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선교지에서 귀국해서 부산근처에 있는 어떤 기도원에 쉬고 있을 때에
그 소식을 듣고 한 목사님이 찾아 와서 하는 말이 ‘제가 헬라어로 성경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공부를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조에‘
곧 생명이라는 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전에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다.
예수를 주로 믿으면 의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예수를 믿으면 축복, 예수를 믿으면
능력과 권세를 얻는다 이렇게 알다가 요한복음을 공부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하여 사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먹으며 살리라 이 말씀이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 왔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15장을 펴 놓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포도나무요 너희가 가지라는 것이 믿어집니까?’
‘예 그럼요’하고 즉시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그 효과가 목사님에게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인 것을 믿는데 그 효과가 있느냐?고 묻자 아무소리 안 해요.
‘자, 그럼 목사님이 지금 저녁을 잡수셨는데 저녁을 잡수면 뭔가 효력이 있지 않느냐
우리가 팔 다리 움직이고 말하고 찬양하고 숨 쉬고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먹은 음식이 소화 흡수돼서 그 열량과 힘으로 지금 우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다 하신 그분은 전능하신 분임을 믿습니까?
생명의 원천이 맞습니까? 복의 근원이 맞습니까? 그분이 태초 곧 만물의 근본인
아르케이며 모든 것의 시작이요 모든 것의 근원이요. 모든 만물이 그분께 연결된다는
사실을 목사님이 믿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믿는다는 겁니다. 당연히 믿지요.
수도 파이프도 저수지에 연결 되면 효력이 있는데 우리의 믿음이 진리를 따라
그분께 우리가 붙잡혀서 연합이 되면 링거처럼 진액이 연결되어 공급될 겁니다.
분명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이 비유는 분명히 주님의 말씀인데
주님이 거짓말 했겠느냐 실제가 안 되는 말을 우리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겠느냐? 잘 생각해 보세요.
요15장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와 가장 사실적이며
가장 실제적으로 연결된다는 진리를 말씀해 주는 부분이며 주님이 직접 유언으로
고별 설교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다가다 심심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이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이 그렇게 효력이 없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아 근데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에게 말합니다.
‘요1:12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맞아들이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 내 안에 계시는 것을 지금 믿으시는
것은 맞죠? 그런데 한번 믿은 겁니까? 항상 믿는 겁니까? 그가 나의 구주가 된 것은
항상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을
항상 믿는 상태이십니까? 그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하는 말씀도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말씀하는 겁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신 후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는 ‘내가 그걸 믿는데 왜 내게는 실재가 안 됩니까?’
그럼 요1:14절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면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이
효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왜 내게 그런 복이 없습니까?’ 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모델로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신 이 호 로고스가 사람의 몸으로 입고 오신 이 사건을
우리는 성육신 또는 화육신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말을 빌리면 교회는 제 2의 성육신입니다. 이 말이 이해 되십니까?
이 말의 뜻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그 분의 몸입니다.
모든 몸이 머리를 통하여 영양 공급을 받듯이 그 머리에 부어지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그 머리에 붙어 있는 모든 지체는 다 맛을 봅니다. 다 영양을 받습니다.
그 진액을 우리는 공급받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 것은 말씀이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로 만드실 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나의 목숨을 포기해야 됩니다.
여성이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가려면 몽땅 포기해 버리고 가야합니다.’
‘우리는 옛적에 율법과 한 짝이 됐다가 이제 율법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서 영원한 새 남편이신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
가운데서 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됐는데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개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에 있었던 옛날의 것을 그대로 다 가지고 옵니다.
전에 살던 집의 장롱과 이불 그리고 전에 사람하고 찍은 사진 등을 몽땅 다 가지고
오면 새남편이 좋아 하겠어요? 전에 가지고 있던 옛 습관과 가치관 풍속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좋아하시겠습니까?’ 이 말로 그 분과 대화를 끝냈습니다.
그 분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 앞에서 계속해 나가야만 했을 겁니다.
욥기의 얘기가 바로 그겁니다. 동양철학은 자연에 관한 이야깁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은 한마디로 신토불이입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자는 겁니다.
그래서 산소자리도 보고 집터도 보고 연월일시 사주도 봅니다. 그것이 인간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자연의 조건이 우리 인간의 생각과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것이 바로 동양철학입니다. 그에 반해
서양철학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인간은 생각하기에
달렸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철학의 사조에 따라 사람의 생각이 바뀌는 겁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사람들에게 계속 집어넣습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실존주의 철학이 말하는 게 바로 합리와 불합리입니다. 생각을 바꾸니까
되더라 이건 합리적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실제로 살아서 만들어보니까
틀림없더라 이건 합리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본성 속에 있는 악하고 추한 생각을
들여다보고는 이건 아무래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되더라 그래서 불합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행운의 여신’이라 합니다. 인간의 이성 가운데 있는 것
중에 되는 것은 합리고, 안 되는 것은 불합리니까 인간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므로 우리가 남신으로 하지 말고 여신으로 하자 그래서 ‘행운의 여신’이라고 합니다.
어쩜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행운의 남신이라 했겠지요?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동양철학은 정적인데 반해 생각하기에 달렸다고 하므로
서양의 철학은 동적입니다. 그 생각대로 실현하고 생각을 사실화시켜 보려고,
동적으로 행동하는 사고입니다. 그게 바로 서양역사입니다.
지금 온 세상에 이 실용주의 철학이 가득합니다.
지금 우리가 욥기를 공부하는데 1장부터 37장까지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사이에서 지루하게 변론이 일어나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구속함을 받고 복을 회복하는 이야기가 바로 욥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약속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약속을 자기 것으로 못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 생각, 마음, 뜻 그리고 자기 이론을 욥처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방법이 그 속에 역사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 꿈틀거리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 그러느냐? 말씀을 안 들었냐? 신앙생활 안했느냐? 기도를 안했느냐?’
물어봐도 도무지 원인을 모릅니다.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다 해 봤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신앙의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욥처럼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Job의 트랩에 걸려 있습니다. 욥기를 통해서 반드시 해결을 해야만 될 문제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살아계신 주님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