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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꽃지기 원문보기 글쓴이: 양산박
2018년 9월 30 일 일요일 백두대간 16회차 청화산, 조항산
자유인 산악회
청화산 : 백두대간 16 회차 : 눌재-청화산-갓바위재-조항산-고모령-입석리
산행거리 : 약 15 km 산행시간 : 약 8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089730
거리 15.2 km
소요 시간 7h 57m 3s
이동 시간 6h 46m 36s
휴식 시간 1h 10m 27s
평균 속도 2.2 km/h
최고점 1,007 m
총 획득고도 753 m
난이도 보통
백두대간 (白頭大幹) 16 – 청화산
양산박
숲속에 들어가면 꽃이 보인다
나무아래 풀섶에 살포시 앉아
끝도 없이 옛날 얘기 들려주는 꽃
숲을 나서면 산이 보인다
나무와 바위와 능선이 고와서
어머니 품속같이 아늑한 산
산 떠나 집에 오면 꿈속에서도
푸른 산 예쁜 꽃 손짓을 한다
파란 별 가득 머리에 이고서
프로로그
평년보다 하루쯤 더 긴 추석 연휴가 바쁘게 끝났다. 길면 긴 대로 짧으면 또 짧은 대로 그에 맞춰 바쁘게 움직이는게 직장인이 명절 보내는 모습이다. 그래도 덕분에 지리산에도 다녀왔으니 나름 보람있었던 연휴였다.
최근 발생한 지구촌 자연재해를 보면서 인간의 왜소함을 새삼 느낀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에 9월 28일 강도 7.5 의 강진이 발생했고 그 여파로 약 7 미터 정도의 쓰나미가 발생하면서 인근의 팔루 해변도시를 덮쳤다. 그로 인해 금일(10월1일) 현재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복구작업이 진행되면서 사망자 수는 수천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한편 한 달 전에 일본을 강타했던 태풍 ‘제비’에 이어 이번에는 ‘짜미’가 일본 열도를 훓고 지나가면서 한 순간 일본을 마비시켰다. 비행기 이착륙이 중단되고 신간센 등 주요 교통망이 멈춰버렸다. 인프라가 잘 갖춰진데다 평소 재난에 대한 훈련이 잘 되어 있어 인명피해는 4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고 130 여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이런 일련의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다시 한 번 생각케 한다. 농작물을 가꾸고 가축을 키움으로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였고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서 다른 동물보다 월등한 우위를 차지했으며 하늘을 날고 물속을 움직이고 심지어 달나라에도 사람을 실어 보낼 수 있는 그야말로 예전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문명을 발달시켰다. 그러나 가끔 평소에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던 초자연적인 현상앞에 그저 한 줌 흙처럼 내동뎅이쳐지는 것을 보면 인류문명의 좌표도 기실 보잘 것 없음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자기 시선이 미치는 범주 안에서 자신이 최고라는 착각에 빠져서 눈 먼 장님처럼 살다가 가곤 한다.
산행기
지난 15회차 속리산 구간에 참석하지 못하여 오랜만에 대간길을 걷는다. 속리산 비탐구간을 훔쳐야 했던 관계로 북진팀임에도 눌재에서 시작하여 남진으로 진행했던 바, 이번 청화산 구간은 북진 방향으로 또 다시 눌재에서 시작한다. 양재에서 7시 20분에 출발하여 평소와 같이 기흥휴게소에 한 번 들르고 2시간 만인 9시 30분 산행 들머리인 눌재에 도착했다.
일제시대 이전에는 동학 농민군으로 그리고 일제시대에는 독립군 대장으로 외세에 항거하며 싸우다 부상으로 체포되어 일제에 의해 사형당한 ‘운강 이강년 장군 묘소 입구’라는 커다란 돌비석 앞에 도착하여 여장을 갖추었다. 여기서 고개 윗쪽으로 100 미터쯤 올라간 곳이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인 ‘늘재(또는 눌재)다. 32번 지방도로 옆에 백두대간임을 표시하는 거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뒷편에는 블루베리를 심은 밭 끄트머리에 작은 성황당 건물이 서 있다. 늘재를 다른 말로 눌재 또는 느재라고도 한는데 ‘넓은 고개’라는 뜻이라 한다. 구전되어온 이름을 한자로 옮기고 다시 일제시대 수난을 당한 후 그 원래 이름을 찾는 것도 어렵거니와 그렇게 부르던 사람들의 의도를 헤아린다는 것은 또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 곳에 성황당 (서낭당) 이 세워져 있으니 이는 어느 마을의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옛날 성황당 앞에는 커다란 돌무더기가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돌을 던져 놓고 침을 뱉으면 복이 따라 온다고 하였다. 이처럼 쌓아 놓은 돌은 외적과 싸울 때 석전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성황당은 마을 어귀에 위치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마을 앞쪽에는 장승백이 뒷쪽에는 성황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들머리에서 청화산까지 오르는 길이 경사가 심하다는 말을 미리 듣고 나름 각오했음에도 처음부터 계속 치고 올라가는 경사길에 대원들은 모두 거친 숨을 짧게 뱉어 낸다. 헉헉거리는 소리를 밖으로 안내려 해도 저절로 나오는건 그만큼 힘이 든다는 얘기다. 누구는 산이 이래야 제 맛이지 밋밋하면 제맛이 안난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깔딱고개에서는 숨을 깔딱거려야 한다.
앞 사람 뒷꼭지만 보며 오르던 길이 바위 위로 올라섰다. 갑자기 트인 조망에 모두들 감탄한다. 이미 오래전에 수명을 다 하고 죽은 채 서 있는 고목 너머로 속리산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채 30분도 오르지 않았는데 이처럼 멋진 조망이 펼쳐지니 얼떨결에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지난 회차에 눌재에서 밤티재를 지나 깜깜한 암릉을 밟으며 문장대를 올라 저 산줄기를 타고 멋진 바위를 감상하면서 천왕봉 그리고 형제봉을 거쳐 걸었던 갈령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이 뚜렷하게 보인다. 산을 보려면 그 산에서 멀찍이 떨어져야 한다는 것를 보여주는 듯 하다.
산길에는 구절초가 발에 채일 듯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하얗다고 해도 어쩌면 저렇게 하얄 수 있을까. 그저 순백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할 듯한 색깔을 구절초는 힘도 들이지 않고 만들어 낸다. 작은 씨앗이 오롯이 물과 흙과 햇빛만 가지고 정성들여 빚어 낸 꽃이다. 이번 청화산 – 조항산 구간에서는 구절초꽃을 눈이 아리도록 실컷 보았다. 요즘 큰 절이나 지자체에서 기획하는 각종 구절초 축제에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 풍긴다.
산구절초
두번째 조망이 트이는 곳에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정국기원단 (靖國祈願壇)’이라고 한자로 크게 써 있고 그 옆에는 잔글씨로 ‘백의민족 민족중흥 성지’ 그리고 그옆에는 부실기조 삼파수 (不失其祖 三巴水)라고 적혀 있다. 제단임을 확인시켜주듯 비석 앞에는 자연석으로 음식을 올려 놓을 수 있는 반석이 있고 그 양옆으로는 향불을 피울 수 있는 커다란 돌향로가 세워져 있다. 제단 뒤쪽에는 병풍처럼 멋들어진 소나무가 돌틈에서 자라나 있고 그 뒤로 멀찍이 속리산 암릉군이 펼쳐져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 제법 그럴 듯 한 모양이다.
나중에 확인한 내용은 이렇다. 이 산 아래 청화농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구촌 어머니 사랑 동산’도 만들었던 조삼수 회장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이 ‘정국기원단’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이 비석을 두고 갑론을박이 뜨겁게 펼쳐지고 있었다. 한자로 쓰여진 비문에서 정국(靖國)이라는 단어가 공교롭게도 세계인들이 알레르기처럼 반응하는 일본의 제1전범들의 혼을 제사하는 ‘야스꾸니’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 ‘정국 기원단 (靖國祈願壇)’은 곧 ‘야스꾸니 기원단’이라는 의미이다. 만든 사람의 의중이야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정체불명의 기원단을 설치한 것이 우리가 자다가 꿈에서 봐도 깜짝 놀라는 일본의 야스꾸니 신사와 같은 이름으로 새겨 놓았으니 오해라고 해도 해명이 수월치 않을 것 같다. 그런 연유로 이 제단을 철거해 달라는 민원이 크게 제기되었으나 아직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제작자의 의중이 긍정적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즉, 민족중흥을 바라는 마음으로 세 갈래 물줄기 (한강 금강 낙동강)가 시작하는 백두대간의 중원에서 기도 올린다는 뜻이리라.
산기름나물
추석이 지나고 가을이 턱 밑에 와 있다. 꽃은 그렇다 치고 단풍중에서도 일찍 물드는 것들은 이미 붉은 물이 올라 왔고 신갈나무나 상수리나뭇잎에도 누른 빛이 비친다. 이 산에는 수령이 50년 이상되는 것이 별로 없는것 같다. 여느 큰 산에 가면 한 아름이 넘는 나무들이 속이 빈 채 겉에는 푸른 이끼를 덮어 쓰고 높은 가지에는 아직도 잎이 무성한 고목을 많이 보는데 이 청화산에는 그런 나무가 하나도 안보인다. 산이 높지 않은데다 마을이 멀지 않아 땔나무로 벌목되었거나 산불 등으로 타 버린 탓이리라. 간간이 바위틈에 소나무가 자라고 비탈진 곳에는 참나무가 무성하니 머지 않아 이 나무들도 아름드리 고목으로 자라나 이곳을 것는 미래의 대간꾼에게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맑은대쑥
청화산에 오르는 비탈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저 하늘 끝 닿은 봉우리가 그 곳이겠지 하고 다가 가면 그 앞에 또 다른 봉우리가 떡 버티고 있다. 산 너머 산 그리고 그 산 너머 또 산이 있다. 이게 우리나라 금수강산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런 산속임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씩 가끔 속아 준다. 어짜피 정상은 때가 되면 숨바꼭질을 마치고 느닷없이 나타나게 마련이니까.
청화산 (靑華山 970)은 원래 화산(華山)이라 불렀는데 먼데서 바라보면 산의 소나무와 조릿대로 인해 푸르게보인다고 하여 푸를 청(靑)자를 붙여 청화산이라 불렀다 한다. 택리지의 저자로 유명한 학자인 이중환(1690~1756)이 평소 청화산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자신을 청화산인이라 부르고, 청화산은 산의 크기가 속리산보다 작으나 바위가 흙에 싸여 부드러움을 주니 속리산보다 아름답다고 하였다 한다. 늘재에서 2.6 km 거리의 청화산 정상까지 1시간 30분 걸렸다. 쉬엄 쉬엄 경치 구경하면서 온 것 같은데 그리 늦은 걸음은 아니었나 보다.
이고들빼기
청화산에서 다음 여정인 조항산까지 4.2 km 다. 약 500 여 미터 산길을 따라 내려가니 눈에 잘 띄는 흰색으로 방향표시를 설치해 놓았다. 시루봉삼거리다. 이 팻말이 없다면 개인 산행하는 사람들이 자칫 직진하여 시루봉으로 내려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가야할 조항산은 여기서 왼쪽으로 꺽어서 진행해야 한다.
까치고들빼기
팻말에 늘재와 시루봉 표시와 함께 우복동천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옛날 한자를 쓰던 시대 사람들은 한자의 특징인 함축성을 이용하여 이 우복동천(牛腹洞天)이라는 네 글자에 많은 의미를 담아내려 하였다. 마치 소의 뱃속에 들어 앉은 것처럼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라는 말이다. 이 청화산 아래 있는 절 원적암이 있는 그 지역이 마치 청학포란(靑鶴捕卵)의 형상을 한 명승지라고 불렀다. 뒤쪽에는 청학산이 있고 우측에는 승무산 그리고 좌측에는 시루봉이 있고 앞에는 쌍용계곡이 흘러 외부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아늑한 지형이라는 것이다.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까지 그리고 소의 뱃속처럼 안전하다면서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말 중 멋진 말을 다 동원하여 이 청화산자락의 뛰어남을 자랑했으니, 이 산줄기에는 분명 우리가 이번 한 번 걸으면서 깨닫지 못했던 무언가가 또 있을지도 모르겠다.
청화산에서 조항산으로 가는 길은 우선 나무숲으로 둘러 싸인 완만한 내리막 흙길에 이어 급한 경사의 암봉으로 이어지고 다시 평탄한 능선길로 이어지다 갓바위재에서 한껏 내려선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가파른 암릉길을 올라 조항산에 닿는다.
구절초
꽃향유
우리는 완만한 흙길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었다. (12:20). 산행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심 밥상의 음식도 풍부해지는가 보다.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五餠二魚)기적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였다고 하는데 우리 대간팀 점심에도 각자의 배낭에서 조금씩 쏱아져 나오는 갖 가지 음식으로 모두 배불리 먹는다. 코펠과 버너에 라면을 끓이고 두툼한 등심살을 구워서 한 점씩 나눠주는 착한 바리새인도 보인다. 포도와 사과로 디저트까지 먹고 커피로 입가심하고 나니 예식장 피로연의 뷔페식당을 옮겨 놓은 듯 하다. 반주로 막걸리와 소주를 마셔도 본인의 주량보다 적게 마셔 산행에 불편함이 없게 하니 회원들의 노련함이 엿보인다.
청화산에서 조항산으로 가는 길은 초반 암릉이 멋진 조망을 제공해 준다. 암릉에 서면 조항산으로 가는 산길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우복동천 원적암 주변의 산세가 마치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왼쪽 날개가 시루봉이요 오른쪽 날개가 승무산이며 몸통이 청화산이라 했으니 그 몸에서 길게 벋어 갓바우재로 이어진 능선이야 말로 학의 긴 목줄기(鳥項)가 아니겠는가.
까실쑥부쟁이
그 목줄기 끝에 학의 머리격인 조항산 (鳥項山 951)이 우뚝 솟아 있다. 이렇게 청화산과 조항산이 어우러져 한 마리 멋드러진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길에서 조금 떨어진 비탈에 용담꽃이 피어 있다. 곰의 쓸게를 웅담이라 하고 용의 쓸게를 용담이라 하는데 용이라는 것은 상상의 동물이니 이 용담꽃이야 말로 웅담에 버금갈 만큼 뛰어난 약효를 갖고 있나 보다. 용담뿌리의 쓴맛은 소화제와 강장제의 원료로 쓰인다고 한다.
용담
참배암차즈기
가을꽃 중 구절초와 함께 산길을 수놓는 것이 쑥부쟁이다. 보라색 꽃잎 가운데 노란 꽃술을 달고 하늘거리는 개쑥부쟁이는 죽은 대장장이 딸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더욱 애절해 보인다. 어찌하여 쑥부쟁이는 이렇게 깍아지른 암릉에서 저리 아름답게 피어 나는가. 소녀의 죽은 혼이 담겨 있어 그리 애절해 보이는 건지, 아니면 저런 애틋한 모습에서 슬픈 전설을 떠올린건지 모르겠지만 쑥부쟁이 꽃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모습이다.
개쑥부쟁이
청화산에서 조항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고개가 갓바우재 ( 750 m )다. 경상북도 문경시 궁기리와 충청북도 괴산군 입석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일설에는 태고적 대홍수 때 주변이 다 물에 잠기고 조항산 꼭대기 바위만 물위에 남아 있던 모습이 마치 삿갓처럼 생겨서 갓바우라 불렀다 하나, 백두대간 직진방향으로 오른쪽 궁기리에서 올라오는 계곡인 햇갓골에 갓처럼 생긴 갓바위가 있어 그로부터 고개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무심코 그냥 지나치기 쉬운 갓바우재에 ‘좋은 사람들’이 A4용지에 이정표를 인쇄하여 바위에 달아 놓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이정표가 언제 떨어져 날아갈 지 모르겠다. 거리 표지목도 좋지만 고개나 봉우리 등 주요 여정에 나무든 돌이든 이정표를 만들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항산(鳥項山 951 m 14:50분)은 암봉이다. 택리지에 쓰여 있듯이 바위로 된 산이지만 도봉산이나 북한산처럼 화강암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한 쪽면만 바위 절벽이고 다른 세 면은 흙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 나무와 풀이 자라나 있다. 갓바우재부터 계속 이어지는 암릉에서 지나온 길을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조항산 위에서는 앞으로 가야 할 대야산 산줄기가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하얀 바위 속살을 드러내고 앉아 있는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앞서 올라와 기념사진을 촬영한 선두팀이 썰물 빠지듯이 휭하니 내려가고, 뒤에 온 사람들은 멋진 조망을 바라보며 사진 찍기에 열중이다. 그리고 배낭에 남아 있는 간식거리를 꺼내 먹으며 휴식을 취한 후 하산길을 잡는다.
고모재 (670 m)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를 연결하는 고개다. 고모재 고개에서 문경시쪽으로 10 미터 내려가면 고모샘이라는 약수터에 맛있는 물이 끊임없이 떨어진다. 이번 백두대간 산행은 이 고모재에서 마치고 우리는 좌측으로 난 산길을 따라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농바우 마을로 하산했다.
은대난초
선두조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사위가 조용하니 적막감이 감돈다. 산길은 오른쪽으로 작은 능선을 돌아 물이 거의 말라버린 계곡으로 이어지는데 앞서 간 사람들의 자취가 희미하다. 오후 4시가 넘은 계곡에는 햇살이 나무끝에 매달려 있다. 이 길이 맞는지 함께 가던 윤수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짜피 계곡을 따라서 내려가면 처음에 흘려 보냈던 지선과 만날 것이라 확신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이 마른 계곡에도 가끔씩 드러난 암반 위로 수정처럼 맑은 물이 작은 소리를 내며 흐른다. 아마도 내가 밟고 지나가는 모래흙 아래에는 꽤 많은 물이 숨을 죽이며 흐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변의 수풀은 무성하다. 길가 작은 나뭇가지에 빨간 열매가 다닥다닥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남쪽에서만 자라는 대팻집나무 열매가 익었다. 작은 열매안에 큰 씨가 들어 있어 식용에는 알맞지 않으며 별 맛이 없다. 새들이 따먹고 종자를 퍼뜨리기에 적당한 것 같다. 나무가 무겁고 단단한데다 말라도 갈라지지 않아 대팻집을 만드는데 유용하다고 하여 ‘대팻집나무’라고 부른다. 그 나무 주변에 또 다른 큰 나무가 보인다. 지난 9회차 석교산 산행 때 밀목재 가기 전 산길에서 대팻집나무 꽃이 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3개월 뜨거운 여름동안 꽃이 지고 열매가 익어 한 세대를 마무리한다.
대팻집나무 열매
대팻집나무 꽃 : 6월 10일 석교산 산행중
계곡위 발자국이 어수선하게 흩어지더니 이내 눈앞에 철로 만든 다리가 나타났다. 방치된 지 오래 된 듯 페인트칠이 바래 있고 이어지는 임도길 위로 오랜 세월 물길이 지나간 듯 깊이 파헤쳐져 있다. 길 주변에는 미역취가 군락을 이뤄 노란 꽃을 피우고 있고 미국쑥부쟁이, 개쑥부쟁이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미국쑥부쟁이
미역취
오후 4시 반이 넘어 넓은 임도길로 내려서니 옆으로 누운 햇살이 그림자를 길게 늘여뜨리고 하루를 마감하려 한다. 산 위에서 세차게 불어대던 바람은 햇볕에 흩어져 버리고 서늘한 가을 기운만 그늘에 감춰져 있다. 임도끝에는 채석장이 있었다. 오른쪽 산비탈을 날카롭게 깍아 내린 바위벽이 마치 다랭이 논처럼 계단으로 서 있고 길 가 바닦에는 크게 자른 돌덩이가 무질서하게 쌓여 있다. 낡은 트럭과 포크레인은 녹슨 컨테이너 옆에 너부러져 흉물스럽다. 누가 왜 언제 이렇게 아름다운 땅을 파헤쳐 놓고, 마치 아이들이 흙장난하다 두고 간 것처럼 방치해 놓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든다.
이제 산행길 끄트머리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조금씩 늘어질 즈음 길옆 계곡에 낯 익은 얼굴들이 모여 있다. 알고 보니 선두그룹도 우리랑 똑 같은 길을 앞서서 내려왔다 한다. 무두 여유있게 아픈 발바닥을 찬물에 씻어내고 남은 간식을 나눠 먹고 있다. 계곡을 내려오는 동안 햇볕에 달구어진 바위를 지나 온 탓인지 계곡물은 생각보다 차지 않다. 웃통을 벗어 찬물로 씻어내고 옷을 갈아 입으니 개운하다.
‘행복이 가득한 터 못골’을 지나 노랗게 벼가 익어가는 들녁을 본다. 더운 여름 수고한 농부들이 보상을 받는 계절, 이 작은 산골에도 영락없이 가을이 익어 간다. 사과가 익어 가고 들깨가 익어간다. 그리고 내 발걸음이 머무는 곳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농바우 마을에는 하루 해가 저물어 간다.
에필로그
산행기를 쓰면서 삼송리 채석장에서 오래 전에 발생했던 괴기한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2011년 부활절에 이 채석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채 죽어 있는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죽은이는 경상남도 창원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58세 김모씨로 신원이 밝혀졌다.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이 현장에서 약 4 km 떨어진 곳에 사는 전직 선교사 주모씨(52세)로 그는 갑자기 양봉업을 하는 지인과 지인의 아들과 함께 토종벌을 찾아 채석장으로 올라가 보자고 제안하여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행한 지인들에 따르면 산이 험하여 내려가자고 했으나 주씨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경치가 멋지다며 올라갔다가 멀리 십자가가 있는 것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고 또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는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경찰은 주씨를 살인 용의자로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죽은 김씨 주변에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과정을 저어 놓은 계획서, 그가 어린 아들을 잃었다는 점 및 종교에 심취했었다는 점과 시신 부검에서 타살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자살로 결론 지었다.
참고로, 이 채석장의 위치는 고모재 너머 괴산군쪽에 치우쳐 있으나 주소는 경북 문경시에 속한다.
첫댓글 기다리던 산행기가 올라왔네요...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으며 잘 읽어봅니다.
산행을 못한 아쉬움이 조금은
풀린건가 아님 더 갈증이 나는걸까요
산행기 감사감사합니다
어느작가못지않은 자세한 글 잘보았네요. 감사합니다
멋들어진 산행기와 틈틈이 올려놓은 야생화 잘 감상하고 야생화 퍼갑니다.
별동대 작가님 수고 하셨습니다,그리고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