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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가 파르바트는 '비극의 산'이다.
파키스탄과 인도, 중국 국경이 머리를 맞댄 히말라야 산맥의 서쪽 끝
펀잡 히말라야 지역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이 산은 1895년 인간의 첫 도전을 받은 이후
1953년 독일의 전설적인 클라이머 헤르만 불Hermann Buhl에게 정상을 내주기까지
58년간 무려 3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 역시 이 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클라이머에게는 '영광의 상처'라 할 수 있는,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두번째 발가락 일부를 절단하는 고통을 맛봤다.
1992년 여름 나는 서울시 산악연맹에서 선발한 대원들과 함께 '악명' 높은 낭가 파르바트에 두번째 도전장을 내밀었다.
2년 전인 1990년 자신만만하게 이 산의 등반에 나섰다가
정상을 400여 미터 앞둔 7700미터 지점에서 기상 악화로 등정을 포기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원정에는 전국에서 선발된 10여 명의 정예 '산꾼'들이 참가했는데,
모두들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지금 생각할 때 1990년 여름의 낭가 파르바트 원정은 무모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가스가 끼고 진눈깨비마저 내려 텐트 바깥에만 나서면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더구나 예고 없이 쏟아져 내리는 낙석과 눈사태는 루트 개척마저 어렵게 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 캠프 1이나 캠프 2에서 쉴 때,
루트 개척에 나섰던 대원들은 대부분 베이스캠프에 두고 온 술과 고기를 생각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슬람 문화가 지배하는 파키스탄에서 술은 금기사항이었지만
서울을 떠나올 때 우리는 술을 빚을 누룩을 몰래 반입해 왔었다.
그 누룩을 이용해서 술을 빚어놓고 등반을 쉬는 날이면 베이스캠프에서 곧잘 '잔치'를 벌였다.
외국의 파티 문화가 그렇듯이 한국의 잔치 문화에도 당연히 고기가 곁들여졌다.
우리는 베이스캠프에서 5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목동 하우스에서 잔칫상에 오를 고기를 조달했다.
목동 하우스에는 베이스캠프 주변의 드넓은 초원지대에
방목하는 염소와 양, 소들이 일일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쿡을 불러 40달러가량을 손에 쥐어주면 목동 하우스에 있는 가축 가운데
한 마리는 어김없이 잔칫상에 끌려 나왔다.
잔치는, 바닥나는 체력을 보충하고 원정의 무료함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등정을 마칠 때까지 우리의 잔칫상에 오른 가축들은 10여 마리에 달했다.
몸과 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깨끗이 하고 정상을 향한 집념을 불태워도 시원찮을 판에,
등반이 제대로 될 리 만무였다.
더구나 히말라야의 신들이 굽어보는 신성한 산 밑에서 살생을 하며 욕구를 채운다는 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쿡이 가져온 고기를 씹어가며 그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빙하가 녹아 흐르는 계곡을 따라서 우리가 잡은 가축의 피가 흥건히 떠내려갈 때도
나는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든 실패하면 흔히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고 했던가.
등반을 포기하고 낭가 파르바트를 등지고 내려오면서 나는 에베레스트를 처음 올랐을 때의 일들을 떠올렸다.
악전고투 끝에 세번째 도전에서 겨우 정상에 올랐을 때의 감격은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대자연의 웅장함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가.
그 나약함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신들의 존재를 인정할 때 비로소 그들의 영역에 한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가.
1992년 낭가 파르바트 원정에 참가하면서 나는 1990년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베이스캠프에서의 '무모한 짓'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정상으로 향하는 루트는 베이스캠프에서 훤히 보였다.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그 루트를 나는 몇 번이고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파키스탄에서는 여름 시즌에 주로 등반을 하는데,
등반 허가를 늦게 받는 바람에 우리 팀은 시즌이 시작되고도 한참이 지나서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등반을 서둘렀다.
히말라야에서는 보통 3, 4일 주기로 날씨가 바뀌었으므로,
타이밍을 제때 맞추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정상 공격 한번 못하고 하산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내 몸은 그것을 읽고 있었다.
나는 후배 2명을 이끌고 캠프 2를 설치한 다음 하루 만에 캠프 4 지점까지 치고 올라가 텐트 2동을 설치했다.
캠프 4는 정상 공격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날씨의 변화를 가늠했다.
낭가 파르바트는 내게 정상을 허락할 것인가?
침낭 속에서 지친 몸을 비틀 때마다 눈보라가 텐트를 덮칠 듯이 몰아쳤다.
눈보라는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하루 종일 꼼짝 않고 텐트에 누워 있었다.
살고 싶으면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하지만 죽을 힘을 다해서 정상 턱밑에까지 올라왔는데 이대로 물러선다는 것은 스스로 납득할 수 없었다.
만일 정상 공격을 포기하고 내려간 다음 거짓말처럼 날씨가 좋아지면 어쩔 것인가.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다시 올라온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베이스캠프에서 2, 3일을 쉰 다음 다시 올라오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가서 날씨가 나빠지면 정상 공격의 기회가 또다시 찾아온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 하루만 더 버텨보자.'
나는 베이스캠프와의 유일한 연락 수단인 무전기를 꺼버렸다.
베이스캠프의 원정대장은 철수 명령을 내릴 게 뻔했다.
등반이 시작되면 선배는 물론이거니와 원정대장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1991년 시샤팡마 등반이 그것을 증명했다.
당시 나는 원정대장의 명령에 따라 정상 공격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눈물을 머금고 철수한 적이 있었다.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의지와 무관했다.
정상을 향해 가는 날 나는 무전기를 켤 생각이었다.
나와 함께 1차 공격조에 속한 후배 2명은 옆 텐트에서 나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바람 소리가 잦아들면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몸 상태는 괜찮은가?"
그때마다 "걱정 마십시요, 버틸 만합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고, 다른 질문이 필요 없었다.
캠프 4까지 올라오느라 모두가 지쳐 있었다.
버너를 켜고 눈과 얼음을 녹여 물을 마셨다.
따뜻한 물 한 모금이 목울대를 적시고 내려갈 때는 생기가 솟는 듯했다.
육체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정신이 맑아졌다.
텐트를 덮칠 듯한 눈보라는 여전했다.
다시 잠들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어렴풋이 정신을 차려 팔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이었다.
옷을 걸치고 등산화 끈을 조이고 장갑을 꼈다.
피켈을 찾아 들고 텐트 문을 열었다.
눈보라는 멈춰 있었다.
다행이었다.
"가자!"
배낭을 어깨에 메고 옆 텐트를 향해 소리쳤다.
잠잠했다.
"가자!"
텐트를 흔들면서 다시 소리쳤다.
잠시 후 텐트 문이 열리더니 후배 한 명이 얼굴을 내밀었다.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둘 다 컨디션이 엉망입니다."
목소리가 가늘었다.
텐트 안을 살펴보니 다른 후배 한 명은 침낭 속에서 미동도 않고 누워있었다.
잠을 좀더 자면 괜찮아질 것 같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캠프 2에서 캠프 4까지 단숨에 밀어붙인 게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었나 싶었다.
"그럼 기다려라."
짧게 한마디를 던지고 텐트 문을 닫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혼자였지만 두렵지 않았다.
마지막 캠프를 떠나 정상으로 향할 때 두려움은 없었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면서 그런 느낌은 매번 똑같았다.
"가자!"
나는 자신을 향해 소리쳤다.
아이젠이 눈 속을 파고 들었다.
숨이 턱에 찼다.
가슴이 아팠다.
폐가 찢어져나갈 것 같았다.
날이 밝았고, 설사면이었다.
무릎을 적시던 눈은 어느새 가슴 위까지 차올랐다.
그런 눈 속에서 허우적댄 게 벌써 8시간째였다.
마지막 캠프를 출발할 때부터 사방이 눈이었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베이스캠프에서 보아두었던 등반 루트는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피켈로 쌓인 눈들을 후려치며 길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전진할 것인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았다.
감각이 없었다.
불현듯이, 이대로 가다가는 눈 속에 파묻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후퇴해야 한다.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나를 향해 소리치는 듯했다.
호흡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몸을 돌렸다.
우선 살고 보자.
올라온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갑자기 바람이라도 불어서 내가 올라온 길이 눈에 묻힌다면 끝장이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내려가야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몇 걸음 움직였지만 아이젠이 바닥에 찍혀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체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나는 미친 듯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몸이 눈 속에 처박힐 때마다 팔꿈치로 기다가 다시 일어났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고 온몸이 흥건히 젖었다.
악몽을 꾸는 듯했다.
눈을 헤치고 다시 일어섰다.
마지막 캠프였다.
텐트 안에 머리부터 쑤셔대고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한번 쓰러지면 못 일어날 것 같았다.
내 몸은 후배들이 누워 있는 텐트로 향했다.
텐트 문이 열리더니 후배가 얼굴을 내밀었다.
"가자!"
땅거미가 질 때까지는 시간이 넉넉했다.
일단 캠프 2까지 후퇴한다면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캠프 2에는 2차 공격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못 가겠습니다."
후배가 대답했다.
정상을 향해 출발할 때 침낭 안에 누워 있던 다른 후배는 여전히 꼼짝 않고 있었다.
캠프 4에 도착하고 이틀 동안 겨우 물만 마시며 누워 있었다고 했다.
정신을 멀쩡한데 일어나 앉지를 못했다.
고소 증상으로 인한 하반신 마비였다.
나는 그런 환자에 대해서 정확한 보고를 하지 않은 후배를 나무랐다.
하지만 잘잘못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내 불찰이라고 생각했다.
무전기를 꺼내들고 베이스캠프에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알렸다.
베이스캠프에서는 그동안 왜 무전기를 끄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질타를 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캠프 2에 대기하고 있는 2차 공격조를 구조대로 올려보낸다는 교신이 들려왔다.
캠프 2에서 캠프 4까지는 제아무리 빨리 올라와도 하루 이상이 걸렸다.
캠프 4에 주저앉아서 마냥 그들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벨트를 채워라!"
한시라도 빨리 마지막 캠프에서 벗어나서 고도를 낮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환자의 허리에 자일을 묶을 수 있는 안전벨트를 채우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다리에 등산화를 신겼다.
다행히 후배 한 명은 내가 정상 공격을 하는 동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괜찮아졌다고 했다.
나는 그 후배와 번갈아가며 환자를 끌기 시작했다.
혼자 몸으로도 내려가기 힘든 길을 하반신이 마비된 환자와 함께 내려간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3명 모두 벼랑으로 굴러떨어져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피켈을 움켜쥔 손에 힘이 가해졌다.
눈이 허리까지 차는 구간을 통과할 땐 피켈로 눈을 후려쳤고, 경사가 급한 구간을 만나면 피켈로 바닥을 찍었다.
수직의 얼음벽에서는 10여 미터를 내려오는 데 1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한나절을 쉬지 않고 움직였는데 마지막 캠프에서 직선 거리로 고작 300여 미터밖에 내려오지 못했다.
그사이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음식을 제대로 입에 대지 못한 상태에서 눈 쌓인 밤길을 더듬어 내려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우리들은 모두 극도로 지쳐 있었다.
캠프 2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남았고, 구조대 역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발가락은 여전히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상태였다.
당장 등산화를 벗어서 발가락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비부아크할 지점을 찾는 게 순서였다.
환자를 눕혀놓고 설동을 파고, 밤새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얼음 바닥에 등짝을 붙이고 끙끙거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무엇보다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후배의 몸 상태가 걱정이었다.
캠프 4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우리들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베이스캠프에서 무전 연락이 왔다.
캠프 2와 캠프 4의 중간 지점인 캠프 3에서 누군가 우리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들을 기다렸다.
정상을 향하는 등반대라면 분명 마지막 캠프에 칠 텐트가 있을 것 같았다.
얼마 후 우리가 내려갈 아래쪽 루트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베이스캠프에서 만났던 외국 등반대였다.
마침 그들에게는 텐트가 있었다.
환자가 있다는 설명을 하고 손가락으로 우리가 떠나왔던 마지막 텐트를 가리켰다.
당신들 텐트를 쓰는 대신에 캠프 4에 설치한 우리 텐트를 사용하라는 신호였다.
눈에 덮였던 길이 우리가 내려오면서 자연스레 다져진 상태라서 캠프 4까지는 그들의 걸음으로 1시간 정도면 족했다.
절박한 건 우리 쪽이었지만, 그들로서는 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정상을 가기 위해서는 캠프 4를 반드시 거쳐야 했고,
그들 역시 우리 텐트가 위치한 캠프 4 지점에 새로운 텐트를 설치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협상은 먹혀들어갔다.
그들이 올라가고 나서 곧바로 새로운 텐트가 세워졌다.
매트리스가 없었으므로 배낭을 바닥에 깔고 우선 환자를 눕혔다.
금새 날이 어두워졌다.
나는 꼼지락거려지지 않는 발가락이 궁금했다.
어둠 속에서 등산화를 벗고 헤드랜턴을 켰다.
양말을 벗자 흐린 불빛 속에서 발가락이 드러났다.
오른쪽 엄지 발가락가 두번째 발가락이 거무스름했다.
동상이었다.
다른 발가락들도 온전치 않았다.
온통 짓뭉개져 있었고 사이사이에서 진물이 흘렀다.
손으로 만져보았지만 발 전체에 감각이 없었다.
피가 통하지 않는 듯했다.
하루 종일 눈속에서 헤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후배를 시켜 발을 주무르게 했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다리 전체가 마비될 것 같았다.
죽어 있는 발가락의 혈관 세포들이 거짓말처럼 부스스 깨어났으면 했다.
발이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허기와 추위에 떠는 고통스런 밤이 갔다.
다시 날이 밝았다.
전날 캠프 2에서 출발했던 구조대원들이 저녁 늦게 캠프 3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자고 우리 팀이 있는 텐트까지 올라왔다.
후배는 여전히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푸르스름하게 부풀어오른 발을 억지로 등산화에 구겨 넣었다.
등산화를 신지 않고 얼음 바닥과 바위와 눈 쌓인 길을 헤쳐갈 수는 없었다.
험로를 뚫고 내려갈 생각을 하니 순간 아득해졌다.
베이스캠프는 그 아득함의 끝에 있었다.
등산화 속으로 들어간, 감각이 무뎌진 두 발이 나를 베이스캠프까지 데려다줄 것이었다.
'가자, 가서 다시는 오지 말자.'
조심스레 발자국을 옮겨놓을 때마다 나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몸이 불편한 후배를 구조대와 함께 남겨놓고 혼자 내려오면서 나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낭가 파르바트가, 히말라야의 신들이 내 목덜미를 잡아끌며 걸음을 멈추게 할 것 같았다.
나는 히말라야에 대한 미련을 끊고 싶었다.
뒤를 돌아서서 내려온 길들을 보는 순간 정상을 향한 미련은 내 마음속에 새겨질 것이었다.
걸음을 재촉했다.
'흰 산'에 대한 생각들을 지우고, 흰 산을 지운 생각들마저 지워가며 하루 종일 산을 내려왔다.
감각이 무뎌진 두 발이 저녁 무렵 나를 베이스캠프에 내려놓았다.
등산화가 벗겨지고 굵은 주사 바늘이 발목 혈관에 꽂혔다.
긴장이 풀렸는지, 온몸이 욱신거리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베이스캠프는 흡사 초상집 분위기를 방불케 했다.
나를 비롯하여 하반신이 마비됐던 후배와 정상을 향해 나섰던 2차 공격조의 대원 1명이
역시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낭가 파르바트는 끝내 오를 수 없는 산인가?'
공격조에 편성됐던 대원들은 이미 기가 꺾여 있는 듯했다.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전체 회의가 열리고 철수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1, 2차 공격조의 절반 이상이 나가떨어진 상황에서 더 이상의 등반은 불가능했다.
나는 간단하게 배낭을 꾸렸다.
붕대가 감겨 있는 발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동상 부위가 썩어들어가는 듯했다.
나는 그 발에 등산화 대신 샌들을 고정시켰다.
한껏 부어오른 발에 등산화는 무용지물이었다.
동상을 치료하려면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까지 가야 했고,
적어도 2박 3일은 걸어 내려가야 이슬라마바드를 오가는 지프를 이용할 수 있었다.
갈 수 있을까?
그사이에 썩어들어가는 발은 괜찮을까?
방법이 없었다.
포터의 등에 업혀간다면 시간은 더 걸릴 것이 뻔했다.
그사이에 동상 부위는 점점 더 확대되고 고통은 배가 될 것이었다.
'가자, 혼자 힘으로 가서 다시는 오지 말자.'
베이스캠프를 나서면서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샌들이 신겨 있는 발이 지프가 기다리고 있는 마을을 향해서 미친 듯이 내달렸다.
발끝이 돌부리에 채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무릎 관절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걸음을 떼어놓았다.
나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산등성이를 가로지르고 계곡을 건너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걸어 올라온 길을 생각할수록 길은 더 멀찌감치 달아나 있었다.
그사이에 날이 저물고, 갈 길은 어두워졌다.
나는 쉼 없이 걸었다.
썩어들어가는 발을 생각하면 어두운 길 위에서 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마침내 지프가 기다리는 마을에 도착했다.
2박 3일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한 것이다.
샌들을 신고 불편한 발을 이끌며 험한 길을 내려왔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기적에 가까운 일도 얼마 가지 않았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나는 동상 부위를 정확히 치료할 수 없었다.
발가락은 엉망이었고 동상 부위는 예상 외로 심각했지만 낙후된 병원 의료 시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무스름하게 변한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은 회복 불능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동상 부위를 잘라내지 않고는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수술대에 오른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나는 그 모험과 의료 시설에 대한 믿음 사이에서 절망했다.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이슬라마바드는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한여름이었다.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정도로 푹푹 찌는 날씨였다.
나는 내 살이 썩는 냄새를 견딜 수 없었다.
서울의 병원에서 나는 동상에 걸린 오른쪽 엄지발가락 한 마디와 두번째 발가락 일부를 잘라냈다.
다행히 다른 발가락들은 잘라내지 않고도 치료가 가능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뼈마디가 잘려나간 끝 부분은 주변의 살들을 잡아 당겨서 봉합했다.
걸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다시 위안을 삼았다.
그해 여름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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