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의 이복 여동생으로 1912년 범서읍 입암리서 태어나 부잣집 딸로 대범하고 리더십·조직력 강해 독립운동에 앞장 공산주의자였던 이재유·김삼룡·박헌영과 부부로 지냈지만 일제·남한·북한의 손에 남편들 잃게된 시대적 비운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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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이순금은 서대문형무소를 자주 드나들면서 항일 운동을 열심히 펼쳤지만 해방 후 공산주의자가 되어 월북하는 바람에 지금은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옛 서대문 형무소는 지금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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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언양초등학교는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언양초등학교가 다른 초등학교에 비해 훌륭한 동문을 많이 배출한 것을 자랑하면서 이들의 높은 뜻을 기렸다.
그런데 이날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 중 이 학교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누구보다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벌였던 이순금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양초등학교 1백년사>를 보면 이순금은 언양초등학교 14회 출신으로 1929년 3월 졸업했다. 이순금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해방 후에는 남로당의 브레인으로 활동했던 이관술의 이복 동생이다.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자로 항일운동을 펼쳤던 이재유, 김삼룡, 박헌영은 그녀의 사상적 동지였던 동시에 부부관계를 가졌던 남자들이었다. 이중 특히 박헌영은 그녀에게 애증(愛憎)을 함께 남긴 남자였다.
이순금은 1912년 울주군 범서읍 입암에서 아버지 이종락과 어머니 김남이 사이에 태어났다. 이종락은 결혼을 3번 했는데 첫 번째 부인에서 이관술이 태어났고 두 번째 부인은 자식 둘을 두었다. 이순금은 세 번째 부인 김남이에서 태어난 외동 딸이었다.
김남이는 이종락에게 시집오기 전 범서읍 ‘새고개’에서 술장사를 했다. 이때 이종락이 이 술집을 자주 드나들다가 김남이와 눈이 맞아 낳은 딸이 이순금이다. ‘새고개’는 삼호에서 범서로 가다보면 왼편에 백련암이 있는데 이곳에 있었다. 이 길은 원래 산길이었는데 새 길이 생겼다고 해 ‘새고개’라 불렀다.
당시 이 고개를 중심으로 10여 가구가 살았는데 김씨는 이곳에 주점을 차려 놓고 울산과 언양을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술을 팔아 큰 돈을 벌었다.
김씨는 이후 언양으로 자리를 옮겨 식당을 차렸다. 그녀가 장사가 잘되었던 범서를 떠나 언양으로 간 것은 순금이 언양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김씨가 언양에서 식당을 차렸던 장소는 현 언양초등학교에서 남천으로 200m 정도 내려오면 오른편에 진주약국이 있는 자리다.
이곳에서 밥장사로 역시 많은 돈을 벌었던 그녀가 서울로 간 것은 순금이 언양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유학을 갔던 1929년이었다. 순금이 서울에서 처음 입학했던 학교는 실천사립학교였다. 2학년까지 이 학교를 다녔던 순금은 그동안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오빠 이관술이 동덕여고 교사로 왔기 때문에 동덕여고로 전학했다.
부자집 딸로 천성이 대범하면서도 동정심이 많았던 순금은 리더십과 조직력 그리고 책임감이 강해 급우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학생시절 ‘독서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펴다가 여러번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던 그녀가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던 때가 동덕을 졸업하면서다. 고교 졸업 후 대학 대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그녀가 처음으로 구속된 것은 ‘반제동맹사건’ 때였다. ‘반제동맹 사건’은 일본의 만주 진출을 반대했던 국내 인사들이 대거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구속된 사건을 말한다.
이순금도 이때 검찰에 송치되어 조사과정에서 많은 고문을 받았다. 이후 영등포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펼치다가 다시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이재유의 노동운동 얘기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던 그녀가 출소 후 이재유를 만났던 것이 1933년 9월이었다.
이재유를 만나자마자 그의 다정하고도 재치있는 말솜씨에 푹 빠졌고 특히 이재유가 공장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이들을 돕기 위해 일하고 있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이재유는 노동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더욱이 결핵까지 걸려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순금이 이재유를 만났을 때는 익선동 기와집에서 살았다. 그녀는 이 집을 단숨에 팔아 이재유를 경제적으로 도왔다. 당시 서울의 변두리 집이 500~600원 정도였는데 이 때 판 집값이 2000원이었다고 하니 꽤 좋은 집이었던 것 같다.
이 무렵 이재유는 다른 여자들과도 동거했다. 그는 나중에 경찰에 잡혀 온 후 “내가 노동운동을 펴면서 많은 여성과 동거를 한 것은 관헌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해 인륜보다 사상을 앞세우는 공산주의자들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순금이 김삼룡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공산주의 재건을 위해 함께 일하면서다. 일제 말이 되면 일제가 공산주의자들을 혹독하게 탄압해 공산주의자들이 대부분 구속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 무렵 공산주의 재건을 위해 충주에 숨어 살았던 김삼룡을 부른 것이 순금의 오빠 이관술이었다.
이순금과 김삼룡은 어떤 과정을 통해 부부 관계로까지 발전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부부관계 역시 애정보다는 조직 강화를 위해서였다는 것은 둘이 동거생활을 할 때도 김삼룡이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이 있었다는데서 알 수 있다.
김삼룡 역시 체포 당시 7명의 여성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도 경찰 진술서에서 여성이 많았던 이유가 경찰의 표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1942년부터 해방까지는 박헌영이 주로 광주에 숨어 있을 때로 이 무렵 순금은 광주에 머물면서 주로 박헌영의 지시를 지하조직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에 앞서 1938년에도 그녀는 항일운동을 펼치다가 서대문에서 옥살이를 했다.
이전에도 이순금은 박헌영을 도운 일이 있다. 박헌영이 1939년 대전형무소를 출옥한 후 청주에서 잠시 어렵게 살았는데 이때 그의 생활을 돌보아 준 사람이 이순금이었다.
박헌영 역시 이 무렵 순금과 동거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시중을 들었던 정순년 사이에 아들 한명을 낳았다. 그런데 이 아이는 파란만장한 유아기를 거쳐 현재 평택에 있는 만기사 주지가 되었다. 법명이 원경인 그는 얼마 전 북한으로 들어가 아버지 박헌영의 활동을 찾아내어 최근 6권이나 되는 박헌영 전집을 발간했다.
해방 당시 박헌영 아래에는 순금 외에도 많은 심복들이 있었지만 순금은 박헌영의 최 측근으로 동지애를 넘어 부부 사이가 되었다. 이 무렵 공산주의자들은 순금과 박헌영을 부부 사이로 보고 공식석상에 나타나면 부부 예우를 했다. 물론 박헌영 역시 3·1운동 당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그의 여비서 주세죽과 정식 결혼을 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처럼 항일 운동을 열심히 펼쳤던 이들에게 해방은 큰 기대를 주었고 실제로 한동안 그들의 세상이 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판사 사건 후 미군정이 공산당을 불법 정치 세력으로 보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면서부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남한에서 부부로 활동했던 순금과 박헌영이 함께 월북한 것이 이 무렵으로 판단된다.
박헌영은 월북 후 북한에서 부수상을 지내는 등 고위직을 맡았으나 차츰 김일성의 정치적 라이벌이 되면서 남로당 조직에 대한 와해 공작으로 2년이 넘는 동안 연금 상태로 있다가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 때 박헌영에게 내린 죄목이 남한에서 미군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었고 이 재판에 순금이 박헌영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 그를 죽음으로 내 몰았다. 한 때 목숨을 건 동지였고 또 살을 섞었던 부부 사이었던 이들에게 이런 운명이 주어졌다는 자체가 비극이다.
순금이 겪은 3명의 공산주의자 중 이재유가 노동운동을 통해 그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면 김삼룡은 목숨을 걸고 공산주의 활동을 함께한 동지였다. 이에 반해 박헌영은 죽음의 사선을 넘어 북한까지 같이 간 정치적 지도자였던 동시에 한때는 부부였다. 그런데 이들 3명 중 한 명은 일제의 손에, 다른 한명은 남한 정부에 의해, 그리고 또 다른 한명은 북한 정부에 의해 죽었다.
이재유는 해방이 되기 전 일제의 탄압 속에 공주교도소에서 병사했고 김삼룡은 박헌영의 지령 아래 남로당 최고 책임자로 활약하다가 1950년 3월 남한경찰에 체포되어 6·25가 일어났을 때 총살 당했다. 그리고 박헌영은 북한에서 사형을 당했는데 이들의 죽음을 모두 지켜 보았던 순금의 삶이 비극적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사상의 늪에서 딸이 이처럼 헤매일 때 가장 가슴 아팠던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 김남이였다. 김씨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딸이 사회주의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이 돈을 외동딸을 위해 제대로 한번 써보지 못했다. 대신 서울에서 사는 동안 딸의 면회를 위해 서대문 형무소를 자주 드나들어야 했다. 다행히 김씨는 서울에서 타계했지만 입암에 묻히어 현재 이씨 집안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순금이 태어났던 해가 1912년으로 일제 합병 때와 가깝다고 생각하면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역사와 민족을 위해 져야 할 짐이 무거웠는지도 모른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의 혼란기를 여성의 몸으로 혼자 감당해야 했던 순금은 그 동안 세상살이의 하중이 너무 무거웠던 탓일까. 우리들은 그녀를 김삼룡의 처였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입암에 있는 그녀의 호적에는 아직 노처녀로 남아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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