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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그 4차원의 세계】 슈테판 데흐. 라인 홀드 메스너. 닐스 슈파르 바서. 김동수 옮김. 2022년 하루재클럽
글. 코오롱 등산학교 명예 교장. 이용대
이 책에는 압축된 등반역사를 제공하는 세계 최고의 산 13개를 위성기술을 활용해 전례 없는 해상도와 화질로 시각화했다. 이 산들의 매우 정교한 디지털 이미지는 수백 킬로미터 상공에서 위성이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독일항공우주센터가 만들어냈다.
이 산들의 역사적인 등반과 새로운 루트, 비극적인 실패, 기억에 남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이곳에는 에베레스트와 K2 같은 ‘8천 미터급 고봉’, 북미와 남미의 최고봉인 데날리와 아콩카과, 알프스의 마터호른과 몽블랑, ‘사람 잡아먹는 산’으로 악명 높은 낭가파르바트, 우슈바와 마셔브룸같이 덜 알려졌지만 도전적인 산이 등장한다. 산을 탐험해나가는 이정표는 산의 특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지도, 인포그래픽, 프로필과 함께 제공되며, 위치 사진과 과거 및 현재의 세계 최고 산악인들이 직접 쓴 보고서는 눈부신 자료를 완성한다. 198개의 일러스트레이션이 수록되어있다.
눈의 보석 카일라스Kailash
거의 완벽한 피라미드 형태로 하얀 눈에 덮여 밝게 빛나는 카일라스(6,638m)는 바람이 많이 불고 광활하며 황량한 티베트의 전형적인 풍경 속에 우뚝 솟아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는 이 기념비적인 봉우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카일라스의 정상이 하얀 눈으로 항상 빛나고, 그 이름이 티베트어로 강 린포체(눈의 보석)인 것은 산기슭의 더 따뜻한 지역으로 눈과 얼음을 끊임없이 흘려보내는 침식과 단층의 패턴 때문이다. 그리하여 산봉우리를 덮은 눈에는 지저분한 것들이 내려앉을 틈이 없다. 바위의 수평 지층과 하얀 눈의 대비로 인해 카일라스는 놀랍도록 다양한 색조를 띤다.
알피니즘의 발상지 몽블랑Mont Blanc
몽블랑의 남쪽에 있는 700미터의 프레네이 중앙 필라는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군인 이 지역에 미등으로 남은 마지막 대과제였다. 1961년 7월 8일, 프랑스인 피에르 ‘피에로’ 콜망Pierrre ‘Pierrot’ Kohlmann과 로베르 기욤Robert Guillaume, 앙트완 비에이유Antoine Vieille와 피에르 마조Pierre Mazeaud가 콜 드 라 푸르쉬Col de la Fourche에서 비박을 했다. 악천후로 인해, 그들은 콜 드 푸트레이Col de Peuterey를 넘어 그 필라 밑으로 접근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7월 9일 밤늦게 역시 같은 목표를 갖고 그곳으로 향하던 이탈리아인 발터 보나티Walter Bonatti와 로베르토 갈리에니Roberto Gallieni 그리고 안드레아 오지오니Andrea Oggioni가 그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서로 힘을 합치기로 했다. 7월 10일, 그들은 길고 어려운 어프로치를 끝내는 데 성공했다. 7월 11일, 그들은 마지막 80미터 등반에 나섰다. 선등으로 나선 피에르 마조가 가능한 한 높이 올라가 두 번째 비박을 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로 인해 5일간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등반의 난이도 단계를 바꾼 마터호른Matterhorn
1865년 7월 14일, 4명의 영국인인 프랜시스 더글러스Francis Douglas 경, 찰스 허드슨, 더글러스 로버트 해도우Douglas Robert Hadow 그리고 에드워드 윔퍼가 가이드인 미셸 크로Michel Croz를 비롯해 타우그발더Taugwalder 부자와 함께 마터호른 정상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그들은 체르마트에서 출발해 회른리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사흘 뒤에는 장-앙투안 카렐Jean-Antoine Carrel과 그의 동향 출신 동료인 장-밥티스트 비히Jean-Baptiste Bich 역시 브로일에서 출발해 그 봉우리의 이탈리아 쪽 사면을 오른 후 더 어려운 리옹 능선을 통해 정상에 도달했다. 그들은 반대쪽 능선에서 하산하던 영국인 3명이 추락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는 오직 윔퍼와 타우그발더 부자뿐이었다. 이 비극으로 등산은 고결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영국의 『더 타임스The Times』는 등산이라는 행위 전체에 의문을 제기한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산이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우슈바Ushba
우슈바는 더글러스 W. 프레쉬필드Douglas W. Freshfield의 코카서스 원정에 뒤이어 고트프리드 메르츠바허Gottfried Merzbacher와 빌리 리크머 리크머스Willi Rickmer Rickmers가 이곳을 탐험함에 따라 ‘독일의 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비토리오 셀라Vittorio Sella가 찍은 사진은 이런 도전을 곧 현실로 만들었다. 우슈바는 독일의 젊은 산악인 세대의 목표가 되었다. 1903년 7월 26일 아돌프 슐츠가 이끄는 4명의 박사인 프리츠 라이헤르트Fritz Reichert, 로베르트 헬블링Robert Helbling, 오스카 슈스터Oscar Schuster와 알베르트 베버Albert Weber에 의해 처음으로 정복된 남봉은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서야 등반할 수 있을 것으로 간주된 한계선상에 있었다.
한밤에도 환희 빛나는 북미의 지붕 데날리Denali
아사바스칸 원주민 언어로 ‘높은’을 의미하는 데날리Denali는 북미 최고봉으로, 거의 100년(1917~2015) 동안 매킨리McKinley로 알려져 왔다. 해발 6,190미터의 이 산은 클라크 호수Lake Clark에서 유콘자치령Yukon Territory까지 650킬로미터를 뻗어나간 알래스카산맥에서 압도적 위용을 자랑한다. 그리고 멀드로 빙하Muldrow Glacier, 카힐트나Kahiltna, 러스Ruth, 엘드리지Eldridge 토코시트나 빙하들Tokositna Glaciers 같은 거대한 얼음의 강들이 화강암 봉우리에서 계곡으로 흘러내린다. 수목한계선이 해발 600미터이지만, 1년 내내 눈이 내려도 햇빛이 비치는 남쪽 사면의 1,650미터까지는 이끼가 자란다.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Aconcagua
우리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목이 너무 마르자 부모님의 부엌에 있는 수도꼭지가 간절히 생각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갈증으로 반쯤 미쳐 있었다! 여기 눈과 얼음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마치 사하라사막에서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같았다! 밤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태양은 어김없이 떠올라 그 빛이 우리에게 일직선으로 뻗쳤다. 추위와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은 우리를, 특히 우리의 정신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었다. 이제 우리는 6,500미터에 이르러 정상이 가까이에 있었다. 500미터만 더 올라가면 마침내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서 있는 것조차 몹시 힘이 들었다. 드니는 발목을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인내의 절대적 한계에서 완전히 지쳐 있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본능에만 의지한 채 동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난다데비Nanda Devi
7,816미터의 난다데비Nanda Devi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중 하나이다. 마터호른, 우슈바, 마차푸차레, 에베레스트와 마찬가지로 이 산은 수십 년 동안 뛰어난 산악인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여신 데비’라는 의미를 가진 난다데비는 8천 미터급 고봉은 아니지만 가르왈에서 가장 높은 산이어서 언제나 산악인들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성역으로 알려진, 이 봉우리를 빙 둘러싸고 있는, 산들 안으로 리쉬 강가 협곡Rishi Ganga Gorge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 어려운 문제가 히말라야의 유명한 선구자들인 해롤드 윌리엄 틸먼Harold William Tilman과 에릭 십턴Eric Shipton에 의해 1934년에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8월 29일 노엘 오델Noel Odel과 틸먼의 난다데비 주봉 초등은 영국 등반사에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자체가 기록인 산 에베레스트Mount Everest
캉슝 빙하로부터 1,000미터 위에 있고, 아룬 협곡Arun Gorge을 향해 동쪽으로 찬란한 전망을 자랑하며, 멀리 티베트와 시킴과 부탄의 산맥들이 끝없이 펼쳐진 그곳 꽃양배추 타워 꼭대기에 어설프게 설치된 티롤리안 트래버스를 나는 좋아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티롤리안 트래버스를 해본 적이 없었지만, 에베레스트는 이것을 배우기에 좋은 장소였다. 게다가 앤더슨을 제외하고, 8,000미터까지 올라본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거의 9,000미터까지 산소 없이 계속 올라간다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하기나 한지 어떤지 알지도 못했다. 하벨러Habeler와 메스너Messner가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이후의 10년 동안 오직 18명만이 무산소로 정상을 밟았는데, 그중 넷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산중의 산 K2
폭풍설이 휘몰아치는 가혹한 산, 그것이 바로 산 중의 산 K2이다. 그런 명성은 격렬한 지질학적 역사와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이 산은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의 충돌로 수백 킬로미터의 땅덩어리가 밀어 올려져 생긴 티베트 고원인 소위 카라코람 단층지대 위에 우뚝 서 있다. K2의 기후는 특히 변화무쌍하다. 이 산은 몬순지역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겨울철에는 극도로 춥고 강풍을 동반한 폭설이 내린다. 이는 대부분의 히말라야 8천 미터급 고봉과는 다른 조건으로, 동계등반에 큰 걸림돌이 된다. 설원과 강풍 및 무너져 내리는 얼음덩어리들은 특히 정상 부근에서 위험한 눈사태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이다.
히말라야의 하얀 산 다울라기리Dhaulagiri
새벽 4시. 나는 온갖 힘을 다 짜냈다. 벽에서 보내는 10일째, 그중 3일은 마실 것도 없이 지냈는데, 이제 그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전 6시 나는 계곡을 향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1킬로미터 반을 10시까지 내려가야 할 텐데,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낡은 고정로프가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약간 밑쪽에 버려진 텐트 같은 무언가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며칠 후, 나는 그곳에서 눈사태가 일어나 프랑스 원정대의 기네트 해리슨Ginette Harrison과 셰르파 사다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서둘러 계속 내려갔다. 가끔은 눈 속으로 쓰러졌는데 몸을 다시 일으키기도 매우 힘들었다. 나는 시간과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점점 더 높아지는 산의 제왕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
낭가파르바트는 지질학적으로 매우 특이한 위치에 있다. 그리하여 매년 거의 1센티미터씩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상승하는 정상 중 하나이다. 이런 극도의 융기율은 물질을 지표면으로 가져올 뿐만 아니라 낭가파르바트에 온천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뜨거운 암석의 한 가지 특성은 판 충돌에 의해 쉽게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이다. 15~20킬로미터 깊이에서 이런 암석들의 빠른 상승과 극도의 융기율로 인해, 과학자들은 낭가파르바트 및 히말라야의 동쪽 끝으로 3,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산의 쌍둥이 남차바르와의 상승이 격렬한 하천 침식과 극도로 유순한 암석들 사이의 지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낭가파르바트의 유별난 고도차는 인더스강의 영향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극도의 융기율과 높은 역동성! 산악인의 관점에서 볼 때, 낭가파르바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타이틀을 향해 자신의 길을 조용히 가고 있는 셈이다.
최초로 등정된 8천 미터 고봉 안나푸르나Annapurna
회의론자들의 말에 결심이 흔들렸다면 나의 안나푸르나Annapurna 원정등반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자살 여정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고귀한 자기희생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인들은 이것을 20세기의 가장 황당한 아이디어 중 하나로 보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영웅주의의 정점이라고 불렀다. 나의 주된 아이디어는 논리적인 등반선을 따라 북서벽을 올라가는 것이었다. 1984년 프라이들 무츨레흐너Friedl Mutschlechner와 함께 가능성을 발견한 나는 그로부터 1년 후 한스 카머란더Hans Kammerander와의 성공적인 등반으로 그 사실을 입증했다. 슬로베니아의 토마주 휴마르Tomaž Humar는 이 등반을 단독으로 해내 고산등반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두뇌는 가야 한다고 말을 해도 신체가 느리게 반응하면서 점차적으로 힘을 잃어갔다. 끔찍한 느낌이었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에 이끌려 무의식중에 아이스액스를 휘두르고 크램폰으로 얼음을 찍었다.”
마셔브룸Masherbrum
마셔브룸에 대한 첫 도전은 1938년에 있었다. T. 그레이엄 브라운Graham Brown을 대장으로 한 원정대가 발토로 쪽이 아니라 그 뒤쪽인 후세 계곡에서 접근했다. 6월 17일, 조크 해리슨Jock Harrison과 로빈 호지킨Robin Hodgkin이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러나 7,620미터 부근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탈진과 동상에 시달린 그들은 포기했다. 악천후가 닥치자 그들은 움직일 수가 없어, 결국 폭풍설이 몰아지는 가운데 후세 계곡으로 후송되어야 했고, 발가락과 손가락에 동상을 입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정상에 올라갈 수 있었을까? 아니,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상 부근의 300미터는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데다 가파른 바위와 깊은 눈은 물론이고, 고소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55년 스탠리 콘웨이Stanley Conway가 이끄는 뉴질랜드 팀이 후세 계곡에서 출발해 1938년에 찾아낸 루트를 따라 등정에 나섰다. 하지만 날씨와 눈 상태가 좋지 않았고, 포터들이 병에 걸려 그중 하나가 폐렴으로 죽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7,000미터에서 등반을 포기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