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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불교회관 승만합창단 가을 성지순례 경북 영주 부석사
불교사적위치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상 대사의 전기와 부석사의 창건설화가 자세히 전한다.
“의상의 속성은 박씨이며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주)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남다른 데가 있었는데, 성년이 되어 출가하여 산천에 노닐다가 불도에 들었으며 성품은 매우 천연덕스러웠다. 일찍이 법을 구하러 원효 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국경에 이르러 폭풍이 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 길가의 토굴 속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은 옛 무덤의 해골 사이에 누워 있었다. 하늘은 비로 자욱하고 땅은 질어 이번에는 벽돌 굽는 곳에서 밤을 보내는데 채 밤이 깊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들이 괴변을 부렸다. 원효가 탄식하며 이르기를, ‘어젯밤에는 토굴 아닌 무덤에서 잠을 자도 편안했었는데 오늘밤에는 초저녁부터 도깨비굴이 있다 생각하니 탈이 많구나.
마음먹기에 따라 가지가지의 일이 생기는구나(一切唯心造). 차별하는 생각이 없어지니 토굴이건 무덤이건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만법이 오직 생각 탓으로 생기는 것이라.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는 것을 무엇 때문에 법을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노라.' 라고 하였다. 이에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갔지만, 의상은 굳은 각오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하며 당나라로 향하는 상선(商船)을 탔다.
669년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여 한 신도의 집에 머물렀다. 집 주인은 대사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머무르게 하였는데, 얼마 후에 고운 옷을 입고 아름답게 화장을 한 선묘(善妙)란 처녀가 사랑을 속삭여 왔다. 그러나 마음이 돌과 같이 굳은 의상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자 도심(道心)을 일으켜 그 앞에서 대원(大願)을 발하여 말하길, ‘내세에 태어나 스님께 귀명하고 대승을 배우고 익혀 대사를 성취하리다. 제자는 반드시 신도가 되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공급하리다.' 라고 하였다.
의상은 그 뒤 장안(長安)의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지엄 삼장(智嚴三藏) 밑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대사는 극히 미묘한 도리를 이해하고, 전체의 흐름을 알고 그 행함에 절도가 있고, 요령이 있어 덕의 그릇에 가득 찼다고 할 수가 있고, 가히 삼장의 바다에 기꺼이 노닌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리하여 귀국 날짜를 정하고 등주에 있는 신도 집에 다시 들렀다.
대사는 수년에 걸친 뒷바라지에 감사를 표하고 상선을 타고 귀국하게 되었다. 뒤늦게 대사의 출발을 알게 된 선묘는 대사에게 드릴 법복과 여러 가지 집기를 들고 해안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대사가 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멀리 가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를 올려, ‘내 본래의 참뜻은 법사를 공양하는 데 있습니다.
원컨대 이 의복을 담은 함이 저 배에 날아 들어가기를 기원합니다.' 라고 하며 파도 위로 함을 던졌다. 때 마침 거센 질풍이 불더니 함은 새털같이 날라 배 위에 떨어졌다. 선묘는 다시 맹세하기를,‘이 몸이 큰 용(龍)으로 변하여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대사님이 무사히 본국에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웃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한 원력은 통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마침내 그녀의 몸은 용이 되어 혹은 약동하고 혹은 굽이치면서 배를 안전하게 이끌어 나갔다.
의상은 본국에 되돌아온 후 산천을 두루 찾아 고구려와 백제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았다. 마침내 그곳을 찾았으나 이미 삿된 무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스님은 혼자 생각하기를, ‘여기야말로 땅이 신령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된 법륜을 돌릴 만한 곳이다. 권종이부의 잡귀 무리들이 오백명씩이나 모여있을 까닭이 무엇이냐.' 라고 하였다.
의상은 마음 속 깊이 대화엄의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곳이 아니면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느낀 것이다. 그 때 의상을 항상 따라다니며 지키던 선묘룡(善妙龍)은 대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허공에서 대변신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넓이와 깊이가 1리쯤 되는 바위가 되어, 가람의 정상을 덮고 막 떨어질 듯 말 듯 하니 많은 잡귀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사는 절 안에 들어가 『화엄경』을 펴기 시작하였다.
겨울에는 햇빛이 있는 낮에, 여름에는 서늘한 저녁에 강설을 하여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국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였으나 대사가 아뢰기를, ‘내 법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등하게 보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없이하여 한가지로 합니다.
『열반경』에는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내 어찌 전답을 소유하고 노비를 소유하겠습니까. 빈도(貧徒)는 법계를 집으로 삼아 발우를 가지고 밭갈이를 하여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의 혜명, 즉 지혜로운 생명이 이 몸을 빌려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대사의 강설(講說)이 심은 나무는 꽃을 피우고, 그가 대화를 통해 이룬 숲은 열매를 맺었다. 대사는 설한 바와 같이 행함을 귀히 여겨 강설하는 일 외에 수련을 부지런히 하였다.
세계와 국토를 장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일이 없었고, 항상 온화하고 서늘하였다. 늘 의정 스님의 더러움을 씻는 법을 실행하여 어떤 종류의 수건도 쓰지를 않았으며, 시간이 되어 마르도록 내 버려 두었다. 또 의복과 병(甁)과 발우(鉢盂)의 세 가지 것 외에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았다.
대개 제자들이 도움을 청하면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가라앉는 때를 기다린 후에 깨우쳐 주었다. 의문나는 점을 술술 풀어서 조금도 찌꺼기가 남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이후 대사는 정처 없이 구름처럼 떠다니며 마음에 드는 곳이면 어디든지 머물렀다.
이상이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과정이다. 부석이라는 절 이름은 가람이 들어설 터에 잡귀들이 패악을 부리며 방해하자, 대사를 흠모하다가 용으로 변한 선묘가 다시 커다란 돌로 화하여 이들을 물리쳤다는 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무량수전 뒤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선묘의 화신이라고 전한다. 의상 대사를 한 인간으로 연모한 당나라 처녀 선묘의 애틋한 마음이 영원히 깃든 이름이다.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창건 당시 세워진 신라시대의 석조 유물이다. 1300여년전의 이 당간지주에는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대와 깃발이 꽂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쌍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다. 당간지주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왼편 중턱에 우뚝서 있으며, 그 키가 4.8m 이다
원융 국사비 (경북 유형문화재 제127호) 원융국사(圓融國師)는 964년에 태어났으며 속명은 김결응, 자는 혜일이다. 열두살 되던해 출가해 불법을 수행 했고 높은 덕망으로 여러 왕들로부터 존경과 예우를 받았다. 고려 문종때 국사(國師)가 되어 부석사에 있다가 1053년에 입적 했다. 비신은높이1.73m이며,재료는수성암질청석(水成岩質靑石)으로 이루어졌다. 비문은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으나 대체로 온전하며 상세한 내용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수록되어있다. 비신을 받치는 귀부(龜趺)는 휼륭한 각법을 보여준다. 귀부 지대석에는 안상(眼象)과 꽃무늬를 새겨넣었고, 머리는 용두화(龍頭化)했으며 귀갑(龜甲)은 6각형으로 선명하게 새기고 왕자(王字)를 음각했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이 비는 부석사에서 제일 먼저 해맞이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원융국사비는 사진에 담지못했습니다)
이
범종각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각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응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특히 이 범종각은 그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목수가 지붕을 그리했는지를 알수 있으며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난다.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날아갈 듯이 앉아있는데 범종각이 정면을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보인다. 따라서 범종각을 옆으로 않혀놓고 뒷쪽을 맞배로 처리하여 건물이 전반적으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고 답답해 보이지 않아 좋다.
안양루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햠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불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되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잛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장단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맞추어야 하므로 품이 훨씬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집들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 위,아래사진-펌
석등 (국보 제17호) 부석사 석등은 無量壽殿 중심 앞 中庭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安養樓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拜禮石이 현존한다. 이들 석등은 배례석이 있는 부석사는 義湘(625~702)이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창건한 이래, 그 제자들에 의해 法燈이 계속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神琳 이후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華嚴宗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곧 이 무렵은 신라 景文王代(861~874)로서, 부석사가 위치한 太白山은 新羅五岳 중 北岳으로 숭앙되며 비중있는 화엄종 본찰의 중심무대가 됨에 따라, 사찰 내에는 석등 이외에 大石檀, 石龍, 長臺石, 石搭 등이 이 무렵이 9세기에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 또 다른 석등 郡材 2기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이고, 다른 하나는 醉玄屢 앞의 옥개석과 간주석 파편 일부를 통해 알수 있다. ▷ 조사내용 석등의 각 부재는 상륜부만이 일부 파손되었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지표면에 하단부가 묻혀 대석의 하단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지대석은 3매의 판석이 조립된 방형의 지대석으로 상면에는 하대하석을 받치기 위해 弧形의 받침대가 2단 각출되었고, 네 귀는 들림현상이 거의 없이 평이하다.
하대석은 방형의 하대하석 위에 하대상석인 팔각 원구형의 연화대석이 얹혀진 구조로 이들은 각각의 別石이다. 하대하석 상면에는 角形과 弧形의 2단 받침대가 마련되고 側斜面의 상하에는角帶가 돌출되었다. 각대 내부에는 음각면의 안상이 2조씩 모두 8개가 새겨져 있다.
연화대석은 팔각 중심에 복엽 연판문이 모아지고, 그 끝 꼭지에는 귀꽃을 돌려 장식하였다. 이들 팔엽의 연화판 사이의간엽은 상하가 겹친 重辦이다. 연화대석 상,하면에는 받침대가 있는데, 하면은 1단의 높이 30mm의 각형받침이, 상면에는 4단의 높이 65mm의 받침이 角形과 弧形으로 있다.
내부에는 간주공이 뚫렸다.팔각형의 간주석은 한 변이 145mm로 상하의 두께 차이가 거의 없으며 안허리곡도 없는 편이고, 상하끝은 상,하대석에 꽂을 수 있는 촉이 마련된 구조이다. 상대석 역시 팔각꼭지에 팔엽 단판 연화문 중심이 모아지게 구성되었고 화판 내부는 보상화문이 들어 있다
하면은 3단의 받침대가 마련된 후 外緣의 연화문과 연결되고 상면은 2단의 받침대가 마련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각형받침이다. 上臺帶는 50mm로 굵기가 두꺼워 화사석과 상대석의 경계가 뚜렷하며 그 상면은 중앙으로 갈수록 귀솟음이 되어있다. 팔면체의 화문석은 내부가 비어있고 사면에 장방형의 창이 뚫렸으며, 나머지 사면 외부에는 보살입상이 浮彫되었다.
火窓높이 410mm, 너비 170mm로 외곽에는 1단의 윤곽대가 마련되고 윤곽대 내부에는 鐵釘孔이 12개씩 돌려있고 이 구멍은 한쪽에만 14개가 있으며 그 배열도 특이해 개폐시설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바닥에는 가로 180mm, 세로 150mm의 등화시설로 보이는 방형의 段이 한 단 파여 있다.
화사벽에 장식된 보살들은 모두 원형의 두 광이 있고 삼면관을 머리에 쓰고 연화대에 서 있는데 목에는 三道가 분명하며 수인은 양 손을 모으거나, 늘어뜨린 천의를 잡기도 하고 연꽃과 보주를 어깨와 가슴에 들고 서 있는데, 자세들이 모두 자연스러우며 신체가 날씬하다.
이 보살들은 상의는 입지 않고 천의만 양 어깨에 늘어뜨린 상태고 하의는 군의를 입고 있다. 옥개석을 삿갓형태를 하고 팔각 옥개면은 仰曲과 안허리가 분명하며 처마선도 경쾌한 곡면을 나타내고 있다. 옥개 상면은 팔엽복 판연화문의 蓮華冠이 덮혀 있고, 그 위로 호형과 각형의 층급 받침대가 2단 마련되었다. 상단 상륜받침대 동서측 중앙에는 엄지손가락 만한 홈이 파여 있기도 하다.
내부 상면은 상륜부를 낄수 있는 竿孔이 지름 220mm로 뚫려있고 구멍은 처마쪽으로 갈수록 점차 옥개면의 형태로 넓게 벌어져 있다. 상륜부는 원래 보주형의 연봉이 있었는데 현재는 보륜의 중간부까지만 남아 있다. 상륜은 하단부에 촉이 있어 옥개석에 끼워지게 되고 외부에는 호형과 각형의 3단 받침이 있고 보륜 중앙허리에는 4엽의 만개한 연화문이 띠와 함께 돌려져있다.
이외에 석등과 동일한 시기와 양식으로 조성된 배례석이 석등 앞에 자리하고 있다. 석등과의 거리는 800mm이고 안양루와의 거리는 2,250mm 떨어진 상태로, 그 형태는 장방형이며 1,420mm x 850mm x 300mm 크기이다. 배례석 상면 중앙은 子房이 큰 팔엽단판에 간엽이 있는 연화문이 양각으로 시원스레 장식되어 있다. 특히 넓은 자방 외곽에는 원형의 線帶가 돌려 있다. 四面에는 상, 하에 걸쳐 角帶가 한 단씩 각출되어 있고 사이에 안상이 낮으막하게 파여 있는데 앞뒤에는 4개의 안상이, 좌우 측면에는 2개의 안상이 각각 장식되어 있다.
이들 안상 아랫면은 하단부에 마련딘 받침대와 바로 연결되는데 받침대는 3단이 넓게 마련되어 안정감 있다. 이 석등의 가장 큰 특징은 기단부가 방형의 지대석과 하대하석위에 팔각의 복엽 복련대석이 놓여 이루어진 점과 연화대 첨단부에 귀꽃이 장식되어 있는 점, 그리고 화사석 사면에 보살이 장식된 것을 들 수 있다. 즉 종래이 방형의 기단형태에서 팔각형태로 바뀌어 가는 변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기단부 하대석의 연화대 받침대가 원형에서 팔각으로, 그 상면은 간주받침대가 굽형으로 각출된 점 등 양식의 세부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간주석을 받치게 되는 연화대석 상면의 角形과 弧形의 4단의 받침은 형태가 장식적인 층단이 마련되므로, 연화대석 의 높이는 그 폭에 비해 매우 낮게 조성되었다.
상대 앙련이 연판 내에는 花紋이 있고 상대석의 두께도 하대석의 연화대석처럼 얇은 편이며, 이들 상, 하대석의 間葉은 2단의 重瓣 구조를 하고 있다. 화사석의 4개의 화창이 개설된 벽면 四壁에 사천왕상 대신 보살입상이 장식된 것은 매우 특징적이며, 옥개석은 옥개마루 쪽이 갑자기 들려 안허리곡이 심해 날카로운 감도 없지 않다.
이와 같이 연화문의 간엽이 중판인 점, 기단부에 귀꽃과 간주석 받침대의 발생, 그리고 상대 연화문 내의 보상화문이 화사석의 보살상의 장식 등과 같은 세부양식으로 보아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간주석
화사석
하대석
배례석 연화문
3층 석탑 (보물 제249호)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3층 석탑이다. 이 탑은 자인당의 석불들과 함께 이웃 절터에서 옮겨진 것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이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의 중석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8매석으로 짜였고중석 각 면에는 2개씩의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의 중석은 각 면이 1매의 판석으로 짜였고 각 면에는 위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그 위로 탑신부가 올려져 있고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각층의 탑신에는 각기 우주만 있을 뿐 조각을 새기지 않았다.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 5단이고 낙수면의 네 모서리는 약간 반전되었다. 3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그 위의 상륜부엔 현재 노반과 넓적한 복발만이 남아 있다. 본래 탑은 법당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부석사 삼층석탑은 무량수전의 동쪽에 서 있어 궁금중을 자아낸다. 아마도 동쪽을 향해 안치된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방향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삼층석탑은 부석사 창건 당시 조성된 것으로 높이가 5.26m, 기단폭이 3.56m 이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건실하고도 장쾌한 느낌이 든다.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 몰아쉬는 숨을 들이키면 범종루가 눈앞에 들어온다. 이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는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반기고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부석사 동쪽 일명사터에 있던 것을 1966년 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석사의 경관을 흐트리지않고 잘 조화되어 있다. 탑은 지석대 위에 상·하층 기단을 쌓고 우주와 탱주를 각각 새겨 격식을 갖추고 있다. 또,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 5층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분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조사당 (국보 제19호)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응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융국사가 재건한 것이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중수하고 성종 24년(1493)에 단청하였으며 선조 6년(1573)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다.
선비화(禪扉花)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나무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조사가 중생을 위햐여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밑에 꽂았더니 가시가 돚아나고 잎이 피어 오늘에 이르렀다 하며,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에 대한 詩를 짓기도 하였다 한다. 이 선비화의 학명(學名)은 골담초(骨擔草)라고 부른다.
응진전
자인당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2구 (보물 제220호) 이 2구의 불상은 처음부터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의 폐사지에서 옮겨 온 것이다. 양손이 깨어졌고 얼굴과 대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자인당의 두 비로자나불 좌상들은 세부 조각만 약간 다를 뿐 형태와 조각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양감이 없는 경직된 신체와 형식화한 옷주름을 지닌 불상이나 다양한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와 대좌는 모두 9세기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자인당 석불좌상 자인당에 2구의 비로자나불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 역시 부석사 동쪽의 절터에서 옮겨 온 것이다. 여러 형식들이 9세기 신라 하대 불상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선묘룡이 바위로 변하여 잡귀를 쫓았다는 부석
범종각
지장전
석축과 돌계단 부석사에 한 번쯤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석축과 돌계단을 특별히 기억한다.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 하는바가 있다. 즉,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천왕문에서 요사체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 마당에 다다르는데, 마지막 계단으로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맞추어 쌓았다 는 것이다.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예천 용문사(龍門寺)
용문사(龍門寺)는 870년(신라 경문왕 10) 두운(杜雲) 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불렀다고 합니다. 고려 명종 때 '용문산 창기사(龍門山 昌期寺)'로 개명했으나 조선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하고 ‘성불산 용문사’로 다시 고쳤고, 정조때 문효세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소백산 용문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시 승병들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던 자운루가 용문사에 아직도 남아있어 호국불교의 기풍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윤장대(보물 684호)를 비롯 성보문화재 10여점이 현존하며, 조선숙종때 조성된 목각탱화(보물989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특히,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한 윤장대를 돌리면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산사의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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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매력적인 가을 하늘과 풍경에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그리도 보고싶던 티 하나 없는 옥빛 하늘을 볼수있어서 소원성취했지요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할뿐입니다..
준비하시느라 애쓰신 단장님과 총무님 또 보살님들 모두 수고많으셨습니다. 총무님 어쩜이리도 준비를 잘해서 올리셨는지요.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단풍도 울긋불긋 모든사람들의 옷들도 울긋불긋 가을의 정취에 취해 봅니다.사찰의 전경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대로 옮겨와 우리절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미처 못보고 지나친 전각도 있었네요. 총무님 덕분에 다시보니 더 자세히 보게 됐어요 감사합니다거웠어요.
가을의 정취를 맘껏 느껴보는 하루였습니다. 너무너무
공양주님 덕분에 나가서도 공양 맛있게 먹었어요.해탈심 그거도 아주 잘 먹었어요.
참 음식 솜씨들 대단해요.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림이 없다." ...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에서 이렇게 쓴글을 되새겨 봅니다.
승만합창단의 성지순례와 어울리는 좋은 날인 것 같습니다. 정성스럽게 담아오신 아름다움과 곳곳을 잘 설명하여주시느라 수고 많이하셨음에 공부 잘 하겠습니다. ..많이많이 감사합니다. _()_
가을빛에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단풍과 파란하늘의 어울림은 마음을 환하게 합니다. 이렇게 많이 사진에 담아오셔 좀 남아있는지 모르겠네요
준비하느라 바쁘고 이렇게 사진찍어서 올리라 ~ 처음부타 끝까지 수고 마니했어요.
덕분에 우린 즐거운날였지만 .........
사진으로 또한번 그날에 즐거움 느끼고갑니다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 합니다 ,,,,,,,,
겨울에 간 영주 부석사의 추억이 아련히 젖어옵니다. 가을에 묻힌 부석사 정말 곱습니다.
용문사도 아름답군요, 언제가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진으로 아름다움을 보여준 해탈심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