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자 때 뵈온 광덕 큰스님
元泉|김해 선지사 주지
나는 이 다음에 반드시 도인이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출가 수행자가 되었다. 그래서 고향 동네 절 주지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는 나를 경북 구미 어느 암자로 안내하여 주셨다. 나는 거기서 출가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고 우선 하심을 닦는 행자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범어사 승가대학을 졸업하신 스님 한 분이 내가 있는 암자에 와서 내게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는 부산 동래 범어사로 가서 득도하라고 자상하게 일러 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고쳐 큰절인 범어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주지스님께 소개장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렇게 찾아간 범어사는 생전 처음 보는 큰절이었지만 무척 마음에 들었고 우람한 가람과 질서정연한 대중의 분위기가 낯익어서 과거 전생부터 여기서 수행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종무소를 찾아가 구미의 주지스님이 써준 소개장을 보여주니까 즉시 행자실 입방이 허락되었다.
내가 범어사 행자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미 먼저 온 행자들은 모두 수계를 받게 되었다. 그때 수계를 받은 스님들은 현재 범어사 선원에서 선원장을 맡으신 인각스님, 해인사 강원에서 강주를 맡고 있는 지오스님, 지상스님, 지문스님 등등이라고 기억한다. 그 덕분에 나는 후원의 행자 반장이 되었다. 그때 행자로 들어온 사람들이 이 시봉일기를 쓰고 있는 송암스님, 과천 보광사에 있는 종훈스님 등등이다. 행자 반장은 여러 행자들과 더불어 대중스님들의 공양을 성심 성의껏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행자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저녁때까지 줄곧 일을 해야 하고 나는 솔선수범으로 앞장서야 한다.
하루 세 번 끼니때마다 후원에서 우리 행자들이 모든 공양준비를 정성껏 해 놓으면 선원스님들을 선두로 사내의 모든 대중들이 큰방으로 모이신다. 맨 먼저 큰스님들과 선원 스님들께서 줄을 지어 큰방에 들어가시고, 그 뒤를 이어 소임자 스님들과 다른 뒷방 스님들이 차례로 줄을 잇는다. 그렇게 질서 정연하게 공양하러 오시는 스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곤 했다. 사실 우리 행자들은 공양시간이 되어야 대중스님들을 뵐 수 있다.
청정수, 찬상, 국, 밥, 숭늉이 차례로 들어갈 동안 큰방 문이 열려 그 사이로 큰스님들의 모습과 차례대로 둘러앉은 대중들이 여법한 질서를 훔쳐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한 공양을 얼마나 드셨나 조심스레 살펴보기도 한다. 공양이 다 끝나면 반찬과 음식이 얼마나 남았는가, 또는 맛나게 잘 잡수셨나 확인하는 것이 반장인 나의 임무였다. 또 그런 일련의 일들이 바로 스님들을 잘 모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열려진 큰방 문으로 어간에 앉으신 광덕 큰스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느 때 보아도 큰스님 얼굴은 밝은 기운이 가득하고 봉긋한 머리는 항상 빛이 솟아났다. 겨울철같이 아침 공양시간이 이른 때에는 형광등 불빛으로 더욱 번쩍거리는 광채에 나는 그만 황홀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아아, 역시 큰스님이시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살며시 문 사이로 큰스님을 훔쳐보는 어린 내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존경심이 우러났고, 나도 장차 저와 같은 큰스님이 될 것을 가만히 다짐하기도 했다.
사실 그때 나는 행자생활을 하는 중이라 누가 진실로 큰스님인지를 알지 못할 때였다. 하지만 광덕 큰스님만은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분이라는 것을 주변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철부지인 나는 아무것도 잘 모르는 주제에 큰스님은 머리에 얼마나 광채가 번쩍거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혹시 다른 큰스님을 뵙게 되면 늘 머리부터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린 시절의 부족한 생각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 광덕 큰스님의 상좌인 지환스님의 속가 어머니가 후원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을 때였는데, 어찌나 지극 정성으로 큰스님을 받들고 섬기는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런 정성은 어디서 볼 수 있는 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혹시 큰스님께서 서울을 다녀오시거나 외출했다가 귀사하면 극진히 공양을 준비했다가 올리곤 했던 것을 기억하는데, 사실 알고 보니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연전에 큰스님께서는 위를 절개하는 수술을 받아서 다른 사람보다 삼분의 일도 안 되는 위 때문에 한꺼번에 음식을 많이 잡수시지 못하고 조금씩, 그리고 아주 담백하고 자극이 적은 음식만 드셨던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범어사 텃밭으로 달려가서 반찬거리 채소를 한 소쿠리 뜯어 왔고 보살님은 정성껏 국을 끓여서 상을 차려 올렸다. 그러면 큰스님께서는 그 국과 푸성귀 반찬을 맛있게 잡수신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흥교스님께서 수술하여 범어사에서 요양하실 때, 큰스님께서 직접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을 보고 놀랄 정도로 자상함을 발견했다. 그러한 큰스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나는 큰스님의 상좌 인연이 되지 못하였다. 그때 선원에 계시면서 입승을 보시던 노스님과 인연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연이란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 후 큰스님은 서울에서 월간 「불광」이라는 잡지도 창간하시고, 또 불광사를 창건하여 새불교운동의 깃발을 올리는 등 한국불교의 선구자 역할을 하셨다. 또 보현행원을 몸소 실천하시어 한국불교에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시기도 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나는 큰스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아주 자상하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나를 알아보시고 은사스님의 안부를 물으시는 것을 듣고 가슴이 찡함을 느꼈다.
이제 큰스님께서는 입적하시고 영영 다시는 뵈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안타깝다. 그때의 햇병아리들이 벌써 오십이 넘어서 절집의 중진들이 되었으니 이 빠른 세월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송암스님의 인연담 원고 청탁을 받고 평소 글을 써본 경험이 없었지만 큰스님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솟아나서 옛날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사실 이 원고 쓰는 것에 대해서 많이 망설였다. 큰스님에 대한 법 인연이 아니고 내 느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공양시간이 되면 어간에 정중하게 앉아서 공양하시는 큰스님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 내 어린 날 추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말하고 싶다. 행자시절 나에게 비춰진 큰스님의 아주 작은 부분만 글로 옮김을 양해 바란다. 나무 보현보살마하살.
2002년 1월 10일 오백아라한도량 선학산 선지사
元泉 頓首敬拜
첫댓글 자상하신 스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원천스님의 큰스님 머리의 광채를 표현한 부분이 재미있습니다.
큰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 어린 날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네요.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마음 속 어른을 섬기고 모실 수 있음은 행복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른을 모시고 또 언젠가는 나이 적은 사람들에게 작은 인연이라도 지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른이 그리운 날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원천스님의 회상이 저희들의 마음과 똑 같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따사로운 봄바람을 온몸에 맡게 하는 듯한 큰스님을 묘사하신 글 감사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자상하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시는 그 모습 닮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글을 쓰신 스님의 마음이 뭉클하게 다가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