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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구암교회 와 군산개복교회→“군산교회” 에 대한 옳바른 선교 역사적이해 ◈
▲ 장인택 조사 (한국인①번) 와 7인의 선발대
▲ 장인택 조사 (한국인: 군산구암교회 회계집사)
▲호남,충청 선교를 위해 조성됐던 "군산 선교스테이션의 전경" - 영명 남학교(현,제일남학교).멜본딘 여학교(현,영광여학교) / 병원 / "ㄱ" 자 교회 /선교배 의 포구 / 선교사들의 사택 / 병원직원 숙소/도서관/안락 소학교(현,구암초등학교) /성경학당/전킨 선교사의 묘 ,정구장 등... 호남의 모교회 군산구암교회 의 자랑스런 믿음의 역사 흔적들이다 .
- (군산 선교스테이션 지도 자료제공 : 군산구암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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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호남 과 충청지역의 선교 교두보로, 또한 이 지역의 모교회로서 의, 자긍심만을
자랑치 아니하고, 오늘도 주님께서 주신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자 전심전력을 다 하고 있다.
교회,학교,병원 등이 세워졌던 군산구암동의 구암동산(=군산을 대표하는 군산의 팔경중 에
한곳인 궁포귀범-弓 浦 歸 帆 이다)의 군산선교 스테이션은 호남 과 충청 선교의 교두보로,
호남과 충청도의 복음전파 기지로써,이지역의 모교회로서, 낙후된 지역사회의,교육과함께
의료선교 활동을 훌륭히 담당했으며, 또한 신문화 즉 군산의 근대문화유산의 발상지인 동시에
한강 이남 최초3.1만세운동 (1919년3월5일 거사 - 구암교회성도28명 이상이 주동및 가담함
16명이 독립유공자로 추서)을 일으켜 교회들이,민족적 교회로 우뚝설수있게 밑거름 된,
애국애족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곳, 위대한 예수문화 를 꽃피운 한국기독교의 아름다운
성지이며,호남 과 충청 의 모교회다.
특히,1905년에 군산시내 쪽과 궁멀을 잇는 가교건설로 통행이 원활하여지자 하위렴
(=해리슨) 선교사가 사비(私費)를 들여 구복동77번지(현,영동)에 집한채를구입-
종교서점 및 예배처소로 사용하게되므로 현,군산개복교회가 시작이되었는데,
(궁멀교회 출석하던 소규모성도가 밑거름이되었으며, 만자산교회 최흥서장로 가 조사로서
헌신적 관리 조력 과 어아력 선교사에 의해 1905년 설립 됨.-종교서점은 후에
미선교회에서 매입 인수하여 군산선교 로 활용)
군산구암교회 보다 늦게 설립된 개복교회가 일명 “군산교회”로도, 통명 되었던것은 군산의
초기선교시 개설되었다가, 자연스럽게 소멸되어버린 “군산교회”로도 불려진 군산선교부
”에대한 선교적 향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의 군산시내 중심가에서 크게 부흥성장
되어가는 개복교회의 위상이 상승된 까닭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결코 개복교회가 “군산교회”로도 불려진 군산선교부”는 아니다.
- 왜냐하면,자.타국의 필요성에 의해1899년5월 군산항이 개항되면서,자국의 이익에
눈이 먼- 일제의 더욱 거세지는 세력으로 당시 군산내항부근에 개설됐던 군산선교부의
이전을 강행할수밖에 없는 선교적 환경으로 내몰렸기에,동년 12월경 궁멀
(現,구암동 구암동산)로 이전 하게된다.
다시 면밀히 말한다면,“군산교회”로도 불려진 군산선교부"의 자체가 궁멀로 이전된것이며,
먼저와 있었던 데이비스 여선교사 의 기도처와 합병한 것이다.
(※데이비스 여선교사 의 궁멀기도처 : 1896년 먼저 궁멀에 와 있었던 처녀 데이비스
선교사의 궁멀사역지 임 : 1897년 제6차 남장로교 월례회 개최장소로 사용 → 군산선교
실적양호로, 나주로 이전치 않고, 군산선교부를 존속키로 결의 한곳임 / 즉, 일명
"군산교회로도 불려진 군산선교부" 자체가 궁멀로 이전,합병한 것으로 궁멀교회인
군산구암교회가 그 전신이다 .)
당시 행정구역상 군산:옥구군/ 궁멀:임피군 소속이였지만,전킨이 안식년으로 미국에서 내한 후
1902년 1월에 군산에서 작성한 The Missionary 에 기고한 글에는 예배장소 5곳 중4곳에 대해선
통사동(현,군산 개정동) / 만자산(현,군산 대야) / 남차문(현,익산) / 송지동(현,김제) 라는
부락명을 구체적으로 명명하지만, 군산선교부 의 궁멀교회에 대해서는 지역명 인" 군산 "으로 만
명명 했는데, 이것은 곧 전킨선교사 자신이 일명 "군산교회로 도 불려진 군산선교부 전신인
궁멀교회를 군산교회 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또한 일부 의견대로, 선교부가 옮겨진 것이지, 교회가 옮겨진 것이 아니요,
남아 있는 교인들(소멸된것이 아니라고)에 의해 일명 "군산교회로도 불려진
교회 교인이" 존속되었다고 주장 한다면-
자신의 몸을 돌볼겨를 없이 복음사역에 몸을 불살렀던 43세의 젊은나이에 생애를 마친 전킨 선교사 의
선교헌신의 열정상 ,분명히 일명 군산교회 라고 불리운(군산선교부) 가 소멸되지 않고. 일부 남아있던
교인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왜 그곳에 계속해서 작은 기도처소나 작은예배처의 형태로라도 당당히 유지시켜
,전킨 자신이나,장인택 조사로 하여금,어떻게 해서라도
관리유지하여서, 존속케하여 아름다운 복음사역의 첫열매의 명맥을 이어갔을 것이 아닌가.
한영혼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한것인데,그리쉽게 사명감없이 내팽개쳐 버리는 사역은 신앙의 양심상
본인이 허락지 아니하였을 것이기때문이다.
첫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뼛속 깊이스며있는 복음의 사역지 였기에 더욱그렇다는 것이며 ,1900년
만자산교회(현,군산 대야에 있는 지경교회) 설립의 주축이됐던 최흥서. 본인교회일도 벅차기 이를때 없는
시기에, 최흥서조사(만자산교회/현,군산지경교회) 로, 하여금 첫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었던 군산시내
전도를 맡아 사역 초석이 되어,1905년(9년후)에나, 더디지만 개복동교회 가 설립이 되었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남아있었다고 주장하는 교인이 소멸되었기 때문임 을 반증한 것이다.
※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합동측) 설립 100주년 을 기념하여 , 2013년 2월 5일
에 발행된 "총회 100주년사" 의 583 페이지 를 보면,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
선교사 가 군산개복교회 "설립자" 분명히 포함되어 기록되어 있다.
초기 군산선교부 설립 당시 의 주활동 선교사는 "전킨(한국명: 전위렴) 과 드루
(한국명:유대모)" 인데, 그당시 군산선교부 에서 활동이 없었던, " "레이놀즈
(한국명: 이눌서)" 선교사 가 설립자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 군산선교부 가
일명 "군산교회" 로 통명 됐다는 "군산교회 는 군산개복동 교회" 가 아니며,
아무런 연관이 없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스스로가 분명하게 증명 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불투명한 억지주장 은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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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좌측) 영문은 에는 " 군산의 맨 처음 교회 " - 라는 전킨의 사인이 있다 .
군산최초의 군산교회인 궁멀교회(현,군산구암교회) 의 사진을 ,
개복교회는 자기교회 사진이라고, 둔갑 시키고 있다.
◈군산선교부의 일명"군산교회(=궁멀교회,
군산구암교회)"성도들의 모습◈
※득병하여, 1901년에 영구 귀국한 드루 선교사가 사진에 없다는 것과.구암교회
양응칠 장로 와 1899년 궁멀에 안착한
불(부위렴)선교사가 있다는 것은 -
즉 군산선교부 가 시내쪽에서 ,궁멀로 이전(1896년 궁멀에
먼저 와 사역중이던,데이비스 여선교사와 합병) 후인 것으로,
궁멀의 군산선교스테이션(구암동산 자리) 내의 궁멀교회 성도들 모습을
촬영한 기념사진.(전킨이 전주로 발령 되기전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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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앞줄 좌측:전킨의 어린3자녀들/중앙:전킨(군산구암교회1대목사,구암교회 양응칠 장로,
불선교사(1899년 궁멀에 안착-전킨을 잇는 군산 선교스테이션의 차세대 주자) /
맨뒷줄 우측:간난아이 안고있는 엘리자벳 앨비(1900년 궁멀 안착,1901년 불과 결혼함)
,검은모자 쓴 메리 레이번(전킨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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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에 최흥서 장로( 만자산교회 장로,현 군산 대야 지경교회 1900년 설립) 의
헌신적 조력과 어아력 선교사 에 의해 설립 된 -
" 군산개복교회 1대 목사 인 (어아력 선교사 사진) 는 왜 없는가 ~! "
참 안타까운 일이다.
1904년 군산에 부임하여,개복교회를 설립한 1대목사인 어아력 선교사 기록에는,
개복교회가 설립 된 1906년의 교인이35명으로 시작되었고, 이때궁멀교회(=군산교회)교인은 250명 이었다, 보고 기록하고있다.
또한1920년 무렵에는 미약한 미자립의 개복교회가 재정이 않돼,단독으로 목사청빙을 할수없어 궁멀교회 (군산교회)현,구암교회 와 함께 목회자를 청빙해야만 했다.
개복교회2대 장로인 홍종필(후에 목사가 됨)이 필진으로 참여한 1928년"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와 1917년 남장로교 선교 25주년 기념식 준비위원으로 홍종필이 작성한"
"군산 스테이션 설립에 관한 보고서 " 에서도
개복교회 설립이1906년 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이기록마저도 부인하고 선교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니 개복교회 출신의 산증인 홍족필 목사가 곡할노릇이 아니겠는가 ?
군산선교부 가 군산시내에서,운영하던 - "예수교 책방" 의 임주환 장로 가 군산통신을 전하면서 개복교회 설립이 1906년임을 "예수교회보" 에 여러차례에 걸쳐 증언해 주고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셨던 군산 선교역사 를 잘못된 이기주의적 교세를 앞세워,억지주장,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질서의 하나님 앞에 순결한 성도,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호남,충청 선교의 교두보로서, 호남과 충청의 모교회로/호남과 충청도의 복음전파
기지로써 - 군산을중심으로 호남지방 과 충청도 지방까지 “지역교회와 선교거점교회”
로서의 2가지 역할을 동시에 훌륭히 담당했던 곳 ,호남과 충청의 모교회다- 즉, 군산지역은
물론 근동지역과 충청일부지역까지의 선교사역을 훌륭히 해 나가지만,군산선교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말할수있는 선교적거점이 군산시내의 중심부가 아닌 외곽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기에,군산선교를 대표할수있는 상징적인 군산선교 구역의 “군산교회
(일명, 군산선교부 가 군산교회로 불려진 ) ” 명보다는 이전하여,궁멀교회로서 命名되었기에
일명 “군산교회라고 불려지기도한 곳”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소멸되어 갈수밖에 없는 이유는 - 이 시기에는 지형적 불완전한 환경과 아울러 ,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자생력을 가지고, 자력으로 정면에 나서 복음사역을 감당할
영적체력이 미미했기에, 선교사를 중심으로 모일수 밖에 없었던 "영적 유아기"
때였음을 상기한다.)
그런데 이 궁멀교회 역사속엔 선교사를 따라 온 장인택(1905 년 군산개복교회 설립
의 초석이 된 - 만자산교회 : 現 군산 대야 지경교회 의 최흥서 장로 와 사돈지간 임)
이라는 사람이 회계집사로 헌신하게 되는데 1893년1월말 선교사공의회를 조직 시 -
유일하게 한국인 조사로서 포함된 인물로, 이는 호남선교의 전통적 맥을 이은 산 증인인
동시에, 또한 궁멀교회(=군산선교부의 일명, 군산교회로도 불려진 전신/ 現 군산구암교회)
의 뿌리교인으로, 선교의조력자로,전킨선교사 와 함께한 그의 발자취는 호남의모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호남선교 역사를 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군산구암교회는 - 새 성전을 헌당하면서 일명 “호남선교기념예배당” 으로도
명명하고,교회 창립일을 1893년1월27일로 계속 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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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한국의 대표적인 사진작가 문 길 수 장로 | |
[제1366호] 2013년 5월 11일]
◈1905 년, 개복동 에 개복교회 가 설립됐다 - 군산 동부교회 문길수 원로장로 ◈ | |
<사진: 군산동부교회 문길수 원로장로>
일본 명승지 한국에 소개 ‘큰 공헌’ 문길수(文吉洙) 장로는 사진작가로서 일생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우리나라와 일본 전국을 누비며 사진을 촬영했다. 그는 군산에서 출생했으며 군산 동부교회 장로로서 시무하였고 이후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1894년 3월 27일 유대모(Dr. A. D. Drew) 의료선교사와 이눌서 선교사가 인천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3일 만에 군산항에 도착을 했다. 이들은 쪽 복음서를 전하면서 군산지방에 첫 기독교를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군산은 100여 호밖에 되지 않는 작은 어촌이었다. 어부들이 바다에 나가 고기잡는 일이 그들의 생업이었는데 매번 배가 출항할 때마다 무당을 불러 고사를 지내고 굿을 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던 유대모 선교사는 이들에게 모든 생사(生死)는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었고 선원들은 유대모 선교사의 말에 은혜를 받아 무당을 초청해 굿 하는 일이 없어졌다. 여기에 전위렴 선교사와 데이비스 선교사가 합세해 군산지방엔 서서히 기독교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군산 선교부는 군산 해변 부두 가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일본인들이 모여 들자 한국인들이 모여 구암 쪽으로 이사하고"군산 선교부를 개설함과 동시에 구암교회를 설립하게 됐다." 이후 군산 시내에서 몰려오는 교인들을 따로 분립해 1905년 개복동에 개복교회를 설립했다. 그무렵 서울에서 진사를 역임했던 홍종익(洪鐘翊)과 홍종필(洪鐘弼) 형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개복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이들 형제는 원래 강원도 평해 출신으로 서울에서 진사의 벼슬을 갖고 알찬 생활을 영유했다. 그러나 나라가 기울어져 가자 이들 형제는 전북 익산 웅포에 낙향 했고 군산이 개항하자 군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개복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군산이 항구로서 그 역할이 커지자 자연히 개복교회도 성장을 하게 되었고 군사 시내 신흥동에 사는 교인들이 1924년 6월에 모이는 전북노회에 분립청원을 하여 신흥교회가 새로 출범하게 되었다. 군산 개복교회는 군산 시내 교통요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계속 부흥되어 갔다. 그러나 개복교회는 군산을 복음화 하는 데 거리관계가 있었기에 1932년 개복교회에 출석하는 양석주, 강기영 장로 등 30여 명이 개복교회 당회로부터 분립 청원을 받아 시내 송창동에 임시기도처로 출발을 했다. 다시 1933년 개복교회 당회로부터 청원을 받았던 전북노회는 분립 청원을 허락 함과 동시에 박승준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41년에는 현 교회당이 위치하고 있는 일본인 여관을 매입해 수리한 후 현재 동부교회가 자리를 잡고 군산 복음화 운동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알았던 문길수 장로는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으며, 그 결과로 이 교회의 원로장로가 되기었다. 문길수 장로는 사진작가로서 1973년 정부로부터 문화여권을 받고 일본의 유명한 사진작가 하라(原北陽)의 초청을 받아 도일(渡日)하게 되었다. 당시 하라(原北陽)는 일본 히로시마(廣島) 출신으로 일본 천황(天皇)으로부터 천황폐하(天皇陛下) 훈오등(勳五等) 서보훈장(瑞寶勳章) 을 받은 유명한 사진작가였다. 그분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게 된 문길수 장로는 단독으로 육로 4,756킬로미터, 항로 1,794킬로 로 총 16,380리를 일본 전역을 답사하면서 촬영을 한 일이 있었다. 일본 관서지방(關西地方) 사진작가연합회에서 개최하는 세미나 과정에 참가를 해 이수를 하기도 했다. 이때 재일대한 오사카 니시나리교회에서 사진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때 문길수 장로는 카메라를 등에 메고 일본의 유명하다는 관광지를 촬영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여름의 경치가 아름다운 일본 교토(京都)의 히가시 야마(東山), 비야코(琵琶)호수(湖水)를 비롯해서 일본의 명승지인 미야지마(宮島) 등 여러 곳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의 사진 촬영으로 한국에 일본 명승지를 소개하는 데 크게 공헌을 했다. 문길수 장로의 사직 작가로서의 명성은 이미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고 300개 이상의 수상경력이 있으며 받은 상패들은 거실에 진열되있어 언제나 연락만 주면 관람이 가능하다. 아래에 그가 받은 상 몇가지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마친다.
1. 1993년 6월 1일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유공자증 받음 2. 6·25전쟁 시 전공이 인정 되어 국방장관으로부터 은성충무무공훈장 수상. 3. 군산지방에 6·25 참전 학도의용군 단체를 전국에서 최초로 창설한 공로자로 수상. 4. 제5회 호남촬영대회 공모전에 특선으로 입선, 이효상 국회 의장으로부터 수상. 5. 학도 의용군 군산지부장 임기 중 육군협회 백선엽 예비역 대장으로부터 특별공로상 수상. 6. 사단법인 프로사진협회에서 사진 문화상 수상. 7. 한명숙 국무총리로부터 공로로 수상.
김수진목사 <한국교회 역사연구원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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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대야 지경교회史(만자산 교회) 에도- 최흥서 조사 의 헌신이 초석이
되어, " 1905년에 개복교회 가 설립"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 138p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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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군산구암교회) 유적지 및 역사물 자료 조사 -
<군산 구암교회 야경>
1.기독교 유적지 및 역사물 명칭
명 칭 : 한국 기독교(개신교) 역사 성지순례지
소재지 : 전북 군산시 영명길 22 / (지번)군산시 구암동 358-6번지
교회☎063)442-3565 , 445-1225 , FAX443-5591
▲ 고증 을 들어 작성된 생생했던 "군산 선교스테이션의 전경" - 남.여학교 / 병원 / "ㄱ" 자 교회 /선교배 의 포구 / 선교사들의 사택 / 병원직원 숙소/도서관/ ⑬안락 소학교(현,구암초등학교) /성경학당/전킨 선교사의 묘 등.....잘 표현 ,그려져 있다. - (군산 선교스테이션 지도 자료제공 : 군산구암교회)
2. 내용(역사적 배경 및 세부내용 기재)
호남 과 충청지역의 선교 교두보로,또한 이 지역의 모교회로서의 군산구암교회 는1892.11.3
-한국에 도착한 美남장로교 7인에 선교사들(=7인의 선발대)에 의하여 세워진 군산구암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교(합동) 의 정통보수개혁의 한길만 을 걸어왔다.
초기 미남장로교에서 파송된7인의선교사들이 1893년부터 호남지방 선교를 시작한 이래
1894년 동학혁명으로 선교사들이 일시 철수를 한 후, 1896년 다시 들어와 W.M. Junkin/
전위렴(군산구암교회 1대 목사), A.D. Drew/유대모의료 선교사,선교사의 어학선생/조사/
장인택(1893년1월“선교사 공의회조직”에 유일하게 한국인으로 참석한 인물:후에
군산구암교회 회계집사로 헌신함) 등이 전도한 곳이다.
원래는 군산항 인근에서 선교사들이 기거하며 전도를 하였으나 일본이 이 지역을 점령하므로,
1899년 12월19일 ,일명“군산교회 로도 불려진 군산선교부"와 먼저와있던 데이비스 여선교사
궁멀 기도처 와의 합병 - 現,구암동산(옛지명;궁멀=군산 선교스테이션)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데이비스 여선교사 의 궁멀기도처 : 1896년 먼저 궁멀에 와 있었던 처녀 데이비스 선교사의
궁멀사역지 임 : 1897년 제6차 남장로교 월례회 개최장소로 사용 → 군산선교 실적양호로,
나주로 이전치 않고, 군산선교부를 존속키로 결의 한곳임 / 즉, 일명"군산교회로도 불려진
군산선교부" 자체가 궁멀로 이전,합병한 것으로 궁멀교회인 군산구암교회가 그 전신이다 .)
계속 부흥이 되어가므로 ,예배처소의 협소를 느낀 교인들은 헌금하여,구암리15번지땅을 매입
하고 성전봉헌 ,1904년에는 생전에 군산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고자했던, 오인묵(:구암교회1
대장로:군산선교스테이션이 낳은 "한국인 최초의 의료선교사 오긍선"의 부친임) 을 중심으로
온교인이 합심헌신하여,10간으로 증축되는 역사가 있엇다. 1916~1919년에는 벽돌
자재 로, "ᄀ"자 교회당을 봉헌하였고, 1959년에는 지금의 석조건물을 지어 성전으로
봉헌하게 된다. 본 교회의 역사에 의해 안락소학교(현,구암초등학교), 군산 영명학교
(현,제일중고) 멜본딘여자(현,영광여중고) ,구암 예수병원(원명:프렌시스 브리지 앗킨슨
기념병원)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는, 학교,병원 등이 일제시대의 강제억압으로 폐교후, 그 후유증으로 아쉽게 소멸되어
흔적이 없지만, 옛 구암예수병원 직원숙소 자리에는 일명 “호남선교 기념예배당”
(선교역사적 의미를 새긴 건물로 설계건축 : 2003 .11 . 3 헌당예배) 으로도 명명되는
“군산구암교회” 가 우뚝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군산시에서는 구암동산 성역화 사업 일환으로 1959년의 구예배당 건물(구암동334번내:
매우낡아 폐처분될 상태였슴)과 교회부지를 같이 매입, 리모델링 완료하여 2008년
11월20일에 “군산3·1운동기념관”으로 개관 하였다.
국내외적으로 암울했던,일제의 핍박속에서도 교회,학교,병원 등이 세워졌던
구암동산 (:군산을 대표하는 군산의 팔경중 한곳인 궁포귀범 -弓 浦 歸 帆 이다) 의
“군산선교 스테이션”은
①호남,충청 선교의 교두보로서, 호남과 충청 의 모교회로/호남과 충청도의 복음전파
기지로써 -
군산을중심으로 호남지방 과 충청도 지방까지 “지역교회 와 선교거점교회”
로서의 2가지 역할을 동시에 훌륭히 담당했던 곳 ,호남과 충청의 모교회다.
②호남에선 가장먼저,학교,병원이 설립된곳으로,낙후된 지역사회의 교육과 함께 ,
의료선교 활동을 열정적으로 감당했던 곳 -
당시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페터슨 의료선교사” 시절에는 일본인들 까지도
찾아와 치료 받았다.
③호남,충청에서 최초로 세례교인(=유아세례 포함)” 이 생겼던곳 -
특히 선교초기 상당한 양육기간을 필요로 하는 세례교인이 생겼다는것은, "예배처소" 란
좁은 범주에서 벗어난 진정한 의미로서의 성장 돼가는 생산적인 면모를 갖춘 모교회가
먼저 세워진것 이며, 이는 군산이 전주보다 1년여 빠르게 교회가 세워진 곳으로,
호남의 모교회 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④“한국인 최초로 美남장로교 파송 의료 선교사” 가 되어 군산야소병원에서
의료봉사를 펼쳘고, 후에 세브란스의전에서 교수,교장 역임 / 한국 최초로 피부과를
개설 / 한국사회복지의 원조인 오긍선(=구암교회 1대 장로 오인묵 의 子 / 한국의 슈바이쳐,
쌍천 이영춘박사 의 스승임- 1925년 세브란스 의전 입학 하여, 스승 오긍선으로 부터 의학교육 받음,
33세 로 군산에 와가난한 자들을 위해 의술, 고아들 위해 영아원 및 개정간호학교를 설립,자혜의원를 인수하여
개정병원으로 성장시킴) 를 배출한곳.
⑤평양(이북)에는 주기철 목사가 있었다면, (이남)에는 순교자 박연세 목사 (구암교회 장로 /
영명학교 교사 / 군산3.1운동 주동,투옥후 / 평양신학교 졸업 / 목포양동교회 시무 中 /
신사참배 반대 / 61세 순교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와 제주도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받쳐 헌신한 강문호 목사 (구암교인 교인 / 제주한림교회:순교자 박연세 목사 의 제자
/ 법정시위로,군산3.1운동 가담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가 배출된곳.
⑥한국 축구계의 거목 “오토바이-채금석 옹”이 배출됐던곳 -
축구를 통한 애국과 ,진정한 스승으로서, 老年에도 젊은 제자들에게 축구로 꿈을 심어주며,
새벽운동으로 건강한 마을문화를 만들었던 곳 /※일제시대 축구 국가대표로 활동하는 등,
전북축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한 故 채금석 선생(군산영명학교에 입학하여 축구를 시작)을
기리기 위해 지난1992년 창설 된 " 금석배 " - 전라북도 군산시 에서는 매년 그의 공로를
기려 " 금석배 전국학생 축구대회 " 를 개최하고있다.
금석배 축구대회는 군산이 낳은 축구 영웅 故 채금석 옹의 축구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2년 창설
이래 해마다 개최되고 있으며, 박지성, 박주영, 이정수, 김영광, 정성룡, 기성용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해 오고 있다.
※군산구암교회 1대 목사 "궁멀전씨" 인 전킨 선교사는 - "한국 축구의 아버지다" : 평양신학교
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축구를 보급했다 (평양숭실전문 과 평양신학교 라이벌전은 장안의 화제)
또한 1902년 무렵에는 군산영명남학교에 "야구부" 도 신설했다./ 군산멜본딘 여학교 의 여학생들
에게는 "정구" 를 가르치기위해 정구장 을 설치했다./1899년 군산에온 불선교사는 "밴드부"(음악) 조직
하여서 가르쳤다. <양국주 : 서빙더 네이션스 대표 - 글 中 에서 >
일제 강점기에[궁멀 교회/현,군산구암교회]의 남녀 찬양대[합창단]와 구암 양악대[밴드부]는
군산 지역 서양 음악회 효시가 됐다.
♡ 전킨은 얼마나 "궁멀(현,구암동)" 을 사랑하였는지, 자신의 성을 "궁멀 전씨"로 불렀다. 그의
한국이름은 전위렴 이다. 그리고 전주서문교회에서 시무하다 1908년 1월 2일 순교하였으나 그는
군산 구암동산에 묻혔다. 구암동산 에는 서울에서 죽은 자신의 첫째 아들을 이장하여 묻었고 군산에서
죽은 자신의 두 아들도 여기에 묻었다. 그만큼 전킨은 궁멀을 사랑하였다. 아니 조선, 특히 군산을 사랑하였다.♡
※ 궁 멀 : 조선시대 에는 현재의 구암동 을 " 궁 멀 " 이라 불렀다.
궁멀 이란 - " 구암동산 (=궁멀산) " 이, 거북이가 강에 들어가는 모습 과 비슷하다 하여 ,
거북이 구(龜) 자를 써서, " 거북이 마을 " 이란 뜻의 "구 멀" 이라 불렸으나, 발음상 "궁 멀"
로 변한것이다.
⑦학생야구 의 효시 가 됐던곳 -
1923년 일본인에 의해 개교한 군산중학교가 학생야구 효시로 알려졌으나 1902년 미남장로교
선교사 전킨(Jun kin)이 지금의 구암동산에 설립한 영명학교에서 처음 시작했고, 최초 야구인
도 김판술 (1909~2009) 전 보사부 장관 이 아닌 양기준씨(1896~1975 : 기독교 병원 사무원/
군산구암교회 양응칠 초대장로 子 / 군산구암교회 성도 / 동생 양기철과 함께 군산3.1운동
가담) 이다.
군산은 1910년을 전후해 야구가 처음 보급됐고, 1923년 고국을 방문한 하와이교포
학생야구팀이 그해 6월 군산 영명학교에서 경기를 치렀다.
<군산 야구 100년사 : 조종안(chongani) 저서 참고 /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의 야구 효시 >
-다수의 시대적 복음사역자들과 인재들을 훌륭하게 양성, 배출했던곳.
⑧당시 신문화를 주도했던, 즉 군산의 근대문화유산의 발상지인 이 곳
⑨ 한강 이남 최초 3.1 독립만세운동 은 군산구암교회 성도들이 주도하였던 거사로써,
(1919년3월5일 거사 - 구암교회성도28명 이상이 주동및 가담함 : 16명이 독립유공자로
추서) 뜨거운 애국애족의 항일항쟁 불씨가 일어났던 곳 -
스승 박연세(군산영명학교 교사/군산구암교회 장로) 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김병수 (군산영명학교 졸업/세브란스 의전 재학/군산구암교회 세례인,집사) 및 구암병원 직원,
영명학교 학생들 등...군산구암교회 성도들이 주도하였던 3.5만세운동 이었다.
⑩1893년 1월 호남선교 최초,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선교사 공의회"에 참여 했던 "
장인택 조사"가 평생 헌신봉사하며,섬겼던 곳 - 이는 호남선교의 전통적 맥을 이은 산
증인인 동시에, 또한 궁멀교회(=군산선교부의 일명,군산교회로도 불려진 전신/
現 군산구암교회)의 뿌리교인으로, 선교의조력자로,전킨선교사와 함께한 ,그의
발자취는 호남의 모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호남선교 역사를 잇고있다.
※1893년1월28일 은 군산구암교회 설립 년도로 1893년1월 선교사 공의회를 조직하고 호남지방을 선교지역으로
배당 받아 사역 - 이때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선교사 공의회에 포함된 장인택조사 (후에 군산구암교회 회계집사)
로 호남선교 정통적 맥을 이었기 에 교회설립 년도 로 정함.
⑪ “호남 최초 의료선교” 의 드루(한국명: 유대모)의료선교사 를 시작으로 "최초의
간호 선교사인 케슬러(Esther Kestler, 한국명:계순라)"가 병원 선교 사역을 활발히
진행한곳 -
드루 이후,알렉산더,다니엘,패터슨,브랜드,홀리스터,월슨 의료선교사 가 의료선교의 질을 더 한층 발전시켰다.
케슬러 이후, 세핑(서서평),레스롭,그리어,월커,그린,우즈 간호사들이 헌신봉사했던 곳이다.
⑫ 엘리자베스 쉐핑 Elisabeth J. Shepping 간호사이며 女선교사. 조선말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위해 헌신한 테레사,성자였던 쉐핑이 (1914 ~1919년 / 5 년간) 美남장로교
"군산선교 스테이션 " 의 군산구암병원 (원명:The Frances Bridges Atkinson Memorial
Hospital) 소속의 간호사 로서 헌신했던 곳 - 1914년 군산지부 소속으로 언어연수3년차,구암병원
사역/여성 복음화/주일학교 사역/"양키" 라는 조랑말타고 병원출근및 전도여행 /군산에도 나환자병원 설립인가/
간호부 양성소(학교) 설립신청 불허로 한학급 규모의 간호원사 양성으로 3명의 군산간호사를 서울 세브란스
연합간호학교 로 파견양성 등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53년9개월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사후엔
장기기증(연구용) 하다.
⑬ 한국 최초로 "복음선(황토돛배:당도리)" 을 이용, 해로(海路) 를 통한 선교 사역을
폭넓게 진행했던 곳 - 육로가 발달되지 못한 시기에 가장 효율적 복음사역의 한 방법으로 해로(海路)
를 통한 전킨 선교사 와 드루 의료선교사가 배를 이용하여, 고군산섬 일대 ,금강, 만경강, 동진강 을 통해
지역교회와 선교거점교회로서 충청지역 일대 까지 순회 하며, 복음의 열정을 아낌없이 불살렀던 곳.
그 중심에는복음선(船) 정박이 쉬웠던 궁멀(현,구암동)에 "궁포" 라는 포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⑭ 초. 중. 고. 대학 까지 갗춘 호남의 유일한 교육 시설 (군산 영명학교)로,낙후된
지역교육 에 이바지 했던 곳 -다수의 시대적 복음사역자들과 인재들을 훌륭하게양성,배출 했던곳.
▲ 1890년대 초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전킨(Jenkin, W. M.)이
지금의 전북 군산시 구암동산 일대에 교회를 짓고 복음 전파를 위해 타고 다니던 선교배(船 : 황포 돛대).
*궁 멀 (구암동) 에는 " 궁 포" 라고 불리운 포 구 (바다 와 뭍 이 만나는 곳 , 배가 드나드는 항구) 가 있었다.
⑮ 운보 김기창 화백이 半입체풍 의 동양화 로 <예수의 生涯 > 를 화폭에 탄생 시켰던 곳 -
운보 김기창(1913-2001) 화백은 청각 장애인이었으나,
운보는 6.25 피난으로 처갓집 우향 박래현(1920~1976,운보 김기창의 부인/일제 강점기의
동양화가 / 대한민국의 최정상 여류작가로-동양화가 겸 한국화가이며 판화가 / 군산구암교회
교인 임)의 고향인 군산에 머무르던 1952년 1여 년에 걸쳐 <예수의 생애〉 제작에 착수
1년 동안 29점의 예수의 일대기 완성에 몰두했고, 1953년 독일 선교사의 제의로 부활’을
추가로 제작해〈예수의 생애〉총30점을 완성했던곳으로, 70여 년 전 운보가 그의 처 우향,
아들 완, 장녀 현을 이끌고 처가로 피난 와 30여 점의 성화를 그렸던 향토사적으로 스토리텔링이
있는 곳이다.
※ (군산시 구암동 390번지(251㎡)의 구 토지대장에는 1952년 10월 1일 ‘김기창’
명의의 소유권 이전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운보 가족들이 살았던 지번에는 현재 건물은 사라져
없고 빈 터만 남아 있다)
-호남 기독교의 메카이며, 민족교육의 요람지이자, 서양의학의 도래지이며,
일제식민지 시대 군산의 자존심을 세워준 자랑스런 현장인 동시에,
군산근대 문화 역사의 신문화 의 발상지다.
- 한국교회들이, 민족적 교회로 우뚝설수있게 밑거름 된,
애국애족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곳, 복음의 씨를 사시사철 뿌리며,
주의 지상명령을 준행한 위대한 예수문화 를 꽃피운
“한국기독교 의 아름다운 성지” 이다.
3.기타사항(문화관광자원으로 활성화할수있는.............대중적 정책 제안)
제안 : 군산시 구암동 의 구암동산 (=옛,선교스테이션) 를 " 성역화 " 해야한다.
- 구암동산(=옛,선교스테이션) 성역화 를 위한 현실상황 -
▶ 군산시구암동의 구암동산(=옛,선교스테이션)는 이처럼 빛나는 역사성을 갖고 있으나,
혼란기에 이를 지키지 못하고 현재는 대부분의 땅을 군산한국전력 직원사택과 세풍
아파트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매우 늦었지만,이제라도 아파트는 몰라도 한전의
땅이라도 기증받아 옛 선교스테이션의 명맥과 3.1운동의 유적을 포함한 구암교회
인근의 유적지 개발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 1995년(76돌)부터 군산시구암동 구암동산(=옛,선교스테이션) 성역화 위해서도
매년3.1절 기념식과 3.1절만세 거리재현 행진등을 계속 하고있다.
계속17년째 다방면으로 구암동산성역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너무나 늦은감이 있지만,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합동) 차원에서 발벗고 나서
한국기독교의 뿌리깊은 믿음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이곳을 하루빨리 성역화 해야한다.
이곳 현지를 답사하고, 마스터 플랜을 세워 구암동산성역화 에 공조내지는,앞장서
마무리 할때다.
- 구암동산(=옛,선교스테이션) 성역화 를 위한 현재 진행상황 -
▶ 현재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한전사택부지(옛,구암동의 선교스테이션=
구암동산)는 토지32,139㎡(9,722평)에 건물 9개동이 있다.
일반감정으로 할 경우 28억 정도의 감정평가 금액이 나올 수 있으나 보상감정으로
할 경우 50억 정도가 나오는 것으로 알려 졌다.
군산시는 한전사택 부지를 매입해 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으로 방침을 세우고 추경에
한전사택부지 매입 예산을 확보할 계획이나, 이것또한 아직은 확실히 단정할수만는
없는 일이다.
매입후엔, 선교사들이 세웠던 남,여학교,병원과 ,초기의“ㄱ"교회, 병원숙소,선교사와
그의3자녀들묘 이전문제,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선교용 배, 3.1운동 및 호남선교를
상징하는 대형조형물,조각물,동상등 제작 설립 해야하며(군산시 담당 관계자와 협의하에)
현재, 구예배당(1959년 건축) 를 리모델링 하여 2008년에 개관한 3.1운동 기념관도
업그레이드하여, 체험관 으로 탈바꿈 시키며,복원해야하는 종합적 비용을 총회차원에서도
책임을 지고, 감당 지원되어야 한다.
▶ 결론:
이렇게 된다면, 군산 근대문화유산의 관광 벨트화(금강호 유역의 역사 ~원도심의역사
문화,해양테마 유적과 연결됨)로 국제관광기업도시의 이미지인 새만금 관광코스와 연계
되므로 그 의미가 클수있다고 본다.
- 끝 -
"한강이남 최초3.1만세운동의 발원지 - 군산구암교회"
애국애족의 목숨건 항일의 숭고한 역사적숨결을 기념키 위해,
군산시 주관으로 "군산3.1운동 기념관" 을 개설하다. - (2012.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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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모교회인 군산구암교회는 - 군산의 근대 교육사업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데...군산지역과 호남지역의 항일 3.1만세운동의 중심적인 역활을 했다.
①군산3.1운동 기념관 홈페이지
1층에는 3.1운동 관련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생억지를 부리는 일본인들은
와서 봐야 한다....
(서울에서 쇼핑 즐기는 시간과 돈이 있으면..)
②☞ http://www.815book.co.kr/sajuk/MSG/
(전북>군산시>구암동>옛 구암교회 3·1운동 근거지 홈페이지)
③☞전국 독립유공자 사적지☜(군산구암교회편)
☞http://www.dmook.co.kr/gallery/view.a
sp?seq=216075&path=130406190340&pag
e=91
④한국관광공사 가 추천한곳 : 군산구암교회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
Id=korea_diary&logNo=30113726404
⑤호남 3.1만세운동의 진원지 :군산구암교회
☞ http://www.ktsketch.com/tmspc/3416
⑥ 군산구암동산:한강이남 최초 3.1발원지 이
며, " 군산선교 스테이션 " 이 있던곳
☞http://vod.gunsan.go.kr/contents/cView.p
hp?mode=view&idx=80#
"군산3.1운동 기념관 " QR 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