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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한국교회의 부흥사․분열사․선교사
정인균 전도사 (상신교회 중등부 교육지도)
Ⅰ. 한국교회의 부흥의 역사
오늘의 부흥을 가져온 원인을 뿌리에서 찾는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한국 교회의 오늘은 신앙의 선배들의 특별한 믿음에 기초하는데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서, 자신들이 번역·출판까지 하였다.
둘째, 저들은 진리를 발견하였을 때, 이것을 묻어 두는 어리석은 종이 아니라 장사하여 이(利)를 남긴 종과 같이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셋째, 의를 위해 죽음도 각오한 신앙이 부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은 기독교를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신교보다 약 100년이나 앞서 전래된 천주교는 세 번의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고, 이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이런 사지(死地)에 복음서를 반입하고 전파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의 신앙인들은 이 일을 해 냈던 것이다.
1. 대부흥 운동(1907년)
원산에는 미국 남감리교회, 미국 침례교회, 캐나다 장로교회 등에 속한 선교사들의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1903년부터 기도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모임은 정기 사경회(Annual Bible Conference)로 발전하였는데, 1903년에는 미국 남감리회 소속 하디(Robert Alexa Hardie, 1865-1949)가 인도하면서, 자기가 선교사업에 실패한 것은 믿음이 약하고 성령 강림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회개한다. 자기의 무력을 깨닫고 통회 자복의 기도를 드린 것이 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 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사모한다. 블레오 선교사가 고전 12:27의 말씀을 읽자 불이 붙었고 길선주 장로의 간증을 통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인격적, 소박한, 공동체적 신앙으로 바뀌어 졌다.
1907년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동기는 1907년 정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평안남도 남자도 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짐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사경회는 정월 6일부터 시작되어 열흘 동안 계속되었다. 주로 성경공부를 하였으나 저녁에는 전도집회로 모였다. 그런데 이 부흥의 불길이 붙게 된 동기 가운데 하나는 그 교회가 새벽기도회로 이 사경회를 준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전 해 가을부터 시작된 새벽기도회는 길선주 장로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새벽기도회야말로 세계 어느 교회도 갖지 않는 한국 교회 특유의 기도회로써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2. 대부흥운동의 결과
대부흥운동은 향후 한국 교회의 신학과 교회 형성에 지대한 결과를 남겨놓았다.
첫째로 이 운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게 하였으며 기독교 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여러 가지 동기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참 기독교 진리를 터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참된 회개와 성신의 감동,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결단하는 삶, 즉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됨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었다.
둘째로 한국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었다. 어느 부흥운동이든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그러하듯, 1907년 전국 교회에 부흥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 필연적으로 나타난 결과 중 하나는 신자들의 전도에 힘입은 교회의 부흥이었다. 장로교회는 교인이 1906년 54,987명에서 1907년에는 73,844명으로 증가하여 34%가 증가했고, 감리교회는 1906년 18,107명의 교인이 1907년에는 39,316명으로 무려 118%의 증가를 나타냈다.
셋째로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부흥운동은 길선주 장로가 주도한 ‘새벽기도회’라는 한국교회의 독특한 기도회의 형태로 정착되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기도하는 통성기도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부흥회 기간중에 철야기도가 시작되었다. 저녁집회가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므로 멀리서 온 교인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교히에 남아 철야하면서 기도하고 다음 날 새벽기도회에 참석함으로써 철야기도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넷째로 에큐메니컬 정신의 구현이었다. 즉 대부흥운동을 통해서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형제 의식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의 교인들을 자기들과 동등한 형제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세가 되었다. 이 부흥운동의 에큐메니칼 정신은 교파를 초월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이 사경회는 장․감 연합으로 모이게 되었고, 두 교회는 서로 강단을 교류하였다. 교파간의 간격과 갈등을 해소하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예양협정 : 장로교와 감리교는 지역분할을 한 후 그 지역내의 교인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선교지 분할과 교인들의 교환은 한국교회사의 가장 빛나는 에큐메니컬 정신의발현이었다.
3. 부흥사
세계 교회가 한국 교회의 부흥에 대하여 경이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부터라고 생각된다. 한국 교회가 계속적으로 성장해 오기는 하였으나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제가 부흥되고 대형 교회가 세워지면서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한국 교회 자체는 진통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먼저 사회적인 여건이 그러하였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이승만 정권이 세워졌으나, 뚜렷한 역사의식의 결여 때문에 정권유지에만 몰두하였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차질을 빚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우국지사들은 외면을 당하고,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의 추종자들이 참정권을 얻음으로써 일제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이 때부터 대한민국의 역사는 왜곡되기 시작하였고, 정권 말기에는 부패와 불법으로 4 · 19 학생 봉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 후에 정권을 인수한 민주당 정권은 당내 내분과 정치역량의 부족으로 뚜렷한 정치 방향을 잡지 못하였고, 일반 민중은 집단행동으로 자기들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그릇된 인식으로 국민학생들까지 데모를 하는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 결과로 5 · 16 군사 쿠테타를 유발하게 되었고, 겨우 싹 트기 시작한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군사 독재에 유린되고 말았다. 이들 군인 집단은 경제 개발을 최대의 정치 이슈로 삼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경제가 부흥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는 하였다.
이런 사회적 혼란기를 이용하여 기독교계는 많은 이단 운동들이 유입되었는데, 그 첫 테잎을 끊은 것이 용문산에서 기도원 운동을 하던 나운몽의 신비주의적 대중집회였다. 그리고 그와 보조를 같이 하던 박태선이 독자적으로 대중집회를 실시함으로써 기성 교회와 교인들은 신비주의 운동의 거센 바람에 강타를 당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이 에큐메니칼운동을 등에 업고 기세를 올리게 되었고, 오순절 교회의 성령운동과 은사운동도 역시 한 몫을 하면서 한국 교회는 신학적인 혼란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이비 신학교와 기도원의 난립으로 목회자들의 지적 수준도 저하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기복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60년대 이후의 한국 교회는 신학적인 순수함을 상실한 채 신앙 노선상으로 어려운 국면을 겪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바라는 운동도 없지 않았다. 즉 미국의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도 집회, Explo 74로 일려진 대중집회운동 등 성장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도 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회 성장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교회안으로 들어왔는데,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부흥이었는가? 그렇게 교회에 유입된 모든 사람들이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미신적인 사고와 세속적인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는 없었을까? 우선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 이유부터 찾아 보도록 한다.
첫 번째는 신비주의 운동도 부흥에 한 몫을 하였다. 저들은 올바른 신앙을 공급하지는 못하였지만 양적으로 성장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두 번째는 오순절 교회의 성령운동과 은사운동이 정통적인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숫적인 부흥을 일으키는데는 일조를 하였다.
세 번째는 사회의 경제적인 발전이다. 우선 이 과정에서 많은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고, 이로 인하여 도시에는 대형 교회가 생겼고,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영적인 필요보다 현실적인 성공과 풍요를 기대하면서 교회를 찾는 사람이 늘어났고, 이것은 숫적인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네 번째는 기성 교회들의 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신흥 교파들의 성장을 보면서 기성 교단들도 각성하여 전도를 하였고, 교회를 발전시키는데 주력한 것이다.
다섯 번째는 80년대에 교회는 은사운동이나 신비주의 운동의 헛점을 알게 되고, 한국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인 성경 교육을 장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는 양적인 성장만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던 교회들이 질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수적으로 성장한 교회가 이제는 질적으로 안정을 찾으면서 건실한 신앙생활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Ⅱ. 한국교회의 분열의 역사
한국 교회는 진통을 겪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회의 분열이다. 한국 교회가 분열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신사참배 문제였다. 이 신사참배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1951년에 제 1차 분열이 있었고, 1954년에 또 다시 총회가 분열되었다. 그리고 1959년에는 ‘에큐메니칼파’와 ‘보수파’가 다시 분열되었다.
1950년 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고려파가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당시 국회의원22명의 명의로 비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난했다.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졌다.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목사의 신학이 신신학 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웠다.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수 없다고 해서 갈라졌다. 1959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됬다.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 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 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그 후 합동에서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겼다.
장로교회의 조직 : 1901년 마펫은 김종섭, 방기창을 데리고 신학교육울 시작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1915년에는 등록학생수가 250명을 넘었다. 1907년 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한석진, 이기풍, 양전백, 서경조 등 7명이 첫 졸업했다.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창립노회를 개최하여 목사7명, 장로 53명, 교회988개, 세례교인 70,000명의 교회로 출발하였다. 1912년에 7노회로 총회가 창립되었는데 총회장은 언더우드, 부회장은 길선주 목사가 선출되어 한국장로교회는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총회 창립후 중국 산동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를 파송하였는데 크게 성공했다.
장로교회의 굴복 :친일파 김일선 목사는 평북노회장이 되면서 신사참배를 결정했고 9월 총회까지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굴복했다. 1938년 총회에서 일제는 반대하던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김선두목사등을 투옥시키고 경찰의 위협속에 회장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되었으니 감옥에 가기 두려워 신앙의절개를 꺽고 우상앞에 절하는 애처로운 장로교회의 변절이 시작된 것이었다.
교회의 친일행각 : 1939년 종교단체법을 만들어 각 도시에 한 교회만 허용하고 신책 설치, 국미의례 및 수탈과 부역을 강요하였다. 감리교는 1940년 10월 일본정신의 함양, 일본적 복음을 결의하였다. 1942년 교회수가 750개 감소했고 교인수도 76,747명이 줄었다. 9월에는 전국장로교회가 국방헌금을 모은 돈으로 비행기1대, 병기 2정을 사서 헌나하기도 했다. 일제는 찬송가에 제재를 가했고 사도신경도 금지시켰고 예배5분전에는 천황의 사진에 요배를 하고 출정장병을 위한 기원, 황국식민서사를 한 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일제는 결국 기독교회 파괴 공작을 노골화하여 작은 교단들을 해체시켰다.(성결교, 안식교, 성공회등)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주권사상, 재림설, 반정론 및 평화사상, 극제적 제휴둥의 이유로 군소교단을 해체시켰다.
장로 교회의 분열은 가장 큰 교단으로 큰 교단인 만큼 많은 분열의 아픔이 있었다. 분열의 큰 원인 들을 살펴 보면 첫째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분열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대두로 인한 분열과 N.A.E.와 W.C.C의 대립으로 인한 분열의 세가지 큰 사건으로 나눌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때 한국 교회는 해방 이전의 교회가 내포 했던 문제들을 극복하면서 부흥 재건 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하나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교회로서의 정체를 상실 하였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본래의 한국 교회의 모습으로 재건 하는일 이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의 정통이 일제하의 강요에 따라서 신사참배나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으로서의 통합 때문에 패멸되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순수 정통에로 회기한다는 운동이었다. 그 이후 소위 고신파의 분립이 1950년 4월에 표면화되기 시작 하였고
이 즈음에 조신파 (현재의기독교 장로회) 역시 신학적 사상에 대한 성서의 소위 고등비평과 역사적 비판등을 이유로 예장과 분립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조신파의 방법론들은 보수주의나 근본주의 일색으로 목회자양성을 실시해온 장로교에 충격을 주었다. 김재준 목사와 박형용목사 두 거목의 사상은 대립하게 되었고 박목사는 김 교수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까지 힐책 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장로교회는 총회에서 새로운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고 기존의 조선 신학교와(한국신학대학) 두개의 신학적 대립의 신학교가 탄생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장총회는 '대한민국에는 예장 총회는 하나 밖에 없다'고 성명서를 제출하게 되었고 조선신학교 측은 새로운 대한 기독교 장로회 라는 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다.(1954) 그 이후 기장은 1957년 10월에 한국 기독교교회연합회(NCC)에 가입하였고 같은해 한국 세계기독교봉사회에 가입하였으며,1959년에는 동남아시아 기독교협의회(EACC, CCA의 전신)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교단으로써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독립된 교회의 기구로서의 출발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1959년 예장은 다시 합동파와 통합파로 분립 하게 되었다. 합동파에서는 1960년 12월 비상 사태속에서 고신파와 합동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를 조직하게 된것이다. NAE계의 목사들은 WCC가 용공적이라고 공격하고, 한국교회의 반공이념과 신앙의 순수성보존을 위해 WCC에서 탈퇴할것을 그동안 주장해 왔다.그런데 1959년 대전총회에서 경기노회의 총대 명단의 조작성 여부의 문제로 양쪽의 주장이 충돌하여 마침내 분립까지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통합파는 곧 서울 연동 교회에서 속회를 가지고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WCC에서의 잠정적 탈퇴를 하면서 합동파와의 재결합을 모색 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이 그 시기에 제출된 제안은 아니었다. 반대로 합동파 에서는 서울 승동 교회 에서 속회하여 당장 WCC에서 영구 탈퇴 하고 어떠한 형태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반대하며, 한국NCC와도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 하였던것이다. 그런데 합동파의 역사도 그이후 기복이 많았다. 1962년에는 ICCC탈퇴 문제로 박병훈계가 호헌파로 분열되고 1963년 9월 고려파가 옛 고려파 총회로 그산하 노회들이 환원 되었다 그리고 같은해에 개혁파교회 세계대회에 가입하였다가 1972년 9원 57회 총회에서 이곳으로 부터 탈퇴를 결의하였다. 합동파 교회가 다시 사당동파 와 방배동파로 다시 분열된 것은 1979년 9월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파들의 분립과 조직 과정을 정확 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계보상 뚜렷한 파생 경로 없이 단독 생성된 장로교 교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장로교의 고신(1951) 분리
장로교의 기장(1953) 분립
장로교의 통합과 합동(1959)의 분열
Ⅲ. 한국교회의 선교의 역사
1. 선교사 이전의 개신교와의 접촉
1) 벨테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됨(네델란드 사람)
벨테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 1627년에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전라도 해안에서 표류하다가 물을 얻기 위해 상륙했다가 억류되게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벨테브레만 남았는데 그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여자와 결혼이 허락되어 1남 1녀를 낳았으며, 따라서 한국에 귀화한 최초의 서양인이 되었고, 최초의 혼혈아를 낳은 기록을 남겼다.
벨테브레가 표류한지 이십 육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3년간 억류되어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였음을 알수있다.
2) 칼 귀츨라프 -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의 할례대학에서 졸업. 화란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함.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네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 만나는 사람마다 의약품, 병 고쳐줌, 전도함)
귀츨라프는 주기도문을 한국말로 번역하였고, 감자씨를 주면서 그 심는 법과 재배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3) 로스역 성서 : 스코틀랜드연합 장로교회의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만주 봉천에 머물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두었고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 기 등의 협력을 얻어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사진은 1882년에 간행된 최초의 한글성서(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 이다.
만주에서 입교한 의주 청년들: 고려문에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와 교제하였고 3년후 매캔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로스는 의주청년들과 성경변역을 시작하여 1882년 봄에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시작으로 1887년 신약 전체 번역이 완료되었다.
권서, 매서인의 활동: 서상륜은 최초의 권서로 임명되어 전도함으로 최초의 예배를 드렸다. 1884년 로스는 6천권의 복음서를 무사히 반입하여 반포함으로서 많은 신자들이 생겨났다.
이수정과 성경번역: 신사유람단 일행인 안종수의 친구인 이수정은 진전선박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박았다. 이수정은 전도하여 유학생들의 성경공부반을 형성하기도 했고 미국선교부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수정은 한문성경에 토를 달아 읽기와 이해를 쉽게 했고 1884년<신약성서 마가전>을 시작으로 한글성경을 번역하였다.
가우처:미국의 사절단을 만난후 일본에 있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하여 한국을 조사한 후 선교할 것을 요청하였다. 매클레이의 방문후 스크랜톤, 메리 스크랜톤, 아펜젤러가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알렌의 입국(1884년 9월): 이승훈 세례후 100년이 지나 중국선교사로 있던 알렌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공사관의사로 있다가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응급조치하여 살림으로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알리게 되었고 알렌은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이는 개신교 선교 사역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득’이 되었다. 1885년 알렌은 광혜원 개설(세브란스의 전신)
아펜셀라 목사의 인천상륙
아펜셀라(Herry G.Appenxeller)는 드루우 신학교 재학시절에, 1883년 미국 하드포드에서 개최된 신학교연맹(The Hartgard Inter Seminary convention)집회에서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처음에는 일본에가 려고 희망하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가려고 했던 친우인 워드윌쓰(J.S.Wodaswoth)가 모친의 중병으로 국내에 남아있을 사정이 되어 그를 대신하여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미국 북감리교회지 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사의 임명을 받은 그는 1885년 2월 2일 한국을 향해 떠나기에 앞서 샌프란시코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펜셀라 목사와 동행으로 스크랜튼 의사 부부와 모친 스크랜튼 여사가 있었다. 이들 감리교의 개척선교사 일행은 태평양을 횡단하여 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동경에 들려 선배 선교 사인 매클레이 목사를 만났으며 3월 5일에는 뜻깊은 선교예배를 올렸다. 이때 매클레이 목사는 시편 121편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는 구저를 읽고바울이 선교사업을 위해 맡은 일터로 떠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면서 한국을 향하여 선교사들의 장도를 격려하였다.
1885년 3월 31일에는 일본에서 재한선교회가 조직되었다. 파울러(C. H.Fowler) 감독은 감리사로 매클레이 목사, 부감리사에는 아펜셀라 목사, 회계로는 스크랜튼 의사를 각각 임명하였다. 매클레이 감리사의 의견이 [여러사람이 함께 한국에 들어가면 의심을받을 염려가 있으니 따로 따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아펜셀라 목사는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와 함께 일본 나가사끼를 떠났으
며 4월 2일 아침에는 한국땅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은 부산이었으며 남해안과 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드디어 인천에 도달하였다. 얼마나 한국행을 갈망하였던지 그들은 상륙하자마자 땅위에 엎드려먼 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을 상륙하였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여!! 어서 속히 이 백성들을 얽어매고 있는 흑암의 사슬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 빛과 자유를 베풀어주시옵소서] (R.S.Maclay,Comen cement
of the Korea Methodist Episcopal Mission,The Gospelin All Lands for 1885,P,328) 아펜셀라 목사는 선교회에 보내는 보고문 가운데 위의 기도문을 실었다.
아펜셀라 목사는 상륙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아내가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다] (Harry A.Rh-odes,The Korea Mission Field No.4,April 1935,P 78)라고 아펜셀라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는 함께 한국을 찾아왔으나 한국내의 실정은 아직까지 외국인 여자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펜셀라 목사는 부득이 부인을 데리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언더우드목사만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국 대리공사 포오크 (George C.F-oulk)가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서울에 서양인 여자가 들어가기는 어려운 사정인고로 부인을 잠시 일본으로 가 있다가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펜셀라는 인천에 도착한지 9일만인 4월 13일에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 다음날인 4월 18일 청국의 대표 이홍장 과 일본 대표 이또오가 중국에서 텐진조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 정세의 긴장이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때에
는 여둑으로 건강을 상한 부인의 치료로 아펜셀라목사의 한국 입국은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에 가서야 아펜셀라 목사는 인천에 또한번 상륙하였고 서울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소명
1884년 봄에 의사 헤론(John H.Heron)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여 일본에서 때를 기다리게 하였고, 9월에는 중국에 파송되어 있던 알렌(Allen) 을 한국으로 옮겨 일하게한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그동안의한국 선교에 대한 신중정책을 전환하여 본격적인 선교사업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서의 정세가 호전된 점도 있었겠지만, 직접적으로 언더우드(H.G,Under wood)목사와 같은 인물이 선교사를 지원 한국행을 희망하여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을 찾게된 동기와 사정을 회상한 내용을 살표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 주재중인 올트맨(Allert Oltmans)이 1883년 겨울에 선교 지원자들을 모아놓고 은사의 나라 한국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주장은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또 1882년에는 한미 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에도 불구하고 미국 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동안을 허송세월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는 그때 인도에 갈 생각으로 의학공부를 했으며 한국에 갈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였다. 교회 기관지들은 아직도 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기사로 나와있었다. 바로 이때에 나에게 하늘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너는 왜 못가느냐(Why not go yourself?) 이었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선교 희망이 한국행을 막고있었고 또 실제로 한국의문은 닫혀있는것 같았다. 나는 두차례나 선교본부에 가서 한국행을 간청하였지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핀잔을 받았다. 이제 나에게는 본
국에 머물러 목회를 하거나 인도에 가는 길밖에 없는것 같았다. 나는이렇게 머뭇거리는 상태에서 뉴욕의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나는 이 청빙에 응하기로 하여 수락하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 순간에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는가,(Not one for Korea)한국은 어찌할 터인가 (How about Korea?)라는 소리가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어왔다. 이때 나는 나도모르게 손에 쥐었던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단숨에 중앙통에 있는 선교본부를 찾아갔다. 나는 수석서기인 엘린우드(F.F.Ellin wood)를 만났다. 몇칠후 그에게서 받은 기별은 다음 회의에서 내가 선교사로 일명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L.George Paik,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PP.100 101)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는 종래의 배외정책으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정을 하였고,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교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그가 일본으로 먼저 가게된 이유는 일본에서 한국말을 공부하기도 하고 또한 한국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여 만반의 선교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었으며, 혹 여의치아니하여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때에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수 있게될 시기까지 일본에서 영어학교 사업이라도 하기 위함이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동안 선배 선교사인 헤본(James C.Hep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루미스목사는 언더우드에 대하여 [그는 한국을 위한 적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The Foreign Missionary,Vol.44,No,1,P,34)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풍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선고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 그나라말을 배우고 또 그 성경을 번역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것인데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번역된 성서를 손에들고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으니 만큼 컸다.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 송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 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 이때 배가 타던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중 하나가 한권을 가지 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 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쳐 죽임. 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인데 나중에 회계하여 1899년 세례받아 평양 초대 교인 이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2.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의료선교, 교육사업, 새문안교회(최초의 교회), 성경번역사업
의료와 교육 사업 : 중국에 의료 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우리나라에 옴. 같은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우리나라 인물들이 참석했는데 수구파(엣것 지키려는, 대장은 민비의 오라비 민영익)와 개화당(개혁으로, 대장으로 박영호, 김옥균)이 있었는데 개화당 사람 이 민영익을 칼로 찔렀음. 개화당이 3일 동안 천하를 이루다가 다시 흩어짐. 이때 알렌이 민영익을 고침.(한의사 14명은 실패했는데) 이것 때문에 알렌의 인기는 치솟음. 알렌은 그래서 궁중 시의가 되어 모든 왕족, 고관을 치료함.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냥을 사례함. 이돈으로 알렌은 왕립 광혜원을 설립. 이 병원의 설립 2주후 고종황제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줌. 제중원 - 나중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1885년 4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오는데 문을 열어주는 도움을 주게 되는 배경은 알렌이 병원으로 정부에 호의를 준 영향이 크다.
의료선교: 알렌에 의해 제중원이, 스크랜톤에 의해 시병원이, 여간호사 엘러즈는 신분의 차별없이 모든 부녀들을 맡아 보았으며 홀튼, 하워드에 의해 보구여관이 세워졌다. 성공회에 의해 낙동병원이 세워졌고 1908년에는 7명의 의사를 배출하게 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의료사역은 평양, 선천, 재령, 대구 등 각지로 확대되어 의료선교는 환자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위생교육과 예방접종에도 치중하여 사망률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교육사업: 의료사역보다 포괄적이고 직접 전도의 계기가 된 교육사업은 영어학교, 육영공원, 언더우드학당, 숭실대학등이 세워졌고 여성교육을 위해 메리스크랜톤이 이화학당을 세웠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워 1894년에 학생수가 104명에 이르렀다. 스크랜톤의 말대로“병원은 쟁기로 땅을 갈고, 교육은 씨를 뿌리기 위해 써레로 땅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고 할 정도로 한국 초기의 의료와 교육사업은 적절했다 할 수 있다.
최초의 수세자 노춘경 : 노춘경은 기독교를 배척하는 문서를 통해 지식을 얻은 후 알렌의 집에서 몰래 가져 온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읽는 중 기독교를 접하였으며 1886년 언더우드에게 생명을 걸고 세례를 받았다.
최초의 교회(새문안교회) : 언더우드는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서 1887년 9월 14명의 교인을 데리고 두 명의 장로를 세운 뒤 교회를 조직했다.
성경번역사업 :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성경이 이미 번역되어 있었으나 오류와 문제점이 있으므로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1887년에 <성서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철저한 심의과정을 두어 선교사들이 조사와 번역을 하고 다른 번역자들이 수정하고 의견을 개진한 후, 위원회에서 토의를 하고, 의견이 이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표결을 하여 확정지었다. 1900년에 신약, 1910년에 구약이 완역되었고 1937년에 다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한국 교회는 첫 출발부터 기적적인 하나님의 사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선교사가 오기 전, 한국 사람들의 손에 의해 번역 · 출판된 성경을 자신들이 갖고 들어와 직접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한 것이 한국 교회의 시초이다. 그래서 이 소래교회를 교회사가들은 <민족 교회> 혹은 <자생(自生) 교회>라고 부른다.
3.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한국교회의 성장
3자 정책 : 자치, 자립, 자전
네비우스 정책
통상적으로 한국 교회 부흥의 비결을 <네비우스 정책>의 공헌으로 인식하는 경향들이 있다. 특히 한국 장로교의 경우 더욱 그런 경향을 가진다. 사실 <네비우스 정책>이 한국 교회에 이바지한 공헌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네비우스 정책>이란 1890년 중국 산동성 지역의 미 북장로교 선교사 죤 네비우스(John Nevius 1829-1893)를 주한 선교사들이 초청하여 선교정책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그가 소개한 선교정책을 1893년에 조직된 선교사 공의회에서 수정 · 보완하여 한국의 선교 정책으로 채택한데서 붙은 명칭이다. 그가 소개한 선교정책을 클라크(Charles Allen Clark)는 “자력전도(自力傳道; self-propagation), 자치제도(自治制度; self-government), 자급운영(自給運營; self-support)” 등으로 요약하였다. 이 정책의 중심 이념은 피선교지 교회가 외국인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발전해 가도록 유도함으로써, 능력 있고 강인한 교회로 키우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선교사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영국 국교회 성직자로써 선교협회 서기로 재직하였던 헨리 벤(Henry Venn)이 실시한 3대 자급원리(三大 自給原理: three-self Principle)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가 주창한 삼자원리(三自原理)란 선교지의 교회들이 “독립적으로 행정”(self-governing)하고, “자급 자족”(Self-supporting)하며, “자체적으로 선교(Self-propogating)”하는 교회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 말의 선교는 대개 이런 방향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기 때문에 네비우스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네비우스는 중국 산동성에서 이 정책에 근거하여 선교를 실시하면서 동양인의 사고와 풍습에 맞도록 수정 · 보완하였고, 이것을 중국보(中國報)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일도 있는데, 내한한 선교사들은 대개 이 논문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강사로 초빙하였다.
이런 선교정책은 한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필요에 의하여 수립된 원칙이지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규례는 물론 아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필요하겠지만 정책이 부흥의 근본 원인라고 주창하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못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되고 <네비우스 정책>이 체택되기 전에 이미 교회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이 사실(그래프-1과 그래프-2를 참조)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매우 껄끄러운 것이다. 만일 선교정책이 수립되기 전에는 미미하던 성장이 정책 수립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면 충분히 납득이 되겠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의 글을 읽으면 <네비우스 정책>을 절대시하는 마음이 약간 수그러들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은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이제는 반대로 자기들의 친척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들은 또한 “자립의 모본을 보여 주었는데, 교회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그 후의 다른 많은 곳에서와 같이 복음이 선교사들을 앞질러 전파되었는데, 선교사들은 언더우드 목사와 마찬가지로 이방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마을들을 방문했던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선교정책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와 영혼을 구원하려는 뜨거운 열정, 그리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려는 진실성때문에 복음을 전하였다고 주창하는 것이 <네비우스 정책> 이전의 부흥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다.
더욱이 당시는 외침(外侵)의 위협을 받아 국가의 독립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 교인들은 독립의 소중함을 절대적으로 느끼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에서마저 자주력을 상실하면 안되겠다는 강한 자주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자주의식이 자력으로 전도하고 자력으로 교회를 설립하는 동기가 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역사적 정황론(歷史的 情況論)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한국 교회가 부흥한 기초는 바로 역사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적 환경론으로는 자립에 대한 의지는 설명할 수 있겠지만, 복음을 받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구령(救靈)의 열정과 사명감은 설명하지를 못한다. 먼저 뜨거운 사명감과 복음 전도의 실천이 있은 후 교회를 자주적으로 이끌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있게 되는 것이지, 역사적인 형편이 그러하기 때문에 열심히 전도해야겠다는 결단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비우스 정책>에도 자주적인 정신이 숨어 있었고, 이런 정신의 공통분모는 역사가들의 시선을 한국인의 사명의식보다는 <네비우스 정책> 쪽으로 비중을 두게 하였다. 이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며,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부흥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만일 <네비우스 정책> 자체가 우수했고, 그 정책만 있으면 기적적인 부흥을 가져올 수 있다면 다음의 두가지 질문에도 분명한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중국의 교회는 네비우스가 직접 선교하였고, 더욱 확실한 <정책>을 구사하였을 터인데, 중국 교회는 과연 기적을 이루었는가?
이 질문은 한국과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지역에 대하여도 적용되리라고 생각된다. 과연 부흥되지 못한 지역의 교회들은 선교정책의 빈곤때문이었을까? 그런 지역에서는 왜 <네비우스 정책>을 도입하지 않았을까?
둘째, 한국의 감리교는 <네비우스 정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다음으로 큰 교단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정책보다 중요한 것은 현지인들의 의식이다. 이것을 더 중요하게 강조하여야만 한국 교회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며, 이것은 한국 교회만 아니라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지역의 선교에서도 적용되는 동일한 원리라고 하겠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이 글을 읽고 한국과 흡사한 풍토를 가진 중국에서 시행된 선교 방법을 연구함으로서 한국에서의 선교가 성공적으로 수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네비우스 목사는 약 2 주간을 서울에 체재하면서 저서인 [선교 사업의 방안](Methods of Mission Work) 을 중심으로 주한 선교사들과 사이의 세미나를 통하여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첫째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으면 그를 끝까지 붙들어그 인물이 스스로 개인 전도하는 일꾼이 될 때까지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생활을 통하여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계속하여 전도한다.
둘째는, 교회의 운영과 기구 조직은 그 교회 자체가 능히 감당할만한 범위 안에서 기획 실천하여 발전시켜 나아가게 한다.
셋째로, 교회에서 전도 사업을 지도할만한 인물이 나오거나, 재정을 공급하여 운영할 수 있는 유자격자가 발생하면 곧 그를 선임하여 교회의 책임 일꾼으로 세우고, 선교사는 가급적 목회 일선에서 후퇴한다.
넷째는 교회당 건축은 그 교회의 교인들 자신의 힘으로 하게 하되 건축 구조나 모양은 한국 고유의 양식으로 지방의 교회당답게 건축한다.
(이것은 거의 실현되지 아니하였으며 한국인들 자신이 외국풍을 선호한 결과로서 오히려 일반 가옥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을 희망하였다.)
네비우스 선교정책 : 선교방법론에 탁월한 네비우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원칙으로 선교사는 폭넓은 순회선교를 통해 전도하며, 성경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모든 예배단은 신자들 자신들의 힘으로 건축되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하며, 엄중한 훈련과 치리를 해야 한다. 적어도 지역을 분할하여 일한다. 보통 3자정책으로 부르는데 자치(自治), 자립(自立), 자전(自傳)이다. 선교지 분할 정책은 예양협정으로 북장로교회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북을, 남장로교회는 전라도, 충청도를, 캐나다장로교회는 함경도지역을 담당하여 선교하기로 합의하였다.
초기 한국 교회 급성장의 원인 : 한국에는 강력한 국교가 없었고,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 국내외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국왕이 공개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호의를 보였으며 서구와 서구의 종교에 반감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전도열이 뜨거웠고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일찍 확보하였다. 한국이 문자와 언어의 통일이 되어 있었고 교인들의 기도운동이 뜨거웠으며 한국교회는 사회개혁과 애국애족의 교회로 정착했다는 점이다.
초기 선교사 순교자들 : 데이비스, 헤론, 윌리엄 메켄지, 기포드, 조지 렉, 헨리 아펜젤러, 월터 존슨, 안나 밀러 부인, 번턴 부인, 윌리엄 헌트 부인, 피터스 부인, 사무엘 무어, 전킨, 게일목사 부인등/ 어린 생명들이 의료시설이나 의사 부족으로 이국 땅에서 죽어갔다.
4. 한국인의 해외 선교사 파송
1) 초기 한국교회 선교
한국감리교회 세계선교의 시작은 1902년 인천 내리교회에서 하와이 농업이주민을 위해 홍승하 선교사를 파송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장로교의 선교의 역사는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조직되니 이를 '독노회'라 하고,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하였다. 191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되고 이를 기념으로 유교의 창시자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에 선교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목사, 1916년 방효원목사, 1917년 홍승한목사, 1918년 박상순목사, 1923년 이대영목사, 1927년 방지일목사, 1931년 김순효 전도사를 각각 파송하였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 조약이후 일제하의 무단정치와 착취 그리고 교회근절을 위한 무서운 박해로 기독교 지도자들의 감금과 선교사 추방 등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치욕적인 36년간의 일제 탄압이 물러가자 또다시 선교의 범위가 아시아를 향하여 웅비의 날개를 펴고 1956년 최찬영, 김순일 목사를 태국에 파송 했고 1957년 계화삼 목사를 자유중국 주재 선교사로 파송 하였다.)
1993년까지 한국교회의 세계선교현황은, 세계 122개국에 4,321명의 한국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통계에 나타난 파송 선교사의 수치는 80%가 80년대에 파송되어 80년대 들어서 선교에 급성장을 하고있음을 알 수 있다. 1913년이후 완만한 곡선을 보여주었던 세계선교가 지난 10년간 수직 상승함에 따라 선교사와, 선교단체와, 후원교회들이 많은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 세계선교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증후군이다. 선교를 바로하기 위한 처방은 누구에게 먼저 내려져야 할 것인가. 바로 한국교회에 내려져야 한다. 선교의 모체는 교회이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건강한 선교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선교 연합의 시대
전체적으로 한국에는 두 개의 선교단체 연합 체가 있다. 이 연합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단체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한국의 선교현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선교단체협의회에는 1996년 85개의 선교단체가 가입되어있다. 설립 목적은 선교 단체간에 친교를 두텁게 하며 보다 신령한 연합을 이루어 한국 교계에 진정한 부흥과 국제 선교 기구와의 유대를 강화하며 상호 협조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주요사역 목표와 현황 1. 선교 문제 연구와 선교 정책 수립 2. 선교 정보 교류이며 1977년 5월 16-17일 창립 총회를 거쳐 1983년 4월 25일 문화부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아 선교단체간의 행정적 지원과 협력을 하고 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http://kcm.co.kr/kwma/index.html)는 설립배경은 교단간 및 교회와 선교단체간 협력 및 동반자적 연합을 이룩하기 위해 본 협의회는 1992년 2월 4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내 소재한 소망교회(곽선희 목사시무)에서 창립되었다. 기존 교단 선교부 연합 협의기구였던 한국동반자선교회(KOREA PARTNERSHIP MISSION)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선교사 파송 주요교단 선교부와 초교파 선교단체들의 대표들로 실행위원회를 구성하여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세계선교의 협력과 연합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본 협의회 목적에 찬동하는 한국교회지도자로 구성된 회장단과 중앙위원들이 본회사업을 후원하고 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의 목적은 복음적인 교단 선교부 및 초교파 선교단체가 선교정보, 선교훈련 및 교육, 선교사 파송 및 지원 등 제 분야에서 상호 협력과 연합함으로 세계선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있다. 조직명단을 참고하면 교단 선교부와 선교단체가 연합할 수 있는 조직으로 교회와 선교단체에게 선교정보 제공. 선교사 후보생 발굴, 교육 및 훈련. 미전도 종족 복음화 연구, 협력 및 조정. 선교전략회의 및 선교정책 협의.선교사 복지 및 자녀교육 지원을 회원단체간에 협력 및 선교사 파송 지원 세계선교대회 개최 및 연합 증진. 을 사역의 방향으로 설정하였다.
3). 성장해온 한국선교
아래의 표는 1996년 한국선교정보연구센타가 집계한 내용을「한국교회의 해외선교」의 책을 참고하여 비교한 것이다.
<표 1> 한국교회 교인 1인당 선교사의 비율
연대 선교사 비율
80년대 6,250:1 (선교사 1,600명, 교세 1,000만)
90년대 4,669:1 (선교사 2,570명, 교세 1,200만)
94년 6월 3,636:1 (선교사 3,300명, 교세 1,200만:KRIM 자료)
96년 2,726:1 (선교사 4,402명, 교세 1,200만:한국선교핸드북)
* 비교 : 북미주 2500:1, 영국 1443:1
<표 3> 선교사 증가율
년도 증가율
1979-1996년 4,730%
1990-1992년 56.6%
1992-1994년 27%
1994-1996년 34.5%
<표 2> 한국선교사의 수
년 도 선교사 명 수
1979년 93명
1992년 2576명
1994년 3272명
1996년 4402명
2000년 7500-8000여명으로 추정
<표 4> 선교대상국 분포
년도 선교대상국 수
1979년 26개국
1994년 119개국
1996년 138개국
<표 5> 선교지역의 대륙별 분포(1996년)
대 륙 별 선교사 수
아시아권 2,172명(49.3%)
유라시아 577명(13.1%)
라틴아메리카 431명(9.8%)
아프리카 349명(7.9%)
유럽 349명(7.9%)
중동 267명(6.1%)
남태평양 158명(3.6%)
<표 5> 한국의 주요교단 선교사 파송현황(1997년 12월)
교 단 선교사 파송수 교 단 선교사 파송수
기 감 242명 예장(개혁) 118명
기 성 180명 예장(개혁합신) 45명
기 장 55명 예장(통합) 498명
기 침 132명 예장(합동) 840명
기하성 111명 예장(합동정통) 98명
예 성 76명 합 계 2,375명
<표 6> 한국의 주요교단* 대륙별 선교사 파송현황(1997년 12월)
* 기감, 기성, 기장, 기침, 기하성, 예성, 예장개혁,
예장개혁합신, 예장통합, 예장합동, 합동정통
대 륙 숫 자 제일 많은 파송국가
아시아 1,135명 AX국(241명), 필리핀 (239명)
아프리카 265명 케냐(60명), 탄자니아(38명)
유럽(구소련지역포함) 390명 러시아(156명), 독일(64명)
오세아니아(태평양) 92명 뉴질랜드(23명), 호주(20명)
아메리카 425명 브라질(69명), 파라과이(49명)
중동(이슬람권) 70명 ACT국(35명), 이스라엘(13명)
기타 70명
합 계 2,375명
이제 양적인 선교의 성장은 꾸준히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1997년 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로 인해서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에 놓여있게 되니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을 면밀히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현재까지의 양적 성장만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선교의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한국교회의 상황은 미국과 다르지만 선교가 위기 국면에 도달할때 경제위기가 왔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따라서 첫째로 소위 돈 선교는 자제해야한다. 여기서 선행되어야 할 사항은 선교사의 자격이다.
선교지에서 필요한 선교사, 즉 고급인력을 파송하지 못한데서 자연히 돈 드는 선교를 하게된다. 선교지의 상황은 경제와 산업이 낙후하여 경제나 기술의 도움을 요청하는 서비스 선교가 요구되지만 여기에 이제 한계가 있다. 특히 프로젝트 사역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는 원주민 교회 스스로 일어서서 일하도록 하는 자립선교를 강화해야한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경제적으로 역사한다는 믿음이 요구된다. 경제적 시련이 도리어 신앙을 강하게 한다는 것도 선교적 교훈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19세기 서구 선교사가 왜 신앙선교를 발전시켰는지 곰곰이 음미할 때가 되었다. 동시에 한국교회는 해외의 교민교회와 교단 적으로, 혹은 개교회적으로, 혹은 선교회 차원에서 협력하여 교포교회들이 선교의 짐을 더 지는 것과 장기 융자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자체에 선교개념을 확대해야 한다. 선교하면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는 협의의 선교에 너무 집착하였는데, 국내도 선교지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국내의 특수지역 등을 선교지로 생각하고 복음화 하는 전략이 더욱 강화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IMF 체제의 한파를 겪고 있다. 이런 경제위기의 회복을 위해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분명 얼마 안가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제위기로 선교사 사역이 축소되고 있고, 마침내는 안식년이라는 미명(?) 아래 선교지에서 철수가 시도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조치인듯 하다. 그러나 현실보다는 이러한 조치들이 진정 하나님의 뜻일까에 대한 깊은 의구심이 일어난다. 한 사람의 선교사역으로 수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무나 생생하게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그런 사실에 사랑과 감사와 기도와 물질의 헌신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을 느꼈을 뿐이다. 마게도냐교회 교인들은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드려 예루살렘교회를 도우므로 심한 기근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던 교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들은 극한 가난 중에도 선교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헌신이 필요한 것이지 사역규모 축소나 철수가 능사가 아니다.
이런 경제위기일 수록 본인을 위한 일에는 지금보다 덜 쓰고, 절약해서 우리는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가루 한움큼, 적은 기름이라도 주의 사명인 선교를 위해 내놓아야 한다. 따라서 더 큰 프로젝트는 할 수 없다하더라도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선교사를 철수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 네비어스 선교정책이란?
1. 선교사들 개인은 폭넓은 순회 선교를 통하여 전도한다.
2. 성경이 모든 사역의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한다.
3. 자립전도 : 신자 각인은 타인의 (복음의 선생)이 된다.
4. 자립정치 : 모든 그룹은 봉급 받지 않는 지도자들과 봉급 받은 조사들이 후에 각 지역과 전국적인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훈련을 한다.
5. 자립보급 : 모든 예배당은 신자들 자신들의 힘으로 건축되어야 한다. 교회가 설립되면 조사들의 봉급을 책임진다. 목사들의 봉급은 결코 선교사들의 보조에 의존하면 안된다.
6. 모든 신자들은 그들의 지도자, 조사들에 의해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그 지도자들과 조사들은 ‘성경반’에서 공부해야 한다.
7. 성경에 규정한 벌칙에 따라 엄중한 훈련과 치리를 해야 한다.
8. 다른 단체(교회, 선교회)들과 (긴밀한) 협조와 연합을 해야 한다. 적어도 지역을 분할하여 일한다.
10.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자립을 돕기 위해 경제면에서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