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1801년부터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모름지기 지켜야 할 삶의 지침, 경계해야 할 사람들
높은 벼슬아치와 권문 세가들, 학문을 해야 하는 이유 등에 대해 100여통의 편지를 보냈다.
특히 두 아들에게 남긴 편지들은 이 시대에도 공감할 수 있는 "참된 인생’에 대한 교훈이 담겼다. 그 편지들 중에서 다산 산문집에 기록된 3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근(勤)과 검(儉)에 대해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는 논밭을 너희들에게 남겨 줄만한 벼슬을 못했으니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을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이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다른 한 글자는 검(儉)이다. 부지런함과 검소함의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이나 기름진 토지보다 나은 것이니 평생을 두고 필요한 곳에 쓴다 할지라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근(勤)을 항상 잊지 말아라.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아침에 할 일을 저녁 때 까지 미루지 말라.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 까지 끌지 말며, 비 오는 날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 까지 늦추어서는 안 된다. 집안식구들이 한사람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게 하고 한순간도 게으름이 없는 것을 부지런함이라 한다.
검(儉) 또한 항상 명심하여라. 한 벌의 옷을 만들 때 마다 이 옷을 먼 훗날 까지 입을 수 있는지 헤아려 보아라. 가는 베로 만들면 머지않아 헤지고 말 테니 질박한 천으로 만들어 입으라.
음식도 목숨을 이어가는 그것으로 족할 줄 알거라.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탐하면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정력을 소모할 뿐이다.
이는 당장의 어려운 생활조건을 극복하는 일시적인 방편이 아니라 여유 있는 가정일지라도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바르게 하는 항구적인 생활규범이다. 그러니 가슴 깊이 새겨두라. 게으름과 사치는 버려야 할 악덕이고 부지런함과 검소함은 익혀야 할 미덕이다.
2.정신력에 대해
정신력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정신력이 있어야 근면하고 민첩할 수 있으며, 지혜도 생기고 업적을 세울 수 있다.
진정으로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무릇 독서하는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나면 그 때 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한 가지 물건에 대해 이치를 캐고 내일 또 한 가지 물건에 대해 이치를 캐는 사람들도 이렇게 착수를 했다. 격(格)이라는 뜻은 가장 밑까지 완전히 다 알아낸다는 뜻이니 밑바닥 까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3.두 개의 저울에 대해
세상에는 큰 저울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저울이다. 다른 하나는 이익과 손해라는 저울이다. 이 두 개의 저울에서 네 가지 등급이 생겨난다.
최상의 것은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도 얻는 것이다.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를 볼 수도 있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른 것을 추구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다. 최 하급은 그른 것을 추구하다 해를 입는 것이다.
다산 초당과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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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요즘엔 초등학생들이 만화로 읽어,
가면서 생각했다 초당이 뭐 별거 있으려고. 유배와서 어쩔 수 없이 공부
하다가 심심하면 차 마시고, 동네 젊은 사람들 한 수 가르쳐 곡식자루 들고 오면
알듯 모를듯 한 일초식을 날려 더욱 궁금하게 만들다가 나중에 다시 찾아 오게끔 만들면서
혼자 속으로 헐헐 웃으며 기분 좋아 했을...
그러다가 저술도 하고, 가까이 있는 외갓집에(해남윤씨) 보관되어 있는 장서들을
빌려다 독파를 하고 한수 한수 늘어갈 즈음에 근처에 잘나간다는 백련사 혜장스님을
만나 유교와 불교의 불꽃튀는 진검승부가 가능했으리라! 혜장선사를 친구삼아 자웅도
겨루어보고, 그것도 지겨우면 암벽에다 글도 새기면서 나를 이곳으로 보낸 그들에게
이를 갈면서, 나를 총애하던 정조대왕의 죽음이 애통 해 잊을려고 손수 인공 연못을
만들어 흘러가는 물길을 바라보며 인생무상도 느꼈을 것이리라!
그래서 초라한 초가삼간에 댓돌 예뿌게 놓여있고, 아마도 자연목을 이용한 현판에 한줄
글귀가 그때의 마음과 인내를 보여 줄 것이다!
예전에 탐독을 하던 정약용 산문집이 책장 에서 먼지에 쌓여가고
"시냇가에 뚝배기 처럼 찌그러진 집이있어
북풍에 이엉 걷히고 서까래만 앙상해라"
- 직성촌의 가난한 농가를 그린시-
"가는 목은 따오기 모양으로 길쭉하고
병든 살갖은 주름져 닭살 같구나."
- 기민시(飢民詩) -
위에 두 글은 다산이 33세 되던 해 경기도 암행어사직을 수행하면서 본 백성들의 고통에
막막한 슬픔을 노래한 詩다.이미 이 때 부터 다산은 백성들의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고자
실학에 대한 의지가 생겨났을 것이다.
주문모 신부 밀입국 사건 때 한직으로 좌천시켜 그 예봉을 피해가게 만들었으며, 유난히
그를 총애 했던, 백성을 위해 사림파들의 권력에 당당히 맞서며 진정한 개혁의 의지를
지녔던 정조대왕이 갑자기 사망했다(1800)
그로서 다산은 형조참의로 모든 벼슬길이 끝이나게 된다. 이인화 소설 "영원한 제국"에서
정조의 명을 받들어 '금등신화'를 모필하던 사람이 죽자 형조참의 였던 정약용이 강원도에
나는 검은 흙을 태우면 독성이 나와 사람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의 연탄가스로
독살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리고 독살설이 힘을 얻고 있지만 정조대왕이 잡자기
죽었다. 아직도 조광조나 정조대왕 그의 개혁이 성공을 했더라면 나대고 있는 일본을
훨씬 앞질렀을 것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정조가 사망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하면서 다시 노론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형 정약종과 그의 매형 이승훈(동지사인 그의 부친을 따라 청의 사신
으로 가는길에 서양 신부에게 직접 세례를 받고 온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이 죽임을
당한다.(세례명. 베드로)
다산은 한 때 그의 서적들을 탐독 했으나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는 그 교리에 그만 두었으나
집안에 일대 회오리가 불며, 그 일도 겹쳐 전남 강진으로 억울한 귀양길에 올랐다.
이로서 그의 저서와 사상이 우리 민족의 유산으로 남게 된다. 그 당시 본인에게는 힘들었지
만 우리에겐 또하나의 주옥같은 유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실학사상이 유배지에서 완성된 것이다.
강진 외진 곳 이청의 집 단칸방에서 8여년을 보내다가 그곳 제자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이곳,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오르는 길에 다산의 목민심서가 나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지금의 권력 중심에 선 자들이 읽긴 했을까?' 하는 물음에
"장식용이지요! 사진 찍기 위해 디스플레이 해 놓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음 속으로 '아침에 일어나 목민심서 한줄만 읽고 서도
하루의 다짐이 될 듯 하것만...'
다산초당 / 추사의 글을 집자한 현판. 나는 알 수 없다 집자한 것인지
전체로 보아선 한필휘지로 한 것 같기도 , 그 몫은 내것이 아닌 것.
보정산방 /초가삼간에 붙어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24년 연하의 추사가 다산을 '보배롭게 여긴다'는 산방이라 쓴 글.
추사의 예술감각을 느껴본다.
그렇게 자주 올랐을 그 길이 아니라 오르기 좋게 새로 닦은 그 길을 숨을
몰아 쉬며 올랐다. 팔작지붕에 다섯칸 짜리 기와 지붕이라.
새로 지은 집이리니 당연지사 초옥이라면 이 삼년 마다 지붕을 새로 올려야
하고, 비가오면 물이나 새지 않을까 노심초사 해야하니 가슴에 심어져 있는 다산의 정신만
새기다 가라며 관리 하기 쉽게 지금의 모양으로 지어놓은 것.
"군자가 학문을 하는것은 절반은 수신(修身)을 위함이요, 절반은 목민(牧民) 즉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인데 요즘 지방장관이란 자들은 자기의 이익만 추구 하는데 바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해져 떠 돌다가 굶어죽는 시체가 구렁텅이에 가득
하것만 지방 장관된 자들은 좋은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다."
그가 유배지에서 쓴 글이다. 그래서 목민심서의 집필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일 독서하지 않는다면 내 저서가 쓸데없이 되고,
내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이 다만 사헌부의 탄핵문과
재판 기록만으로 나를 평가 할 것이다."
"폐족(廢族)으로서 글을 배우지 않고 예의가 없다면 어찌 하겠느냐?
모름지기 보통 사람 보다 백 배의 공력을 더해야 겨우 사람축에 들 것이다."
(2월 초이레)
"폐족 가운데는 이따금 기이한 인재들이 많은데,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다.
과거 공부에 얽메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너희들은 절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 하여 스스로 좌절하지 말라.
경전(經傳)에 힘과 마음을 써서 책 읽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를 간절히 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지난해 10월 초하룻날 입은 것이다.
그러니 어찌 견딜 수 있겠느냐"(2월 17일)
1802년, 두 아들에게 보내는 글, 다산 정약용 산문집
바위에 새겨진 두 글자 , 비로소 정을 붙일만한 것을 얻었다.
새겨 가면서 비로소 정을 붙일만한 이곳이라 느꼈던 것일까?
참기 어려웠을 것이라 여겨진다. 유배가 풀리기 얼마전에 새긴것이라 아마도 그리 느꼈을것...
초당 위 식수. 백련사 혜장선사로 부터 차를 알게 되었다.
그 후론 손수 이 물로 차를 닳여 마셨으리라.
마당 가운데는 넓직한 바위가 다조를 대신했다고 한다.
다산이 만들었다는 인공연못.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들어 음과 양의 조화를 두었고,
홈통으로 물을 끌어다 작은 폭포를 만들어 흐르게 했다.
자꾸만 심심해 하며 이궁리 저궁리 하던 다산이 생각나는게 아닌가! 불충하게도.
지금도 누가 풀어 놓았는지 색색의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생소한 것인지! 지들끼리만 가운데로 몰려 이방인을 거부 하는 듯 눈길을
돌린다.
백련사 혜장선사를 만나러 몇번을 오르내렸을 뒷 오솔길을 옆으로 지나
몇몇의 작은 돌계단을 오르자 새로운 바람과 함께 시야가 트인 넓은 하늘을 안고 서 있는 작은 누각하나.
이름하여 천일각 이라고 한다.
설마 '이제는 천일만 지나면 유배에서 풀려나겠지!'하는 바램?
다산이 하루의 시름을 달랬을 천일각.
천일각에서 바라다본 풍경. 멀리 구강포가 보인다.
유배지에서 시름을 달랬을 그 단절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나마 이것으로 달랬으리라!
다산이 유배가 풀리기 까지 10여년을 머물렀던 그곳을 나온다.
뒷편 오솔길을 다산이 걸어 백련사 혜장선사을 만나러 가던길을 팽개치고 편하게 앉아서
문화의 이기를 맘껏 누리며 백련사로 향한다.
백련사 이야기는 항상 그렇듯이 동백길 숲을 따라 걸어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옆구리를 치고
들어간 형상이라 사진으로만,
백련사 대웅보전 / 동국진체의 원교 이광사 글이다 .
꾸불꾸불 일정한 힘을 주어 저렇게 써 내리기란 참으로 어려웠으리라.
한치의 흐트러 짐도 없음
단청이 벗겨지는 순간을 포착, 장닭인지 봉황인지? 봉황이 되려하는 찰라!
문살
대웅보전에 그려진 코끼리.
대웅보전 처마 끝자락
대웅보전의 시야를 가로막아 놓은 만경루. 넓은 대웅보전 앞 마당을 둔 해남 미황사와 달리 비좁은 공간을 앞에서 가로막고 있는 만경루를 뚫고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백련사 중수비.
귀부는 고려때, 비문은 조선시대 것이다.
다섯개의 발가락을 가진 거북이 용머리를 하고 있다. 용이라고 하기엔 목이 너무 짧음
단정한 수염에 잘생긴 아가미가 힘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