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장익 : 21세기가 되면 그리스도교 내에서도
우리 스스로를 다시 보아야 하는 숙제가
제일 큰 관심으로 떠오를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처럼 세상이 점점 가까워지고 다원화된 세상에 살면서
불교처럼 아주 높은 경지의 종교를 보면
우리 스스로를 다시 알게 되는
대단히 중요한 길이 트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울 안에 갇혀서 눈을 안으로만 돌리면
우리 스스로를 보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또 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론이 다시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물론 큰 진통을 가져오겠지만 분명히 겪어야 할 것입니다.
🍵법정 : 인도의 고전인 ‘리기도에다’에 보면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랑이건 자비건 똑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가볍고 진리는 무겁고가 아니라
문화적인 배경과 지역적인 특수성에 의해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
말을 통해 뜻을 취하면 그런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말 자체에 집착하게 되면 뜻을 놓치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열반경에 보면 ‘말에 따르지 말고 뜻을 따르라’는 말도 있지요.
(다음호에 계속)
이 글은 1997년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종교간의 이해를 돕고자
평화방송과 평화신문이 기획한 프로그램에서
법정 스님과 카톨릭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가 서울 법련사에서 만나
스무 해에 걸친 인연, 곪아터진 세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나눈 이야기를 발췌하였습니다. / 정리·이규동
출처: 월간 맑고 향기롭게 산방한담(山房閑談) 2019년11월
첫댓글 어디엔가 묻혀서 덜 노출되고
자신의 잠재력을 더 일깨워야 한다..
진짜 불교를 알려면 불교로 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신념을 가지되 그것만이 전부라 생각하면 전체를 보지 못한다.
말 자체에 집착 말고
말을 통해 뜻을 취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