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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얼굴> / 존 드라이버 지음 / 전남식·이재화 옮김 / 대장간 펴냄 / 280쪽 / 1만 4,000원. |
높은 도덕성과 겸손, 가난과 사랑이란 수식어를 가진 목사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 높은 배기량의 차량을 제공받는 공무원과 기업인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목사들의 세계다. 교회는 자신의 신앙을 '버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하는 곳이 된 지도 오래다. 교회는 교회에 대한 회의감으로 신앙을 버리고 나간 수많은 교인들의 공백으로 인해 금세 쓰러질 것 같은 중심이 텅 빈 고목(古木)이 되고 말았다. 위기를 넘어 멸절(滅絶)하고 말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제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교회란 무엇인가?'이다. 폭력과 배신, 불신과 적의가 가득한 교회가 진정 처음 예수가 자신의 피값을 주고 세운 교회일까? 참으로 의아하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교회는 무엇인가? 말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계급과 서열, 진리를 지키기 위해 쌓아 놓은 배타성이란 높은 담장이 교회의 정체성일까? 혹시 교회를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깊은 목회적 회의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빛이 되어 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존경하는 강해자인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을 강해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지금 이보다 더 긴박한 질문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복음이야말로 오늘날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하는 일은 무엇이며,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가장 긴박하게, 그리고 시급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교회란 무엇인가?'이다.
거두절미하고, 저자가 말하는 교회를 찾아가 보자. 저자는 남미에서 평생을 바쳐 선교사로 헌신했고, 현지인들과 해방신학자들에게서조차 살아 있는 성자로 불릴 만큼 가르침과 삶이 동일했다. 그는 "교회는, 부르심의 본질상 선교하는 곳이어야 한다"(19쪽)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경험하고 전달하는 인간 공동체"이며, "거룩함으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대조 공동체"(33쪽)이다. 교회는 달리는 자전거처럼 선교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즉 영혼을 구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며, 선교는 교회의 존재 방식이자 존재 이유이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대조 공동체로서 존재할 때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교회의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치명적 결함
교회에 대한 바르지 못한 왜곡은 매우 일찍 시작되었다. 4세기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승인과 국교로의 전환은 교회를 이해하는 치명적 결함을 가져왔다. 핍박받던 교회가 핍박하는 교회가 되었고, 관용하고 포용하는 교회는 정죄하고 핍박하게 되었다. 특히 제국의 이미지를 빌려 교회의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교회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그 후 결코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지 못했다"(27쪽).
작금(昨今) 교회의 이미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이 아닌 세속적이고 제국적인 이미지를 빌려 옴으로 교회의 그릇된 정체성이 일어났다. 제국적 이미지는 로마가 타국을 자국의 문화와 법에 복종시키듯, 교회가 선교라는 명목으로 선교지의 문화를 지배하고 복속시킨다(29쪽). 이러한 왜곡과 오류는 교회가 성경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세상을 닮아 가려는 유혹 속에서 일어났다고 단언한다. 아브라함의 소명(召命)과 출애굽 사건을 통해 나타나듯 성경은 탈(脫)제국적 이미지가 하나님이 계획한 교회임을 보여 준다. 올바른 교회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는 세속적이고 제국적인 모델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이미지
알아 둘 것은 교회를 논함에 있어서 조직신학적 정의나 도그마적 촌평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성경에서 그 뿌리를 찾아 간다. 순례 이미지(그 길, 임시 체류자, 가난한 사람들), 새로운 질서 이미지(하나님나라, 새로운 창조, 새로운 인류), 백성 이미지(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가족, 목자와 양떼), 변혁 이미지(소금-빛 그리고 도시, 영적인 집, 증언 공동체)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과 추구해야 할 양태(樣態)를 제시한다. 교회에 대한 네 가지 이미지는 결국 세상을 변혁시키라는 교회의 사명과 직결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이미' 임함이며, 장차 도래할 천국의 가시적 표지이다. 교회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확장시켜야 한다. 교회의 존재 방식은 철저하게 성경에 뿌리내려야 하며, 성경을 통해서만 교회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본다면 선교는 한때의 붐도 아니고, 어느 부서가 관장하는 프로그램은 더더욱 아니다. 선교하는 교회라는 성경적 이미지로의 '급진적 회귀'(58쪽)가 있을 때 진정한 교회의 얼굴을 찾을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급진적 회귀를 몇 가지만 분석해 보자.
예수의 길의 급진성
예수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다. 제자도, 즉 제자의 길은 예수의 길이며, 예수가 가는 길을 뒤따르는 것이다. 예수는 길 위에서 자신의 배신과 배척, 죽음을 이야기한다. 예수의 길은 정확하게 아브라함이 걸었던 길이고, 이스라엘의 걸었던 출애굽과 광야의 길이다.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드러나는 '길'은 타자를 위한 대속과 죽음의 길이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또한 타자를 위한 고난의 길'(67쪽)이어야 한다. 결국 예수가 길이다(요 14:7).
"길이란 악의 세력과 갈등 가운데 있는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표지 아래서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 고난받는 증인의 순교자적 교회 안에서 강력하게 전달되는 이미지이다. 이것들이 상실되면 그 이미지가 갖는 힘도 상실될 수밖에 없다." (71쪽)
길의 이미지는 타자를 지배하는 방식의 제국적 이미지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길의 이미지는 두 번째 이미지인 '임시 체류자' 또는 '나그네'와 '외국인'에서 더욱 강화된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믿음의 족장들을 '나그네'로 표현하며, 베드로 역시 '나그네'로 부른다. 이뿐이 아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은 요셉에 의해 배타적 소외를 당해야 하는 '나그네'로 존재한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거주할 때조차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임시 거주자"(레 25:23)라고 선언한다. 그들은 여전히 길 위에 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자비하심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유리하는 자들의 공동체"(75쪽)이다. 교회는 지배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나그네이며, 천국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길 위에 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교회는 단 한 번도 교회가 제국적 이미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 나라처럼 왕을 허용했을 때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의 임박한 심판을 통해 경고"(41쪽)했다.
대안이 아닌 대조 공동체로서의 교회
저자는 교회를 '대조 공동체'로 소개한다. '대조'의 사전적 정의는 '둘 이상인 대상의 내용을 맞대어 같고 다름을 검토함'이다. 대조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세상의 대안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세상과 본질상 같지 않음으로 인해 변혁을 요구한다. 앞서 언급한 제국적 이미지는 거주하는 이미지다. 그러나 교회는 길 위에서 걷고, 잠시 체류할 뿐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세상적인 지배 체제와 악에 대해 한 공동체를 외국인으로 살게 함으로써 그 안에서 진정한 구원 복음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85쪽). 동적(動的)인 교회는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이어야 한다. 교회는 어떻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가?
제국은 존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억압과 폭력이 동반된다. 그들에게 칼과 창이 없다는 것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용서와 평화, 섬김과 희생으로 존재한다. 성경은 제국적 이미지를 끊임없이 저항하고 고발한다.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라는 도시에서의 도피, 애굽이라는 제국에서의 탈출, 이방 나라를 닮아 가려는 제왕적 통치 방식에 대한 선지자들의 통렬한 비판 등은 교회는 인간의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만을 인정하려는 존재 방식에 의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 백성이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체제 전복적인 행위"(109쪽)이다. 교회는 새로운 질서로 재편된 곳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다. 계급과 서열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한 몸이며, 지체이다. 구분은 있으나 차별은 없다.
"예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메시아 공동체로 초청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여성이나 가난한 자들, 실패한 자들이나 어린이들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사회질서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양식임을 보여 주셨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지향한 비전이었다." (140쪽)
대조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과 확연히 구분했고, 존재 방식 자체가 다름을 보여 준다. 자끄 엘륄이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말하듯,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니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대조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미지는 '소금과 빛, 산 위의 도시'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이것을 '변혁적 이미지'의 범주로 묶었는데 잘한 일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물들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변혁 시킨다. 구약 제사에서 소금은 제물을 상하지 않도록 보존하고, 맛을 낸다. 모든 제사에는 소금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레 2:13). 소금은 하나님과의 언약이며, "그 언약 관계 위에 희생 제사 제도가 기초하고" 있다(208쪽).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하기 위해 '사회의 가치관에 순응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지리적 영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빛이 어둠을 밝히고 모든 것을 드러내듯 교회는 세상 속에 있되, 대조 공동체로 존재함으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급진적인 삶을 살아가고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이다"(213쪽).
나가면서
그리 두껍지 않는데도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교회의 이미지에 상당한 변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추천한 풀러신학대학교의 윌버트 R. 쉥크 교수는 이 책이 "교회의 이미지에 대한 성서적 이미지와 기능을 회복하는 동시에 그동안 하나님의 더욱 완전한 뜻을 은폐시켜 왔던 잘못된 해석과 악습을 낱낱이 보여 주고 있다"(11쪽)고 평하는데 옳은 말이다. 실천이 극미(極微)한 관념적 신앙관을 견지(堅持)하고 있는 장로 교인으로서 이 책은 굉장히 도발적이다. 제도적 형식과 개인주의적 신앙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현대의 교인들에게 존 드라이버의 교회의 얼굴은 진정한 제자도와 교회의 존재 방식이 무엇인지 명징하게 보여 준다.
교회에 희망이 있는가를 물었다. 결국 교회만이 희망임을 새롭게 발견한다. 로이드 존스의 사도행전 서두에서 가장 긴박한 질문 '교회란 무엇인가?'는 교회만이 희망이고, 제국적 이미지로 왜곡된 교회의 이미지를 벗어 내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로의 급진적 회귀를 통해 진정한 교회로의 회복하는 데서 그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교리의 주변부에 밀려나 있고, 때론 상황 논리에 함몰되어 잃어버린 예수가 꿈꾸었던 교회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성경에 탄탄하게 뿌리내린 저자의 교회론은 교회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로와 도전이 될 것이다.
정현욱 / 로고스서원 연구원, 반석교회 부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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