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움과 어둠
요한일서 2:9-11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지난 주 우리는 성경 전체가 주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 계명은 옛 계명과 새 계명으로 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옛 계명은 옛 언약을 대표하는 계명으로써 구약의 들은 바 말씀, 그리고 처음부터 들은 소식과 맞물려 있다고 했습니다. 반면, 새 계명은 신약의 새언약과 연결된 신약의 말씀이며, 유앙겔리온, 즉 기쁜 소식인 복음과 연결된 사랑의 계명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즉, 새 계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의 구원사가 다 성취된 가운데 주께서 보내시는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이 변화되어 행하는 사랑으로서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 같이”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신자라면 성령을 따라 새 계명을 지키도록 되어 있고, 따라서 새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새 언약과 무관한 자입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오늘 새 계명과는 정반대인 현상들을 지적하며 그런 현상들은 거듭난 주의 신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9절을 보니,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는 무서운 말이 있는데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는 뜻이고 앞으로도 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영원한 어둠에 계속 머물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섭습니까?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
그런데 사도 요한은 무엇으로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라고 판단하고 있습니까?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원어로 보니, (호 로곤, 미손)이라고 하여 두 개의 현재 분사가 주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직역해보면 “이렇게 계속 말을 하긴 해도 계속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말로는 “나는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계속 항상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그런 경우 그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로서 가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9절을 통해 가짜 그리스도인이 얼마든지 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가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미움’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의 교회 내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둠에 있던 자이며, 오직 미움에 속한 자였습니다. 여기서 미움은 사랑과 반대되는 영역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미움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라는 전제가 맨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즉, 빛과 미움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빛은 어둠과 대조되는데 이 구절에서는 빛이 ‘미움’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는 여기서 말하는 ‘미움’은 어둠과 한 통속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어둠에 속하였기 때문에 빛이신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세상이 …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 7:7).
또한 세상은 빛에 속한 주의 참된 자녀들과 제자들을 미워합니다.
[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
나아가 빛에 속하지 않은 어둠의 자녀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미워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도 미워합니다.
[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23-25)
그러므로 그들은 불신자들로서 빛을 미워하는 것이며, 그 빛에 속한 형제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요 3:19-20).
따라서 그들은 행여 교회 안에 들어와 있어도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빛 가운데 있다”고 반복하여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자기 기만이며, 그릇된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 것이고, 성령이 없는 자들이며 가짜 신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던 이교도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이교도로서 알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지어낸 우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우상 신을 섬기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주의 은혜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참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라”(엡 2:2-3).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8, 11).
즉, 우리는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 자들이며 물과 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의 은혜로 빛의 자녀들이 된 자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요한일서 2장 7-8절에서 새 계명이 참된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즉, 빛의 자녀들은 새 언약에 따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그러한 새 계명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우리가 주의 원수와 같던 상태에서 주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동일한 종류의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이에 바울은 주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늘 깊어지기를 간구하였습니다.
[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6-19)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
7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7-10)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이미 어둠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러기에 반드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둠의 세계에 속한 미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9절은 ‘소위’ 신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는 그들은 더 이상 미움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미움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끝까지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교회를 다니며 스스로 자신은 빛 가운데 있다고 아무리 강조하며 말을 할지라도 거짓 신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며 죽는 그 날까지 마음 속에 앙심과 원한을 품는다면 그는 참된 신자일 수 없습니다. 물론 신자들도 옛사람의 세력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잠시 미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러한 어둠에 속한 마음을 회개하고 다시 주를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어둠을 미워하고 불의를 미워하고 마귀를 미워하는 그런 거룩한 감정을 잃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끝까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사랑으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레 19:17).
한편, 앞의 구절의 “사랑하라”는 새 계명과 연관시켜서 9-11절을 이해하면 빛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역사 속에 들어오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주 예수님은 그 사랑을 역사 속에 나타내셨기에, 그리고 그런 주의 사랑을 우리들이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셨으니, 우리가 “빛에 거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므로 …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이처럼 사도 요한은 참 빛이 그 영혼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한다고 주장합니다. 진리가 그 영혼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에게 있으면 그 영혼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있다 하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미워하면 사실 그는 빛 가운데 있는 자가 아니라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빛은 사랑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움은 어두움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빛이 없습니다. 따라서 계속 넘어지는 인생입니다.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요. 계속 비참과 괴로움과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분명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11).
제가 오래 전에 신학교를 다닐 때 화장실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들어온 후 손을 닦고 나가면서 사람이 없는 줄 알고 급하게 불을 꺼버리고 가버린 것입니다. 소리를 쳐도 이미 문은 닫히고 그 사람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가버렸습니다. 그 화장실은 건물 내에 있던 것으로서 불을 꺼버리니 와, 완전히 깜깜한 가운데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입구까지 약 10 미터 정도가 되는데, 그날 저 참 많이 고생했습니다. 이리 저리 부딪치고 깨지면서 화장실 밖으로 나가는데 적어도 5분 정도는 족히 걸린 것 같습니다. 정말 빛이 없이 움직이려고 하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움은 스스로 어두움에 거하는 상태로서 지혜를 거부하는 지독한 어리석음의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영원한 것들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 어떤 선한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는도다”(전 2:14).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시 82:5).
그들은 미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소화해 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
무엇보다 10절에 의하면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자기 속에 거리낌”이 있습니다. 여기서 개역 개정이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라고 번역한 원어 (스칸달론 엔 아우토 우크 에스틴)은 직역하면 “그의 안에 스칸달론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칸달론)의 뜻은 ‘덫’, ‘함정’,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요인’, ‘넘어짐’, ‘유혹’, ‘걸림돌’ 등입니다. 그런데 ‘스칸달론’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즉, ‘스칸달론’의 대상이 주어이면 주어가 시험에 들어서 ‘거리끼는 마음’, ‘불편한 마음’, ‘분노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개역 개정은 (스칸달론)의 대상을 주어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안에 스칸달론이 없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스칸달론’의 대상이 주어가 아닌 다른 대상일 경우, 주어는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덫, 유혹,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일반 권위 있는 영어 번역들은 거의 다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마태복음 18장과 고린도전서 1장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전 1:23).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6-7).
그러나 원문은 이 두 가지 의미가 전부 가능합니다. 따라서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도 되고, “자기 속에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없다”도 됩니다. 그러므로 문맥에 따라 번역이 결정되는데 우리의 본문은 문맥에 있어서도 두 가지가 다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풍성하며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면 개역 개정처럼 첫째 의미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는 자”라고 할 때 그 뜻은 무엇입니까? 이는 11절과 연결하면 “자기 속에 거리낌이 있는 자”는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로서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 안에 거리낌이 있다”는 뜻은 어떤 뜻입니까? 이는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인해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섭섭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는데 그 때 “우리 안에 거리낌이 생깁니다.” 즉, 시험에 들어서 방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의심하고 실망하곤 합니다.
특히 “내 안에 거리낌이 생기는” 전형적인 경우는 나의 밖에서 발생하는 어떤 일들로 인해 내 마음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발생할 일들 때문에 ‘내가’ 시험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 거리끼는 것이 생긴 것입니다. 내 속에 걸림돌이 생겼는데 제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난 상태에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미움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이때 내 안에 미움이 생긴 이유가 내 입장, 내 중심, 내 체면 등, 복음과 무관한 것이면 그 사람은 현재 진리와 빛과 사랑에 속하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심지어 만일 복음의 진리 문제가 아닌 것으로 마음에 ‘거리낌이 생겨’ 미움 가운데 있다가 교회 공동체를 떠난다면 이는 그가 원래부터 진리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 또는 교리 문제가 아닌 것으로 자기 속에 거리낌이 생겨 교회를 떠나는 것은 자기 중심 및 내 입장에 의한 것으로서 이런 사람은 어디서든 참 교회에 속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분을 내며 교회를 떠나지만 교회를 떠난 이유를 물어보면 언제나 자기 중심적인 답변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번 일은 참을 수 없어. 기분이 너무 나빠서 이 교회를 다닐 수가 없어. 내 뜻이 관철되지 않았어. 내 체면과 자존심이 구겨졌어. 더 이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또는 아직은 교회를 떠나지는 않아도 “이제 교회 예배나 성경 공부 등에 다 참여하지 않고 오직 주일 예배 1시간만 드리고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안 할 거야”라고 결심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의 속에 거리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낌이 왜 생겼습니까? ‘나의 영광’, ‘내 체면’, ‘내 뜻’이 관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에서 내 자존심이나 입장에서 견딜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여 그 교회를 다닐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미움의 상태에 머문 상태며 이런 상태에서 삶의 결정을 내리며 나아가는 자는 빛과 무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어둠의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이런 식이면 그 사람은 가짜 신자입니다.
이처럼 어둠 및 미움에 속한 상태에서는 그 사람은 계속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으며 이 교회는 이래서 싫고 저 교회는 저래서 싫다 하고 계속 떠돌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누가 그런 사람의 까다로운 이기심을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온 세상을 비난하고 정죄하며 모든 것을 ‘거리낌’과 ‘걸림돌’로 삼는 사람이니 스스로 폭군이 되어 온 세상을 제 멋대로 다스리는 것 외에 결코 어디서나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만족하는 경우는 오직 자기 손에서 노예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원하는 교회는 자기 자신이 교회의 권력을 잡고 자기 멋대로 흔들 수 있는 그런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교회 내에서 자리 싸움 및 특권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새 계명인 새 언약의 사랑을 모르는 갓난아이 같은 신자든지 혹은 가짜 신자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어둠 속에서의 ‘거리낌’은 바른 교훈을 들을 때 자주 발생합니다. 주를 믿으면 많은 떡을 얻어 부자가 될 수 있고 세상에서도 권력을 잡을 수 있으며, 유명하게 될 것이고, 건강의 복도 누릴 것이라고 하면 ‘아멘’ ‘아멘’하며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이 종교적인 열심을 내지만 어느덧 주의 복음을 듣게 되면 ‘자기 속에 부화가 나고 거리낌’이 생기면서 복음을 진실하게 전하는 주의 종을 쫓아내든지, 그럴 수 없으면 자기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 역시 그 사람들이 어둠과 미움에 속한 자인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례가 예수께서 복음을 가장 선명하게 전하신 때에 나타났습니다.
[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
14 …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예수께서그들이와서자기를억지로붙들어임금으로삼으려는줄아시고다시혼자산으로떠나가시니라
](요 6:11-12, 14-15)
그런데 그들은 주 예수님을 찾아서 끝까지 따라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
26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묻되그러면우리가보고당신을믿도록행하시는표적이무엇이니이까, …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5 …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 6:26-33, 35, 47-51, 60-61, 66-69)
이처럼 어둠과 미움에 속한 자들은 복음이 강력하게 전파될 때 오히려 참 복음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주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에 속한 자들이 버린 우리 주님과 그분의 복음은 영원한 나라의 살아있는 돌들, 즉 참된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어둠에 속한 자들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더라
](마 21:42-44)
그러나 자신의 교만 및 체면 등에 초월하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과 진리에 속한 주의 자녀들은 이러한 ‘걸림돌’ 또는 ‘거리낌’을 주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건너뛸 수 있습니다. 즉,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주의 제자들은 내 자존심이나 유익이나 체면과 같은 것을 잃더라도 시험에 들지 않고 새 계명의 사랑의 힘으로 능히 이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의 공동체를 떠나지 않으며, 결코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참된 신자들에 의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됨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모든 사탄의 간계와 속임수와 이간질과 오해를 넉넉히 이겨냄으로 교회 공동체에 빛과 사랑을 유지시키는데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고 행하는 자는 참된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지 않고 보호하는 것이며, 결코 내 체면, 유익, 입장으로 교회를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거리낌’이 생길 때 늘 먼저 자신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이는 만일 자기를 제대로 점검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둠 속으로 들어가 행하면서 마귀의 도구와 노리개로 전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음에 ‘거리낌’으로 인해 화가 잔뜩 날 때는 주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하기 바랍니다. 시간을 내어 기도하며 예배와 성경에 집중함으로 주의 뜻을 찾아낸 후 움직이기 바랍니다. 그러하면 결코 내 안의 ‘거리낌’에 이끌려 행동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리낌’을 이기는 훈련이 될 때 그는 어느새 사랑에 속한 사도 요한과 같은 아름다운 주의 제자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요한도 과거에는 자신 안에 ‘거리낌’이 있을 때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던 미성숙한 성도였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성에 들어갈 때 사건입니다.
“그들이 …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더라”(눅 9:52-55)
이처럼 야고보와 요한은 마음속에 ‘거리낌’이 생길 때 곧바로 우뢰처럼 혈기를 부리곤하여 그들 이름은 우레의 아들이란 뜻인 ‘보아너게’였습니다(막 3:17).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영광을 얻고자 하는 마음 가운데 ‘거리낌’이 생기자 곧바로 예수께 나아가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주의영광중에서우리를하나는주의우편에, 하나는좌편에앉게하여주옵소서
](막 10:35-37)
“(이에)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더라”(마 20:24).
그러나 우레의 아들 요한은 주의 복음의 능력으로 새 계명을 따르는 사랑의 사도가 되자 철저하게 주의 계명을 지키면서 빛에 거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걸림돌’을 두지 않고, 그 마음도 늘 ‘걸림돌’이 없어서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의와 거룩함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가능한 번역은 “자기 속에 다른 사람들을 시험들게 하는 걸림돌”이 있는 경우인데,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 들게 하는 영적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런 경우는 소위 어떤 영적인 지도자가 많은 사람들을 미움과 어둠으로 이끄는 경우입니다. 그런 거짓 선지자는 어둠에 속한 자입니다. 그들은 보통 거짓 복음, 거짓 영, 거짓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3, 13-15)
[
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3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벧후 2:1-3)
또는 신자들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작은 사건들을 부풀려 ‘걸림돌’을 만들어서 거룩한 교회 공동체에 던져 교회가 분열하도록 합니다.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19).
즉, 이런 자들은 새 계명에 따른 행동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단지 간교한 꾀를 가지고 정치를 하면서 교만과 미움과 위선과 불의를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새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울의 경우는 시장에 나온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라 할지라도 묻지 않고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었지만 만일 그럼에도 누군가가 바울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었다고 생각하고 시험에 걸린다면, 바울은 아예 이런 걸림돌을 두지 않기 위해 차라리 고기 자체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
14: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 14:19-15:1)
즉, 이것이 사랑의 새 계명을 지키는 행위로서 교회 공동체의 하나 됨이 아디아포라 같은 이슈로 인해 분리되거나 미워하거나 실족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속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되는 것을 두지 아니한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 계명을 행하는 입장에서 20절의 교훈은 바울의 다른 교훈들과 일치합니다.
[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엡 4:1-4)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그러므로 정리하면, 본질적인 중요한 문제가 아님에도 다른 사람들 때문에 쉽게 시험 드는 자들,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거리를 만드는 자들의 특징은 언제나 공동체에서 평강과 기쁨을 제거하는 핵심 인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만 없으면 공동체에 사랑과 은혜와 감사와 평강이 넘치는데 그 사람만 있으면 공동체에 두려움과 공포와 불일치와 거짓과 갈등과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빛 가운데 어둠이 찾아온 것이고, 진리와 진실이 있는 곳에 거짓이 들어왔기 때문이며, 사랑이 있는 곳에 미움이 틈타서 침투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둠과 미움에 속한 자들을 잠언과 성경은 어리석은 자들, 마귀에 속한 불량하고 악한 자라고 정의합니다.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20:3)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을 하며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잠 6:12-14).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은 ..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 6:16-19).
“눈짓하는 자는 분열을 만들고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는도다”(참조, 잠 10:9-12).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13:10, 잠 15:18, 잠 20:3)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 16:28).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악을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악한 것이라.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잠 17:19, 18:5-6; 22:1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잠 26:20-22; 잠 28:25; 잠 29:22),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하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율법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은 새 계명대로 주께서 나를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기 때문에 결코 ‘거리끼는 것’이 자기 안에 생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나아가 남들에게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빛 가운데 행하며 사랑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심과 같이 형제를 사랑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안에는 다른 사람들로 인한 ‘거리낌’이 생기기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나아가 여러분의 삶이 연약한 성도들을 시험 들게 하거나 또는 복음을 막는 그런 ‘걸림돌’이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11절에서 사도 요한은 대단히 위대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우리의 남은 삶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11)
미움의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 등 모든 것은 눈이 먼 상태에서의 행동이기 때문에 그 삶에 많은 어리석음과 아픔과 비참과 곤고함이 따를 것입니다. 이는 어둠에 거하며 행한 모든 일들마다 어둠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며 그 열매는 눈이 먼 상태에서 맺은 것으로써 썩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이 생길 때는 결코 그 미움에 따라 행동하거나 결정하지 않기 바랍니다. 미움의 감정을 폭발시켜 더 무서운 거친 행동들을 일삼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미움 가운데 행한 모든 일마다 어둠에 속하여 눈이 먼 상태에서 행한 지독히 어리석은 행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어리석은 표정과 행동과 결정 때문에 지옥을 맛보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그 사람 자체의 성품도 마귀를 닮게 되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그 대신 언제나 우리의 눈을 십자가로 향하게 하여 부활의 주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을 볼 때 우리는 내가 어리석을 때, 미움에 빠져 있을 때, 연약할 때, 원수로 행하고 있을 때, 죄인 되었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생명바친 사랑과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미움과 어둠은 신속하게 걷히고 우리 마음에는 평강과 감사와 인내와 진리와 빛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거하며 행하는 모든 것들마다 다시 빛으로 드러나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6-18)
항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면서 부활 승천하셔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행함으로 항상 사랑의 계명에 거할지언정, 육신에게 져서 어둠과 미움 가운데 살아가는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는, 진정한 참된 지혜로운 주의 백성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