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남(2004). 『교육학론』. 학지사.
제8장 교육적 가치의 논리: 그 혼돈과 질서 중 pp. 21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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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갈등이 항상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는 곳이 교육이다. 교육은,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교육사상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가치추구 과정이다. ‘교육’은 최고선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의 정신적 삶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선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가치갈등을 겪는다. 지식을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하느냐, 아니면 어떤 실천적 목적을 위해서 추구해야 하느냐와 같은 질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선’은 우리 인간이 실현해야 할 목표이고, 교육이 궁극적으로 이르러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각주 6: 최고선은 가치의 완전한 모습을 그려놓은 것일 뿐, 이 단어가 담고 있는 가치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도, 정리된 가치체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에서 최고선에 함의된 가치를 선택하고 이를 정교하게 다듬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으면서도 그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최고선’은 확실히 교육적 관념어에 해당되는 대표적 용어다. 말하자면, 교육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교육목적 또는 교육적 가치를 표현하는 어군을 모두 포용하는 단어인 셈이다.]
고대 그리스는 이론적 삶의 가치와 실천적 삶의 가치가 갈등을 빚은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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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선’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 모습이다. 플라톤은 이론적인 삶을 이소크라테스는 실천적 삶을 주창한 대표자들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교육이 이론적 삶을 추구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힘겨루기에서 플라톤학파로부터 밀려난 소피스트들은 이론적 삶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론적 삶과 실천적 삶은 교육이 추구하고자 하는 상반된 두 가치였다. 비록 고대 그리스의 교육이 공식적으로는 이론적 삶의 가치를 추구하였다고 하지만, 그 뒤안길에서는 실천적 삶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을 로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로마의 교육에서는 실천적 삶의 가치가 이론적 삶의 가치 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Cicero)는 이렇게 말하였다. ‘교육은 국가를 위해서 유익한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교육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 이 질문을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이어져 왔다. 이 논의는 교육에서 발생하는 가치갈등의 대표적 범례가 된다. 대학교육의 목적에 관한 논의도 매한가지다. 21세기에 가장 첨예한 가치갈등문제는 대학의 교육목적에 관한 상이한 주장이다. 대학은 원래 보편타당한 진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 말하자면, 지식탐구 그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라기보다 지식을 탐구하는 그 자체가 가치있기 때문에 지식을 탐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대학의 교육목적은 이런 가치만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교육을 담당하는 각국 정부 각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사회 경제적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대학은 시대에 뒤졌다. 그런 대학은 마치 중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대학은 전통적 학문 사회가 추구한 지식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가 각축을 벌이는 경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지식을 창출하고 이를 전수하는 데 힘써야 한다. 실용적 지식의 필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 또한 높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탐구를 등한히 한다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적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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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에서는 사회 경제적 발전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대학이 가르쳐야 한다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순수한 지적 탐구가 대학 교육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는 직업을 위한 교육을, 후자는 인간이 되는 교육을 요구한다. 전통적으로 갈등을 빚어 온 교육목적의 갈등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훈련과 교육, 직업교육과 일반교육, 기능을 연마하는 교육과 ‘영혼을 보살피는 교육’ 사이의 갈등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한 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지식은 실천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뉴만은 달리 말하였다. 실용적인 지식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허버트 스펜서는 물었다. 어떤 지식이 가장 가치있는가? 그가 의중에 둔 지식의 유형은 실용적 지식이었다. 교육의 역사에서 이와 같은 질문이 계속되어 왔다.
학교가 공리주의에 아첨하는 경향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각국 정부는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조건으로 교육기관에 투자하는 경향이다. 건전한 경제 발전은 사회적 가치를 성취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지식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추구할 것이냐, 아니면 지식을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 추구할 것이냐는 학교가 맞이하는 선택 상황이다. 하지만 선택 상황이 없다면, 갈등은 있을 수 없다. 갈등은 단일 가치를 내세우는 전체주의 사회나 독재체제 아래의 정치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갈등은 다가치를 인정하는 민주사회에서만 발생한다. 가치갈등은 그것이 교육목적에 관련된 것이든 개인의 선택에 관한 것이든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상황이 마련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치가 갈등상태에 놓여있으려면 동치 관계에 있는 가치들이 다수로 존재해야 한다.
사회학적 내지 역사적 관점에서 가치의 존재 양상을 살펴보자. 우리는 어느 사회, 어느 역사의 한 시점에는 단일가치가, 그리고 이와는 다른 사회와 역사를 살피면 거기에는 다양한 가치가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일가치 사회는 다가치 사회에 비하여, 그 사회의 가치체계가 소수의 가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다. 여기에 비하여 다가치사회는 가치체계가 서로 상충 배리되는 실로 수많은 가치들로 구성된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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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가치 사회는 단일가치사회에 비하여 보다 개방적이며 민주적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개방사회는 폐쇄사회와 달리 가치가 다양한 사회이며, 다양한 가치들이 서로 경쟁하고 각축을 벌이는 사회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현대사회가 그렇듯이, 절대적으로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가치가 없다. 오늘날 학교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따라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특별한 제도다. 학교는 다양한 가치가 경쟁을 벌이고, 이 과정 속에서 갈등을 빚는 독특한 곳이다. 학교는 개방사회이며, 또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가 다양하다’라는 말은 가치의 수가 많다는 것을 항상 뜻하지는 않는다. 물론 가치의 다양성은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있을 경우에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가치의 다양성이 가치의 수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가 이를테면, 지식을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것을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학교교육에 대한 가치 주장이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두 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런 가치 주장이 본질적으로 학교교육의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질에 해당되는 가치를 논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질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질의 다양성 없이 질에 해당되는 가치를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