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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답사기
-언제:2015.2.1
- 어디로:지하철 5호선 김포공항 송정역->마천역 1번출구->성불사
->연주봉 옹성->서문-수어장대->남문->북문->마천역
작가 김훈의 소설,<남한산성,학고재,2007>을 읽기 전까지
남한산성은 그저 한여름 날,
계곡에 발담그고 닭 백숙이나 먹는 행락지 쯤으로 여겼었습니다.
2월의 첫 날,휴일 오후에 지하철 5호선을 타고
그 옛날 병자년 겨울,
'죽음으로 의로울 것인가,아니면 삶으로 치욕을 감당할 것인가'의
기로에 섰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남한산성에 올랐습니다.
뒤늦게 읽고, 만난 소설 속 또다른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의 먹먹한 역사의 현장이었던 치열한 역사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와 하남,성남에 걸쳐 있는 남한산성은
수천년 동안 산성과 도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한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작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문화와 역사의 현장 입니다.
우리나라 호국 유적의 백미로 꼽히는 곳으로 산성 건축의 최고봉답게
20개의 성문과 5개의 옹성,6개의 암문도 그렇지만
역사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다했던 곳이었습니다.
장구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산성의 외성과 내성의 성벽을 따라 걷다보니
곳곳에 빛바랜 성벽에서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점철된
호국 의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목을 거창하게 '남한산성 답사기'로 붙였지만
기실,답사라는 것이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책한권 달랑 읽고 수천년의 역사가 숨쉬는 산성을 답사한다는 것이
참으로 가당찮은 일인것 같습니다.
남한산성'소풍'(바람속을 거닐다) 정도가 적당할 듯합니다.
서울의 서쪽 끝자락 강서구의 김포공항 옆, 송정역에서
지하철 5호선을 타고 동쪽 끝 종착역인
강동구의 마천역에 도착합니다.
마천역 1번 출구를 나와 왼쪽 길로 접어들면
눈 앞으로 저 멀리 남한산성의 청량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루먹은 세월
두발로 살기 힘들어 네발로 뛰지만
이젠 똥을 똥으로 본다.
꼬리만 잘 흔들면
비를 맞지 않아도
누우런 이빨에 고기점이 물리고
밤잠도 넉넉하다
계절이 바뀔 땐
털갈이를 적당히 하고
냄새만 잘 맡으면 된다
그렇다. 땅에다 귀를 대지 않아도
마음 놓이고, 요즘은
내가 할 싸움을 사람들이 하고 있다.
오, 뼉다귀 하나에
일천 방울의 기름이 튀는 밤,
도둑놈의 집에서 도둑을 지킨다.
- 원광,<개>
성불사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산중턱으로 난 가파른 길을 박차 오르면 산성으로 빨리 오를 수 있지만
일부러 완만한 돌아가는 길을 택했는데
인적이 드물고 산새들만 조잘대는 호젓한 길이 이어졌습니다.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 오세영,<2월>중
죽어서까지 아낌 없이 주는 나무 등걸에 앉아
잠시 물 한모금 마십니다.
그림에 여백이 있듯 산행에도 휴식이 있어야 제맛입니다.
이쁜 여자가 스쳐 지나가면
내 다리는 갑자기 감속되다가
급기야는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야!
(이상할 게 없어요
뒷걸음질이 건강에 좋다는 설도 있으니)
- 정현종,<이쁜 여자가 스쳐 지나가면>
모든 오솔길은 그 자체로 이미 애틋함의 표상입니다.
호젓한 오솔길은 고독,내면,고요함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길은 '위례 둘레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등산로엔 유난히 소나무가 눈에 많이 띄었는데
내성길과 외성 성벽길을 따라가다 보니
장구한 세월 산성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멋스러운 소나무들이
겨울 숲에서 청량감을 더해주었습니다.
마천역 1번 출구에서 천천히 걸어와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 방향으로 오르는 언덕에서
아래로 펼쳐지는 서울 송파구 일대를 봅니다.
지상 123층, 높이 555M.
현재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초고층 빌딩인
송파구 잠실동 '제2롯데월드'가 웅장한 위용을 드러냅니다.
인허가 과정에서 부터 인근 비행장 활주로 방향까지 틀면서 논란이 되더니
최근에는 주변 도로의 싱크홀과 인근 석촌호수의 수위 저하등
벌써부터 후유증의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처럼 아직 꼭대기 부근은 공사가 한창인데도
저층부 조기 개장을 위해 임시 사용승인 신청서를 서울시에 제출했다고 합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세월호..
도대체 얼마나 더 참담한 사고를 겪어야 안전불감증이
이 땅에서 사라질까요.?!
잔설이 쌓인 겨울숲 위로 남한산성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좌초한 인간들.
가닿을 수 없는 높이를 강인하게 추구하다가
한기(寒氣)를 끌어 모아 서리를 뱉어내는 겨울 땅에
결국은 드러눕는 인간들.
언젠가 이른 봄 그대들이 찾아낸 새파란 무덤 하나
그대를 향해 왈칵 달려드는 풀내음
그것이 우리가 끝까지 살아야 했던 이유이다.
-조정권,<산정묘지19>중
완경사와 급경사를 반복하던 숲길은 어느새 평탄해지면서
드디어 연주봉옹성에 다다랐습니다.
연주봉 옹성 바깥쪽의 이곳 외성길에서
본성으로 들어갈 참입니다.
연주봉 옹성 포루를 통해 본 아차산과
그 뒤로 휘뿌연 연무속의 휩싸인 북한산입니다.
연주봉 옹성에서 바라 본 북쪽 성벽입니다.
저 꼭대기 부근은 아마도 '벌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산성의 성곽길은 반듯하지 않습니다.
자연이 만든 굴곡을 그대로 따라 갑니다.
연주봉 옹성 아래쪽은 행정 구역으로 하남시 일대 입니다.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탓인지
저 멀리 아파트 단지와 확연히 구분됩니다.
우측으로 보이는 산은 검단산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12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여
성곽길을 따라 걸으면 사방으로 활달한 조망을 즐길 수 있습니다.
산성건축의 백미,연주봉 옹성 끝부분의 동그란 포대에서
산성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을 봅니다.
작년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로 새롭게 보수 공사한 흔적이 보입니다.
연주봉 아래로 이성산성이
한강 너머 고구려의 요충지 아차산성과 보루들이 줄지어 섰습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조선임금 인조가 병자년 겨울,이곳 산성에 갇힌
47일간의 피란 생활이 그려집니다.
끝내 치욕스러운 결과를 맞이하며 소설은 끝을 맺지만
소설의 여운 탓인지 이처럼 수려한 산성이
애처롭고 먹먹하게 다가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오자
인조는 47일여만에 이곳 남한산성의 서쪽문을
스스로 걸어 나와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호령에 따라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도'를 행합니다.
조선의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였으며 세계사에도 보기 드문 치욕이었습니다.
남한산성에는 다섯개의 옹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병자호란을 겪고 난 다음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업그레이드를 시킨 결과물 입니다.
다섯개의 옹성 중 이곳 연주봉 옹성이 가장 높은 지대에 쌓은 옹성입니다.
"그해 겨울,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살아서 죽을 것인가.
옛터가 먼 병자년의 겨울을 흔들어 깨워,
나는 세계악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
그 같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절말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내지 못할진대,
땅으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으리."
- 김훈,<남한산성>중
사람이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그 길들을 모아 기록하면 그것이 곧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따뜻한 햇볕과 한줄기 바람...
소소한 한포기 풀도 이곳 산성 길에서는 풍경이 됩니다.
이곳 연주봉 옹성은 본성과 비밀의 암문을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능선을 따라 동서로 길게 쌓여져 있으며,
성벽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60~70도 정도 기울여 쌓았습니다.
또한 남쪽은 지형이 완만하므로 성벽을 높고 가파르게,
급경사 지역인 북쪽은 오히려 다른 곳에 비해
낮고 완만하게 쌓았습니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을 중심으로 하여
북족으로 연주봉과 벌봉,동쪽으로 망월봉,남쪽으로 몇개의 봉우리들을
연결하여 쌓았습니다.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많았습니다.
동,서,남,북문..그리고 사이 사이에 16개에 이른다는 이런 암문까지.
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곧 산성을 나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조지훈,<석문(石門)>중
오 계절이여,
오 성곽이여!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랭보
주봉인 청량산을 중심에 두고 성벽이 좌우로 흘러내렸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남한산성을 걸어보니
산봉우리들은 큰 의미가 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북쪽으로 연주봉옹성,동쪽엔 봉암성과 한봉성이 본성을 호위하고
남쪽에는 신남성이 굽어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산줄기에 장장 12킬로미터나 되는 성벽이 본성과 외성을 타고 넘으며
산성의 서쪽 아래는 한성 백제의 왕궁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저 앞으로 보이는 강남의 대모산성이 겨울 한낮의 풍경속으로
수려하게 펼쳐집니다.
남한산성에서 서울 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포인트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저 아래 데크보다 지금 서있는 이 곳에서의 조망이 훨씬 활달했습니다.
남한산성의 길위에 서면 과거와 현재의 공존하며
시공간을 넘나듭니다.
성문이란 성의 안과 밖을 통하는 관문입니다.
성문은 성곽의 상징시설물로 내외의 출입에 편리한 지점에
동서남북 방향별로 한곳씩 성문을 마련하는 것이 기본이었는데
저 아래로 보이는 문은 서문입니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로 적의 침입이 쉽지 않았습니다.
축성이후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남한산성은
사실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강화도를 단념하고 이곳 남한산성으로 향했던 조선의 임금 인조는
남한산성의 남문으로 들어와 47일 후
두어 사람이 지나기에도 좁고 낮은 이곳 서문(우익문)을 통해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기 위해 걸어 나와야 했습니다.
남한산성은 치욕의 역사 때문에 비통하게 느껴지지만
서문을 넘어 북문을 돌아 동문까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은
성곽 안쪽에서 걸으면 역사와 나란히 걷는 듯하고
바깥쪽에서 걸으면 자연과 맞닿은 느낌을 줍니다.
자연과 역사가 함께 숨쉬고 있는 남한산성은
소나무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합니다.
장구한 세월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저 소나무들은
병자호란 당시의 남한산성의 치욕의 역사를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시절에 상관없이 성곽을 흘러간 세월의 유장함이 느껴집니다.
청량당 남쪽 담장에는 족히 350년도 넘어 보이는 향나무가 서있습니다.
나무의 곁가지가 청량당의 저 담벼락을 뚫고 밖으로 뻗었는데
억울하게 죽어간 이회의 서슬퍼런 한을 떠올리게 합니다.
청랑당은 남한산성 축조 과정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입니다.
청량당은 매바위와 함께 애절하고 원통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회는 조선 인조 2년 남한산성을 축성 할 때에 동남쪽 부분을 맡았는데
공금을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는
억울한 모함을 받게 되어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부인도 남편의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 하였는데
그 후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이곳에 사당을 지어 그들의 넋을 달래게 했습니다.
수어장대의 매력은 이곳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온전히 드러납니다.
웅장한 건축미와 고목들 그리고 늦은 오후의 호젓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어장대 마당 한켠, '수어서대'라는 글자가 새겨진 저 바위는
'매바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바위에는 산성을 쌓을 당시의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는데
남한산성 축성 총책임자 이회는
산성을 기초부터 치밀하고 견고하게 쌓느라 공사 기한을 못지켜
주변의 모함과 비방에 이곳에서 억울하게 참수당할 당시
어디선가 날아온 매 한마리가 앉아서 처형이 끝나자 날아갔던 바위로
실제로 바위에 매 발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때
왜놈들이 떼어갔다는 얘기가 전해져 옵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으로 선대의 왕들이 겪었던 치욕과 원한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인조의 통한과 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효종을 생각하며
영조가 직접 쓴 글씨입니다.
무수히 많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웅장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어장대는 우리 조상들의 혼이 느껴집니다.
'장대'는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으로
남한산성 내에는 원래 5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수어장대만이 온전하게 남았습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이곳 수어장대에 올라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수어장대는 성안에 남아있는 건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남한산성의 위용을 자랑합니다.
삶으로 가는 길은 어디로 나 있을까요.
그곳이 어디든 갈 수 없는 길과 나아가야 할 길은
결국 저렇듯 포개져 있습니다.
치욕의 현실 위에서 삶의 길은 열리는 것이며,
치욕 역시 삶의 일부라고 ‘남한산성’은 가르쳐 주는 듯 합니다.
거목과 어우러진 고색 짙은 성벽에 켜켜히 쌓인
역사와 자연의 숨결을 온전히 느끼기에는
하루해가 무척 짧았습니다.
행복을 여는 열쇠는
금고를 여는 구멍과 맞지 않고
마음을 여는 구멍과 맞는다
- 정채봉
남한산성길을 따라 걸으며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등장 인물들의 고뇌를 떠올립니다.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실용주의자 이조판서 최명길.
'모든 환란의 시간은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다시 맑게 피어날 것'으로
믿었던 예조판서 김상헌의 원칙주의!
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기회주의자 영의정 김류까지.
기실 '역사'에서의 가정은 무의미 하고
또한 역사는 어느 한쪽의 편에도 설 수도 없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침묵할 수 밖에 없지만,
길이 있기에 우리는 그 길을 계속 따라 걷습니다.
길 위에 이야기가 있고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의 성곽길 모퉁이에서 만난 여백.
구부러진 성곽길처럼 나만의 리듬과 속도로 가볍게 그리고 천천히
산책하며 걷습니다.
살아갈수록 길은 낯설다.
뒤돌아보면 추억은 굽이진 몸을 숨기고 있다.
걸을 때마다 앞길은 자구 끊어져 있고
끊어진 길을 잇다보면 뒷길도 끊어져 있었다.
문득 길의 끝이 바다에 묻힐때
먼 수평선에 닿을수 없는 길이 보였고
닿을수없는 길이 산에 밟혀 있을 때
깜깜한 동굴에 몸을 감추는 길의 옷깃이 보였다.
김문희, <낯선길> 중에서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브리서 13:14
별과 달 중에 누가 더 외로울까.
힌트는 별은 무수히 많은데 달은 혼자라는 것.
그래,별이 더 외롭지
무수히 많은 속에서 혼자인게 훨씬 외롭지...
당신처럼,나처럼.
-별과 달 중에,< 내 머리 사용법,정철 지음 58쪽>
여장은 체성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합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지자 산성안에는 탐방객들이
하산길을 서둘러서인지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내려다본 노을에 물들기 시작하는 서울 시내
2천만 수도권 시민들의 식수원인 팔당댐에서 흘러내린 물이
한강을 이루고 강건너 남양주시와 하남시 일대도 노을에 물들어 갑니다.
수어장대에서 북문으로가는 임도입니다.
너른 도로 옆으로 울창한 소나무숲이 인상 깊었습니다.
벌목재를 옮기거나 산림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도로라고 하는데
유사시에는 물자를 수송하거나
화재를 진압하는데 기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아침이 오고 또 봄이 오듯이 새로운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이 성 안에서 세상은 끝날 것이고 끝나는 날까지 고통을 다 바쳐야 할 것이지만,
아침이 오고 봄은 기어이 오는 것이어서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왔듯
성 안에서 성 밖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없다 하겠느냐..."
- 김훈,<남한산성>중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습니다.
수천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이곳 남한산성도
햇볕과 달빛속에서 역사와 신화가 되었습니다.
우리내 삶도 햇볕과 달빛으로 어우러져 역사와 신화가 되는 것처럼.
쇠잔해진 하루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성안의 탐방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성안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해질녘 아직 남한산성안에 남아있다면
고요히 걸어 서문 방향으로 가볼 일입니다.
"멀리 떨어지는 석양은 성머리에 닿아서 불처럼 붉다...(중략)
...그러나 그도 잠시까지는 석양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요히 바라보면 지나가는 건 그저 바람이요 구름뿐이다."
- 이태준,<城>
쇠잔한 하루해는 무어 그리 바쁜지 시나브로 서산 너머로 떨어지고
그 하늘 언저리에 타는 노을은 산성의 성벽도
보는이의 마음도 붉게 물들입니다.
남한산성의 겨울 야경을 보려면 혹독한 바람과 고독을 견뎌야 합니다.
해가 저물면서 성곽의 산행객들은 일제히 하산길을 재촉하고
산성 안은 호젓함과 고요함이 동행하는 시간입니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탐방 코스 역시
방금전까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해가 서산 너머로 내려앉으니
한적한 공간으로 변신했습니다.
해가지고 밤이 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드라마틱 했습니다.
해가 지고나면 처음에는 서쪽하늘을 중심으로 붉은빛이 보이는데
이후 푸른색이 돌다가 이른바 '매직아워(magic hour)'에는
푸른빛에서 붉은빛으로 하늘에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이 펼쳐집니다.
아쉽게도 사진 기술 부족과 장비를 갖추지 않아
이런 과정을 밀도있게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야경을 감상하는 최고의 포인트는 서문에서 조금 올라온
바로 이곳 성곽 위입니다.
역사의 흔적이 담긴 남한산성에서 만나는 서울의 야경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남한산성은 백제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 역할을 한 요충지였습니다.
어둠이 짙어지고 찬바람이 불어오는 성곽 위에 서니
마치 성루를 지키는 옛 병사가 된 듯 애틋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회적 총체성이 축소된 결정체,
자본주의의 본질적 중심인 동시에 자본주의가 가진 착취,불공평,소외가
필연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곳"으로 '도시'를 보았습니다.
과거와 현재,풍요와 빈곤,평등과 불평등이 공존하는 곳.
거대한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도시는
우리에게 살기 힘든 동시에 떠나기도 힘든,
편리함과 기능성에 몸을 싣고 있지만 언제나 벗어나길 꿈꾸게 되는
그런 곳이 되었습니다.
새해 벽두 부터 앞만보고 내달리다 보니 어느새 1월이 훌쩍 지나고
맞는 2월의 첫날,
잠시 이곳 남한산성의 성벽길에서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짧게는 2백년에서 수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남한산성을
반나절만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역시 무리였습니다.
서울 근교 탐방코스로 가장 인기 있는 곳중 한 곳이라는 남한산성은
본성에서 외성까지 천천히 음미하며 다 돌아보려면
넉넉잡아 8시간 이상의 산행을 해야하는 곳이었습니다.
역사와 자연이 함께 살아 숨쉬는 남한산성 성벽길을 걷는 백미는
거목과 어우러진 고색 짙은 성벽을 감상하며
곳곳에 켜켜히 쌓인 먼저 살다간 옛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려 마천루의 빌딩숲인 서울 시내의 야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과거와 현재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버스나 지하철로 배낭에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떠날 수 있는 남한산성 답사 여행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행궁과 여러 다른 옹성 등 수많은 유적지들은 감히 범접조차 해보지 못한
이번 남한산성의 짧은 '소풍'을 마치고 생각해보니
단순히 병자호란 패배의 치욕이 서린 곳으로 인식되었던 남한산성이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초대형 전시 수도이자,민족의 생존을 지켜온 최후의 보루로
후손들이 충분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유산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들이 많이 생기길 기원합니다.
-끝.
글,사진:윤선한
Wheresoever you go, go with all your heart.
- 공자
첫댓글 사진+친절하신 설명 늘 눈팅만 하다보니 미안하고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
언제나 한 편의 작품을 만들어내시는 손길에
경탄하며 감사할 따름입니다.^*^
즐겁게 감상하였습니다.....
가슴에 남는 글과 사진...삶의 도움이 됩니다. 감사....?
마지막 사진 압도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