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174년,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합장한 채 극락 간 원각국사
숙종 4년(1174년)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高麗篇1 (1994)
영동 영국사 원각국사 비 (국보 534호)
□□□□ 태종(台宗) 증시 원각국사비명(贈諡 圓覺國師碑銘) 및 머리말
조산대부朝散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판사재사判司宰事 지제고知制誥 겸 兼 태□太□
□ 붇다가 말씀하신 3승三乘 12분교十二分敎 8만 법문八萬法門이 천축乾竺에서는 모두 갖추어졌으나, 해동국에서는 아직 번득이는 가르침 소리에 어둡다. 그러나 붇다의 미묘한 말씀이 설해지는 것은 멀고 가까움이 없다. (비석깨짐) 상언尙焉. 그리고 그 바람이 변마卞馬(변한 · 마한 지역?) 지역에 크게 떨쳐, 슬기로운 해가 비치는 곳은 밝아지고 가르침의 비가 내리는 곳은 촉촉이 적셔 한 구역이 되었다.
우리 태조께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 남모르게 도움을 받아 만세 (비석깨짐) 이루었다. 차츰 동쪽으로 전해졌으나 종문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문왕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가 선왕宣王이 즉위하신 지 3년(1085), 경오(1090?)에 가르침을 구하려고 송나라에 들어가 전당錢塘(지금의 항주)을 다니면서도 도를 묻고, (천태) 불롱산佛隴山에 올라 바라보고 (비석깨짐), 천태(종)를 논의하는 사람은 대각(국사)을 시조로 삼았으나,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대도가 행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러한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 오늘날 천태의 감추어진 교리는 가장 으뜸가는 법문이다.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사람이 있어야 한다. (비석깨짐) 행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야 복리를 쌓아 나라를 보호하게 된다. 그러므로 대각이 입적한 지 7년이 지나, 하늘이 국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바른 법(正法)을 보살피게 하였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스님께서 (비석깨짐). 손에는 항상 책을 놓지 않고, 불도를 구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국사가 바른 법을 보호하도록 그렇게 함이 아니겠는가! 또 모든 여러 경문을 살펴보면, 여래의 방이란 큰 자비심이고, 여래의 옷이란 부드러움과 너그러운 마음(忍辱心)이며, 여래 (비석깨짐. 게으르지 않은 마음으로 붇다의 가르침을 널리 펴서 만세에 널리 쓰이도록 큰 법륜을 굴릴 사람은 오로지 우리 (원각) 국사뿐이다.
스님의 이름은 덕소德素이고, 자는 혜약慧約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자미子美이고, 속성은 전씨田氏다. 담潭 (비석깨짐). 주 수령으로 있을 때인 정해년(1107) 3월 6일 어머니 남원군부인南原郡夫人 양씨가 어느 날 밤 서울에서 주의 경계까지 길에 수레가 가득히 이어져 있는 꿈을 꾸었는데, 스님은 그날 밤에 태어났다. 부모가 그 귀함을 알고 자미子美라고 불렀다. (비석깨짐)
중이 “저는 국청사 정원淨源입니다.”라 하므로, 스님은 그와 기꺼이 대화를 나누니,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람 같았다. 드디어 따라가서 대선사 교웅敎雄 문하에 들어가 9살 때 머리를 깎았다. (대선사) 교웅 공(雄公)이 늘 이르기를 “우리 (천태)종을 일으킬 사람은 틀림없이 이 사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석깨짐) ~하면 반드시 늘 스님과 함께 놀았는데, 어느 날 함께 불당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법당(大藏堂)에 들어가 함을 열고 책을 꺼내 스님에게 주자 스님은 그 책을 받아 보고 바로 능통하였다. 인종이 감탄하여 “이 중은 훗날 반드시 큰 법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신년(1128) (비석깨짐). 대선大選이 열러 시험 보기 전 이미 자미가 당선될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 다음날 과연 합격하니 한 생만 보살 수행을 한 것이 아니고, 어렸을 때 이름도 전생의 이름이었다. 인종이 자리를 이은 지 11년째인 임자년(1132) 인종이 국청사에 나들이하여 (비석깨짐) 스님. 계해년(1143) 봄 스님은 문도에게 치하의 말을 남기고, 각지로 돌아다니며 스승을 찾아 도를 묻다가 울주 영취산에 이르러 머물렀다. 슬기로운 이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들어 이보다 더할 수가 없고, 사방 학자들 부탁이 날로 많아졌다. 또 들으니 (비석깨짐)
돌아오는 길에 푸른 바다에서 갑자기 폭풍이 불어 성난 파도가 산과 같았다. 배에 탄 사람들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스님은 태연히 「보문품」을 독송하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과 물결이 저절로 가라앉아 무사히 건넜다. 경오년(1150)에 몸소 금으로 경전을 썼다. (비석깨짐) 정사를 본 지 8년째인 계유년(1153) 봄에는 마납법의磨衲法衣를 내리셨다. 갑신년(1164) 여름 날씨가 오랫동안 가물어 의종이 문명궁에서 경을 설하는 법회를 열고 스님을 모셔와 강설하게 하자마자 큰비가 쏟아졌고, 그리하여 논밭이 (비석깨짐) 임금님 수레를 따라가 머무는 곳에서 보필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스님이 모든 종문 석학 가운데 벼슬할 만한 인물 천거하였는데, 추천한 사람은 모두가 명망 있는 인물들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평주에 머물렀을 때 스님께 대선사를 내렸다.
숙종1년 신묘(1171) (비석깨짐) 불법승. 이리하여 덕망이 큰 스님을 얻어 사범師範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왕이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어서 선禪 · 교종敎宗에서 오랫동안 덕망을 쌓은 대덕을 뽑아 불상 앞에 그 이름을 붙여 두고 엎드려 기도한 뒤 봉한 이름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 임금의 진영眞影 앞에 나아가서 (비석깨짐) 이리하여 이름이 친척 아우(戚弟) □세승통 □世僧統 우복야 박경서朴景瑞 등을 보내 왕의 뜻을 전하고 이어서 여러 번 청하였으나, 스님은 모두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사신을 세 번이나 보내자 임금의 뜻이 간절함을 알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갑인년(1194)에 보내 (비석깨짐) 등이 예를 갖추어 존호를 높였다. 11월 갑술, 출가자 · 재가자와 임금 · 신하가 큰 법회를 열고 스님께 예를 올렸다. 이날 백좌회百座會(사자좌 100개를 만들어 고승 100명을 모시고 설법하는 큰 법회)를 베풀어 향을 나누어 주는 의식(行香)을 할 때 임금이 먼저 스님 앞에 공손히 예를 표하고 궁전에 올랐다. 그 뒤 수창궁壽昌宮 화평전和平殿에서 금경회金經會를 열고, 스님을 청하여 □□□□□ 즉則 혹或 □ 임금이 수레를 타고 나들이 가서 스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 안부를 물으니, 그 공경함이 이와 같았다.
갑오년(1174) 10월 기축□ 천수사天壽寺 대연大延□□, 11월 계사癸巳에 가벼운 병이 드니, 임금이 몸소 앓아누운 자리까지 와서 약을 손으로 먹여 주었다. 또 우복야 박경서를 보내 □□□□□□□□□, 스님은 손을 들어 뿌리치며 돌려보내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임금이 “이것이 스님이 늘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선사를 모시고 있는 승지承智에게 명하여 모시고 의왕사醫王寺로 옮기게 하였는데, 하루 지난 뒤,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입적하였다. 임금께서 들으시고, (비석깨짐) (송)악산 서쪽 기슭에서 (다비하였다).
스님께서 병에 났을 때 내인(內人) 곽영견郭永堅이 꿈에 맞이하여 □문門□유有□□, 성문인(聲問人)이 대답하되, “이것이 여래가 열반하신 때”라고 하였다. 스님들이 바라보니, 옷이 하얀 학 무리가 되어 둘러싸고 공중으로 올라가 서쪽으로 (비석깨짐) 전 電. 다음날 스님이 과연 참여하지 않았다. 11월 경인庚寅에 선사 승지에게 명하여 유골을 받들어 □□□하下, 양산陽山 관내 지륵산智勒山 영국사寧國寺에 모셨다.
을미년(1175) 4월 태사를 보내어 (비석깨짐), 형원사瑩原寺에 있을 때, 일찍이 이르기를 형원瑩原이란 선가禪家의 고찰古刹□ 일이 혼란스러워 부不□□□□□□□ 지륵智勒은 산 높고 물 맑아 참으로 수도하기 알맞은 곳이다. 드디어 임금이 청하여 사使 (비석깨짐)
(비석깨짐) 병이 없고, 입은 옷은 유有 (비석깨짐)
(비석깨짐) 불전佛典을 읽고 다른 일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비석깨짐)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願我臨欲命終時 盡除一切諸障碍 面見彼佛阿彌陀 卽得往生安樂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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