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걸출한 헤비메탈 그룹 '백두산'

'아시아나'의 리드 키타 출신으로 우리 가락을 록에 접목하는 음악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국악록 기타리스트 김도균. 한국 헤비 메탈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그는 1988년 첫독집 'CENTER OF THE UNIVERSE' 로 '국악 록'이라는 외로운 음악 여정에 첫 발을 디뎠다.
한대수, 이우창과 함께 <삼총사> 앨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발표한 '김도균 그룹'의 첫 앨범 <정중동>은 한국 록의 세계화를 꿈꾸는 그의 오랜 탐구가 이제 본 궤도에 들어섰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한국적 가락으로 '월드뮤직'을 꿈꾸는 한국대중음악의 뉴에이지 리더로 거듭났음을 증명해 보였다.
김도균은 대구에서 음악과는 거리가 먼 섬유사업가 김정태씨와 전정임씨의 1남 2녀중 막내로 1964년 5월 11일 태어났다. 부잣집 외아들로 부족함 없이 자란 그는 동네 친구들과 총싸움을 즐기고 장난감을 좋아했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에 대한 동경을 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문을 가지고 고민했던 조숙한 아이였다.
당시 그의 꿈은 천체물리학자.
대구 남도초등학교 3학년때 대구교대부속 초등학교로 전학한 날 미술시간을 그는 잊지 못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묘한 예술적 흥분을 느꼈던 것.
1년 뒤 처음으로 불어본 리코더는 더욱 신기했다. 그는 곧 학교 대표로 경북도내 초등학교 리코더 경연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 후 학교 리코더 합주단과 함께 대구·대전 MBS TV 녹화등 연주 여행도 다녔다. 5학년 때 합주부에서 북을 치는 김도균을 본 천기석 음악선생님은 "10년만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연주"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음악에 대해 더욱 강렬한 매력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뿐만 아니라 서울 리틀엔젤스 미술 경연대회 등 크고 작은 미술대회에서 수 차례 수상을 했을 만큼 미술 재능도 대단했다. 그는 "나는 음악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늘 그림을 그린다. 렘브란트의 강열함과 세잔드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역동성들을 보며 강력한 인상을 받았다"며 "초등학교 때 이미 해볼 것은 다 해본 기분"이라고 회고한다.
대구 경복중에 입학해 교복을 입자 군대 같은 답답함이 가슴을 죄어왔다. 1학년때 사촌형님의 일렉트릭 기타는 일종의 탈출구였다. 처름 기타를 처 본 느낌은 그저 그랬다. 하지만 우연히 경북대의 록 그룹 지하 연습실에 놀러 가 딥 퍼플의 강력한 기타소리를 듣는 순간 망치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때 전기 기타를 사고 초등학교 동창인 드럼 김대벽과 베이스를 치는 중학교 친구와 함께 3인조 '중성자'란 팀을 결성했다. 드럼 김대벽의 집 지하실은 늘 연습을 했던 아지트.
김도균은 창작도 시작했다.
'중성자'는 대구 수창초등학교 강당을 빌려 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창작곡 '동녘에 밝은 태양',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이글스의 '호텔 켈리포니아' 등을 연주했다.
제법 이름이 나자 대학생들의 호텔 고고 티에도 초청받아 가발을 쓰고 나가 연주를 했다. 당시 김도균의 가슴을 불태운 것은 키스, 딥 퍼플, CCR, 피터 프램프턴, 레드 제플린 등 비트 강한 록 계열의 음악들.
하지만 대구 영진고에 진학한 후 반사회적 내용으로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온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을 접하자 "학교가 문제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의논도 없이 자퇴를 해버렸다. 학교에 간다며 집을 나와 혼자 '앞 산'에 올라가 교과서가 아닌 기타로 자신의 인생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80년 초 대구의 한 클럽에서 연주생활을 하며 전문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몇 개월 후 "큰 물에서 놀자"는 생각에 무작적 상경.
낙원상가에서 무명 음악인들과 만나 전국의 클럽을 도는 떠돌이 세션활동을 하다 4인조 록 그룹 '수레바퀴'를 결성했다.
당시는 디스코 열풍 시대, 모든 클럽은 댄스 클럽이었다. 하지만 84년쯤 이태원에 신중현이 관여하던 국내 유일의 연주 전문 클럽 '라이브'가 생겨났다. 반가운 마음에 찾아가 밴 헤일런의 라이트 핸드 주법을 선보였다.
이 연주를 본 손님들이 열광하자 클럽 사장이 전속 출연을 제의했다.
'들국화'와 '괴짜들'이 당시 함께 활동한 그룹들, 김도균은 수레바퀴의 멤버 중 보컬을 빼고 베이스 김영진 드럼 유상원과 3인조 록 그룹 '솔로몬'을 결성해 무대에 섰다.
그는 막 한국에 상륙한 헤비 메탈과 블루스 음악에 경도되며 즉흥 연주에 빠지고, 게리 무어의 음악을 밤새워 카피했다. 6개월이 지나자 심신에 무리가 왔다.
이 때 클럽에 찾아 온 선배가수 유현상과 서라벌레코드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그룹을 결성하기로 했다. 85년 보컬 유현상, 베이스 김주현, 드럼 한춘근과 함께 4인조 그룹 '유현상과 백두산'을 만들어 기꺼이 리드 기타를 맡았다.
86년에 발표된 백두산 1집은 평범한 트로트 풍 가요 곡에 김도균의 양손 햄머링 기타 연주가 범벅된 황당한 음반이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컸다. KBS '쇼 특집'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그리고 KBS '영11'에 고정 출연할 정도로 방송을 탔다. 헤비 메탈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감지한 유현상은 록커로 거듭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백두산은 시나위와 더불어 한국 헤비 메탈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한국적 록 사운드 세계를 꿈꾸다
백두산 2집에서 들려준 김도균의 기타 연주는 그를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떠오르게 했다. 당시 여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던 그는 "연습실에는 여학생들이 매일같이 진을 쳤고 팬 클럽도 생겼다"고 웃는다.
백두산은 헤비 메탈 그롭으로 처음으로 1987년 KBS 10대 가수상 그룹 부문 후보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하며 관심을 끌었다.
2집이 일본에서 발매되자 일본의 헤비 메탈 전문잡지 'BURN'은 "한국에 초강력 헤비메탈 밴드가 출연했다"고 흥분한 리뷰를 실었다.
2집의 성공에 고무된 맴버들과는 달리 김도균은헤비 메탈 사운드가 사물놀이로 연상될 만큼 록에 빠져들고 있었다.
록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었던 그는 멤버들과 음악적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백두산은 해체의 순서를 밟았다.
김도균은 록인코리아 기획 음반과 첫 솔로 연주음반 'CENTER OF THE UNIVERSE-1988년'을 발표하며 한국적 록 사운드에 몰입했다.
'아리랑'을 가야금 주법으로 표현하는 등 음악적 끼가 넘쳤던 그의 솔로 음반은 록 마니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폭넓은 대중이 수용하기에는 시기장조였다. 국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지라 실험적인 시도 이상의 음악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
그는 88년 12월 원대한 꿈을 품고 헤비메탈의 본고장 영국 런던으로 건너 갔다. 현지에서 드러머 미크를 만난 후 임재범을 불러 한국말 '사랑'을 영문으로 표기한 4인조 록 그룹 'SARANG'을 결성했다. 웨일즈의 카디브 대학에서 가진 첫 공연. 백두산, 외인부대 때의 레퍼토리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영국에서는 평범한 사운드였기 때문이다.
'스완지'에서 두 번째 공연을 시도했다. 첫 공연과는달리 개량 한복을 입고 '아리랑'등 국악 록을 들려주었다. 관객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순간 그는 한국적 가락을 접목한 록이야말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월드 뮤직임을 절감했다.
9개월 후 일본그룹으로는 유일하게 빌보드 챠트에 올랐던 해비메탈 그룹 'LOUDNESS'의 내한공연이 스페셜 게스트로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 이 들과 함께 월드 투어를 꿈꿨지만 사업상 문제로 무산되자 스스로 '세계시장 진출'이라는 야망을 품었다.
보컬 임재범, 카리스마의 베이시스트 김영진, 솔로몬 출신의 드러머 유상원과 함께 결성한 4인조 록 그룹 '아시아나'는 그런 취지로 결성된 한국 헤비 메탈의 드림팀이었다.
아시아나의 유일한 앨범 'OUT ON THE STREET-1990'는 "국내 최초로 영국에서 녹음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녹음을 마치고 귀국한 뒤 일 주일만에 팀이 깨져 버렸다. 김도균은 "한국의 현실과 타협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국제적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시아나는 내 음악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좌절의 시간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기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92년 백두산 스타일로 되돌아가 3인조밴드 백두산 2기를 결성했지만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 변진섭 등 랩과 발라드 가수들의 세상이었다.
그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이번엔 대마초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이 때가 92년 가을. 40일간의 수인생활에서 영국이라는 화려한 세상을 보며 흔들렸던 마음을 접고 종교에 몰두했다.
하지만 활동금지 후 94년 발표한 '파워 투게더' 앨범과 평범한 2집 역시 록의 관점에서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이었다. 재기에 쫓긴 강박관념이 빚어낸 실패작이었다.
거듭된 좌절 끝에 95년 MBC TV '샘이 깊은 물'에 고정출연을 하게 되었다. 이 때 국악과 양악의 접목을 다시 꾀하며 국악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96년 미국여행은 다시 창작의 물꼬를 트게 했다. 기독교방송에서 기획한 '빛으로 모두 함께'라는 옴니버스 복음 음반에 참여하며 CCM 음악활동에 전념했다. 또 한대수의 음반 녹음에 세션으로 참여하며 97년 후쿠오카 공연에도 참가했다.
2기 백두산의 해체 이 후 홀로 음악작업에 전념해 오던 그는
무당의 리더였던 선배 최우섭의 권유로 99년 베이시스트 배찬우, 드러머 박동식과 함께 3인조 국악 록 그룹 '김도균 그룹'을 결성했다.
이 들은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국악이론 탐구에 몰두하면서 2001년 한대수 공연을 시작으로 국악 록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했다.
2002년 11월엔 한대수, 이우창과 함께 <삼총사> 프로젝트로 마련된 김도균 그룹의 첫 앨범 <정중동>에서 그는 한결 정제되고 농익은 국악 록 가락을 선보였다. 앨범 발표를 기념하는 세종문화회관의 <삼총사> 공연에서도 그는 관객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는 "정중동 음반은 정규 음반이 아니고 이제까지 답습한 것의 습작일뿐"이라며 "한국적 록 가락에 대한 음악탐험은 이제 시작" 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부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 김태원과 함께 국내에서는 드문 기타 프로젝트 음반 을 발표했다.
"예전의 음악으로 회귀하는 것이냐"는우려에 대해 "침체된 한국 록의 부활을 위해 의리를 지켰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진짜 소리를 찾은 음반은 죽기 전에 낼 수도 있고 못 낼 수도 있다.
다음 세대로 넘어가서라도 진짜 음을 발견할 수 있는 디딤돌이라도 되고 싶다"고 말하는
김도균은 아직 한국 록 음악의 한줄기 빛이다.



백두산 - 어둠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