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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과상황 오지은 |
김삼웅(73) 전 독립기념관장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다.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과 <평민신문> 등 기자를 거치면서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엔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가슴을 발로 차이는 등 폭행을 당해 30년 넘게 근육통 약을 먹는다. 한때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지낸 언론인이자, 바른 역사 찾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학자이다.
제주4.3사건 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상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등 그가 맡은 일들은 하나같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집중돼 있다. 관련 서적들만 50여 권 넘게 집필했는데, 특별히 현재까지 스물다섯 명의 생애를 조명한 평전을 써 역사 속 인물을 복원해내고 있다. 김구, 한용운, 신채호, 전봉준, 김원봉, 안중근, 장준하, 조봉암, 함석헌, 안창호, 김근태, 김대중 등을 비롯하여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나 현대사의 첫 단추를 잘못 낀 이승만 평전도 있다.
역사의 인물은 정면교사이기도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해방 70년 질곡의 세월은 인간의 숭고함과 추악함을 모두 담고 있다. 그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이제는 참 무섭게 느껴진다고 했다. 추하고 악한 행태가 반복되는 현실의 세계를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는 방법은 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들의 의로움을 배우는 일일 것이다.
인터뷰는 8월 11일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자택에서 진행했다. 우리 역사 속 ‘레드레터 크리스천’들의 이야기와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의로움에 관해 물었다.
― 최근 집필한 세 권의 책 이야기를 먼저 여쭤야겠습니다. 《10대와 통하는 민주화운동가 이야기》《역사의 절망을 넘어》《몽양 여운형 평전》인데,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10대와 통하는 민주화운동가》는 민주화운동가 20인의 생애를 통해 10대들이 한국의 현대사를 더 잘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습니다. 해방 후 70년 동안 독재정권을 물리치려 일어난 민주 인사·열사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역사의 절망을 넘어》는 해방 70년 역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70개의 사건을 다루었고요. 다른 나라 같으면 1,000년 동안에도 겪을까 말까 한 일을 우리는 70년 동안 모두 겪어야 했습니다. 그 질곡의 역사를 70개의 키워드로 뽑아본 것입니다.
《몽양 여운형 평전》은 ‘기회주의자’ ‘친일파’로 잘못 알려진 여운형의 생애를 재조명한 책입니다. 저는 여운형을 ‘조선의 자주적 독립과 해방,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 싸웠던 진보적 민족주의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 하나 같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었을 텐데, 이런 책들이 어떻게 동시에 출간될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조만간 ‘김규식 평전’ ‘김남주 평전’도 나옵니다. 집필 기간은 사실 30년으로 봐야 합니다. 30대 후반에 ‘60세까지 살게 되면 30명 정도의 평전을 써야겠다’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 역사반역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왔습니다. 제 나이가 이제 70이 넘었으니까, 약 30년간 보아온 자료들이 이제 막 책으로 나오나 봅니다. 포도를 오래 숙성하면 포도주가 되듯, 숙성해놓았던 글들이 지금 나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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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약 2만 8천여 권의 책을 집에서 보관중이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 선생님 댁 서가를 둘러보니 웬만한 헌책방보다 더 많은 책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2년 전 대한출판협회에서 모범장서가로 뽑혀 조사할 때 파악한 분량이 28,000권입니다. 1년에 한 500권 정도는 새로 사고 있으니 지금은 더 늘었겠지요. 해외 출장을 가거나 취재를 가면 관광명소 대신 지역 헌책방이나 고서점에 가서 우리나라와 관련한 책들을 사곤 했습니다.
― ‘10대와 통하는’ 시리즈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7월에는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출간하셨는데요. 특별히 청소년들과의 소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있습니까?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독립이 되었고 민주주의가 지켜져 왔는지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10대들은 거의 학생시위를 못 보고 자랐잖아요. 최루탄도 모르고요. 지금 한국사회를 민주주의사회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열사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립도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땀의 결과이고요. 이런 부분을 청소년들에게 알림으로서 뜻있는 청소년들이 자라나고, 그들이 민주주의를 잘 지키고 사회가 더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 최근 영화 <암살>이 흥행하면서 역사에 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비운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향한 관심도 함께 올라가고 있고요. 2년 전에 이미 《약산 김원봉 평전》을 집필하셨는데요.
어떤 모임에서 <암살>을 단체관람하고 근처 허름한 술집에서 <암살>과 김원봉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이 왔습니다. 김원봉 선생님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달라고요. 이제라도 그런 관심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김원봉 선생은 김구 선생보다도 현상금이 많이 걸렸던 분입니다. 최고의 독립운동 지도자였지요. 그런데 그런 분이 남한에서 쫓겨나고 북에서도 숙청을 당했습니다. 어디를 가도 그분의 무덤을 찾을 수 없습니다. 6·25 때 형제 5명이 군경에 처형당하고, 아버지는 산속에 들어가 굶어 죽었습니다. 밀양에서 강의할 때 80대 노인이 “김원봉 평전을 봤다”며 꽃다발을 주기에 누구냐 여쭈었더니 김원봉 씨 동생이라고 하더라고요. 겨우 여동생 한 분 살아남은 겁니다.
― ‘평전’이라는 장르가 쓰기에 까다로울 것 같습니다. 인물을 미시사로도 보며, 그 인물을 둘러싼 상황은 또 거시사로 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쓰는 사람도 적고, 대중들에겐 생소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평전 장르가 대단히 활발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진 E. H. 카는 평전을 7권인가 썼습니다. 러시아 혁명가나 문학가들의 삶을 추적했지요. 외국은 평전이 하나의 장르로서 읽히고 연구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위인전’으로 대치되어 있으니 고등학생만 되어도 안 읽는 거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삶 한 번만 살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미 25~40여 명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때 묻은 발을 씻겨주니까 내 손이 하얗게 되었다”는 우리말도 있는데, 평전을 쓰면서 정말로 내 삶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 〈복상〉을 구독하는 기독청년들이나 젊은 목회자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인물이 있다면요? 독립운동 초기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 많았습니다. 김규식, 여운형 선생 두 분 다 신앙이 아주 투철한 분들이죠. 김구 선생도 유교, 불교를 따르다가 마지막에 기독교 신앙을 가졌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역경을 이겨낸 치열한 분들입니다. ‘105인 사건’도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을 처단하려고 일제가 조작한 사건이잖아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역량이 참 좋았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저항한 장준하, 김재준, 안병무 선생 등 아주 많습니다.
― 선생님께서도 그분들의 삶을 통해 신앙을 배웠을 텐데요. 자세한 배움은 평전을 읽으며 얻어야겠지만, 그분들의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분들은 모두 예수의 기본 정신에서 삶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기독청년들도 예수의 기본 정신에서 삶을 배워야지요. 예수의 ‘삶’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겁니다. 예수의 삶이 무엇인가요? 불의에 저항하고, 의롭게 사는 것 아니었나요?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 핍박받는 사람, 창기 등의 권리를 위해서 자기를 바치는 길을 갔습니다. 김교신, 함석헌 선생 같은 분들은 이런 예수의 길을 따랐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정신은 예수의 삶 그 자체입니다. 예수의 행동, 그것만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신앙의 본질에 닿을 수 있다고 봅니다.
― 기독교인들이 ‘개인구원’에 치중하게 되면서, 민족주의 역사관 또는 사회운동에 괴리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탈민족주의 관점에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근래에 민족주의를 마치 삭은 개념처럼 말하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한국에 외국인 170만 명이 살고 있고, 이제 다문화사회로 들어서고 있다는 현실을 근거로 드는데요. 주로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탈민족주의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기에 누가 덤비지 못하는 다민족국가입니다. 반면 우리 민족은요? ‘민족’이라는 어휘 자체가 국가 구심력이 되어 있고, 특히 일제강점기 이후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거의 신념화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 중국의 ‘침략적 민족주의’는 배격하되, 폴란드, 아이슬란드처럼 ‘저항적 민족주의’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침략적 민족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를 똑같은 것으로 여겨 몰아내려고 한다면 그건 정말 무식한 짓입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미국주의’이죠.
조선을 괴롭히는 일제에 항거한 것은 선한 민족주의이지, 패권주의가 아닙니다. 평화와 정의를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은 기독교 정신의 근저이기도 합니다. 소외된 이들을 이웃으로 삼았던 예수의 정신만 제대로 받아들이면 ‘저항적 민족주의’와 상충하는 가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석가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어야 하고 유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반면, ‘석가의 조선’ ‘공자의 조선’이 되는 현상을 비판했는데 이는 기독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기독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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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집필한 책. ≪10대와 통하는 민주화운동가 이야기≫(철수와영희), ≪몽양 여운형 평전≫(채륜), ≪역사의 절망을 넘어≫(꽃자리). |
―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가 ‘패권주의’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예수의 정신은 지금의 휘황찬란한 교회와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금관의 예수’를 만들고 있어요. 저는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기독교인 1천만이 넘는 나라에서 동족끼리 이렇게 갈라져 있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를 지배한 일본하고도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6·25 때 적군으로 참전했던 중국, 러시아와도 국교를 수립했고요. 베트남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동족끼리 설탕, 밀가루 한 포대 나눠주는 것을 막아섭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무슨 기도를 할까요. 예수는 공동체의 구원을 추구했던 의로운 분이었습니다. 함석헌, 문익환 선생이 살아낸 가르침들이 거의 묻히고 지금의 교회들은 그냥 기복사상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 《‘독부’ 이승만 평전》(2012)도 쓰셨는데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전을 읽으면 알겠지만, 이승만이 민족반역자이자 민주반역자인 증거가 너무 많아요. 한 예로 1908년 하버드에서 재학 중일 때는 한일합방을 찬미한 외교관 더럼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 의사(志士)의 재판 통역을 의뢰받았을 때 “예수인 신분으로 살인 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사탕수수밭에서 동포들이 애써 모은 돈으로 청했던 거거든요. 이승만의 속내는, 당시 미국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백안시하고 일본을 우방으로 만들고 있을 때였기에 동포를 옹호할 수 없었던 겁니다. 변호도 아니고 ‘통역’을 부탁한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설사 살인범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게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 아닙니까.
― “예수인 신분으로 살인 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던 그가 제주 4·3사건 때는 3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습니다. 6·25 때는 안전하다는 방송을 내보내며 본인은 후방으로 줄행랑을 쳤고, 나중에는 죄 없는 양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학살했는데요.
이승만은 기독교를 이용한 사람이지,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이승만의 책임은 아주 큽니다. 민족을 분단시킨 사람, 반민특위를 해체하면서 친일파를 한 명도 청산하지 못했고요, 한국사회의 여러 모순을 잉태시킨 인물입니다. 자기가 농림부 장관으로까지 임명했던 조봉암 선생을 “좌파” “빨갱이”로 몰아서 ‘사법살인’으로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 모습을 박정희가 그대로 따라했고요.
― 《역사의 절망을 넘어》에서, 이승만이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다가 6시간 뒤에야 북한군의 전면남침 보고를 받은 일과,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7시간 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일을 같은 선상에 놓고 서술하신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통령이 그러고 있는데 나라가 안 망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말은 ‘반공반공’ 하면서 전혀 위기의식이 없는 모습도 비슷합니다. 대통령은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평안하게 함)이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승만,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은 보국안민을 제일 못했습니다. “역사는 반복”이라고 하면, 우리 국민이 참 불쌍합니다. 국가 운명도 비참하고…. 역사라는 게 참 무섭기도 합니다. 합리주의철학자 헤겔은 “역사는 반복된다”며 “처음은 비극으로서 두 번째는 희극으로서”라고 했는데요. 마르크스가 구체적인 예를 드는데, 나폴레옹이 일으킨 쿠데타가 비극이었다면,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는 희극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에릭 홉스봄은 1차대전을 보며 이 말을 정정합니다. “첫 번째가 비극이라면 두 번째는 희극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말입니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비극’이었다면, 박근혜 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체, 국정원의 간첩조작과 선거개입 등 국정의 타락상이 꼬리를 잇는 모습은 ‘절망’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무능한 지도자는 범죄자”라고 했는데요. 이승만, 이명박, 박근혜 세 지도자에게 들어맞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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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집필한 책들. 우측이 그가 쓴 평전이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 같은 책에서 박근혜 정권이 미국에 전시작전권을 무기한 넘긴 일을 역사에 길이 남을 오점으로 기록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데요.
남한은 OECD 국가, 경제력 13위, 군사력 세계 5~7위, 미국과 프랑스로부터 무기 도입이 다섯 번째로 많은 나라입니다. 북한의 40배가 넘는 경제력을 갖추고 있어요. 그런 나라가 국방력을 외국에 의존한다는 건 전 세계적으로 유일합니다. 전시작전권 넘기는 걸 보고 미국 언론에서는 “다 큰 청년이 유모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국방력과 경제력 다 포함해도 북한과의 경쟁에서 우리는 월등히 앞섭니다. 여유 있는 사람이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핵도 못하게 하고, 같이 놀자고 친구처럼 회유해야죠. 그런데 지금은 ‘너는 나쁜 놈이니까 집단 폭행당해야 해’ 하면서 싸우자는 모습입니다. 저는 화해의 역할을 기독교인들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사랑과 용서 아닌가요? 그런 기독교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사실 기독교의 내부 개혁이 절실합니다. 다가오는 2017년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데, 청년들이 그에 버금가는 개혁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무섭게 다가옵니다. ‘일베’ 등 극우 청년들이 등장하고 서북청년단 재건위가 조직되기까지 했는데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기 직전에도 망나니 조직들이 참 많았습니다. 일진회 같은 조직은 주로 20~30대 청년들이었습니다. 이 일진회가 의병 학살에 앞장서고 일본군의 밀정이 되어서 군수품도 나르고 소도 훔쳐서 바치고 했어요. 나중엔 일제 왕에게 조선을 합병해달라고 청원서를 냈습니다. 이보다 더 악독한 짓을 많이 했는데,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이런 집단이 창궐합니다. 한평생을 의롭고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도 할 일이 많은데, 왜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고 진리를 거역하며 하나님을 배역하는 청년들이 생겨나는지 안타깝습니다. 이런 청년들을 푼돈 주면서 조종하는 기성 세력들이 더 문제입니다.
― 역사 속에서 어떤 ‘청년’을 본받아야 할까요?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선두에 섰던 청년들입니다. 4·19는 고등학생이 시작했고, 의열단도 20대 청년들이 주축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켜온 선두에는 반드시 청년들이 기치를 들었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대단히 무기력해 보입니다. 시인 조지훈 선생은 <사상계> 1962년 12월호에서 <당신들 세대만이 더 불행한 것은 아니다-불운의 3대에 보내는 공개장>을 썼습니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4월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절망에 빠지고 어디에서도 희망의 싹이 보이지 않던 때입니다. 반면 쿠데타 주체들은 신흥귀족이 되었지요. 마치 2010년대 한국 청년들이 ‘5포 시대’를 겪고, 중년들은 비정규직, 노인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세대별로 우리가 가장 힘든 세대라고 싸울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통에 참여해야겠지요.
― 여러 인물들의 평전을 쓰면서 ‘삶의 본질’에 대해 깨우치는 기회가 많을 것 같습니다. 관련해서 청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청년들에게 강의할 때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젊어서는 의롭게, 중년에는 정직하게, 노년에는 깨끗하게 살아라.” 이게 가능해지려면 젊을 때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게 절대조건입니다. 그런데 젊어서부터 ‘일베’나 서북청년단 같은 데 참여해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조롱하는 청년들은 정말 사람 되기 글렀습니다. 10~20대가 한참 의로울 수 있는 나이입니다. 청년의 때에 의롭게 살던 사람도 중년이 되면 정직하게 살기 어려워요. 의로움을 지키며 살아야 중년과 노년에도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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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 책더미 위 함석헌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함석헌 선생은 60~70년대 내 사상의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 독립기념관장을 그만둔 사연도 궁금합니다. ‘의로운 삶’과 연관이 있는지요?
이야기가 깁니다. 제가 임명되기 전까지 독립기념관장은 대통령 임명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관리·경영이 엉망이 되다 보니 ‘공모제’로 법이 바뀌었고요. 그때가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로 있었을 때였는데, 제게 독립기념관을 혁신해달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있어 지원했습니다. 15명 중 3명을 추렸고, 그중에서 내가 최고 득점자로 올라가 노무현 대통령이 나를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보수 신문들이 나를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사 있을 때 친일파 관련해서 다루고 그랬으니까, 제가 미웠겠지요. 내가 취임한 후부터 독립운동가 후손도 아닌 사람이 독립기념관장이 되었다고 대서특필을 하더군요. 자리를 뺏었다는 식으로요. 우리 할아버지도 독립운동가입니다.
공모를 통해 들어갔는데 그런 평가를 받으니 참 힘들었습니다. ‘언론의 친일’ 문제를 집요하게 비판한 이력 때문에 <조선일보> 등에 미운털이 박혔던 거죠. 휴일에 단체관람 많을 때 사진과 평일에 관람객 없을 때의 사진을 비교하면서, 제가 관장으로 있어서 독립기념관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기사를 내보내고 그랬어요.
2004년부터 임기 3년을 마치고 정부 산하 200개 기관 중 우수기관으로 뽑혀 기관장 1년이 연장되는 기간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상급기관인 보훈처에서 압력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관장이 되고 독립기념관 전시실에 <조선일보>를 찍어내던 윤전기를 일제 때 친일 어용신문을 찍던 것이기에 지하창고로 치웠습니다. 대신 하와이에서 <독립신문> 찍던 윤전기를 전시했는데, 나중에 그걸 문제 삼으며 철거 경위를 설명하라고 하더라고요. 정부기관에서는 언제 사표 내느냐 닦달을 했어요. 저는 괜찮았는데, 직원들이 불안해하더라고요.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슨 저격 사건 100주년 기념학술대회가 있었는데,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더라고요. 돌아와서 바로 사표를 냈습니다. 어차피 이명박 집권 하에서 정부 산하 기관장을 하는 것 자체가 제 생활신조와 맞지 않아 그만두려던 참이었습니다.
― 이후에도 어려운 일은 없었나요?
개인 은행계좌 추적을 하더군요. 독립기념관이 20년째 전시관 교체가 없었는데 예산이 없어서였어요. 그때 제가 예산을 18억 원 따오면서 전시관 교체를 했거든요. 투명하게 하려고 관련 업체 선정을 조달청에 의뢰했어요. 그런데 조달청에서 선정한 업체 사람이 저와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더라고요. 제 고향이 전남 완도인데, 그 직원은 전북 어디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고향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범위인가요?(웃음) 관장으로 있을 때 항상 직원들에게 누누이 당부했던 말이 “다른 기관에서는 1억 원을 해먹어도 일회성이지만 우리 기관은 100만 원만 해먹어도 독립운동사에 누를 끼치는 것이다”였습니다. 밥 먹은 거 하나까지 다 뒷조사를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참 잔인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어요. 제가 그만두고 나와서 《노무현 평전》 《김대중 평전》 쓰면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니까 ‘이놈을 잡아야 하는데, 책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어떻게든 엮으려고 작업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잘 안 되었나 봅니다.(웃음)
― 그런 핍박들이 혹시 친일 인사들 연구하는 일과도 연관이 있을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노무현 정권 때 국회에서 법 통과해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제가 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때 조사하면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총장 등을 친일행위자로 규명했습니다. 보수 세력으로서는 치명적인 거죠. 자신들의 이념적 멘토들이 반민족행위자가 되니까요. 그러니 나를 좌파로 몰아붙이는 겁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가 아닙니다.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하자는 것뿐이지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우리 여섯 형제와 아들까지, 모두 군대 다녀왔습니다. 세금도 다 냈고 충실히 살아왔는데, 자기들 비판한다는 이유로 나를 “좌파”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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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반복'이라고 하면, 우리 국민이 참 불상합니다. 국가 운명도 비참하고…. 역사라는 게 참 무섭기도 합니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 친일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청산할 기회는 놓쳤다고 봅니다. 사후적으로 약 1,400명의 친일 인사를 노무현 정부 때 지정했지만, 법조계 언론계 경제계 등 현실의 권력자가 된 후손들은 눈 하나 깜빡 안 합니다. 그래도 70~80년대에는 ‘친일파’ 이야기하면 후손들이 움찔하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아주 당당하게 활개를 치고 다니잖아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역사 교육을 바꾸려 하고 있고, 신문과 방송은 이를 옹호하고요.
이제 ‘역사 심판’은 현실 세계에서 투표로 해야죠. 국민의 권리는 세금 내고, 군대 가고, 투표하는 권리밖에 없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선거 때 친일과 독립운동, 항일과 반민족행위 이런 걸 염두에 두고 투표하는 분별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내 발등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발등을 찍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습니다. 도끼질할 때 서투른 사람은 자기 발등을 찍기도 하지만 옆 사람 발등도 찍습니다. 투표도 그래요. 조선왕조 때는 나라가 잘못되면 나라의 왕에게 책임이 있었지만, 민주주의사회에서 나라가 잘못되는 것은 투표를 잘못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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