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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증언자: 유복동(남)
생년월일: 1945. 6. 15(당시 나이 35세)
직 업: 공원(현재 공원)
조사일시: 1989. 1
개 요
유복동 씨는 5·18 당시 쌍촌동에서 살았다. 5월 23일 오후 3시 정도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계엄군이 광주시내로 진입해 오고 있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어 얼른 현관문을 닫는 순간 현관문 새시를 뚫고 날아온 총알이 아래턱을 뚫고 지나갔다. 한방에 있던 딸도 부상을 당했다.
6.25 때 행방불명되신 아버지
나는 3남매 중 맏이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 부모님은 비아나 장성 등에서 채소 노점상을 하고 계셨다.
내가 6.25를 겪은 것은 6살 때였다. 6.25에 대한 확실한 기억은 별로 없다. 다만 비행기에서 쏘는 따발총에 맞아 장독이 깨졌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6.25 때 집을 나가신 뒤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의 행방을 확인할 길이 없게 되자 일정 기간이 지난 뒤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께서 사망신고를 하셨다. 지금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잘 기억할 수 없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주위의 권유로 재가를 하게 되었다. 새아버지는 우체국에 다니고 계셨고 슬하에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었다. 어머니는 거기서 이복형제를 낳으셨다. 생활은 넉넉지 않았지만 나는 어머니와 함께 양동에서 살았다.
대성국민학교를 졸업한 뒤에 중학교에 갈 형편이 못 되었다. 그 후 어느 정도 세상물정에 눈을 뜨게 된 나는 정신적인 방황을 하게 되었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자주 집 밖에서 맴돌기도 하는 나를 크게 염려하신 부모님께서 결국 서울에서 세탁소를 운영하시는 외숙한테로 보내셨다.
외숙이 세탁소를 제주도로 옮김에 따라 나도 함께 갔다. 3년 후 외숙은 다시 서울로 가시고, 나는 제주도에 그대로 남았다. 제주도에 살면서 정도 들었고 학교에도 다니고 싶었다. 의지할 데라곤 없었지만 남의 세탁소에서 일하며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제주중학교, 제주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세탁소 일은 별로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에 가려니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학교에 갔다가 오후 5시에 돌아오면 쏟아지는 피로 때문에 그냥 쓰러져 자곤 했다.
숙식은 세탁소에서 해결했으며 대가는 학비에 충당되었다. 21살에 고등학교를 마친 뒤 뭍으로 나왔다. 그해 1967년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1969년도에 제대를 한 뒤 전남대학 교수가 운영하고 있는 '삼양화공'이라는 데서 종업원으로 조금 일했다. 그러다가 대인동에 개인적으로 세탁소를 차리고 몇 개월 운영했다. 그러나 잘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1970년도에는 친구의 소개로 양동에 있는 삼양타이어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근무하게 된 곳은 관리부였다. 거기에서는 완성된 생산품에 합격, 불합격 판정을 내리는 일을 주로 했다. 대부분 공장들이 그렇지만 소음과 공해가 심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고무를 만지는 일이었으므로 고무냄새를 맡아야만 했다. 기계는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되었기 때문에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3교대로 일했다.
생활의 리듬이 깨지기 십상이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그곳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까 힘든 줄 모르게 자연히 적응이 되었다.
1971년도에 결혼을 하여 1남 1녀를 두고 월 1만 천원씩을 받으면서 우리는 그런대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다.
10.26이 일어났을 때 나는 오전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일이 끝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철두철미한 경호를 받았을 텐데 부하에게 저격을 당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독재자의 종말이 라는 게 그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반나체의 학생을 트럭 뒤에 묶어 끌고 가다
1980년 봄에 들어와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는 중에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대학생들은 과연 어디서 정보를 입수해서 그렇게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주도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1980년 당시 나는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고 신현확이 누군지도 몰랐다. 대학생들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 학생들이 주장했던 말들이 맞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5월 19일까지 회사에서 근무했다. 연락이 있을 때까지는 출근하지 말라는 회사 측의 말을 들은 뒤 퇴근을 했다. 집에 와서 상황이 심상치 않을 것 같으니 식료품을 마련해둬야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시장에 가서 쌀과 부식류를 웬 만큼 준비해 놓았다. 당시 다른 집에서도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 외곽지역을 차단한다는 얘기가 나돌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회사 동료가 하고 있던 슈퍼마켓의 라면과 과자 등이 거의 다 팔려버렸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매일 아침밥을 먹고 집안을 정리한 다음 시내에 나가곤 했다. 차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시위차량을 타고 도청까지 나갔는데, 시위차도 타지 못할 때는 걸어서 갔으므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2일까지 계속해 나갔으므로 목격한 것에 대해서는 정확한 날짜를 가늠할 수 없다.
아마 21일이었을 것이다. 오후 3시쯤이나 되었을까? 광주공원 앞 공중전화 박스 부근 식당 앞을 지나는데, 식당 할머니 한 분이 새파랗게 질려 공수부대가 학생 두 명을 끌고 갔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남학생과 여학생을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긴 채 군용 트럭 뒤 밧줄에다 손을 묶고 질질 끌고 갔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 광경을 식당 유리문 너머로 떨면서 지켜보았다고 하셨다.
21일 저녁에는 우리 집 앞에서 시민, 학생들이 게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쌍촌동 신학대학 바로 옆에서 살고 있었다. 도로에는 전날 밤에 계엄군이 파놓은 고랑이 있었다. 시위대가 더 이상 외곽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고랑을 중심으로 송정리 쪽에는 군인들이 서 있었고, 반대쪽에는 시민과 학생들이 서 있었다. 그날 오전 11시경부터 그렇게 대치상태가 계속됐다는 말을 들었다. 고랑은 군인들이 팠지만 군인들이 시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시민, 학생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지역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수 는 3백-4백 명 정도 되었을 것이다. 군인들은 중대단위로 해서 교대로 식사를 하면서 교체되는 것 같았다. 군인들은 대부분 일병, 이병 등 신병들로 보였다. 우리들은 그들과 말을 주고 받기도 했다. 왜 광주까지 오게 되었냐고 어떤 군인에게 내가 묻자, 광주에 폭동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폭도들을 토벌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유언을 써놓고 손톱과 발톱까지 깎아놓고 왔다고 했다.
광주시민은 절대 폭도가 아니라고 했더니 군인들도 어느 정도 수긍을 하는 것 같았다. 어떤 군인은 집이 유동인데 지척에다 집을 두고도 못 가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밤이 깊도록 대치하고 있던 시민, 학생들이 해산하지 않자 군인들은 설득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군인이 시민에게 총을 쏘는 일은 없을 거라며 광주시민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라는 것이었다. 군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약속조로 말하자 시민들은 하나 둘 거기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군인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언제 밀고 내려올지 모르니까 계속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 힘만으로는 힘드니까 그냥 옆에 있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집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내와 나도 밤 11시에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학생들의 말이 옳았다는 걸 곧 알게 되었다. 그날 밤에 계엄군들이 광주시내로 들어와 한번 휘젓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계엄군이 난사한 총에 맞다
22일에는 집에 있기로 했다. 총에 맞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문 등이 나돌았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였다. 오후 3시 정도에 낮잠을 한참 자고 있는데 국민학교 3학년인 딸이 깨웠다. 밖에 신기한 것이 지나가는데 그게 뭐냐는 것이었다. 그 시각에 군인들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광주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나는 딸과 함께 2층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우리 집에서 보면 쌍촌동 동사무소 앞 사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군인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여덟 대였다. 나는 그것을 보다가 섬뜩한 생각이 들어서 얼른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그와 동시에 아래턱이 얼얼함을 느꼈다. 총알이 현관 문 새시를 비스듬히 뚫고 들어와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턱을 뚫고 입으로 나온 것이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차려보니까 이와 살점이 피와 함께 마룻 바닥에 널려 있었다. 아이들은 울고 난리였다. 그때 내 옆에 있던 딸도 파편에 맞아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나는 쏟아지는 피를 수건으로 막으며 일단 밖으로 나왔다. 탱크는 이미 지나간 뒤였고 군인들은 정지해 있으면서 밖을 내다보지 말라고, 내다보면 다 죽여버리겠다 하며 여기저기 총을 난사하면서 악을 썼다.
그러나 나는 흐르는 피를 주체할 수가 없어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온 것이다. 파란 잠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는 도중 "쏴버려" 하는 소리들이 군인들 사이에서 들렸다. 나는 겁이 났다. 그래서 공사를 하고 있던 유성목욕탕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나를 뒤쫓아 나오려던 아내는 코 앞에다 총을 쏘면서 나오지 말라는 군인들 때문에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숨어 있다가 전날 21일에 집 앞에서 군인들과 시민,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을 때 만나 얘기했던 군인을 만났다.
그 군인은 병원에 데려다주겠다며 나를 군용 트럭에 실어주었다. 그때 거기에 있던 군인들은 언뜻 보기엔 중대병력 이상인 것 같았다. 이번 청문회를 통해 알 게 된 바로는 그들은 20사단 소속 군인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트럭에는 나외에도 부상당한 여자 두 명이 더 있었다. 그런데 트럭은 통합병원으로 가지 않고 기갑학교로 갔다.
기갑학교에는 나처럼 잡혀온 부상자가 상당히 많았다. 복도를 사이에 둔 양옆 사무실은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응급치료를 받지도 못했다. 다만 가제 헝겊 몇 장을 주면서 피를 막으라고 했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분류했다. 부상 정도에 따라서, 그리고 시위하다가 부상당한 사람과 우연히 다친 사람으로 선별하는지 어쩌는지 당시엔 몰랐는데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말 한마디도 못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선별을 할 때 단순피해자로 분류되어 빨리 통합 병원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잠옷바람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화염방사기에 그을린 사람들
나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아내는 파편에 맞은 딸을 업고 이리저리 헤맸다고 한다. 그러다가 기갑학교까지 갔는데, 거기서 좋은 군인을 만나서 딸아이의 응급치료를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딸만 들여보내고 아내는 들어갈 수 없었다. 아내는 기갑학교에 딸을 들여보내면서 말했다고 한다.
"혹시 그곳에 아빠가 계실지도 모르니까 물어보기도 하고 잘 살펴봐." 나는 며칠 뒤에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때 차를 타고 가게 되었는데, 나는 보지 못했지만 차를 타고 가는 나를 딸아이가 보았다고 한다. 딸의 말을 듣고 나중에야 내가 통합병원에 있다는 걸 아내는 알게 되었다. 뒷날 아내의 말에 의하면 내가 들어가고 난 뒤 3일 정도를 헤매다가 어떤 군인을 만나 상무대로 가게 되었다 한다. 안내해 주겠다며 따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어떤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별을 단 장군들 10여 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들과 함께 머리에 부상을 입었는지 붕대를 감은 군인 한 명이 들어왔는데 그가 외쳤다. 손수레에다 시체를 싣고 다니면서 시민들의 시위참여를 선동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아내처럼 30대로 보였다는 것이다. 또 "당신이 아니었냐?"며 대검을 들이대며 아내에게 엄포를 놓았단다. 그러면서 "저런 여자를 그냥 놔두냐?"며 난리였다. 그러자 몰려들었던 군인들이 아내를 빙 둘러 에워쌌다. 그렇게 숨막히는 긴박 한 상황에서 아내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썼다.
"집에 갓난 아이가 혼자 있는데 그 아이에게 무슨 변이 생기면 당신들 책임질 거예요?"
밖에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혼자 집에 남겨두고 온 다섯 살짜리 아들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아내가 그렇게 말하자 평범한 가정주부라는 걸 믿었는지 그냥 보내주었다고 했다. 아내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끔찍하다고 한다. 거기서 살아나온 것은 천행이었다고 남들도 말하고 있다.
통합병원에서 나는 수술을 받았다. 거의 날마다 회진을 해주는 등 대부분 치료를 잘 해주는 편이었다. 딸도 곧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어 와서 치료를 받았다. 거기서 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웬지 나는 딸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될 수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무슨 기록이라도 남아 앞으로 그애의 장래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있으면 어쩌나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내 심정을 글로 써서 그들에게 표현했다.
"학교에 가야 하니까 어서 빨리 내보내주시오."
글로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이가 모두 빠져버렸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호스를 식도로 연결하고 있어야만 했다.
딸아이는 그곳에서 보름만에 퇴원했다. 얼굴에 난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상태였다. 통합병원에 간 뒤 2주 정도 지나자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나왔다. 주로 다치게 된 경위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들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총알 자국이 나 있는 우리 집 현관문을 촬영해 가기도 했다. 나는 통합병원에 있으면서 부상자들의 모습을 통해 공수부대의 잔학행위를 피부로 느꼈다. 광주시내에서 나돌았던 유언비어들도 얼마만큼은 사실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 것이다. 먼저 M16에 맞아 젖가슴을 잃어버린 경우를 세 사람 목격했다. 한 사람은 전남대학교 2학년 여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전일빌딩에서 주로 시민군의 밥을 해주고 있었는데 등 뒤에 M16을 맞은 것이었다.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아마 27일 새벽에 당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쪽 젖가슴이 흔적 없이 날아가버렸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 학생은 구호를 외쳐댔다. 똑같은 경우를 전남방직에 다니던 한 여공도 당했다. 또 6살짜리 여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콩밭에서 김을 매는 할머니 곁에서 고개숙이고 놀고 있던 아이가 비행기에서 쏜 총을 등에 맞은 것이다.
또 화염방사기에 그을린 사람 둘을 보았다. 그들은 온몸이 온통 까맣게 그을린 채 퉁퉁 부어 있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대략 30대로 보였다.
특히 그들의 배는 대검에 의해 갈라져 있었는데 의사들이 대충 얽어매놓은 것 같았다. 만지기만 해도 펑 하고 터져버릴 정도로 부어 있었기 때문에 반듯이 누워 있어야만 했다.
이번 청문회에서는 화염방사기를 결코 사용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그곳에서 퇴원했었는데 왜 화염방사기에 당했던 사람이라고 선뜻 나타나 주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또 한 농고생은 머리에 총을 맞았는데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총에 맞았던 5월 22일, 군인들이 광주시내로 진주해 오던 그 시각에 나처럼 엉魷하게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노부부가 연탄장사를 하며 애써 키운 자식을 밖으로 못 나가게 말려서 집에다 가둬 두었는데, 그 아들은 진주해 오는 계엄군을 구경하기 위해 옥상에 올라갔다가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또 어떤 모자는 화정동 자택 방안에 있다가 총에 맞았다고 했다. 방안에서 어머니가 아이를 업고 있었는데 총알이 날아들어와 그들을 덮친 것이다. 집 기둥 나무에 총알 자국이 숭숭 뚫려 있다고 했다.
통합병원에 1개월 있다가 퇴원한 후 조선대 의대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나를 포함한 일곱 명의 환자가 함께 있었던 병실에는 일반환자도 있었다. 거기서는 주로 치과계통의 치료를 받았다. 딸아이도 여름방학을 하자 곧 그곳으로 와서 치료를 받았다. 파편이 눈동자를 피해 지나가긴 했지만 점점 시력이 약화되었다. 그래서 안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곳에서 6개월간 입원해 있는 동안 우리 네 식구는 아예 그곳에서 숙식을 했다. 말이 쉽지 병원에서 6개월 동안 생활하기란 너무나 지루하고도 힘들었다. 1980년 그해 여름부터 가을, 겨울, 다음해 봄까지 이렇게 4계절을 병원에서 꼬박 생활한 것이다. 그동안 집을 비워뒀더니 도둑이 들어 한바탕 휩쓸어 가기도 했다. 사글세로 전전하다가 모처럼 전세로 얻은 2층 독채였었다. 치료비는 무료였다. 시위를 하다가 다친 사람들보다는 더 대우를 받은 편이다.
학생들이거나 시위로 인해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치료 도중에 강제퇴원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뒷배경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거의 완쾌될 때까지 오래 입원해 있었다. 어떤 여자는 귓불을 약간 다쳤는데도 한두 달 가량 입원해 있었다.
조선대병원에 입원한 지 3개월 만에 내가 다니던 삼양타이어에서 사람이 찾아와 나에게 사표를 강요했다. 아내가 찾아다니면서 사정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위로는 못 할망정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에게 당장 사표를 쓰라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사표를 써야 했다.
조선대병원에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관을 가득 싣은 트럭이 3일 동안 밤마다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병원에서 죽은 시체를 담을 관이 아니었나 생각되었다. 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조선대 뒷산에서 시체를 화장시킨다고도 했다. 사람 머리통이 터지는 소리가 텅텅 들린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들은 뒤 나도 그와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냄새도 좀 이상한 것 같았다.
다시 직장으로
나는 1981년 봄에 조대병원에서 퇴원을 하여 집에서 좀 쉬다가 처남의 일을 거들었다. 처남은 양동시장에서 미곡상회를 하고 있었다. 방도 서국민학교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러던 중 '삼양타이어' 사장 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다시 삼양 타이어에서 일해볼 의향이 없느냐고 그가 물었다. 1981년 4월 3일자로 삼양타이어에 재입사를 하게 되어 관리부에서 일하고 있다.
입사한 지 19년이 되었지만 아직 평사원이다. 그것도 아직 3교대로 일하고 있다. 나와 함께 입사했던 동료들은 과장, 부장으로 진급했고, 나보다 훨씬 늦게 들어온 후배들도 진급을 하여 내 위에 있다. 후배를 교육시켜 상사로 모시게 된 형편인 것이다. 학력 등이 관계되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5·18 때 당했던 부상이 큰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상처는 아물었고 이도 모두 다시 해 박았지만 오른 쪽 턱뼈가 나간 상태이고 치아도 잘 맞지 않기 때문에 발음이 정확치가 않은 편이다. 긴장을 하면 더욱 힘들다. 대화 도중에 상대방이 되물어 보면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다 보니까 남 앞에 나서기도 꺼려진다. 또 남과 대화를 하는 데 자신이 없다. 또 날씨가 추우면 턱에 감각이 없어진다. 그래서 음식을 먹다가 흘러도 모를 정도이다. 회사에서 일하는 데는 별지장이 없지만 물질적인 것 못지 않게 정신적인 고통이 크다.
1988년 1월에 이곳 주월2동으로 이사왔다. 은행 융자 8백만 원을 얻어 내 집을 마련했다. 5·18 당시 국민학교 3학년이었던 딸애도 지금은 어느새 대학 갈 나이가 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명단에 따라 자동적으로 부상자로서 신고가 되었다. 추가 신고 기간에 딸애를 올리기 위해 갔더니 병원진단서를 끊어오라고 했다. 조선대 병원에 가보니까 진단서가 있기는 했지만 입원기간이 훨씬 짧게 기록돼 있었다.
부상자회가 만들어진 초창기에 모임에 참석하라고 연락이 왔었지만 나가지 못했다. 회사에서도 나가지 말라고 자주 암시를 주곤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가보니 둘로 나뉘어져 혼란스러웠다.
작년 7월에 생활안정자금을 받았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처음엔 모르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시청에 볼일이 있어서 갔는데 통합병원에서 알게 되었던 부상자가 그런 것이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앞으로 보상이 된다고 할 때는 억울한 사람 없이 골고루 되었으면 한다. 특히 가장이면서도 노동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큰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상규명이 된 뒤에 보상을 해야 떳떳할 것이다. 하지만 우선 밥술이나 먹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할 것이다. 당장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보상을 해주고 난 뒤에 진상규명은 차차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청문회에서 노력들은 하고 있지만 현상황에서 확실한 진상규명이 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카드는 무료라 해도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어서 전두환, 최규하 두 전직대통령이 국민 앞에 나와서 역사와 민족 앞에 5·18에 대해서 사실대로 밝히기를 바란다.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