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로 뒷모습을 보려면 목에 무리하게 힘을 주어야 해서 부자연스럽다. 이처럼 인간이 자기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즉자적(卽自的)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을 말하고 대자적 태도는 자기 자신까지도 객관화하여 반성하고 관찰하는 태도이다. 인간이 성숙하려면 즉자적 존재에서 대자적 존재로 변화해야 한다.
사람은 에고라는 이른바 ‘존재의 벽’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음 깊숙한 곳에 에고라는 ‘반향판’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타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에고의 반향판으로 받아들인 뒤 그 반향음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타인의 음성을 내가 듣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에고가 듣는 셈이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저래서 맘에 안 들고 이 사람은 이래서 맘에 안 든다.”고 남을 탓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에고와 싸우는 것이다.
융에 의하면 자기(self)와 자아(ego)는 둘 다 ‘나’를 뜻하지만 차원이 전혀 다르다.
에고는 의식의 중심부로서 감각을 통해진 정보를 받아들여 사고하는 센터이다. 즉 자아는 ‘내가 의식하고 있는’ 나를 말한다. 그러나 자기(self)는 자아(ego)가 의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잠재성이다.
자아가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라면 자기는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신성(神性)의 이미지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무의식적인 부분이 의식적인 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자아는 의식에 떠있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 영혼의 중심점은 자아가 아니고 자기(self)이다. 자기(self)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 안에 있다.
자아(ego)는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말하기 때문에, 자아를 알기 위해서는 구태여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기(self)는 나도 잘 모르는 내 자신의 본성이기 때문에 자아가 의식적으로 탐색할 때만이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아만 강한 사람은 끝까지 자기를 모르기 쉽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싫어”, 혹은 ‘좋아’로 판단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싫어, 좋아’가 많은 어린이 같은 사람이 있다. 사물과 사건을 판단할 때 객관적인 생각 보다 주관적인 판단이 아직도 강한 것이다. 말을 할 때는 항상 자기 감정이 들어나는 사람들이다. 또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 전에 판단을 내리는. 즉 추정(Presumption)이 발달하면서 자신은 직관이 발달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오래 전에 아들이 국제적인 학술지에 제출한 논문에 일부 데이터가 잘못 사용된 부분을 발견하고 “잘못하다가는 황우석 되게 생겼다.”며 초비상이 걸렸던 것을 보았었다. 전 세계의 학자들이 볼 수 있는 논문에 단 하나의 오류라도 발견된다면 가문의 망신이 아니라 국가의 망신인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데이터의 오류는 내일 모래 결혼할 처녀가 딴 남자의 쌍둥이 애를 밴 것 보다 더 용서가 안 되는 일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엄밀성은 기본이다. 심지어는 매년 똑 같은 일이 반복되는 농사일에서 까지도.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엄밀해야 할 일은 자기를 아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기를 아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자기를 알려면 자기를 부정할 줄 알아야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깨닫는다는 것을 서양식으로는 해석학이라고 한다. 해석학의 특징은 파괴력이다. 자기긍정을 뒤집어 자기부정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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