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레미야 40:7-16
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그의 시 <송가>의 마지막 구절에 유명하게 회자되는 ‘Carpe Diem(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라틴어로 ‘오늘을 잡아라’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영어로는 ‘Seize the day’라고 하는데, 이를 번역할 때 사람마다 ‘오늘을 즐겨라’, ‘현재를 즐기라’라고 의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자칫 세속적인 즐거움을 쫓으라는 말로 오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말을 처음 사용한 호라티우스의 시 원문으로 정확하게 직역하면, carpo(카르포)는 ‘열매를 따다’라는 말이고, diem(디엠)은 ‘날 또는 오늘’이라는 뜻이므로, 번역하자면 ‘오늘의 열매를 수확하라’라는 의미가 됩니다.
고대 시인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의 열매를 수확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오늘의 열매입니다. 각자의 열매가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지독하게 척박한 인생의 땅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열리지 않는 것 같은 오늘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맺히지 않는 오늘은 없습니다. 로마서 5장 3절과 4절에 따르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에 따르면, 비록 그 삶에 환난의 터널 한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소망할 것이 있다, 곧 얻어 낼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모양이 어떻다고 할지라도, ‘오늘이라는 현재’, 곧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향한 성실함은 결단코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 상황이 아무리 척박하여도 생명이 있는 한, 오늘의 열매는 반드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파종(7-12)
오늘 본문의 유다가 그랬습니다. 바벨론의 침략 전쟁 이후 참상이 되어버린 유다에 수습책으로 남겨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다랴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7) 들에 있는 모든 지휘관과 그 부하들이 바벨론의 왕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그 땅을 맡기고 남녀와 유아와 바벨론으로 잡혀가지 아니한 빈민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함을 듣고
그다랴는 아히감의 아들입니다. 아히감은 사반의 아들로 여호야김 왕 시대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살려준 인물입니다. 예레미야 26장 24절입니다.
(렘 26: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또 그다랴의 조부이자 아히감의 부친인 사반은 서기관으로 요시야 시대에 발견된 율법책을 알아보고, 성전 개혁을 도모한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그다랴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매국노처럼 바벨론에 부역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다가 패역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멸망하게 된다는 선지자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못마땅하지만, 바벨론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상황을 수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전란을 피해 도망쳤던 사람들이 그다랴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8절입니다.
(8) 그들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과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느도바 사람 에배의 아들들과 마아가 사람의 아들 여사냐와 그들의 사람들이 미스바로 가서 그다랴에게 이르니
8절에 기록된 여러 이름은 패망하기 전 유다의 지도자들인데, 그들이 바벨론의 철군 이후 다시 본토로 돌아왔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다시 돌아온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미스바라는 점입니다.
본래 유다의 중심지는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 유다의 성전은 불에 타고 무너졌습니다. 성벽도 부서졌습니다. 다윗 왕가의 위용은 땅에 떨어졌고,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다랴를 통해 사람들을 모으신 장소가 미스바입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은 뒤, 거기서 회개하고 금식하며 영적 재건운동을 펼쳤습니다. 또 사무엘상 10장에 근거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왕으로 세운 곳도 미스바입니다. 물론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였지만,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고백해야 하는 것은 사울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 무너진 유다가 미스바에서 재건을 시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즉 신앙을 바르게 세우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무너진 현실일수록, 또 삶이 어렵다고 느낄수록 회복하고 복구해야 하는 것은 세속적 영토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미스바, 곧 무너진 신앙의 자리입니다. 무너진 삶의 원인은 무너진 기도 때문일지 모릅니다. 부서진 오늘은 말씀의 부재가 가져온 비극일지 모릅니다. 남유다가 그랬습니다. 세속 욕망만을 추구하다가 우상에 빠졌고, 결국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 의해 패망하게 되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미스바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 삶의 기초가 되었던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 주님을 손과 발로 사랑했던 봉사의 자리, 그곳을 바로 세우는 것이 오늘의 열매를 경작하는 ‘carpe diem(카르페 디엠)’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그다랴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미스바에 모인 사람들에게 앞으로 무너진 유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천명합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9-10)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보라 나는 미스바에 살면서 우리에게로 오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리니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아 그릇에 저장하고 너희가 얻은 성읍들에 살라 하니라
9절에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라고 한 것은 그가 매국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7장과 38장에서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러 차례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도 알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예레미야를 위기에 빠뜨리고 죽이려고까지 하였지만, 그다랴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염치없이 가장 궁금해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대체 왜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이 이방 나라에 의해 짓밟혀야 하냐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렇게 위태로운데 왜 침묵하고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하박국 1장 13절입니다.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 선지자도 예레미야 선지자도 모두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이유는 뻔합니다. 패역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속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속상하다고 해서 투정만 부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뜻은 한 번도 번복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다랴를 비롯한 유다에 남은 사람들은 후회, 통곡, 자책해서는 안됩니다. 무너진 그곳에서 다시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느리다고 생각한 그때가 어쩌면 가장 빠른 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에 제한된 시간은 없습니다. 깨달았다면 바로 그 즉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다랴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벨론 왕을 섬길 것과 갈대아 사람들 즉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허용하자고 권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이 허락한 지역에 거주하면서,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으자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먹고 마시던 것들입니다. 즉 그다랴의 말은 일상을 회복하자는 뜻입니다. 폐허가 된 땅이지만, 그 속에서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 훗날 성벽을 재건하는 발판이요, 성전을 중건하는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일과 보통의 일이 처음부터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보통의 일이 계속되어, 쌓이고 쌓이면 그것이 위대함이 되지 않습니까? 거룩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실 때, 그들에게 구한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을 구별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엇은 먹을 수 있고, 무엇은 먹으면 안되는지 그것을 가리는 소소함이 거룩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주 작은 걸음일지라도, 무너진 그곳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가장 필수적인 것,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방식대로 바꾸어가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니 현재 주어진 상황 때문에 불평, 원망, 시비, 낙심 따위는 내려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찬양, 경탄, 벅참, 감동의 마음으로 일상을 맞아야 합니다. 비록 작고 소소하더라도 용기 내어 시작하는 것, 그것이 신을 벗고 오늘의 은혜를 누리는 carpe diem(카르페 디엠), 현재에 충실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평화의 먼 길(13-16)
유대 땅에 평화를 재건하고자 그다랴를 중심으로 이제 막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흉흉한 소식이 들립니다. 총독 그다랴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13절과 14절입니다.
(13-14)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들에 있던 모든 군 지휘관들이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에게 이르러 그에게 이르되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네 생명을 빼앗으려 하여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낸 줄 네가 아느냐 하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믿지 아니한지라
유다가 패망하기 전 군대 지휘관이었던 요하난이 어느 날 유다 땅의 일상을 회복해 나가고 있던 그다랴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침략 때 암몬으로 도피했던 이스마엘이 본토로 귀국한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사실 암몬의 왕 바알리스가 그다랴 자신을 죽이라고 보낸 암살자라는 것입니다. 너무 충격적인 말이었는지 그다랴는 충성스럽게 여기던 요하난의 말이었음에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요하난의 이어진 말입니다. 15절입니다.
(15)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미스바에서 그다랴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되 청하노니 내가 가서 사람이 모르게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죽이게 하라 어찌하여 그가 네 생명을 빼앗게 하여 네게 모인 모든 유다 사람을 흩어지게 하며 유다의 남은 자로 멸망을 당하게 하랴 하니라
요하난은 은밀하게 그다랴를 찾아와서는 자신에게 이스마엘을 죽이라고 암살을 지시하라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다랴가 암살당하면, 이제 막 시작된 유다 재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어 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니 요하난은 자신에게 명을 내려서 이스마엘을 치도록 지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일이 한창 진행된 것도 아니고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벌써 권력의 암투가 빚어졌습니다. 사실 8절에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 이름 중 이스마엘은 다윗 왕가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왕족이었기 때문에 왕가의 부흥을 꿈꿨습니다. 유다가 재건된다면, 다시 다윗 왕의 후손인 자기가 왕이 되어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릅니다.
이에 반해 요하난은 군대 지휘관이었습니다. 그 역시 지도자로 권력에 대한 욕심에 노출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중간 과정이 이들 사이에 있었는지는 성경이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제 막 시작된 평화가 다시 깨어질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조금의 평화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우는 사자처럼 발버둥 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과 9절입니다.
(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말씀과 같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일상의 평화를 무너뜨리고자 어떤 일을 일으킬지 모르기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곁에 머무르는 것이 필수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 끊어진다면, 시시각각 다가오는 사탄의 울부짖음 앞에서 버티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상황의 어떠함을 떠나 매일 새벽을 깨우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몸부림치며, 밥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다윗도 그와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시편 27편 4절입니다.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이 품은 평생의 소원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적에게 쫓기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순간에도, 자기를 구해달라는 요청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그의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에 온전한 평화가 머무는 것은 먼 길을 가야 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사탄의 몸부림도 하나님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상황이 어떠한가 보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미스바로 돌아가십시다. 훼파된 우리 삶은 그곳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무너진 기도의 단과 말씀의 단을 다시 세우는 것이 회복과 부흥을 위한 오늘의 카르페 디엠이 될 것입니다. 또한 소소한 일상이라도 용기를 내어 걸어가십시다. 대단한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 우리 삶의 작은 선택 앞에서마저 신을 벗는 용기가 거룩한 삶을 경작하는 carpe diem(카르페 디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사탄의 방해가 시작됩니다. 넘어뜨리려는 울부짖음을 이기기 위해, 우리는 매일 하나님이라는 안전함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분의 크신 은총 안에서만 승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이라는 삶의 토양이 척박한 땅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이곳에서 다시 시작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보이는 전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위함입니다. 부디 우리 신념의 신을 벗고, 어떤 상황에도 충실하게 살아가는 carpe diem(카르페 디엠)의 모습으로, 오늘의 열매를 풍성하게 건져 올리는 복된 주님의 사람들로 이 하루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척박해 보이는 현실이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풍요의 땅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그 척박함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만든 것임을 깨달으며, 다시 주님을 만났던 미스바로 돌아가겠습니다. 또한 작은 일일지라도 용기내어 시작하겠습니다.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울부짖는다고 하여도 주님 안에서 더욱 강건할 수 있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혈과 육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매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시고, 오늘 오늘을 경작하며 감사하고, 찬양드리는 개척자의 기쁨을 누리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 아침 오늘 하루의 모든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다시 돌아가야 할 내 삶의 영적 미스바가 있다면 그곳은 어디입니까?
2. 그다랴가 척박한 유다 땅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며, 내가 고난의 한중간에서라도 우선해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나누어 봅시다.
3. 오늘 내가 용기 내어 내디뎌야 할 무너진 일상은 무엇이며, 그 걸음이 인도할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지 생각해 봅시다.
4. 내 삶의 평화를 위협하는 사탄의 도전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을지 말해 봅시다.
(작성: 황성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