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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7월 왕정(1) 동요의 전반기
7월 30일 의회는 루이 필리프에게 프랑스 왕국 육군 준장(lieretenant-general)이라는 지위를 제공하였다. 루이 필리프는 그 지위를 받아들여 이튿날 파리 시청으로 가서 국민 방위대장 라파예트를 만나 삼색기를 계양하고 환희에 날뛰는 군중 앞에서 서로를 껴안았다. 8월 2일 샤를 10세는 손자 보르도 공작을 상속자로 선언했으나 그는 외국으로 망명하고 없었다. 의회는 8월 7일 프랑스 왕의 궐위를 선언하고 루이 필리프를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럼 루이 필리프란 어떤 사람일까? 그는 프랑스 대혁명 초기 왕족으로 루이 16세에 반대한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조세프의 아들이었다. 조세프는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한 시해파로서 ‘평등공 필리프(Philippe Egalite)'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나 1793년에 자코뱅파에게 처형되었다.
샤를 10세를 몰아낸 프랑스 국민은 대혁명을 지지한 왕족의 후예 가운데서 루이 필리프를 새 왕의 최적임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티에르 일파는 7월혁명을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간주하여 다음과 같이 간결한 필치로 오를레앙 공을 새 왕으로 추대할 것을 역설하였다.
샤를 10세는 결코 파리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그는 자기 동포의 피를 흘리게 하였다. 공화정은 우리를 위험스런 분열에 직면케 할 것이고 우리를 유럽 여러 나라의 적으로 만들 것이다.
오를레앙 공은 혁명의 대의에 몸바친 왕족이다.
오를레앙 공은 우리를 적대하여 싸운 일이 없다.
오를레앙 공은 제마프 전투(1792년 11월 6일 프랑스군이 승리한 전투)에 종군하였다.
오를레앙 공은 시민의 왕이다.
오를레앙 공은 적의 포화 아래서 삼색기를 휘날렸다. 오를레앙 공만이 그 삼색기를 다시 휘날리리라. 우리는 어느 다른 깃발도 모두 거부한다.
오를레앙 공은 스스로 설치고 나서지 않고 있다. 그는 우리 뜻의 표시를 기다리고 있다.
자, 이제 우리의 뜻을 선포하자. 그러면 그는 우리가 항상 바랐던 헌장을 수락할 것이다. 그가 받아 쓸 왕관은 프랑스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복고 왕정의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프랑스 혁명을 승인하는 오를레앙 공을 새 왕으로 추대하는 7월혁명은 별 저항 없이 쉽게 성공하엿다. 새 왕은 부르봉의 왕들과는 달리 “신의 은총에 의한 프랑스 왕 필리프 7세”가 아니라 “신의 은총과 국민의 의사에 의한 프랑스 국민의 왕 루이 필리프“였다. 필리프 7세가 아닌 루이 필리프라는 왕호는 그의 7월왕정이 자유주의적, 시민적 왕국임을 분명히 말해 준 것이었다. 새 왕은 바로 국민의 왕이었다. 새 왕은 국민의 의사에 의하여 국민의 대표자로 추대된 것이다. 주권은 왕에게 있지 않고 국민에게 있었다. 따라서 국가 생활의 요강이 되는 헌법도 1814년 헌장처럼 왕이 왕의 권위로써 국민에게 하사한 것이 아니라 의회가 1814년 헌장을 대폭 수정하여 왕에게 무조건 승인하게 한 것이었다. 그것은 국민의 대표자들이 왕의 통치 원칙을 왕에게 명시한 것이었다.
개정된 헌장은 더 많은 자유를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원리와 정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기를 삼색기로 바꾸었다. 프랑스 현대사에서 국기를 삼색기로 하느냐 백색기로 하느냐는 것은 그저 국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을 용인하느냐 부정하느냐 하는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7월왕정이 삼색기를 국기로 제정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색기는 어떤한 정치체제 아래에서도 계속 프랑스 국기로 남아 있다. 이 사실은 7월혁명 이래 여러 번 국가 체제에 변화가 있었지만 어떤 체제도 기본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을 부정한 일이 없음을 말한다.
1830년의 헌장은 유권자와 피선거권자의 자격을 완화하여, 최하 연령을 각각 25세와 30세로 낮추고 납세 자격도 각각 200프랑 및 300프랑으로 낮추었다. 여기서 참정권을 가진 자들의 수가 부 배쯤 늘었다. 그만큼 부르주아의 정치적 자유와 함께 그 지배권이 커졌다. 사실 7월혁명은 부르주아가 내세욘 민권 사상의 승리였으며, 대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을 통하여 이미 수립된 바 있었던 부르주아의 정치적, 사회적 우월권이 재확립된 사건이었다. 이 혁명으로 이제는 앞으로 망명 귀족이 부르주아의 토지 소유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영원히 사라졌다. 부르주아는 그들의 손으로 새 왕국을 만들어 세웠다. 7월왕정은 부르주아의 왕국이었다. 루이 필리프는 부르주아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증권업자의 왕(roi des agioteurs)이라는 별명을 얻게 될 터였다.
7월혁명은 국민주권의 원리에 따라 왕권을 여러 모로 축소했는데 왕의 연급도 4,000만 프랑에서 1,200만 프랑으로 삭감하였다. 그리고 상원 의원의 세습제를 종신제로 고치고, 귀족의 전통적 특권을 아주 없앴다. 특별재판소의 설립을 일체 금하고, 언론의 검열제도를 영구히 폐지하고, 국민 방위대를 재건하고, 군 복무 기간을 1년 줄였다. 새 정부는 지방장관, 군부의 장성, 고급 관료, 대학 총장 등을 모두 자유주의 인사로 바꾸어 국가 생활의 온갖 구석에 시민적 특성을 강화하였다. 7월왕정은 언론 재판을 배심제로 다시 고치고, 지방의회(conseils generaux)를 다시 구성하여 지방자치제의 기초를 놓았고, 1833년에는 국가의 재정 보조에 의하여 초등교육을 개혁하고 확장하였다.
7월혁명은 새로운 개혁과 진보를 약속한 동시에 지금까지 숨어 있던 모든 불만과 불평을 폭발시켯다. 변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변화에서 어떤 이득을 얻으려는 과격한 행동을 취하였다. 자유의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신념은 모든 일에 새 사람, 새 방법, 새 생각을 소리 높이 요구하게 하였다. 많은 정치 클럽과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온갖 종류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고 선전하는 가두시위가 매일같이 벌어졌다. 보나파르트파, 공화주의자, 생시몽주의(Saint-Simonisme) 같은 사회 개혁가들은 각자 저마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시대가 이제 왔다고 믿었다. 혁명이란 언제 어디서나 정치적 변혁과 함께 일시 사회적 불안정을 낳게 마련이고 따라서 경제적 침체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7월혁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제적 침체의 영향을 곧바로 받는 계층은 부유층이 아니라 노동자 계층이다. 그들은 당장의 끼니가 문제였다. 7월혁명도 빵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만들어냈다. 혁명 후 얼마 동안 프랑스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 소란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혁명에 대한 두 견해의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혁명은 왕조의 변경과 기본적 자유의 보장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했다는 견해였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개혁은 혁명의 일차적인 성과이고 더 큰 개혁의 출발에 불과하다는 견해였다. 전자는 7월혁명을 정치혁명으로 이해하고, 후자는 7월혁명을 사회혁명으로까지 발전시켜야 한다는 태도였다. 이 양자의 대립은 7월 혁명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실은 프랑스 혁명을 받아들이는 자세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었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그것이 공화정으로까지 과격하게 변한 것을 잘못으로 생각했고, 후자는 공화정과 자코뱅의 공포정치야말로 프랑스 혁명의 당연한 결론이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7월혁명을 정치혁명에서 그치게 하여 더 큰 변화를 막으려는 저항파(parti de la resistance)와 계속 더 진전시키련느 운동파(parti de mouvement)가 7월 왕정에서 서로 대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루이 필리프의 첫 내각에는 이 두 파의 대표자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카시미르 페리에(August Casimir-Perier), 브로글리(Achille-Charles Leonce Victor Broglie), 기조 같은 인물들은 저항파의 대표자들이고, 라피트(Jacques Laffitte), 뒤퐁 드 뤼르(Jacques Charles Dupont de l’Eure) 같은 인물들은 운동파를 대표하였다. 혁명 이후 왕궁 앞에서는 매일같이 시위 행렬이 소란을 피웠다. 특히 과격파들은 샤를 10세의 전직 대신들을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왕은 과격파의 행동을 무마하려고 11월 운동파의 라피트에게 새 내각을 위촉하였다. 이 개각은 과격파의 여론을 다소 누그러뜨리기는 했으나 사회적 무질서를 막지는 못하였다. 시위 군중은 전직 대신들에게 선고된 ㅈ오신형 판결에 항의하여 사형을 요구하고, 1831년 2월에는 파리의 대주교관과 교회를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라피트 내각은 재정의 위기와 실업자의 격증을 막지 못했고, 또 폴란드, 이탈리아 등지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운동을 원조하라는 시위 군중의 요구에 못 이겨 결국 1831년 3월 물러나고 말았다. 거기서 저항파의 카시미르 페리에 내각이 들어서서 중도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
앞서 복고 왕정은 프랑스 국민의 분열을 막고 하나로 통합하려고 안간힘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했는데, 이제 7월왕정도 모든 프랑스 국민이 동의하는 국가체제를 건설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 같았다. 왕당파는 7월 왕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샤를 10세와 그의 손자 보르도 공작만이 프랑스의 정통 왕위의 승계자라고 주장하여 필리프를 왕위 찬탈자로 규정하였다. 그들을 정통파(Legitimistes)라고 칭하거니와, 7월 혁명 당시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고 나선 세력이 없었던 것을 보면 정통파의 정치세력은 보잘것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가톨릭 교회 안에서 교황 지상주의와 교권주의를 반대하는 자유주의 가톨리시즘(liberal Catholicism)이 성장함에 따라 정통파의 힘은 한결 더 약화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파는 정부 전복 음모를 꾀하기도 하고, 샤를 10세가 1836년에 죽은 뒤부터는 보르도 공을 앙리 5세라고 칭하면서 그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더구나 정부 전복 음모에서는 극좌인 공화파와의 협력마저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음모와 소동이 1830년대에 주주 일어났다. 1836년부터 1846년까지 10년 사이에 왕의 암살 음모 사건이 여섯 번이나 되었다.
그러나 정통파의 반정부 운동은 공화파의 그것에 비하면 덜 심각하였다. 7월혁명을 계기로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던 공화주의자들에게는 7월 왕정이 아무리 자유주의적이라 하더라도 왕정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7월왕정 시대는 프랑스의 산업 혁명기로서 근대 공업 노동자계급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들의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은 부르주아적 7월왕정에 불만을 품게 하고 공화국의 수립을 열망하게 하였다. 특히 7월왕정은 시의적절한 사회 입법과 참정권의 범위 확대에 실패하여 산업사회가 만들어내는 새 근로 계급의 사회적, 정치적 불안을 해소해주지 못하였다.
정통파와 공화파 이외에 보나파르트파도 심심치 않게 반정부 소란을 피웠다. 나폴레옹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제국 시대에 네덜란드 왕이 되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들에게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자가 나폴레옹의 외아들이 1832년에 죽자 자기가 나폴레옹의 제위 상속권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1836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나파르티슴의 깃발을 들고 7월왕정 타도의 소란을 피웠다. 정부는 이 사건을 별로 중대시하지 않고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해외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샤를 루이는 이듬해 구내로 잠입해 있다가 1840년에 또 다시 볼로뉴에서 소란을 피웠다. 정분은 이번에는 그를 종신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그는 1846년 탈옥에 성공하여 영국으로 도망하였다. 1848년 2월에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로 다시 돌아와서 국회의원에 선출되고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 3년 후에는 쿠데타에 의해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3세라고 칭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하게 되거니와 여기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나폴레옹 제국의 이념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여 7월왕정 시대의 프랑스에서는 정치적, 이념적으로 최소한 네 줄기가 뚜렷한 형태로 각축하기 시작하였다. 극우의 정통주의, 극좌의 공화주의, 그 중간에 입헌군주주의로서의 오를레앙주의, 그리고 현대 프랑스에 특이한 보나파르티슴, 이 넷은 1789년에 시작하여 나폴레옹이 실각할 때까지 이미 뚜렷한 형태로 나타난 일이 있었고, 프랑스 국민이 실컷 경험한 바였다. 그런데 프랑스 국민은 이제 1815년 이래 대혁명의 경험을 한 바퀴 더 되풀이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복고 왕정의 정통주의에서 오를레앙 왕국의 입헌군주주의를 거쳐 1848년의 공화주의에서 다시 나폴레옹 3세의 보나파르티슴으로.
7월왕정도 프랑스 국민의 분열을 막고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 성공할 것 같지가 않았다. 7월왕정을 타도하려는 세력은 오른편에서도 왼편에서도 거세게 몰아쳤다. 그러나 왕국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좌익 즉 공화파에 있었다. 산업화에 따라 급속히 성장한 공업 노동자계급이 7월왕정에 불만을 품고 좌경하고 있었다. 프랑스 근대 공업이 비약적 발전을 시작한 것은 1826년의 영불통상협정이 체결된 이후부터이다. 선진 산업국가들 중에서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어느 나라보다도 중소기업이 가장 광범위하게 발전한 나라로서 1846년까지 대기업에 취업한 노동자 수가 아직 100만을 넘지 못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산업혁명은 그 나름대로 착실히 발전하였다. 특히 알자스와 노르망디 및 북부 지방의 면직 공업, 리옹 지방의 견직공업, 로아르 분지와 로렌 지방의 금속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병행하는 법이다. 대표적인 공업도시 루베와 생테티엔의 경우, 1831-1841년의 10년 사이에 인구가 각각 8,000에서 3만 4,000, 1만 6,000에서 5만 4,000으로 급증하였다.
그리고 산업혁명 초기에는 어디서나 일어나는 사회적, 도덕적 문제들이 프랑스에서도 예외 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1인당 국민소득도 노동자의 임금도 저축도 늘었으나 그것이 물가와 생활비 상승을 따르지 못하고, 따라서 노동자의 생활조건이 개선되지 못하여 그 불만이 커갔다. 더구나 급속히 팽창하는 공업 도시의 인구 조밀과 비위생적인 노동환경, 부녀자 노동, 장시간 노동을 비롯한 열악한 노동조건, 이러한 것에서 비롯된 높은 발병률과 사망률. 1840년도에 징집된 공업지대의 장정 1만 명 중 9,000명이 신체검사에 불합격했다는 놀라운 통계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
어쨌든 산업혁명 초기의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혁명은 공업노동자에게 큰 기대를 품게 했으나, 정치적 불안정은 오히려 물가고와 겹쳐서 실업의 위협마저 가중시키고 있었다. 파리와 기타 공업 도시에서는 일자리와 빵을 요구하는 노동자의 시위가 그칠 날이 없었다. 드디어 1831년 11월 리옹에서 노동문제로 말미암은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리옹의 견직물 공업은 그 수출액이 프랑스 수출 총액의 30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막중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동임금은 물가 상승을 따르지 못하였다. 노동자들이 노사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최저임금제를 책정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요구를 도지사의 행정 지도에 의하여 상공회의소가 수락하였다. 노동자의 단체교섭권과 노사 간의 평화적 타협 정신이 훌륭하게 발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리옹 지방의 제조업자 약 1,400명 중 104명이 타협에 응하지 않았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드디어는 이 지방 전체 노동자가 들고 일어나서 한때는 리옹 시의 행정마저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이 최악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무력의 무자비한 행사를 주저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일하면서 자유로이 살든가 아니면 싸우다가 죽자”라는 구호 밑에 결사적으로 항쟁하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결과는 지극히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폭동은 진압되었으나, 앞서 모처럼 합의에 도달했던 노사 협조와 타협이 수포로 돌아갔다. 정부가 단체교섭의 불법을 선언한 것이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어디서나 노동문제가 일어나지만 그것이 어떻게 처리되느냐는 그 나라의 산업화의 방향에는 물론이고 정치적 민주화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리옹 사건은 7월왕정이 노동자의 불우한 사정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정부냐 그렇지 않은 정부냐를 판가름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7월왕정이 노동자와 불우한 국민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보살피는 정부라면 노동자는 7월왕정에 기대를 걸고 열심히 일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공화파로 기울어져서 7월왕정 타도의 전위부대로 화할 것이다. 리옹의 폭동은 동기와 목적 면에서 전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정부의 무력 진압과 파리 기타 다른 도시에서 일어난 소규모의 노동쟁의에 대한 정부의 탄압 정책은 노동자로 하여금 7월왕정을 극도로 불신하게 하였다. 거기서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스스로 만든 강력한 노동조직에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어떤 정치조직도 불신하는 프랑스 특유의 생디칼리즘이라는 노동운동의 씨앗이 이때 배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는 1835년까지 공화파의 맹렬한 선전에 힘입은 많은 노동자가 공화파로 기울어져서 정부 전복을 목적하는 비밀결사에 가입하게 되었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본래 정치적이 아니었지만 정부의 잘못된 노동정책이 그들을 정치적으로 만들었고, 더구나 가장 과격한 공화주의자로 만들었다.
특히 당시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과격하게 만드는 데 크게 작용한 것은 마라(Armand Marrast)의 공화파 신문 <트리뷴(Tribune)>이었다. 7월혁명 후 프랑스의 신문들은 언론의 자유를 만끽하였다. 특히 <트리뷴>은 국왕과 정부를 마음대로 비난 야유하고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주장하고 반정부 폭동을 선동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서 정부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헤치는 자유에는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정신에서 1834년 4월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 법률이 의회에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리옹과 파리에서 거의 동시에 공화파 노동자의 폭동이 일어났다. 정부는 또 한 번 무자비한 총탄 세례로 진압하였다. 파리 폭동의 진압을 ‘트랑스노냉 가의 학살’이라고 부른다. 이 학살은 1848년 6월 폭동과 1871년 파리 코뮌의 선례가 되었다.
1831년 리옹 사건에서 평화적 방법에 의한 노사문제의 해결에 실패한 프랑스는 산업화가 진전하면 할수록 더욱더 무서운 사회적 대립과 충돌을 일으켯다. 이런 대립과 충돌이 평화적인 정치 발전에 극히 유해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7월왕정의 전도는 낙관할 수 없었다. 1835년에도 국왕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9월법(Loi Septembre)을 제정하여, 언론을 통제하고 국왕에 대한 모욕이나 정부 형태에 대한 비난 공격을 국가의 안정 보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이로써 7월 혁명 후 5년간 지나칠 정도로 자유를 누린 언론은 그 자유의 남용의 대가를 치르게 되고, 왕정 초기의 무질서가 차차 사라지고 사회는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정치적 안정을 찾으려면 앞으로 몇 해 더 걸렸다.
1836년 2월 브로글리 내각이 물러나고 젊은 티에르 내각이 들어섰으나 스페인의 자유주의 운동에 대한 원조 문제로 국왕과 대립하여 반 년 만에 무너졌다. 이어 몰레(Louis-Mathieu Mole) 내각이 1839년까지 존속하였으나 술트(Jean de Dieu Soult)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내각에 밀려나고, 다시 술트의 뒤를 티에르가 이었으나 이집트 문제로 영국에 대한 유화 정책을 주장하는 왕과 대립하여 제2차 티에르 내각도 1840년 10월 다시 무너졌다. 이제 제2차 티에르 내각을 이은 것이 제2차 술트 내각인데 그 실권자는 외무대신 기조였다. 기조는 1847년 9월에는 수상이 되지만 이듬해 2월 혁명으로 쫓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