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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참극-미군의 양민학살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이 비단 노근리 뿐이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99년 경남 마산시 외곽의 농촌마을인 곡안리 노인들의 입에서 나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언론이 먼저였다. 오히려 그들은 여전히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치유된다는 보장도 없이 깊은 상처를 헤집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당하고만 살아온 사람들의 본능적인 경계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은 결국 그 상처를 터뜨리고 말았다. 유족과 생존자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50년간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99년 10월 7일 진해 미군부대 앞에서 열린 진상규명 촉구집회에서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던 황점순 할머니(당시 74세)는 “너무 좋아서 그래. 이런 시절이 올 줄을 누가 알았겠노”하며 수줍어했다. 무섭게만 생각했던 경찰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미군부대를 향해 당당하게 진상규명을 외칠 수 있게 된 것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황 할머니는 전쟁이 일어나던 그해 스물 네 살의 새댁이었다. 가난했지만 듬직한 남편과 시부모, 두 살 난 아들 상섭이가 있어 남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났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7월 15일 지서에서 남편을 끌고 갔다. 보도연맹원 소집이었다. 남편은 “지서에 훈련받고 올께”하고 나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이 끌려간 후 보름만에 이곳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그녀는 시할아버지(이생현·당시 71세)·시어머니(하병이·당시 51세)와 함께 아들을 안고 마을 뒷산 아래에 있는 성주 이씨의 재실(齋室)로 피신했다. 그날이 음력 유월 열아흐레(양력 8월 2일)였다.
당시로선 인근에서 가장 큰 기와집이었던 이 재실에서 이씨 일가 100여명이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10여일이 지나는 동안 인근 마을에서는 큰 전투가 벌어졌지만 이곳 재실만은 안전했다. 한때 인민군들이 마을까지 내려오기도 했으나 주민들을 해치진 않았다. 주민들은 재실의 조상들이 돌봐주는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자 불길한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재실 아래로 보이는 마을에 미군들이 속속 들어오는가 싶더니 그날 저녁 어스름에 미군 1명이 통역관을 데리고 재실로 왔다.(이 통역관은 당시 재실의 주민 가운데 유일하게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이원순씨(당시 26세)였다는 설도 있다.)
미군은 우선 주민들의 정체를 파악한 후 “여긴 작전지역이니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말했다. 이에 주민들은 “벌써 날이 어두워지는 데다 노인과 어린이들이 많아 밤중에 피란을 가긴 어렵다”면서 “내일 아침에 떠나겠다”고 했다. 미군은 “그렇게 하라”고 말한 후 재실을 떠났다.
주민들은 밤새 짐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다음날 주민들은 평소보다 일찍 아침식사를 마친 후 마루에 짐을 쌓아두고 미군을 기다렸다. 다시 통보가 올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막상 짐을 싸놓긴 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어. 그래서 미군이 피란갈 곳을 알려줄 줄 알았지.”
그 때였다. 뒷산에서 내려온 인민군 정찰대 2명이 재실 인근 대나무 숲까지 내려와 마을 앞 ‘멧등거리(묘지)’에 있는 미군을 향해 총을 쏘았다. 미군 1명이 꼬꾸라졌다. 미군을 쏜 인민군 정찰대는 즉시 뒷산으로 사라졌다.
“아마 그 때문에 미군이 화가 났던 거야. 재실에서 총알이 날아온 것으로 잘못 알았던 게지.”
그로부터 약 30분이 지났을까. ‘탕’‘탕’하는 총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마루에 있던 주민 중 한명이 픽 쓰러졌다. 연이어 소낙비처럼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재실은 아비규환이 됐다. 주민들은 허겁지겁 양쪽 방과 부엌·마루밑·변소·돼지우리 등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사격은 계속됐다. 하늘에는 비행기까지 날면서 기총사격을 해댔다. 박격포탄이 날아들어 ‘쾅’하는 소리와 함께 서쪽 방 지붕이 내려앉았다. 그 방에 있던 임산부(이귀득·당시 31세)가 온몸에 피를 흘리며 마당으로 기어나왔다. 그녀는 목이 타는지 “물 물 좀…”하고 애원했지만 아무도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잠시 사격이 주춤하는 듯 했으나 이내 비명이나 아이울음 등 소리만 들리면 다시 비오듯 총탄이 날아들었다.
재실에 그대로 있다간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점순 할머니는 아이를 안고 재실 뒤편 콩밭을 가로질러 뒷산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옆에서 함께 뛰던 시어머니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곧이어 그녀도 다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가슴과 목에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부터 살폈다. 아이가 울지 않았다. 포대기를 풀어보니 겨드랑이쪽에 피가 묻어있을 뿐 총을 맞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아이는 죽으면 고추가 위로 올라간다는 말이 퍼뜩 생각났어. 그래서 급히 고추를 들춰보니 정말 그렇게 돼 있능기라. 눈물도 안나왔어. 그만 벌렁 누워버렸는데 그때부터 목이 말라 환장을 하겠더라구.”
눈앞에 보이는 콩잎을 따서 마구 씹었으나 풋내만 날 뿐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목마른 게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누운 채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해거름녁에 총격이 잠잠해지더니 생존자들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미군들이 총을 들고 마치 포로를 대하듯 성한 사람과 부상자를 가려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트럭에 타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군트럭을 타지 않았다. 아이 시체를 콩잎으로 덮어놓고 친정마을까지 걸었다. 한발자국 걷고 나서 쉬고, 또 쉬면서 걷는 도중 논에 있는 물을 마시려는데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현재 서울 ㅈ병원 행정실장으로 있는 이민순씨(60)는 당시 11살이었다. 그는 이날 현장에서 누나 복희씨(당시 14세)를 잃었다.
“오전 8시쯤 대청마루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총알이 날아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어머니·여동생과 함께 돼지우리의 돼지들을 몰아내고 그 속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있었죠. 그때 포탄이 떨어져 어머니와 여동생이 부상을 입었어요. 거기 있어선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나가자고 소리쳤죠. 그러나 안나가려 하길래 저 혼자 튀어나가 뒷산을 향해 뛰었죠.”
콩밭을 가로질러 뛰는데 발밑으로 총탄이 퍽퍽 튀는 게 보였다. 순간 발가락이 따끔했으나 콩밭이 끝나는 곳에 있는 개울을 힘껏 뛰어 건넜다. 공중에 몸이 뜨는 순간 건너편 언덕에 총탄이 작열하는 걸 보았다. 산으로 올라가는데 비로소 발에 피가 흐르고 있는 게 보였다. 정신없이 산 중턱까지 갔는데 인민군 1명이 총을 겨누고 있는 걸 발견했다. 본능적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인민군은 부상당한 발에 붕대를 감아주며 “산을 넘어가면 동네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동네에 내려가니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아무 집이나 방문을 열어보니 오이가 보였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오이 몇 개를 먹은 후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곡안리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역시 배가 고파 떨어진 감을 주워먹고 옆 마을 노인이 일러준 대로 창포해안에 가서 아버지·어머니를 만났다.
조호선씨(83)는 큰집 장조카(이일화·당시 4세)와 딸(삼순·당시 2세)을 안고 ‘작은 전각’(재실 관리인의 집) 변소에 숨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시아버지 이교영씨(당시 72세)와 시어머니 변담래씨(당시 74세), 그리고 시숙 종성씨(당시 36세)와 동서 이귀득씨(임산부), 조카 우순(당시 10세), 계숙(당시 3세), 그리고 호적에 출생신고도 않은 조카 2명 등 모두 8명을 잃었다.
“사격이 시작된 후 딸을 안고 방으로 가니 시부모 등 가족들이 모두 거기 있데? 처음엔 함께 숨어있었어. 그런데 자꾸 방안에까지 총알이 날아 오길래 내가 ‘여기 있으면 안된다’고 고함를 질렀지. 그런데 아무도 안나가는 거야. 그때 마당에서 웬 아이가 울고 있는데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저놈이 자꾸 우니까 총알이 날아 온다’고 욕을 하는거야. 그래서 보니 네 살먹는 큰집 조카더라구. 뛰어나가서 내 딸과 함께 조카를 안고 작은 전각 변소간으로 숨었어. 거기 숨는 바람에 살았지.”
조씨는 오후 6시쯤 미군들이 총을 메고 재실에 들어와 “살아있는 사람은 아랫마을로 내려가라”고 해서 “이제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들은 재실 곳곳과 주변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그대로 둔 채 진전면 암하마을을 거쳐 고현리 해안에서 배를 타고 거제로 피란을 갔다. 그리고 2개월 후 마을로 돌아와서 그때까지 부패한 채 방치돼 있던 시체를 수습했다.
조씨는 “여름 뙤악볕과 비에 노출된 시체들은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패돼 있었다. 만삭 상태에서 죽은 동서를 보니 아기가 자연분만된 채 새까맣게 돼 있더라”며 몸서리를 쳤다.
이재순씨(83)는 재실변소 똥통 속에 얼굴만 내밀고 숨었던 덕에 목숨을 건졌다. 악취는 물론이고 구더기가 입과 코로 기어오르는 속에서 하루 종일을 견뎠다. 그러나 아들 상업(당시 9세)이는 척추에 총상을 입고 시름시름 앓다가 스물 아홉에 장가도 못가보고 죽었다.
유족과 생존자들은 이 사건으로 최소한 83명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이곳에는 제25사단장 윌리엄 킨(William B Kean) 소장이 지휘하는 ‘킨 특수임무부대’가 7일부터 인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킨 소장은 최근 『AP통신』이 입수해 공개한 ‘민간인 사살명령’을 내린 장본인이었다.
곡안리 학살사건이 발생하기 13일전인 7월 26일 킨 소장은 다음과 같은 통신문을 예하부대에 내려 보냈다.
“전투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라” 그는 다음날인 27일에도 재차 “(남한 양민들은 한국 경찰에 의해 전투지역에서 소개됐기 때문에) 전투지역에서 눈에 띄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에 따른 조처를 취할 것”이라는 통신문을 하달한다.
이로써 미뤄볼 때 ‘왜 미군이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하는 의문은 우문에 가깝다.
또 학살 전날 저녁 미리 재실 피란민의 정체를 확인한 점으로 미뤄 이들 주민들을 인민군으로 오해했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다만 그날 아침 인민군 정찰대의 저격에 의해 미군 1명이 죽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보아 미군이 보복심리에 의해 학살을 자행했거나, 재실에 인민군이 숨어들었다는 의심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미군은 재실에 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양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차별 사격을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99년 10월 이 사건에 대한 필자의 보도 직후 결성된 곡안리 양민학살 유족대책위(위원장 이만순·66)가 그동안 확인한 피해자 명단만 봐도 △10세 이하 어린이가 17명(23%) △부녀자 36명(48%) △50세 이상 노인 20명(27%) 등이었다. 그러나 20~40대 청·장년 남자는 6명으로 8%에 불과했다.
특히 미군이 재실을 향해 사격을 가한 대숲 돌담은 30m거리였다. 육안으로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선명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만순 대책위원장은 “당시 주민들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있었고, 재실 지붕에도 하얀 삼베이불을 걸어 민간인이 있음을 표시해 놓았다”면서 “흰옷을 입은 아녀자가 아기를 안고 도망가는 걸 보면서 뒤에서 사격을 가했다는 것은 어떤 상황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피학살자 명단(대책위 집계, 괄호 안은 당시 나이)
◇현장 사망자(65명) △이석순(남·35) △이석기(남·55) △이봉순(여·19) △이복희(여·14) △이원순(남·26) △이봉연(여·16) △이기갑(남·77) △이갑이(남·46) △이상정(남·14) △이상연(여·9) △이상말(여·6) △이상팔(남·3) △이위이(여·39) △이상열(남·3) △이시운(여·67) △이상철(남·20) △이상철의 동생(남·2·출생신고 안됨) △이은갑의 처 △이은갑의 아들(10) △이기석(남·63) △이기수(남·72) △이남이(여·71) △이일순의 처 △이정두(여·13) △이상응(남·4) △이기필(남·60) △김직래(여·61) △이생현(남·71) △하병이(여·51) △이상섭(남·2) △이성현(남·59) △황수남(여·43) △이기정(남·12) △오서리 박증근의 처 △이수화의 처 △이규현의 처 △이교영(남·72) △변담래(여·74) △이우(于)순(남·10) △이일하의 누나(6·출생신고 않음) △이종성(남·36) △이귀득(여·31·임산부) △이계숙(여·3) △이진구의 형(8·출생신고 않음) △이진구의 동생(1·출생과 함께 사망) △이작조(여·24) △김육갑의 처 △김육갑의 아들 △월안리 권씨의 처 △한양순(여·54) △이태기(남·64) △이기출(남·60) △이순분(여·13) △오추래(여·70) △김죽림(여·79) △이하순(남·16) △이우(佑)순(남·14) △이갑석(남·16) △이상연(여·3) △이만순씨 댁 머슴 △머슴의 처 △머슴의 아들 △이덕이(여·55) △이갑순(여·28) △정명순(여·3)
◇부상후 사망(3명) △이수현(남·70) △이상업(남·9) △이주영의 조모(여·70)
◇부상자(6명) △이만순(남·16) △황점순(여·24) △이일하(남·4) △이민(敏)순(남·29) △정복수(여·23) △이민(旼)순(남·10)
<월간 말 9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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