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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교육
“2020년 미래 사목환경과 가톨릭교회의 변화 모색”에 대한 논평
조용환(서울대학교 교수 ∙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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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환 신부님의 상심과 열정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가톨릭교회의 변화를 감으로 대충 판단하시지 않고, 각종 자료에 근거하여 정교하고 체계적인 분석을 하시는 데 감명을 받았습니다. 발제에서 신부님은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 2020년이라는 미래 시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전망하셨습니다. 둘째, 교세통계, 인구통계, 실태조사, 갤럽조사 등을 근거로 가톨릭교회의 향후 변화를 예측하셨습니다. 셋째, 가톨릭교회의 변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아이디어를 제시하셨습니다.
신부님이 우려하시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문제점은 (1) 가톨릭교회가 일부 지역, 계층, 연령층에 편중되는 경향, (2) 주일미사 참여가 저조하고 냉담자가 늘어나는 현상, (3) 교회의 매체들을 활용하여 신앙을 키우려는 열심의 부족, (4) 본당공동체 의식과 공동체 활동의 미약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은 교세의 양적 증가 못지않게 종교생활의 질적 향상을 중시하십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부님은 (1) 교회지도자의 모범, (2) 인터넷을 비롯한 IT 매체의 활용, (3) 적극적인 신자 관리, (4) 열세인 지역, 계층, 연령층에 대한 전략적 접근, (5) 생활의 스트레스와 문제를 교회 안에서 풀 수 있는 환경 조성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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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부님의 분석, 예측, 문제의식, 해법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신부님의 발제에 제 소박한 견해 몇 가지를 보태는 것으로 논평에 임하겠습니다. 저는 평범한 가톨릭신자인 교육학자입니다. 종교와 교육은 제 삶의 중요한 두 축입니다. 그러나 그 둘이 제 삶 속에서 따로 놀지 않도록 유의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동양의 종교(마루 宗, 가르칠 敎)는 ‘으뜸가는 가르침’, 즉 ‘최상의 교육’입니다.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종교(religion)를 ‘신에 대한 경외’ 혹은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결코 상반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지만, 해석과 접근 방식에 다소 차이가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교육학자로서 저는 교육의 의미가 담긴 동양의 정의에 더 매력을 느끼는 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교육의 눈으로(조용환, 2002) 신부님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상심과 열정을 이해하고, 또 가능하다면 보완해 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신부님의 발제에서 냉담의 가장 큰 이유가 “학업과 생계”라는 조사결과가 제 눈길을 끕니다. 학령층의 젊은이들이 학업 부담 때문에 냉담하는 것이나, 생계 때문에 주일도 없이 일해야 하는 근로자들의 냉담은 모두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알고 보면 여기서 말하는 학업과 생계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것입니다. 즉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에는 생존과 실존 양면이 있습니다.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생태적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은 생존의 의미와 방식에 대해 문답을 하며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입니다. 내가 누구이며,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부단히 ‘존재물음’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생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존을 포기하기도 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를 교육열이 매우 높은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만큼 교육열이 낮은 사회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열은 진정한 의미의 교육열이 아닌 학교열, 학력열, 학벌열일 뿐입니다. 교육에 관련된 미사여구가 넘치고 사이비교육에 쏟는 열기는 뜨겁지만 진정한 의미의 교육은 찾아보기 힘든 혼돈과 혼동 상태입니다. 그 와중에서 교육은 일종의 상품으로, 생존경쟁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교육을 관장하는 정부기구의 이름도 ‘교육인적자원부’입니다. 물론 인력을 개발하고 인적 자원을 관리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능력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자원으로서 가치가 있고 없음을 떠나서 모두가 존엄하고 소중합니다.
교육은 생존과 더불어 실존을 돌보아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의 일차 과제가 생존인 점을 감안할 때 교육은 실존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능력과 품성의 향상은 총체적인 삶, 그 가치지향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최상의 교육’으로서 종교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물론 종교와 세속의 교육은 그 접근방법이 다르고 마땅히 달라야 합니다. 세속의 교육이 ‘인간과 인간의 만남’ ‘가르침과 배움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의지할 때, 종교는 ‘인간과 신의 만남’ ‘신에 대한 경외와 순종’을 중시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는 세속과 다르고 다른 종교와 다른 특유의 교육 전통과 체계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가톨릭교회가 오래전부터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신부님이 제시하신 우리 가톨릭교회의 문제점과 대책을 생각할 때 교육에 대해서 좀더 깊이, 새로운 시각에서 검토해 보아야 할 점들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그 단적인 예를 냉담의 이유로 ‘학업과 생계’를 드는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먹고사는 문제와 잘 사는 문제, 특히 그리스도인으로 잘 사는 문제는 결코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즉 ‘학업과 생계’가 냉담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학업과 생계’를 이유로 들어 냉담을 하고, 그런 이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세속의 ‘교육답지 못한 교육’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정론을 제시하기는커녕 그것을 부추기거나 방임하는 모습을 저는 드물지 않게 봅니다. 학교에서 종교를 지식 이상의 것으로 다룰 수 없고 다루지 않는 현 상황에서, 교회는 ‘최상의 교육’으로서 종교교육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생존과 실존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세속의 가치들이 종교 속에서 어떻게 설명되고 추구되어야 하는지 교회가 그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문제는 종교와 교육을 통합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부족한 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교와 학원은 교육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일을 하고, 학교의 문제를 고민하며, 학교를 개선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런 저에게 교회는 학교에서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깨달음을 정말 많이 줍니다. 그러나 제 이웃의 어린이와 어른들을 돌아보면 교회를 교육의 장으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몹시 안타깝습니다. 물론 그 잘못을 교회가 아닌 그 사람들의 탓으로 돌려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기는 하겠지만, 저는 교회가 좀더 진정한 의미의 교육, ‘최상의 교육’에 좀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만약 그 염원이 실현된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빗나간 교육열을 진정한 의미의 교육열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때의 교육열은 종교열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신부님이 우려하시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양적 위축, 질적 위기 문제가 교회의 교육력을 회복하는 데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교육학자인 저의 확고한 신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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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은 2020년까지 일어날 한국의 경제, 정치, 사회의 변화를 치밀하게 예측하셨지만, 실상 그 변화가 가톨릭교회에 미칠 영향은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그러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왜냐하면 그 전망들이 성격상 거시적이고 구조적이어서 신자와 일반인의 일상적인 삶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예견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세기 말부터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정보혁명이 우리 한국인의 구체적인 생활방식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고 있고 또 심화시킬지를 간략히 다섯 항목으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그 변화가 우리 가톨릭교회에 미칠 영향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이 변화와 영향은 신부님이 우려하시는 젊은 연령층의 문제이며 ‘종교적인 교육’의 과제와도 직결됩니다.
첫째, 차이입니다. 사회학자 보드리얄(Jean Baudrillard)은 후기현대사회를 ‘차이자본주의’라 명명했습니다. ‘최소한계의 차이’가 자본이 되는 사회입니다. 예컨대, 기능상 큰 차이가 없는 자동차에 디자인과 옵션 상의 작은 차이를 주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회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그것에 빨리 적응합니다. 성당이 아닌 교회나 절, 혹은 다른 어떤 종교적 기구가 더 참신한 프로그램을 제시한다면 신자들, 특히 젊은층 신자들은 그리로 관심을 쏟을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신앙의 전당인 동시에 구역 ․ 반 소공동체 등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생활의 공간입니다. 기본 교리와 전례를 유지하면서도 가톨릭교회만의 차이를 부각하고 참신한 활동과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속도입니다. 컴퓨터와 휴대폰의 정보 처리 및 전달 속도가 얼마나 엄청나게 빨라지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정보혁명시대의 청소년들은 “틀린 것은 용서해도 느린 것은 용서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성당의 정보, 지식, 활동은 너무나 느려서 갑갑합니다. 그렇지만 장년층, 노년층에게는 지금의 속도조차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참으로 복잡한 문제입니다. 신부님께서도 인터넷을 비롯한 ‘IT’의 활용을 강조하셨지만, 우리 가톨릭교회 전체가 이 속도의 문제에 대해서 지혜를 모으고 바람직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속도와 차이에서 앞서가는 대중매체와 기업체를 주목하면서 가톨릭교회 특유의 방법을 찾으면 되리라고 봅니다.
셋째, 이동입니다. 교통·통신의 발달, 정보화, 여가, 글로벌 시스템 등 여러 요인이 복합하여 이동이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사람의 이동은 물론이며 상품, 서비스, 정보, 지식, 문화, 자본, 노동의 이동 또한 급증하고 있습니다. 자원과 기회, 편리와 행복을 찾아서 사람들은 국경을 초월하여 더 빈번하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이제 정착민이 아닌 ‘신유목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물리적으로 이동하지 않은 채 인터넷세계 속에서 가상적 이동을 무한히 할 수 있는 ‘디지털 유목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을 교구, 구역, 반 등의 지리적 경계 속에서 관리하는 체제는 조속히 개선되어야 합니다. 이동 중에 어디서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좀더 ‘열린 교회체제’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넷째, 사이버(cyber)입니다. 정보혁명의 견인차 인터넷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입니다. 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가상공동체라는 새로운 커뮤니티를 대거 창출하고 있습니다. 2007년 10월 27일 현재 포털 프리챌(Freechal)이 파악하여 관리하고 있는 사이버커뮤니티 숫자만 해도 666,277개입니다. 2003년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 중 89%가 한 개 이상의 사이버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들이 가입한 사이버커뮤니티의 평균치는 13.7개에 달합니다.(조혜영, 2006) 요컨대 가시적, 물리적, 직접적, 현실적 만남이 아닌 사이버공간에서의 만남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의 선교, 전례, 교육, 친교 모든 면에서 사이버라는 생활방식이 좀더 진지하게 연구되고 활용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불만족입니다. 대중매체와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은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 풍요로운 삶을 눈앞에서 늘 접하게 됩니다. 욕망이 한껏 증폭되고 복제됩니다. 그러나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도구가 함께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적 박탈감이 더 커지게 됩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서도 불만족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경쟁’과 ‘경쟁력’은 또 얼마나 강조되고 있습니까? 저는 가톨릭교회가 이 문제를 좀더 진지하게 분석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곡된 욕망, 불만족에서 벗어나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함께 모색하고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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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언급한 우리 사회의 변화들이 결코 바람직하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양면적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변화를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물론 이 두 과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톨릭교회가 봉착해 왔던 것이고, 또 해결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변화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만큼은 반드시 새롭게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직자의 보수성은 그 자체가 미덕이며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습니다. 외람되나마 저는 교회와 성직자가 평신도의 세속적 상황, 관점, 요구, 능력을 좀더 중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방적인 교화가 아닌 상호적인 대화가 더 많아지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는 신부님, 수녀님의 말씀과 의견을 늘 존중해야만 했고 따라야만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눌, 제 의견을 진지하게 개진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만남, 관계는 결코 교육적이지 않습니다. 오늘과 같은 세미나에서도 저는 마냥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참고 문헌
조용환(2002), 교육을 보는 눈. 조용환 외 <세상을 보는 눈 1.6>, pp.1-31, 서울: 이슈투데이.
조혜영(2006), 지식정보사회와 청소년문화 재고찰: 청소년의 온라인 커뮤니티 참여와 지식·정보 습득을 중심으로. <교육인류학연구> 9(2): 14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