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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高麗圖經)》 해제(解題)
서긍(徐兢, 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하《고려도경》이라 약칭함) 40권은 그가 송 휘종(宋徽宗)이 파견한 고려에의 국신사(國信使) 일행에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으로 개경에 다녀간 경과와 견문을 그림을 곁들여서 엮어 낸 사행보고서다. 서긍이 개경을 다녀간 것은 선화 5년(1123, 고려 인종1)으로, 북송이 금(金)에 멸망되기 4년 전이고 고려 예종(睿宗)이 훙거하고 인종(仁宗)이 즉위한 이듬해다. 서긍의 평생은 본서에 부록된 장효백(張孝伯)이 작성한 그의 행장에 극히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기로 하겠다. 다만 서긍은 가학(家學)의 연원(淵源)도 있고 해서, 서화(書畵)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점은 간단하게나마 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송대 초기에 중국에서 전자(篆字)를 잘 쓰기로 이름을 떨치고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던 서현(徐鉉, 916~991)이 바로 서긍의 조상이다. 서긍은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서현의 후신으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고, 그 자신 서화에 취미가 있기도 해서 그 방면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는 휘종 앞에서 ‘진덕수업(進德修業)’ 네 글자를 기세 좋게 휘호하여 탄상을 받고,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이 내려져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로 발탁되어 장서학(掌書學)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탁월한 서예의 소지자로 그림에도 비범하여, 그의 그림은 신품(神品)의 경지에 들어간 것으로 칭송되었고 특히 산수와 인물 두 가지에 있어서는 당대에 으뜸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듯 서화에 있어 거장의 경지에 육박해 있던 서긍이었으므로, 단시일의 사행 기간 중에 《고려도경》같은 내용이 풍부하고 관찰이 예리한 보고서를 그림과 글씨로 편성해 낼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어부(御府)에 바친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도경》의 원본은 그 내용을 차치하고서라도 하나의 드문 예술품이었을 것이다. 《고려도경》의 원본은 1126년 이른바 정강(靖康)의 난리로 금군(金軍)에게 북송의 수도가 유린되는 분란 속에서 가석하게도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한편 서긍은 중국 고전의 학술적인 연구에는 취미가 없었으나 독서를 좋아하여, 고금의 전적을 거의 유루 없이 섭렵한 나머지 대단히 박식하여져서, 역사와 장고(掌故)에 밝아 매사를 보는 눈이 남달리 예리하였다. 그래서 그는 개경에서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체류하면서 공식적인 행사에 몰리고 행동에 제약을 받는 가운데서, 《고려도경》을 엮어 낼 만한 자료를 면밀 주도하게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사절단으로 수행하는 동안 일기의 형태로 소묘(素描)와 비망기를 적어 두었으리라 짐작된다.
당시 중국 북방의 대부분의 지역은 금제국(金帝國) 치하에 있었으므로, 북송에서 고려에 사절단을 파견할 경우에 육로는 이용할 수 없고 해로로 황해를 건너가야 했었다. 그것도 산동 방면의 항구에서 떠나는 짧고 안전한 항로가 아니라, 지금의 절강성 연안의 항구에서 떠나 황해의 폭이 넓은 부분을 건너 전라남도 근해에 와서 다시 예성항까지 북상하는 우회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송 휘종은 본래 선화 4년(1122, 고려 인종 즉위년) 3월에 노윤적(路允迪)과 부묵경(傅墨卿)을 국신소의 정사ㆍ부사로 하여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하기로 하였으나, 고려 예종의 훙거를 알게 되어 동년 9월에 제전(祭奠)ㆍ조위(弔慰)의 임무까지 그들에게 겸임시켰다.
노윤적을 정사로 하는 고려행 사절단 일행은 그 이듬해 2월부터 사행 준비에 착수하여 3월 14일에 배편으로 수도 변경(汴京 지금의 개봉(開封))을 떠나 5월 4일에 지금의 절강성 근현(鄞縣) 땅인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사절단을 위해 특별히 건조한 관선(官船)인 신주(神舟) 2척과 민간 소유 선박인 객주(客舟) 6척, 도합 8척으로 선단을 짜고 인마와 예물을 비롯하여 각종 장비와 물품을 적재하여 출항 준비를 했다. 이 사절단은 정ㆍ부사를 정점으로 하여 상ㆍ중ㆍ하 3절(節)로 구성되었고, 실지의 사무는 도제할관(都提轄官)이 관장하여 처리하였는데, 뱃사람들까지 합하면 2백 인을 돌파하는 큰 규모의 것이었다.
이 사절단을 실은 선단이 명주를 떠난 것은 5월 16일이었고, 동 24일에 정식으로 바닷길로 나서서 28일에 큰 바다로 들어가, 7일간의 거센 항해를 하여 6월 6일에 군산도(群山島)에 당도하였다. 다시 6일간의 항행 끝에 예성항에 입항하여 6월 12일에 개경으로 들어가 순천관(順天館)에 입주하였다. 그 후 약 1개월 동안 공식 행사를 끝내고 사절단은 7월 13일에 개경을 떠나 다시 배에 올랐는데, 풍세가 좋지 않아 42일 만에 명주로 돌아갔다. 명주를 떠났다가 명주로 되돌아오는 데 대략 3개월이 걸렸다. 다소의 과장이 없지는 않겠지만, 서긍의 서술에 따르면 사절단 일행은 황해를 횡단 내왕하는 항해 중에 극심한 고생과 많은 위험을 겪어야 했다. 제34권부터 39권까지의 6권은 ‘해도(海道)’라는 대제 하에 사절단 일행의 항해를 일지의 성격을 띠어 서술한 것이다.
《고려도경》을 어부(御府)에 바친 일이 언급된 서긍의 자서(自序)는 선화 6년 8월 6일로 되어 있다. 그가 고려를 다녀간 후 약 1년 만에 《고려도경》의 저술을 완결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림과 글씨를 다 서긍 자신이 직접 그리고 쓰고 한 것이어서, 장효백의 행장에 따르면, 그것을 열람한 휘종을 대단히 기쁘게 만들 수 있었고 또 그 일로 인해 서긍의 지위와 관직이 더 올라가게 되었다 한다.
《고려도경》 40권은 29류로 나누어져 있고, 그 아래에 3백여 목으로 세분되어 있다. 그리고 29류의 제하에는 그 내용에 해설하는 서문 형식의 글이 있고, 세목에 가서 역시 분제(分題)를 제시하고 설명을 달았다. 29류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 건국(建國) 2. 세차(世次) 3. 성읍(城邑) 4. 문궐(門闕) 5. 궁전(宮殿, 2권) 6. 관복(冠服) 7. 인물(人物) 8. 의물(儀物, 2권) 9. 장위(仗衛, 2권) 10. 병기(兵器) 11. 기치(旗幟) 12. 거마(車馬) 13. 관부(官府) 14. 사우(祠宇) 15. 도교(道敎) 16. 석씨(釋氏 도교와 석씨는 모두 제18권에 포함) 17. 민서(民庶) 18. 부인(婦人) 19. 조례(皁隷) 20. 잡속(雜俗, 2권) 21. 절장(節仗) 22. 수조(受詔) 23. 연례(燕禮) 24. 관사(館舍) 25. 공장(供張, 2권) 26. 기명(器皿, 3권) 27. 주즙(舟楫) 28. 해도(海道, 6권) 29. 동문(同文)
3백여 종에 달하는 세목에는 대체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그렇다고 그 전부에 그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분명하게 그림은 생략한다고 말한 데가 몇 군데 있다. 이를테면 제40권 ‘동문(同文)’의 서문 말미에 ‘그 그림은 생략한다.[省其繪畫]’ 한 것이라든지, 제17권 ‘사우(祠宇)’의 제6목인 왕성내외제사(王城內外諸寺)의 설명문 끝에 ‘그 그림은 생략하고 그 이름들을 여기에 싣는다.[略其圖而載其名焉]’ 한 것은 그 뚜렷한 예들이다. 그 밖에도 확실하지는 않으나, 제1권 ‘건국(建國)’의 시봉(始封), 제2권 ‘세차(世次)’의 왕씨(王氏) 등 그 내용으로 보아 본래부터 그림이 없었던 곳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긍은 《고려도경》의 부본을 한 부 만들어 자기집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한마을 사람 서주빈(徐周賓)이라는 자가 그것을 1127년 초 정강의 난리 직전에 빌려가서 반환하지 않은 채로 난리를 당해, 그 부본마저 소재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 후 10년째 되던 해에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남창현(南昌縣)의 땅인 홍주(洪州)에서 그 부본이 발견되었으나, 낙결(落缺) 없이 그림과 글씨가 완전한 것은 단지 해도(海道) 부분의 2권뿐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어떤 경로였는지는 몰라도 《고려도경》의 문자 부분은 전사(傳寫)되어 세상에 유통하였던 것 같아서, 서긍이 그의 장질(長姪)인 서천(徐蕆)에게 ‘세상에 전해지는 내 책은 왕왕 그림은 없어지고 경문이 남아 있다. 내가 후에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 말이 건도본(乾道本) 발문에 보인다. 그러나 서긍은 그림 그릴 비단을 펼쳐 놓고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한 해가 지나가도 화필을 잡지 않는 성벽의 소유자여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음이 안 내켜서였던지 그는 《고려도경》의 그림을 다시 그려 놓지 않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고려도경》은 서명에만 ‘도(圖)’ 자가 남아 있고 본제의 그림은 전연 전해지지 않게 되어 버렸다. 서천은 그의 중부 서긍이 세상을 떠난 지 13년 후인 건도(乾道) 3년(1167, 고려 의종21)에, 《고려도경》을 그 문자 부분이라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징강현(徵江縣)의 땅인 징강군의 군재(郡齋)의 인화조씨소산당(仁和趙氏小山堂)에서 서긍의 자서(自序)와 장효백의 서긍행장 및 서천의 발문을 붙인 40권본의 《고려도경》을 판각해 냈다. 이것이 《고려도경》의 송본(宋本)으로, 건도본이라고도 부른다. 이 건도본이 지금 전해지는 《고려도경》으로서는 가장 오래되고 의거할 만한 판본이다.
그러나 이 건도본은 오랫동안 세상에 유통되지 않아, 청대 중기의 대장서가인 포정박(鮑廷博, 1728~1814)조차도 그 원본의 소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요행 건도본의 완질 하나가 청 고종, 즉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5) 때 궁중 송ㆍ원ㆍ명 선본의 장서처인 천록임랑전(天祿琳瑯殿)에 보존되어 내려왔다. 청실의 서화골동과 고완진보(古玩珍寶)를 인계, 관리하게 된 고궁박물원(古宮博物院)에서 천록임랑총서의 하나로 중화민국 20년(1931)에 이 송 건도본 《고려도경》의 영인본을 발간하였다. 그 후 이 영인본도 희귀해져서 대만으로 옮겨간 고궁박물원에서 중화민국 63년(1974)에, 다시 원장 장복총(蔣復璁) 박사의 서문과 서지학자 창피득(昌彼得) 교수의 발문을 추가하여 원본에서 새로 찍은 선명한 영인본을 발간하였다. 이 3책으로 된 영인 건도본 《고려도경》에는 ‘건륭어람지보(乾隆御覽之寶)’를 비롯한 7종의 홍색 장서인이 각 책마다 찍혀 있다.
고려본의 《고려도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건륭 58년(1793, 조선 정조17)에 포정박이 그의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의 하나로 《고려도경》을 간행하였다. 이 지부족재본은 포정박의 가장본(家藏本)을 저본으로 하여 명말에 해염(海鹽) 사람 정휴중(鄭休中)이 낸 중간본과 참합(參合)한 것으로, 정휴중의 중간본은 초록송본(鈔錄宋本)과도 대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근세에는 이 지부족재본의 《고려도경》이 널리 통행되었다. 이 밖에 금세기 초엽에 일본에서 지부족재본을 저본으로 하여 건도본을 참교한 근대식 활자본 《고려도경》이 나와 광범하게 유통되었다. 그러나 이 활자본은 건도본과의 대교가 철저하지 않고 베풀어진 구두점에 착오가 적지 않다.
고려 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 자료가 풍부하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는, 북송 때의 중국인에 의해 저술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 《고려도경》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서든 다행한 일이다. 당시 북송은 북쪽으로는 요(遼)와 금(金)의 무서운 압박을 받고 있었고 서남쪽으로는 서하(西夏)가 독립국으로 버티고 있어, 한족(漢族)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중국을 지배하는 입장에는 놓여 있지 않았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휘종 치하의 북송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려의 지지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휘종은 정화(政和, 1111~1117) 연간에 고려와의 교빙을 요와 대등한 국신(國信)의 수준으로 제고시켜, 그 업무를 국신소로 이관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의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과명(科名)을 주어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서긍이 보고 간 고려는 인종 치하에 있었기는 하나, 예종이 16년 동안 경영하여 안정시켜 놓은 데서 크게 변화하지 않은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종은 육지로 연접해 있는 요와 금을 적절하게 조종해서 국내의 안정을 기하기를 꾀하고, 북송과 교빙하여 문치의 터전을 닦기에 힘써 볼 만한 치적을 올렸다. 예종은 강성해지는 여진족을 초기에는 무력으로 제압하는 정책을 써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칭제하여 금제국을 세우고부터는 그 세력이 강성하여지지 못하게 하는 방도를 강구하기에 부심하였다. 예종은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이 힘의 평형을 이뤄서 북송을 포함한 네 나라가 균형을 유지하면서 공존하게 되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북송의 휘종은 요에 대한 굴욕을 씻기 위해 신흥 세력인 금과 협력하여 요를 타도하려고 했다. 예종은 그 일을 알아차리고 그의 재위 말년(1122)에 중국의 의관(醫官)을 통해 휘종에게 요를 타도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휘종은 그 후 고려 예종의 종용을 무시하고 금과 함께 협공하여 요를 멸망시켰고, 또 그렇게 해서 강성해진 금에 의해 북송도 망국의 화를 입고, 휘종 부자는 북으로 잡혀가 버리는 참변을 당했다.
예종 11년(1116)부터는 고려에서는 요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간지기년(干支紀年)을 실시하면서 송ㆍ요ㆍ금과는 그야말로 등거리 외교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의 고려의 실정을 보고한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를 마치 북송의 복속국가를 다루는 듯한 어투로 설명을 시도하였다. 국력이 대단치 않고 점유한 영토도 퍽 작았던 북송은 당시 말로라도 허세를 부리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북송의 학자나 정치가들이 이른바 정통론(正統論)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짙은 낭만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한 심리가 작용한 소치라고 이해된다. 고려는 당시 15세의 소년 국왕인 인종 치하에 있었으나, 북송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규모와 방법이 극히 엄연하였고, 사절단을 극력 환대하면서도 사절 인원이 방자하게 굴지 못하도록 절도 있게 조종하였다.
서긍은 고려에 와서 주로 개경에 머물러 있었고 또 개경은 고려의 수도였으므로, 《고려도경》에는 자연 개경을 중심으로 한 기사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려도경》 첫머리에 ‘건국’과 ‘세차’ 두 권을 두어, 고려족의 건국전세(建國傳世)의 개략과 상고 이래 중국과의 접촉 상황을 간단하게 적어서 전체의 실마리로 삼았다. 건국에 관한 기사는 제사(諸史)를 참고해서 작성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 본다면, 그 중에 참고되는 부분이 전무하지는 않지만, 사실(史實)을 왜곡하였거나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를 고구려와 연결시켜 이해하려고 하여 혼동을 일으켰고, 삼국의 정립과 통일신라 내지는 후삼국 등에 관해서는 극히 무식하였음을 나타냈다. 다만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보고 고려와의 동족성 내지는 연계성을 의식하는 듯한 서술은, 《오대사(五代史)》 사이전(四夷傳)의 발해 부분을 적기한 것이기는 하나 다소간 시사를 던져 주는 점이 없지 않을 것 같다. 소년 국왕 인종을 성인(成人)의 풍도가 있어 동이(東夷)의 현왕(賢王)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주목을 끌기도 한다.
서긍은 제3권 ‘성읍’의 서문에서, ‘그 땅에 들어가면 성곽이 우뚝하여 사실 깔보기 어렵다.’라고 개경에 들어오면서 다소간 위압을 느낀 듯한 말을 했다. 그는 고려의 강토와 군읍(郡邑)에 대해 언급하였으나 상세하지는 않고, 개경의 형세와 도성 및 황성의 성문ㆍ문궐(門闕)ㆍ궁전 등에 걸쳐 중점적으로 설명을 시도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등 우리의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규모가 완전히 파악되어 있지는 않으나, 직접 관찰한 기록이어서 우리 자료에서 볼 수 없는 사실을 보존한 의의가 크다. 일례를 들면, 장령전(長齡殿)은 건덕전(乾德殿)의 동자문(東紫門) 안에 있는, 규모가 건덕전을 능가하는 전각인데, 거기서 중국 사신의 도착 통지의 서한을 받고 중국 상인들이 오면 역시 거기서 그들의 물품을 헌납 형식으로 받고, 그 가치를 따져서 방물(方物)로 그 가치의 수배에 상당하게 그들에게 보상해 준다는 것이다.
관부(官府)는 서긍이 가 본 곳이 적어서였던지 창고ㆍ약국ㆍ감옥 등을 포함한 6종만을 기술했다. 다만 그 기사를 통해 관록(官祿)ㆍ의약ㆍ형벌 등에 관한 당시의 실제 상황을 추측할 수 있게 하여 준다.
서긍은 고려의 인물을 소개하는 데 있어, 서문에서 지전주(知全州) 오준화(吳俊和)를 위시한 관원 57인을 직함과 함께 나열하고서, 이자겸(李資謙)ㆍ윤언식(尹彦植)ㆍ김부식(金富軾)ㆍ김인규(金仁揆)ㆍ이지미(李之美)의 5인을 개별적으로 소개하였다. 이 5인은 당시 문벌귀족의 인물로, 이자겸ㆍ지미 부자(父子)가 끼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자겸을 현신(賢臣)이라고 말해 놓고 그의 탐욕 치부하는 상황에 언급하여 가석하다고 맺었다. 그리고 김부식을 당시의 고려에서 으뜸가는 문장으로 소개하였다. 서긍에게 비친 당시 고려 인물의 면모라고 하겠다.
국왕의 관속과 의장 물건을 비롯하여, 황성을 중심으로 한 개경의 경비를 담당하는 친위부대의 규모와 무기 및 거마에 이르는 제반 사항을 비교적 주도하게 기술하고 있다. 《고려사》의 여복지(輿服志)에 따르면, 요ㆍ금ㆍ송에서 각기 국왕의 관복을 보내 주었다. 그러한 연유로 국왕의 관복은 자연 중국풍이 짙어졌던 것으로서, 서긍의 기술에도 그 점이 지적되어 있다. 평시에는 국왕도 서민과 다름없이 조건백저포(皁巾白紵袍), 즉 검은 두건에 흰 모시 웃옷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서긍이 그것을 목격하지는 못하고 전문을 기록한 데 불과하였을 것이다. 국왕의 의장 물건 12종, 의장대 18종, 병기 8종, 기치 7종, 거마 7종이 각각 소개되어 있는데, 《고려사》 여복지의 의위(儀衛)에 열거되어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각종 의장 물건의 형제(形制)와 용도가 설명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당시 도성을 수비하는 친위부대의 병력이 상시 3만을 유지한다고 하였다. 당시의 인구나 국력으로 보아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고려에서는 국가의 종교로 불교와 도교가 신봉되었으나, 도교의 규모는 불교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개경에는 불교 사원이 많았는데, 서긍은 사원에 관심이 컸던 것 같아서 짧은 체류 기간 중에 28개소에 달하는 사원을 답사하였다. 그 중에서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를 가장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안화사는 예종이 창건한 사원으로, 당시 고려에서 가장 웅장ㆍ미려한 것으로 알려졌고, 송 휘종도 이 절의 건립 소식을 듣고 사신을 시켜 건축비ㆍ불상ㆍ어서 전액(御書殿額)ㆍ채경(蔡京)의 사명문액(寺名門額) 등을 보내주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송 휘종과의 인연도 있고 하여, 사절단 일행은 안화사를 찾아가 휘종의 글씨가 수장되어 있는 어서전(御書殿) 아래서 배례하고서 불승들을 공양하고 복을 빌고 돌아갔다. 서긍은 불승의 의복제도에 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다.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법안종(法眼宗) 일파가 중국에서 동래하여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으로 말한 점이다. 법안종은 중국의 건업 청량사(建業淸涼寺)의 법안 문익(法眼文益)에 의해 전해진 선종(禪宗)의 일파로, 화엄초지(華嚴初地) 중의 육상의(六相義)를 들어 삼계유심(三界唯心)과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종지로 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법안종의 전래에 대한 역사적 규명은 한 가지 흥미 있는 과제라고 하겠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불승 중에 중국어로 독경할 수 있는 자가 있어 서긍이 그것을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범패(梵唄)는 우리말이어서 그가 전연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지금도 불가의 독경은 현토하지 않고 한자음만을 절주에 맞춰 낭송하는 것으로 미루어서, 서긍이 들은 중국어의 독경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의 한자음으로 읽는 독경도 절주가 중국 독경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어서, 중국인도 대체로 알아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도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승려의 계급으로는 왕사(王師)를 정상으로 하여, 국사(國師)ㆍ삼중화상대사(三重和尙大師)ㆍ아사리대덕(阿闍梨大德)ㆍ사미비구(沙彌比丘)ㆍ재가화상(在家和尙) 여섯을 들었는데, 그 중 재가화상이 가장 주목을 끈다. 서긍의 설명으로는 이들은 결코 승려가 아니고 머리털과 수염을 깎인 형여지역인(刑餘之役人)으로, 관가의 각종 노역에 복무하고 전시에도 출정하여 전투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품종(品從)이나 백정(白丁)을 두고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도교에 관해서는 복원관(福源觀)과 도사의 복장에 관한 기술뿐이다. 서긍은 서문에서 예종이 도록(道籙)을 받아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해서 불교 대신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올려놓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는 말을 했다. 이것은 고구려 말년의 연개소문의 종교 정책을 연상하게 한다. 예종이 도교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시 고려 상하에 그런 말이 나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한편 또 서긍의 이러한 말은, 도교 황제인 송 휘종에 대한 일종의 아유적인 언사로 풀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종이 훙거하자 그의 장자인 인종이 이자겸의 힘으로 곧 즉위하였는데, 그해 12월에 예종의 도교 정책과 관련이 깊었던 한안인(韓安仁)과 이중약(李仲若)은 왕권을 위요한 갈등에 말려들어 피살되었다. 이러한 일 등을 가지고 본다면, 또 예종 생전의 도교로의 경도(傾倒)가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도 여겨진다. 도불 이외에 각종 신사(神祠)에 관해서도 기술되어 있다.
서긍은 서민과 그 생활 전반에 관해서도 널리 관찰하였고, 그것을 5권의 편목을 써서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당시는 8세기 경의 과거였으나 오늘날과 유사한 성향 내지 풍습을 보여 주는 예가 적지 않았다. 민간에 팽배한 교육열을 그 한 가지 예로 들 수 있다. 제19권 ‘민서(民庶)’의 서문에서 ‘사민(四民)의 업 중에서 선비[儒]를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글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하였고, 제40권 ‘동문(同文)’의 유학(儒學)에서는 국자감 같은 국립 교육기관 이외에도 민간의 교육열의 대단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舍)가 두셋씩 늘어서 있어,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운다.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한테서 글을 배우니, 아아, 훌륭하기도 하다.”
이러한 교육열은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살아야겠다는 의욕의 표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글을 모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정도였으므로 당시의 교육열은 대체적으로 볼 때, 우리 겨레가 문화를 애중하는 성향을 나타낸 것이 극히 오래 전부터임을 말해 주는 사례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 같다. 여자가 아기를 등에 업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풍경을 당시에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인들은 깨끗해서 목욕을 자주 하고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웃곤 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오늘날과 조금 다른 점도 없지 않았다. 황성의 긴 행랑에는 10칸마다 장막을 치고 불상을 설치하고서는, 큰 독에 숭늉을 채워 놓고 국자 따위를 마련하여 두어 오가는 사람이 귀천 없이 아무나 마시게 하고, 중이 그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철저한 급수공덕의 실천이다. 물론 지금도 공원이나 유원지 같은 데에 수도가 마련되어 물을 마시게 해 주고 있지만 그 작풍이 판이하다.
당시의 고려에서는 공예를 숭상해서 그 기술자 중에 뛰어난 자들은 복두소(幞頭所)와 장작감(將作監)에서 일하게 하였고, 그들의 수입과 사회적 지위는 농민들이 따라가지 못했다. 공예품에 관해서는 제28권부터 5권에 걸쳐 ‘공장(工匠)’ㆍ‘기명(器皿)’이라는 두 가지 제목 하에 수십 가지 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서긍은 고려에서 청도기(靑陶器)를 소중히 여긴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말하는 고려청자다. 그는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취색이라 한다 하였는데, 그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고 말했다. 고려청자로 된 기물은 대부분 중국의 것들과 형태가 같아 생략하고, 술준[樽]만은 같지 않아서 소개하였다. 그 술준의 형상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청자 술준이다. 서긍을 가장 감탄케 한 것은 청자 향로다. 그것은 산예출향(狻猊出香)이라 하여 사자모양으로 된 청자 향로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위에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맞이하는 연꽃이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오직 이 물건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祕色)과 여주(汝州)의 신요기(新窯器)와 대체로 유사하다.”
이 산예출향으로 불리는 청자 향로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의 청자공예는 이미 중국을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도경》에는 북송과 고려의 선박 구조가 소개되어 있다. 신주(神舟)로 부르는 중국의 관선(官船)은 그 구조에 관한 설명이 없으나, 민간 선박인 객주(客舟)의 구조는 비교적 상밀하게 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객주는 목선으로, 길이 약 30m, 깊이 약 9m, 위폭 약 8m로 선창이 3분되어 위아래로 각종 시설이 베풀어져 있다. 신주는 물에 뜨면 산악같이 우뚝하다고 형용하고 고금에 그 유례가 없다고까지 하여, 객주보다 훨씬 거대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편 고려의 선박은 4종이 소개되어 있는데 다 구조가 간략하다. 서긍이 소개한 고려의 선박들은 그가 목격한 연안을 항해하는 것들에 그치고 고려의 외항선은 볼 기회가 없어서 소개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사절단의 숙소는 순천관(順天館)으로 웅장하기가 왕궁을 능가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본래는 요의 사신을 유숙시키기 위해 건립하였던 것이다. 수백 명의 사절단 일행이 불편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서긍은 순천관을 극히 면밀하게 구석구석까지 설명을 시도하였다. 순천관에서 사절단 일행에게 매일 3식을 계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제공하고 차도 역시 매일 세 차례씩 끓여서 대접한다. 그리고 사절단이 순천관에 도착한 날에 베푸는 불진회(拂塵會)를 첫 번으로 하여 5일에 한 차례씩 사절단 전원에게 주연을 베푼다. 물론 사절단도 자체의 숙수들이 있어 가지고 온 식료품과 기명을 써서 주연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러한 순천관에서의 일상생활 이외에 국왕과의 사적(私覿 사적인 상면)ㆍ연음(燕飮)ㆍ헌수(獻酬) 등 연례(燕禮)가 있으나 다 극히 형식적이었다.
사절단의 공식 임무인 송 휘종의 조서를 전달하는 의식은 번잡한 절차를 취해 가며 절도 있게 거행되었다. 조서는 인종의 즉위에 붙여 송에의 협력을 당부하는 내용의 것이 주요한 것이고, 인종에게 문상(問喪)하는 내용의 조위조서(弔慰詔書)는 부수적인 것이다. 예종에의 제전(祭典)에 쓰는 송 휘종의 어제 제문이 있다. 먼저 회경전(會慶殿)에서 조서를 받고, 수일 후에 장경궁(長慶宮)의 제실(祭室)에서 제전 예물을 진열해 놓고 휘종의 제문을 정사가 낭독하게 하여 제전 의식을 끝내고, 잠시 후에 다시 인종의 조위 조서를 정사로부터 받는다. 이렇게 해서 공식절차를 끝낸다. 이러한 조서를 받는 의식절차는 송 황제와 고려 국왕 및 주인과 빈객을 따지는 예법상의 논리가 엄연하다.
이러한 서긍의 《고려도경》은 고려 시대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당시의 국제 사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적이 보탬이 될 것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서(宣和奉使高麗圖經序)
천자가 정월 초하루에 큰 조회(朝會)를 갖는데, 뜰에다 천하[四海]의 도적(圖籍)을 다 늘어놓아 왕(王)ㆍ공(公)ㆍ후(侯)ㆍ백(伯)이 만국에서 모여들어도 그들을 다 헤아려 알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유사(有司 담당 관원, 여기서는 도적을 관장하는 책임 맡은 관원)가 그것들을 수장함이 특히 엄격하고 신중하며, 사신의 직책 중에서도 더욱 이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옛날 주(周) 나라의 직방씨(職方氏)는 천하의 지도를 맡아 가지고 천하의 땅을 관장해 다스려서 그 나라의 도비(都鄙 도회지와 변두리)와 사이(四夷)ㆍ팔만(八蠻)ㆍ칠민(七閩)ㆍ구맥(九貊)ㆍ오융(五戎)ㆍ육적(六狄)의 인민을 분간하고 그 이해(利害)를 두루 알았던 것으로, 행인(行人)의 관원들이 도로에 연달아 있었다. 경축과 군대의 위문, 재앙을 떨쳐 버리는 불제(祓除) 같은 따위의 행사에는 무릇 다섯 가지 종류의 일[五物]치고 처리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안락과 재액ㆍ빈곤 같은 따위의 경우에는 무릇 다섯 가지 일의 분별에 참고할 책이 없는 것이 없어, 그것들을 가지고 왕에게 복명하여 천하의 일을 두루 알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외사(外史)는 그 일들을 써서 사방의 지(志 관계기록)를 만들었고, 사도(司徒)는 그것들을 모아 지도를 만들고, 송훈(誦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살필 일을 일러 주고, 토훈(土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토지의 일을 일러 주었다. 이 때문에 더할 수 없는 존귀함으로서 깊숙한 구중궁궐에서 높이 팔짱끼고 지내면서도 사방 만리의 먼 곳을 손바닥 보듯이 환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패공(沛公 후의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처음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갔을 때 소하(蕭何)는 혼자서 진(秦) 나라의 지도와 호적을 거둬들였는데, 천하가 평정되기에 이르러 한(漢)에서 그 요해지와 호구를 남김없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소하의 공로였다. 수(隋) 나라의 장손성(長孫晟)이 돌궐(突厥)에 가서는 사냥 나갈 때마다 그 국토의 상세한 상황을 기록하곤 하였고, 돌아와 문제(文帝)에게 표문(表文)을 올리고서는 입으로는 그 형세를 말하고 손으로는 그 산천을 그리곤 하다가 마침내 그 일로 후일의 보람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니 유헌(輶軒 천자의 사자가 타는 수레)을 타고 다른 나라에 사신가는 자로서는 도적(圖籍)에 대해 실로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하물며 고려는 요하(遼河)의 동에 있어서,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와서 바칠 수 있는 후복(侯服)이나 전복(甸服)과 같지 않기 때문에 도적의 작성은 더욱 어렵다. 황제는 천지와 같은 덕업(德業)으로 만국을 다 내조(來朝)하게 하여 고려가 예우를 받도록 돌보았거니와, 신령하신 선왕(先王)께서는 더욱 따르게 만드시어 인재를 뽑아 조정에 있게 하여 위무(慰撫)와 하사(下賜)의 어명을 받들게 하시었으니, 은혜의 융숭함과 예의 후함이 전례가 없었다.
이제 급사중(給事中) 신 윤적(允迪)은 경전에 통달한 재주와 세상에 뛰어난 문장으로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오랜 명망이 드러나 있고, 중서 사인(中書舍人) 신 묵경(墨卿)은 학문의 훌륭함이 행실에 나타나 충효를 근엄하게 지키고 일에 임해서 마음이 변하지 않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사명을 받들고 가게 되었으니, 이들은 비단 부절(符節)을 가지고 전대(專對 타국에 사신으로 가서 모든 질문에 응답함)하는 것이 옛날의 선량한 사신에 못지않을 뿐더러, 풍채와 명망도 조정의 위엄을 드높이고 외국인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임명을 받고서 아직 떠나기 전에 마침 왕우(王俁)가 훙거하였음을 알게 되어 드디어 제사를 지내고 조위(弔慰)하는 예를 겸임하고 갔다.
나는 우매한데도 외람되이 빈 자리를 채우게 되어 사신의 말석에 끼이게 되었다. 큰 일이야 물론 그 장(長)의 결정에 따라야 하겠지만,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은 또 조정에서 자격에 따라 시킨 일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에 부족하다. 물러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실하게 찾아서 묻고 의논하라’고 황황자화(皇皇者華)의 시에 노래되었으니, 일을 두루 묻는 것은 정사(正使)된 사람의 직책일 것이다. 그래서 삼가 이목이 미치는 데 따라 널리 여러 설을 채택하여, 중국과 같은 것은 뽑아 버리고 중국과 다른 것들을 취하니 도합 3백여 조가 되었다. 이를 정리하여 40권으로 만들었는데, 물건은 그 형상을 그리고 일은 설명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 명명하였다.
신이 숭녕(崇寧 1102~1106) 연간에 왕운(王雲)이 찬술한 《계림지(鷄林志)》를 본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 설(說)만 기록하였으나 그 형상은 기록하지 않았다. 근자에 사신 행차 때 그것을 가져다 참고하였는데 도움이 이미 많았다. 이제 신이 저술한 《도경》은 손으로 펼치고 눈으로 보고 하면 먼 이역땅이 다 앞에 모이게 되는데, 이는 옛날 쌀을 모아 지세의 모형을 만들던 유제(遺制)이다. 그렇기는 하나 옛날 한대(漢代)의 장건(張騫)이 월지(月氏)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13년 후에 돌아왔는데도, 겨우 월여를 머물렀을 뿐이요, 숙소가 정해진 뒤에는 파수병이 지켜 문 밖을 나가 본 것이 5~6 차례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거마를 달리는 동안과 연석에서 수작하는 경우에 이목이 미쳐 간 것은 13년이라는 오랜 세월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건국(建國)과 입정(立政)의 근본과 풍속과 사물의 상황을 대충 터득할 수 있어서, 그것들을 그림과 기록에서 빠지지 않게 하였다. 감히 박식을 자랑하고 경박함을 가다듬어 황상의 총명을 흐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들을 모아서 조정에 복명하여 명령받은 책임을 다소나마 면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어부(御府)에 바치라는 조명(詔命)이 있어 삼가 그 대강의 경위를 추려서 서문을 지었다.선화 6년 8월 6일
봉의랑(奉議郞) 충봉사고려국신소제할인선예물(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 사비어대(賜緋魚袋) 신(臣) 서긍 근서(謹序)
奉議郞,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賜緋魚袋臣徐兢。撰。
聞天子元正。大朝會畢。列四海圖籍于庭。而王公侯伯萬國輻湊。此皆有以揆之。故有司所藏。嚴毖特甚。而使者之職。尤以是爲急。在昔成周。職方氏掌天下之圖。以掌天下之地。辨其邦國都鄙,四夷,八蠻,七鬪,九貉,五戎,六狄之人民。周知其利害。而行人之官。駱驛道路。若賀慶槁襘之類。凡五物之故。
莫不有治。若康樂厄貧之類。凡五物之辨。莫不有書。用以復命于王。俾得以周知天下之故。外史書之。以爲四方之志。司徒集之。以爲土地之圖。誦訓道之。以詔觀事。土訓道之。以詔地事。此所以一人之尊。深居高拱於九重。而察四方萬里之遠。如指諸掌。當沛公初入關。蕭何獨收秦圖書。及天下已定。而漢盡得知其阸塞戶口者。繄何之功。隋長孫晟之至突厥。每游獵。輒記其國土委曲。歸表聞於文帝。口陳形埶。手畫山川。卒以展異日之效。然則乘輶軒而使邦國者。
其於圖籍。固所先務。矧惟高麗。在遼東。非若侯甸近服。可以朝下令而夕來上。故圖籍之作。尤爲難也。皇帝天德地業。畢朝萬國。乃眷高麗。被遇神考。
益加懷徠。遴擇在廷。將命撫賜。恩隆禮厚。前未之有。時給事中臣允迪。以通經之才。超世之文。取甲科著宿望。中書舍人臣墨卿。學問高明。見於踐履。恪守忠孝。臨事不回。竝命而行。非獨其執節專對。不減古人之膚使。而風采聞望。自足以壯朝廷之威靈。聳外夷之觀聽。拜命未行。會聞王俁薨。遂以奠慰之禮兼往。臣愚猥承人乏。獲聯使屬之末。事之大者。固從其長。而區區得以專達者。又不足以補報朝廷器使之萬一。退而自訟曰。周爰咨詢。歌於皇華之詩。則徧問以事。正使者之職。謹因耳目所及。博采衆說。簡去其同於中國者。而取其異焉。凡三百餘條。釐爲四十卷。物圖其形。事爲之說。名曰宣和奉使高麗圖經。臣嘗觀崇寧中王雲所撰雞林志。始疏其說。而未圖其形。比者使行。取以稽考。爲補已多。今臣所著圖經。手披目覽。而遐陬異域。擧萃於前。蓋倣古聚米之遺制也。雖然。昔漢張騫出使月氏。十有三年而後歸。僅能言其所歷之國地形物產而已。臣愚雖才不逮前人。然在高麗纔及月餘。授館之後。則守以兵衛。凡出館。不過五六。而驅馳車馬之間。獻詶尊俎之上。耳目所及。非若十三歲之久。亦粗能得其建國立政之體。風俗事物之宜。使不逃乎繪畫紀次之列。非敢矜博洽。飾浮剽。以塵冕旒之聽。蓋摭其事實。以復于朝。庶少逭將命之責也。有詔上之御府。謹掇其大槩。爲之序云。宣和六年八月日。奉議郞,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賜緋魚袋臣徐兢。謹序。
[주D-001]직방씨(職方氏) : 중국 경전의 하나인 《주례(周禮)》는 이상적인 관제(官制)를 엮어 낸 것인데 그 하관(夏官)의 하나로 직방씨(職方氏)가 들어 있다. 직방씨는 각 지방의 일을 맡아 보는 관직으로, ‘천하의 지도’는 《주례》에 설명된 직방씨의 직책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2]천하의 지도 : 정현(鄭玄)의 주에 따르면 여지도(輿地圖) 즉 지도다. 서긍이 《고려도경》에 그렸던 그림은 설명된 내용으로 보아 실물들을 그린 것들이었을 것이다.
[주D-003]사이(四夷)……육적(六狄) : 주(周)에 복속했다는 미개 족속들을 나열한 것이다. 사이(四夷)는 동방의 이(夷), 남방의 만(蠻), 서방의 융(戎), 북방의 적(狄). 그밖의 것들은 개별적인 명칭이 전해지지 않는다. 《周禮 夏官 職方氏 鄭司農注》
[주D-004]행인(行人) : 《주례》에는 추관(秋官)에 속하는 벼슬로 빈객(賓客)을 맡아 보는 것이 그 직책이다. 대행인(大行人)ㆍ소행인(小行人) 등이 있다. 행인은 사자의 의미로도 쓰였으나 역시 《주례》의 행인의 직책과 연결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주D-005]다섯 가지 종류의 일[五物] : 《주례》 우관 소행인의 직장(職掌) 설명에 나오는 말로, 제후국에, 1. 상사가 있으면 부의(賻儀)를 보내 도와 주고, 2. 흉년이 들면 구호 양곡을 거두어 보내 주고, 3. 전사(戰事)가 발생하면 재물을 모아서 지원해 주고, 4. 복된 일이 있으면 경하해 주고, 5. 수해나 화재 같은 재앙이 있으면 위문해 주는 다섯 가지다.
[주D-006]외사(外史) : 《주례》의 춘관(春官)에 속하는 관원으로, 외국에 보내는 명령을 쓰는 일을 맡아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07]사도(司徒) : 《주례》 지관(地官)의 대사도(大司徒)를 말한 것으로, 그 직장(職掌)은 나라 토지의 그림과 그 백성의 수효를 확정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08]송훈(誦訓) : 《주례》 지관에 속하는 관원으로, 사방의 기록에 있는 오래된 일들을 설명해서 임금이 각 지방의 옛일을 살피게 해 주는 것이 그 직책이다.
[주D-009]토훈(土訓) : 역시 《주례》 지관에 속하는 관원으로, 지도를 설명해서 각 지방의 사정을 살펴 알게 하는 것이 그 직책이다. 임금이 지방을 순시할 때에는 토훈이 임금의 수레 양곁에 붙어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10]소하(蕭何) : ?~B.C.193. 한 고조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이른바 개국명상(開國名相)으로 꼽혀 장량(張良)ㆍ한신(韓信)과 함께 삼걸(三傑)로 불리기도 한다. 《漢書 卷39》
[주D-011]장손성(長孫晟) : 552~609. 활쏘기를 잘했는데 그가 돌궐(突厥)에 수항사자(受降使者)로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머리가 영리한 사람이어서 돌궐을 공략할 준비를 미리부터 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隋書 卷51》
[주D-012]문제(文帝) : 수(隋)의 제1대 임금. 그의 재위 기간(581~604) 중에 중국이 통일되었다. 《隋書 卷1》
[주D-013]선왕(先王) : 송 철종(宋哲宗, 재위 1085~1099)을 말함.
[주D-014]인재를 뽑아 : 고려의 인재를 말함. 북송(北宋)의 철종(哲宗)은 원부(元符) 2년(1099, 고려 숙종4)에 고려로 하여금 학인(學人)을 북송에 보내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자재들을 북송의 국자감에 보내 수학하여 빈공과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宋史 高麗傳》
[주D-015]윤적(允迪) : 성은 노(路). 생몰 연대는 미상. 급사중(給事中)은 문하성(門下省)에 속하는 벼슬로서 제칙박정(制勅駁正)의 일을 관장한다. 《고려사》 인종 원년 6월에는 노윤적의 관직 명이 예부 시랑으로 되어 있다. 송대의 관제(官制)로는 급사중에서 옮겨 가는 다음 자리가 예부 시랑이다
[주D-016]묵경(墨卿) : 성은 부(傅). 생몰 연대는 미상. 세 차례에 걸쳐 고려에 사신으로 왔었다. 《尙友錄 卷18》 중서 사인(中書舍人)은 중서성(中書省)에 속하는 관직으로, 조고제칙(詔誥制勅)을 관장하는데, 문사(文士)로서는 명예스러운 지위로 여겼다.
[주D-017]왕우(王俁) : 고려 예종(睿宗). 1122년 4월에 훙거(薨去). 《高麗史 睿宗世家》
[주D-018]황황자화(皇皇者華)의 시에 노래되었으니 : 황황자화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 사신을 보낼 때 불러 주던 노래로 인용된 구절은 제6장 끝 한 구.
[주D-019]왕운(王雲) : ?~1126. 자는 자비(子飛), 진사(進士)로 사신을 수행하여 고려에 다녀가 《계림지(鷄林志)》를 저술하여 비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郞)에 발탁되었고, 그 후 북송이 멸망할 때까지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거쳐 자정전 학사(資政殿學士)까지 지냈다. 《宋史 卷357》 《계림지》는 산일되고 전해지지 않는다.
[주D-020]그 설(說)만……않았다 : 기록만 있었지 그림은 없었다는 말.
[주D-021]쌀을 모아……유제(遺制) : 후한 때의 장수 마원(馬援, B.C.14~49)이, 외효(隗囂)가 이끄는 군사는 토붕와해(土崩瓦解)할 형세에 있음을 설명하면서 광무제(光武帝) 앞에서 쌀을 모아 산골짜기를 만들고 그 군사의 형세를 지적해 주어 광무제가 그 상황을 잘 알기에 이르렀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54》
[주D-022]장건(張騫) : ?~114. 한 무제(漢武帝) 건원(建元) 2년(B.C.139)에 대월지(大月氏)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수행원 1백여 인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떠났으나 흉노(匈奴)에 잡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몇 차례의 탈주 끝에 대월지를 거쳐 원삭 3년(B.C.126)에 간신히 귀국했다. 장건의 견문은 한 무제의 서역 경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漢書 卷61》
[주D-023]봉의랑(奉議郞)……사비어대(賜緋魚袋) : 북송(北宋) 원풍(元豐, 1078~1085) 연간에 개정된 37계(階)의 문산신관(文散新官) 중에서 봉의랑(奉議郞)은 제24계이고 구관(舊官)으로는 저작랑(著作郞)에 해당된다. 종정시(宗正寺)의 속관이다. 《宋史 卷169》 북송 휘종(徽宗)의 정화(政和 1111~1118) 연간에 고려에 보내는 사신을 ‘국신(國信)’으로 승격시켰는데, 국신은 국신사(國信使)의 약칭으로 나라의 신서(信書)를 가지고 가는 사신이라는 뜻이다. 《宋史 卷487 高麗傳》 국신소(國信所)는 본래 거란[契丹]과의 교빙(交聘)을 관장하던 관서로, 고려에의 사신을 국신으로 승격시킨 것은 당시 북송에서 고려를 국제 관계상 중요시했음을 나타낸 것이다. 서긍은 고려와의 교빙을 담당한 국신소의 관속으로 충원되었는데 그 임무는 인원ㆍ선박ㆍ예물 등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제할(提轄)’은 인원과 물건 등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탁지관(度支官)의 하나이다. ‘비어대(緋魚袋)’는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송의 사륙(賜六) 중 끝의 것. 본래는 하급 조관(下級朝官)을 20년을 지낸 자에게 내리는 것인데 특지(特旨)로 내리기도 했다. 송대의 비어대는 귀천(貴賤)을 표시하는 데 쓰였으니 당대(唐代)에 조관의 신분증 구실을 했던 것과는 달랐다. 은색 주머니에 붉은 빛의 물고기 형상을 그린 것을 띠 뒤에 달고 다니게 되어 있었다. 《唐書 車服志》《宋史 職官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