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두리와 곽태휘는 이번 아시안컵에서 선수단을 지탱하는 든든한 두 고참이다. 국제 메이저대회에서 베테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극과 극의 교훈을 가지고 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은 황선홍, 홍명보 등 고참 선수들과의 적절한 밀당(?)을 통해 팀 분위기와 전력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반대로 홍명보 감독이 이끈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는 내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베테랑들을 완전히 가동하지 못해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이번 아시안컵에서는 차두리(35, FC서울)와 곽태휘(34, 알 힐랄)가 선수단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최고참 차두리는 지난달 제주 전지훈련 소집 때부터 팀의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대표팀이 어색하기만 한 공격수 이정협은 허물 없이 다가오는 차두리 덕분에 한결 편하게 팀에 적응할 수 있었다. 당시 이정협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차)두리 형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조차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라며 즐거워했다.
곽태휘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며 후배들을 일깨우는 스타일이다. 최강희 감독이 대표팀을 맡을 당시에는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다. 홍명보 감독 역시 그가 그라운드 안팎에서 할 일이 있다며 대표팀에 불렀다. AFC 챔피언스리그를 제패한 울산 현대 시절에도 그는 캡틴을 맡았다.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카리스마는 그를 대하는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따르게 만든다.
차두리는 아직 현역 은퇴를 생각할 나이가 아니다. 차두리보다 한 살 많은 이동국도 아직 잘 뛰고 있다. 차두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번 대회를 통해 대표팀에서 은퇴하는 차두리는 ‘차미네이터’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두 차례 어시스트를 통해 그가 보여준 질풍 같은 드리블은 온 국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줬다. 쿠웨이트와의 조별리그 2차전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그는 오른쪽 측면을 시원스럽게 뚫어낸 뒤 크로스를 올려 남태희의 골을 도왔다.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서는 70m 드리블로 상대 진영에 다다른 후 손흥민에게 패스를 내줘 쐐기골을 도왔다. 이 경기를 중계한 이영표 해설위원은 “이 골의 지분은 99퍼센트 차두리에게 있다”며 그를 칭찬했다.
차두리는 이번 대회에서 역대 아시안컵 최고령 출전 기록을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지친 기색은 전혀 없다. 대회 직전 무릎 통증으로 컨디션이 100퍼센트 올라온 상태는 아니었지만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그는 오만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김창수가 오른쪽 허벅지 부상을 당해 전반 초반 교체 투입됐다. 쿠웨이트와의 2차전은 풀타임을 소화했다. 호주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차두리는 결승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에서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그동안 이루지 못했던 아시안컵 우승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라고 있다.
대표팀에서는 은퇴하지만 다행히 소속팀에서는 현역 생활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차두리는 지난해 중반까지만 해도 “이번 시즌이 끝나면 지도자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축구 유학을 가고 싶다”며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소속팀 FC 서울의 만류로 1년 재계약을 맺게 됐다. 차두리는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팬들은 아직 차두리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곽태휘는 수비 뿐만 아니라 공격에서도 유용한 옵션이다. 한층 듬직해진 ‘공중의 제왕’ 곽태휘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 MOM(맨오브더매치)는 멀티골을 넣은 손흥민, 70m 드리블을 선보인 차두리, 왕성한 활동량으로 공수를 오간 김진수도 아니었다. 수비라인을 조율하며 무실점 경기를 이끈 곽태휘가 주인공이었다. 특히 공중볼 경합 상황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볼을 걷어냈다. 공격에서도 그의 ‘머리’는 치명적인 무기다. 우즈베키스탄전 후반에는 기성용의 프리킥을 헤딩으로 연결했으나 공이 골 포스트를 스치고 지나가 아쉬움을 남겼다.
곽태휘는 이날 경기에서 중앙 수비수임에도 무려 14.77km를 뛰었다. 88.16%의 높은 패스 성공률로 슈틸리케호의 빌드업을 책임졌으며 결정적인 태클과 가로채기도 1개씩 기록했다. 대회 직전 엉덩이 근육 부상을 당한 곽태휘는 조별리그 1,2차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 두 경기에서 김주영-장현수, 장현수-김영권 조합이 호흡을 맞춰 무실점했지만 수비 불안이 해소된 느낌은 아니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장신 선수들이 즐비한 호주와의 경기에서는 곽태휘를 선발 출전시켰고, 곽태휘는 이에 보답했다. 호주는 0-1로 뒤진 후반에 팀 케이힐을 비롯한 공격수를 대거 투입하며 반전을 노렸지만 곽태휘가 철벽처럼 막아선 중앙을 뚫지 못했다.
사실 곽태휘는 4년 전만 해도 불안감을 안기는 수비수였다. 지난 2011 카타르 아시안컵 바레인과의 1차전에서는 어이없는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내주는 동시에 퇴장을 당하고 말았다. 호주와의 2차전에 결장한 곽태휘는 인도와의 3차전에 출전해서도 또다시 페널티킥을 허용했다. 인도와 경기에서는 심판 판정이 과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수비수로서 안정감이 떨어졌다. 이 때문에 곽태휘는 위험 지역에서 종종 쓸데없는 반칙으로 상대에게 기회를 내주는 수비수라는 이미지로 각인됐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 소속인 곽태휘는 지난해 아시아 정상에 오를 기회를 눈 앞에서 놓쳤다. 국가대항전이 아닌 클럽 대항전에서다. 알 힐랄은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웨스턴 시드니(호주)에 1,2차전 합계 0-1로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이번 대회가 더욱 절실하다. 아시안컵 홈페이지는 “아시안컵 우승은 곽태휘에게 AFC 챔피언스리그를 놓친 것에 대한 보상이 될 것”이라며 그가 이번 대회에 임하는 각오를 자세히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