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1501.11-1570.12)과 남명 조식(1501.6-1572.2)은 동갑 동도인으로써 을사사화 이후에 굴기하여 1575년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 지기 이전에 일생을 마치면서 각기 경상좌도(또는 상도)와 경상우도(또는 하도)를 대표하여 영남학파의 2대산맥인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형성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는 남명학파가 몰락하지만 두 학자의 생존시에는 그 형세가 대등하여 양쪽을 드나드는 학자와 관인들도 많았다.
퇴계의 문인 조목(趙穆)은 그가 찬한 ‘퇴계언행총록’에서 “선생의 천품은 영오하고 神彩가 정명하고 온화하고 굳세고 언사는 완곡하면서도 직선적이었다. 학식은 해박하면서도 요령이 있었고, 행동은 온전하면서 독실하였다.청정하되 과격하지 않았고 참여하되 굳이 바로 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옛것을 흠모하되 그것에 옹체되지 않았고 세상에 처해 살되 세속에 흐르지 아니하였다.”하여 스승의 사람됨을 간결하고 요령있게 평설하였다.
퇴계의 官歷은 소과, 문과를 거친 후 權知承文院副正字에서 著作-博士-典籍-六曹佐郞-三司郎官-諸司正-外職守令-大司成-軍職上護軍-僉知中樞-參判-判書-右贊成-判中樞 등 당시 양반관인이 문과를 거쳐 요직 고관에 이르는 경로를 순차적으로 밟아 마침내 정1품인 判中樞에 올랐고, 죽은 뒤 곧 영의정과 文純이란 시호가 추증되고 다시 종묘배향과 문묘종사라는 신하로서,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향유하게 되었다.
퇴계의 학문세계는 그가 평소 탐독하고 참고했던 수택본의 종류와 내용을 갖고 짐작할 수 있다. 명종 15년 도산서당이 준공된 뒤 그는 동향 출신 제자인 금난수(琴난秀)에게 자신이 도산서당과 溪上住宅에 소장하고 있던 도서 정리를 맡겼는데, 당시 퇴계의 소장 도서목록은 금난수의 “手筆目錄”에 상세히 기재되어있다. 소장도서는 총 1700여 권인데 종류로는 중국의 經史子集이 159종, 한국의 역사,지리,법제,문집,기타 잡록이 55종으로서 전자에 비하면 후자는 3분의 1에 불과하였다.
평소 그의 수택본의 목록울 갖고 짐작되는 것은 그의 학적 관심사가
주자학 일변도였다는 사실과 중국에서는 주자학과 병행했던 陸王學(일명 陽明學)관계도서가 그의 장서에는 거의 없었으니 그의 편협한 闢異사상의 일면을 였볼수 있으며 자국의 역사와 선배학자에 관한 도서는 적은 편이 아닌데도 한국의 역사와 문화 및 時事.時務的인 것에는 관심이 적은 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양명학에 대해서는 왕양명의 제자 서애(徐愛)가 쓴 傳習錄에 대하여 傳習錄辨을 지어 반박하므로 그 당시 주자학을 하는 모든 조선의 학자들은 퇴계를 따라 양명학을 반대하였다. 퇴계는 양명학을 선불교라고 비판하고 그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하였다.조선이 주자학 알변도의 단순한 학문에 빠져 버린 결과를 초래하였다.
퇴계는 朱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을 계승하여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영역적(演繹的)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만물은 이(理)와 기(氣)의 二元的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는 이(理)는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고 기(氣)는 가선가악(可善可惡)한 것인즉 이(理)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氣)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심성(心性)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理氣二元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론으로 이 후 우리나라 유학자로 서 이 문제에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설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메이지시대(明治維新)의 교육이념의 기본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기본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知)와 행(行)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誠)이요, 그에 노력으로서 경(敬)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남명(南冥)은 1501년(연산군)7년 6월 경상우도 三嘉縣(지금은 합천군) 토동(兎洞)에서 출생하였다. 7세가 되면서 부친으로부터 가학으로 수학하였으며 부친의 관직 이동에 따라 義興과 瑞川, 서울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傲世,傲物하는 고답적인 기질을 지녀 부귀와 재화를 草芥와 같이 보면서 약관때부터 과거에 몰두했으나 30세가 넘도록 小大科의 예시에만 합격했을 뿐, 끝내 합격하지 못하다가 性理大全과 心經등 성리학에 접하게 되자 25세부터 心性學에 관심을 갖게 된다.
남명의 학문자세는‘敬義’를 전제한 反躬實踐에 궁극적 목표를 두고 日用動作에서 시작하여 <사서>,<근사록>,<성리대전>및<심경>을 기본교재로 사용하였다. 그는 교육의 실제에서도 性命,天理와 같은 上學보다는 일상동작과 같은 下學적인 면에 치중하였다.
그는 사람의 소질과 품성에 따라 교육하되 스스로 체득하여 실천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현실을 떠나 지나친 관념론과 고원한 차원에서 高談峻論하는 것을 가장 싫어 하였다. 그래서 평소 자신도 항상 이를 경계하였다. 그는 당대 조야의 촉망과 사류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늘 겸허한 자세로 임했고 師友,門人과의 서신 왕래에서도 자신의 虛名이 위세를 저지르지나 않나 해서 자책,자괴하는 심정을 술회하였다.
드디어 1555년 단성 현감으로서 사직소를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慈殿塞淵, 不過深宮之一寡婦,殿下幼沖,只是先王之一孤嗣.
“나라의 기틀은 무너졌고 민심은 떠난지 오래입니다. 대왕대비는 세상물정 모르는 바깥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의 어린 아들에 불과하니 천갈래 만갈래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 때는 22살 먹은 명종 시절로 문정왕후가 실권을 쥐고 수렴청정을 하고 동생 윤원형이 세도를 부리는 것을 憂國至誠을 개진하고 끝내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학파의 지역적 범위는 진주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김해,밀양,청도, 북쪽으로는 창녕.현풍.성주,서쪽으로는 산청.함양.하동 및 남쪽으로는 사천.고성 등지였다. 남명 당시 경상도를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할 때 진주목 관내의 전지역과,경주부 관내의 밀양.청도.창녕.영산.현풍과 상주목 관내의 성주.합천 고령.초계가 남명학파의 지역에 들어 간다.
15세기의 두 정치세력인 훈구파와 사림파 가운데 경상우도 출신이 많았다는 것은 16세기 후반 남명학파의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남명이 三嘉에서 김해를 거쳐 만년에 진주목 관내 덕산동에 정착하여 후학을 가르친 것도 이런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명는 일생을 초야에서 보냈지만 결코 현실을 망각한 운둔자는 아니였다. 그는 수차의 상소에서 척족정치의 폐해와 서리들의 횡포를 지적하고 획기적인 변통과 잘못된 세도를 만회해야 한다고 시종 솔직하고 과격한 언사로서 개진하였다.그와 같은 尙義.主氣的인 현실 대응 자세는 결과적으로 그의 문인들로 하여금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는 모두 倡義.討賊의 대열에 나서게 하였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저돌적인 자세 때문에 마침내 진주의 淫婦 사건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의 수제자격인 崔永慶과 鄭仁弘이 각기 기축옥사와 인조반정에서 옥사 또는 처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명학은 경상우도라는 지리적 환경과 선배학자들의 영향아래 형성되었다. 김굉필.정여창.조지서.를 비롯하여 김대유.곽순.신계성. 등과 오건.최영경.정인홍.곽재우 등 남명의 師友門人관계를 살펴보면 기질.학문.사상.처세 및 문체에 이르기 까지 공통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한 특징에는“老莊과 陸王學(陽明學)적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남명학은 현실적,정치적 기능이 약화되고 반대로 思辨的 인 번쇄한 이기론과 예학 중심으로 흘러가는 학풍에 대하여 비판과 반성을 촉구한 데서 일정한 시대적 사명을 다 하였다고 평가 할 수 있다.
1570년 퇴계가 타계하자 남명은 생전에 만나보지 못한것을 크게 아쉬워 하며 퇴계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한다.
퇴계와 남명은 같은 주자학을 하면서도 크게 차이가 있다. 그것이 두 사람이 살아 생전에 서로 쉽게 가까워지지 못 하였음을 알 수있다.
퇴계는 주자에 반대한 양명학을 수용하지 않았지만 남명은 주자학의 바탕위에 양명학을 수용하였다. 살아 생전에는 두 사람간의 학문적 논쟁은 없었지만 죽고 난 후 퇴계의 제자와 남명의 제자들 사이는 양명학을 두고 서로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서 퇴계와 남명 두 스승을 함께 모신 정구(鄭逑)는 퇴계학파에 이름이 오르지 못하였고 정구의 제자 여헌 장현광 역시 배척 당하였다. 안동의 도산서당 학파에서는 남명의 학파들이 사는 이곳을 하도라고 불렸다.
(도산서원)
남명이 55세 때 1555년 단성현감에 제수되었는데 현감직을 받는 대신 온 나라를 발깍 쑤서 놓은 상소문 단성소를 올리자 선생은 명성이 온나라에 펴졌다.을묘소 라고도 한다.
첫댓글 也川의 博學에는 끝을 모르겠네. 퇴계의 理와 氣는 설명을 듣고도 알 듯 모를듯..
역사의 뒤안길을 더듬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
구천아재의 정보마당에서 정말 좋은정보를 얻고 있네 특히 간강이 좋지 않아 겅강에 대한 많은정보를 얻고 있어 늘 고맙네,
우주,만물이 생성 소멸하는 에너지가 '氣'이고 그와 같은 생성 소멸에 작용하는 원리를'理' 즉 理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氣 라고 알고 있네.그래서 理는 體요 氣는 用이라 생각하네
인간의 心性도 여기에 적용하여 하늘에서 받은 본성으로서 理가 있고 理가 작용하여 발현되는 마음이 있으니 이것이 氣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두고 논쟁이 붙었네.마음에 무슨 理와 氣가 따로 움직이느냐하고 대든 사람이 기대승이지 워낙 관념적이라 나도 어정쩡하니 좋은 해석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