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文字)써서 하는 말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어느 한 시기, 공문서를 작성할 때 어려운 말을 구사해야만 권위 있게 대접 해주던 시절이 있었다. 관청출입을 하자면 고무신대신 남의 구두라도 빌려 신고 가야 무시를 당하지 않던 시절의 일이다.
이런 말을 하면 ‘에이, 뭐 그렇게 까지 했을라구’ 할지 모르지만 관공서의 분위기가 대체적으로 그런 때가 있었다. 대놓고 업신여기지는 않아도 입성이 허술하면 은근히 따돌리고 무시했다.
그 시절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때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그러했다. 아는 사람에게는 몰라도 모른 사람을 대하면 고압적으로 대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 당시 시골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실무를 익히기 위해 선배들의 조력을 받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이 천편일률적으로 한문투의 문장이어서 난감함을 겪었다.
당시 나는 예비 작가로서 문학공부를 하던 때라 성향에 맞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그런 글에 녹아 들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 중의 한 예이다. 관내에서 키우던 소가 고삐를 풀고 탈출을 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제목을 어떻게 달까요?”
고참 선배에게 물었다.
“畜牛一走發生報告(축우일주발생보고)”라고 달게.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인 줄은 알겠는데 굳이 그렇게 달아야할까. 그런 보고서 제목을 달기는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천편일률적으로 '00에 관한 건'이라고 상투적인 문구를 고집했다.
얼마든지 알아보기 쉽고 순화된 말이 있는데도 한사코 전통적으로 써오던 문구를 고집했다.
그러기는 법률용어도 마찬가지다. 쉬운 말이 있는데도 한문 투의 용어들이 넘친다. 잃어버린 것도 유실물이나 분실물이라고 하고, '빼앗다' 는 것도 갈취니 편취 등으로 어렵게 쓴다.
그러니 사람들이 흔히 쓰는 편지글도 지극히 상투적인 말이 쓰였다. '무더운 여름철'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염천지절(炎天之節)이라 하고, 이른 봄을 일컬어도 '맹춘(孟春)'이라 했다. 뿐인가. '녹음이 짙어지고 한창 꽃 피는 시기' 또한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는 캐캐묵은 관용구를 끌어다 썼다.
그러니 글께나 읽은 사람은 더욱 어려운 말을 골라 쓰게 되고, 급기야는 영어까지 한 토막 끼어 넣어야 유식하다는 평판을 얻게 되는 지경이 이르렀다. 이러한 뽐내기는 배비장전에도 나온다.
하루는 배비장이 은밀히 여인을 만나려 개구멍으로 들어가다가 튀어나온 배가 걸리고 말았다.
방자가 빼내려고 다리를 끌어내자 하는 말. 포복불입(飽腹不入)하니 출분이가사(出糞而幾死)로다 한 것이다. 즉, 배가 불러 들어가지 못하니 똥을 싸고 죽을 지경이다, 라고 한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윤모촌 선생이 쓴 <식자우환(識字愚患)>에 나온다.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가 다급하여 외쳤다.
“원산대호(遠山大虎)가 자근산래(自近山來) 하니 유창자(有槍者)는 지창이래(持槍以來)하고 유궁자(有弓者)는 지궁이래(持弓以來) 하시오”
즉, 원산의 큰 호랑이가 가까운 산에 나타났으니 창을 가진 사람은 창을 지참하고 활을 가진 사람은 활을 지참하고 나오시오, 한 것이다. 쉬운 말로 하면 될 것을 그렇게 말을 했으니 알아들은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는 원에 끌려가 매타작을 당했는데, 그러고서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서 풀려나오면서 하는 말이 "차후로는 불용문자(不用文字)하오리다" 라고 하다니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유사한 이야기는 조선 후기를 살다간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선생이 쓴 글에도 보인다. 옛날 왕희지 필법을 익혀서 초서를 잘 쓰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식량이 떨어져서 아침을 굶으며 친구에게 쌀을 구걸하는 편지를 썼단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저녁이 되도록 그 편지 내용을 해독하지 못하여 쌀을 보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밥을 짓지 못했단다.
선생은 글에 적기를 '초서를 잘 쓰는 것이 이상할 것은 아니지만 남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무슨 의사소통으로서의 기능이 있다 할 것인가' 하고 따끔하게 꼬집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잘 써놓은 글을 읽는 이가 잘못 이해하는 경우에 해당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보면 어떤 말을 적소에 사용하지 않아 듣는 이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십 수 년 전 어떤 특강을 듣던 자리에서였다.
초청 받은 인사는 열변을 토하면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말을 사용하며, "무슨 일이나 적극 참여해 실천해야지 강 건너 불을 보듯 그렇게 타산지석으로 방관해서는 아니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실수를 한 것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연거푸 되풀이하는 게 아닌가. 얼굴이 확끈 거려 혼이 났다.
또 한 번은 이런 것도 보았다. 주례를 선분이 주례사를 하면서 신부에게 '시가 식구와는 화이부동(和而不同) 하라'고 했다. 듣는 귀를 의심했다. 화이부동 하라니. 이게 그런 자라에 쓸수 있는 말일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언뜻 다음의 말을 떠올렸다. '天下, 無知是底父母 父雖不慈 子不可以不孝‘.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비록 자식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 자식은 효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왜 그 말을 생각났을까.
나는 수필을 쓰면서 늘 명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을 쓸 때 될수록 어려운 말을 피하고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 쓰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나는 틈만 나면 좋은 어휘를 모은다.
그렇게 모은 것을 최근에는 '막 쓰는 수필 잘 쓰는 수필' 을 내면서 그 일부를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나뿐만 아니라 남과 함께 공유하자는 뜻에서이다. (2004 )
첫댓글 1950년대 만 해도 샘물하면 공동우물을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 일 것입니다.
마을의 몇 안되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퍼다 사용했으니 말입니다.
나중에 집에 우물이 생기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군요!
김선생님 댁도 그랬군요. 돌은 미리 준비를 해놨다가 담을 쌓은 담장이 영감을 불러 쌓게 되었는데 솜씨기 일품이었습니다.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대부분 우리 농촌들은 공동우물을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집에 우물을 판 것은 그 이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때였으니까요.
선생님 저의집에 는 아직도 우물이 있답니다. 맑은 물이 고여있는..... 물론 지하수를 쓰지만요. 두레박이 물에 닿는 순간 줄을 밖으로 밀쳤다가 안으로 끌어당기면 물바가지가 엎어지며 물을 가득 안고 길어 올리던 유년시절이 떠올라 빙그레 웃어봅니다. 수박도 채워놓았었지요.
서선생님댁에는 지금도 사용하는 우물이 있군요. 우물속에 들어가 청소하던 일, 물깃던 일, 그곳에 얼굴을 디밀고 들여다보면 구름장이 떠가던 풍경이 그립기만 합니다.
그리움과 회한이 교차하는 고향집 우물 생각에 잠겨봅니다.
이작품에 댓글이 많이 달립니다. 전에 살던 이선생댁에도 우물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여름철 시원한 물을 퍼울려 등멱을 하면 더위가 싹 가시곤 했지요.
2005년 선수필
아름다운 우리말을 놔두고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나 외래어 심지어 정체불명의 신조어가 범람하니 개탄할 따름입니다. 문학인이 소명과 사명을 가지고 고운 우리말 사용하기에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엣날에는 어려운 말을 써야 유식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말을 쓰곤 했지요. 지금도 법률용어는 그 것이 많이 남아 있는줄 압니다.
글쓴이는 특히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쓰는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