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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적 차별과 색(color)
인류가 직물을 생산하고 미술 및 예술활동을 시작하면서 염료를 구하는 일 역시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연계에서는 이러한 염료를 구하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고, 특히나 뿔고둥과 자줒빛 추출물은 그러한 역사를 대표하는 사례로 종종 언급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자주색 못지 않게 귀한 색이, 특히 중세 유럽사회에서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붉은색'이었습니다.
원래 중세 유럽사회에서는 붉은 염료의 채취원료인 '꼭두서니'가 부족한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붉은색 염료를 직물에 입히는 가공과정에서의 기술부족으로 '제대로 된 붉은색 옷' 자체가 귀한 실정이었습니다.
즉 꼭두서니 염료는 상당한 가공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변색이 되는데, 세탁하거나 오래 두어도 변색되지 않는, 그리고 오래도록 강렬한 붉은색을 내고 유지할 기술이 부족했습니다.1)
때문에 '제대로 된' 붉은 색의 옷은 사실상 귀족들만이 입을 수 있는 것이었고 이것이 사회적 규범이나 차별기제로서 자리잡게 되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부르주아나 농민들이 귀족들간의 차별철폐를 요구하는 조건 속에서 이러한 붉은색 옷을 자유롭게 입게 해달라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죠.
16~17세기에 들어와 네덜란드 영방과 같이 부르주아들의 자유가 보장된 공동체가 발생하고, 각 도시에서 부르주아들의 권력이 커져감에 따라 붉은색 옷에 대한 사회적 제약은 조금씩 사라져갔습니다만, 문제는 이런 붉은 색 염료를 대량으로 그리고 보다 강렬한 색을 오래도록 가게 해줄 우수한 염료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붉은색 염료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켜준 곳은, 16~17세기 유럽사를 논할때 역시나 빼놓을 수 없는 아메리카 식민지였습니다.
2. 의외의 산물
이러한 유럽인들의 붉은색 염료 수요에 맞추어, 처음 등장한 것은 바로 신대륙의 나무인 브라질 나무였습니다. 국명 자체가 '브라질'이될 정도로 브라질에는 이 나무가 많았고, 브라질의 삼림은 당시로서는 무한정해보였습니다. (현재는 멸종위기 =_=;;)
때문에 우리의 눈에서 당시를 본다면, 나무를 맘놓고 베어다가 염료를 만들면 '돈이 될' 일이었습니다만, 세상일은 언제나 쉬운 것이 아니었으니....
브라질 나무 자체는 노동력 동원 과정에서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던 것이었습니다. (....)
아무리 삼림에 나무가 무한정 있다고 해도 그것을 벌채-제재하여 항구까지 끌어오는 데에는 상당한 노동력이 소모되었고, 농장이 아닌 삼림속에서 작업해야한다는 특성은 노예의 도입도 제한하는 특성이 있었죠.
더군다나 브라질 나무 자체도 염료가 되는 부분을 얻어내려면, 겉의 껍질과 표재(表材)를 깎아내어야 했는데, 이 나무가 워낙 딱딱해서 가공시간이나 노동력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네덜란드의 경우 아주 원목을 수입해다가 죄수들에게 이 나무를 깎게 하고, 일정량을 채워야만 밥을 지급해주는 시스템을 운영할 정도였습니다. (....)
연지벌레로 불리는 이들 벌레는 남부 멕시코의 황무지에 사는 선인장에서만 사는 특수한 종류였고, 원주민들은 이미 아스테카 시대 이전부터 이런 벌레들을 대량으로 사육할 수 있는 기술을 획득한 뒤였습니다.
결국 작물이나 나무도 아닌 이런 벌레들이 유럽의 시장수요와 국제교역의 축을 담당하는 상품으로 자리잡은 것이었죠. 그리고 이들이 '벌레'라는 특성은 해당지역 원주민 공동체들에게 상당한 역사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3. 원주민 공동체를 '살린' 벌레들
스페인은 원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엔코미엔다 제도 등을 통해 스페인 정착민 중심의 그리고 대지주 중심의 아시엔다(hacienda) 체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가 자리잡아가는 와중에서 종래의 원주민 공동체는 파괴되고, 원주민 구성원들은 노예화되기까지 하는 양상이 존재했습니다.
만일 코치닐 염료가 보통의 '작물'로서 대농장에서 마음껏 재배할 수 있었다면, 치아파스를 중심으로 한 남부 멕시코의 원주민 공동체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되는' 이들 염료는, 단순한 재배작물이 아닌 '벌레'였기에 원주민과 그들의 공동체를 살릴 수 있는 배경이 되었죠.
이 연지벌레라는 동물은 일단 특정 종류의 선인장이 아니면 먹지 않는 미식가 체질(...)인데다가, 벌레의 번식에 있어서 벌레 알과 유충의 채집, 성장의 관리를 위한 온도-습도의 조절은 어지간한 경험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고, 거기에 상품가치가 되는 벌레(짝짓기 전의 암컷)2)를 골라내는 일 역시도 상당한 경험과 감식안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대대로 이어지는 관습적 경험의 체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비해서, 이들 벌레를 키우는 것은 놀랍게도 별다른 토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 선인장을 재배할 다소의 면적을 제한다면 텃밭 정도의 크기는 물론 집안에서도 충분히 키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죠.
결국 스페인인들은 이들 치아파스 등의 남부 멕시코의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노예화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공동체를 남겨두고 이러한 '생산구조'를 남기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단순한 치아파스 지역을 비롯한 남부 멕시코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만으로 이들 원주민 공동체가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3)
(심지어는 내부 운영에 있어서 스페인 총독부의 직접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을 단위의 재량권이 증진되거나 강화되는 양상까지 존재하였죠.)
이렇게 살아남은 원주민 공동체는 나름의 전통을 발전시켜나가게 됩니다. 즉 다소의 면적이 드는 선인장 재배나 벌레의 파종 및 생육단계 일부를 마을 공유지인 에히도(ejido)에서 시행하고, 소생산자로서의 개별 농가가 코치닐로 수익을 올리면 그것 일부를 마을의 공공시설이나 상호부조 비용에 충당하는 전통을 형성했던 것이었죠.
이처럼 치아파스를 중심으로 한 남부 멕시코는 원주민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공동체가 제일 온존한 지역이 되었을 뿐더러, 공유지를 통한 자신들의 지역적-경제적 공동체 전통을 세우고, 그것이 세계경제와 시장에 통합되어 기능하는 하나의 양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코치닐 염료도 추출이 결코 용이한 것은 아니었지만, 브라질우드 나무보다도 가공이 쉽고 재배가 가능하다는 것은 양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꼭두서니보다 빛깔이 곱고 별다른 가공과정 없이 오래간다는 것은 질적인 측면에서 코치닐 염료의 우세를 보장해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됨에 따라 코치닐 염료는 금-은에 이어 남미대륙에서 반출되는 최대의 상품이 되었고, 이는 멕시코 독립 이후로 재배지가 더욱 확산되어 가속화되었습니다. 18세기~19세기 초 이제 코치닐 염료는 생산량이 늘어서 가격은 다소 하락했지만 저렴하고 대중적인 염료 중 하나로서 광범위한 시장을 형성했죠. (월광토끼님 포스팅 참조)
이렇게 코치닐 염료를 통한 치아파스 지역 등과 세계경제와의 결합, 원주민 공동체의 보존이라는 양상은 계속되서 이어질 것 같았습니다만. 이러한 '행복한 결합 관계'를 깨트린 것은 현대과학의 발전이었습니다.
4. 파국
1850년, 영국에서 석탄의 콜타르로 아날린 염료를 추출해내고, 여기서 붉은색을 생산하게 됨에 따라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초기의 아날린 염료는 질적으로 조악하고 변색이 쉽게 되었기에, 코치닐의 우세를 금방 뺏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화학염료의 품질은 개선되었고, 코치닐 염료는 종전처럼 우세한 위치를 고수할 수 없었습니다.
코치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듬에 따라 상당부분의 원주민 공동체가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들 원주민 가정 다수가 옥수수 등을 재배하는 소규모 농가로 전환되게 됨에 따라 마을공동체에서는 말썽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주곡 생산을 하기에는 수에 비해 면적이 부족한 에히도의 운영권을 두고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 다수를 핑계를 잡아 쫓아내는 등의 일도 발생하게 되었죠.
(프로스테탄트로 개종을 했나니, 마을 축제에 참가를 안했으니, 마을 돈을 빌리고도 상환이 늦었으니 등등 별별 핑계가 다 동원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마을 공동체의 붕괴와 개인 소농의 몰락이라는 틈을 타 고리대와 법적 장치를 이용한 대지주-부재지주들의 치아파스 지역으로의 진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카카오, 커피 등을 중심으로 한 대농장 체제를 도입했고, 치아파스의 토지 다수가 이들에 의해 잠식되게 되었죠.
결국 20세기에 들어서는 시점에서, 치아파스는 비교적 최근(?)까지 공동체적 운영을 유지했던 전통에 비해서 멕시코에서 가장 소외되고 빈부격차가 많은, 그리고 사회 주류층으로서의 메스티소와 잔존한 원주민 공동체가 부딪치는 사회적 격랑의 장이 되었습니다.
* 반전
코치닐 염료가 화학염료에 밀려서 몰락한 것은 맞습니다만, 특정 영역에서는 자신의 자리를 내주지 않고 지금의 우리의 생활에도 온존히 와닿는 부분이 있죠. 그 분야는 애시당초 화학생성물이 발을 붙이기가 힘든 분야이기도 합니다.
이런 코치닐 염료가 우리들의 생활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사실 본 포스팅의 목적은 딸기우유 안티가 주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주)
(終?)
5. 부평(附評) : 정치적인 사견을 덧붙여;;
사실 치아파스라는 지방이 저 자신에게 와닿게 된 계기는 역시 '사파티스타 반군'의 활동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하필 치아파스에서 이러한 분규가 터졌는가?라는 의문이 언제나 존재했었고 말이죠.
사실 '토지와 자유'(Tierra y Libertad)'를 표방했던 멕시코 혁명의 여파와 카르데나스 정부의 정책으로 이러한 치아파스의 공동체적 삶과 공유지(에히도)의 연계는 어느 정도 수명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4) 하지만 이러한 에히도 정책은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원주민들이 '그나마 가진 쪽박이라고 깨지 않게 하는 현상유지책'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1982년의 IMF의 권고에 따른 에히도에 대한 개혁조치와, 1992년의 헌법에서의 토지관련 조항 삭제, 1994년의 NAFTA 체결 등은 시장주의적 개입과 외국자본으로의 매도를 가속화하였고, 여기서 원주민들의 공동체적 삶과 '마지막 쪽박'이 사실상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발이 바로 사파티스타 반군의 발생으로 이어지게 되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멕시코 정부나 지도층의 반응인데, 특히 대문호 중 하나인 옥타비오 파스 등의 반응은, 비단 치아파스 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가난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인데, 치아파스에서 이러한 무장봉기가 발생한 것은 외부집단의 유입이나 사상집단의 준동이 더 크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또 다른 대문호인 카를로스 푸엔테스나 한국의 남미연구자들은, 치아파스의 무장봉기와 저항의 전통을 '역사속에서 찾음'으로서 대응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발생했던 반란, 시위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운동사적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운동적 관점을 벗어나 좀더 거시적인 관점을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요?
앙리 피렌은 서유럽 부르주아 정치운동의 문화적 기반을 자치도시(commune)적 전통에서 찾았고, E.P 톰슨은 노동자 계급의 저항을 인클로저 이전에 공유지를 중심으로 해서 매개되었던 '도덕경제(moral economy)'를 매개로 한 역사적-문화적 전통에서 찾았습니다.
만일 치아파스의 저항을 단순한 경제적 빈궁에서 유래된 것만이 아닌 보다 다양한 이유에서 탐구해보고자 하면서, 옥타비오 파스와 같은 논객들의 비아냥(?)을 극복할 만한 기제를 찾는다면, 이러한 역사적-문화적 전통을 탐구해보는 것도 나쁜 시도는 아니리라고 봅니다.
결국 저 자신은 톰슨 등이 주목했던 '문화적 전통'을 연지벌레-코치닐 염료와, 그것의 공유지 재배를 통한 공동체적 삶에서 그 연원을 찾고, 또한 그러한 공동체적 삶의 기억이 가장 최근에까지 온존된 원주민 공동체가 바로 치아파스 지역으로서, 그들의 저항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적 삶에 대한 문화적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위험한 추정'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은 단순히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폐쇄적인 지향이라기보다는, 세계시장과 근대경제 속에서도 자신들에게 적절한 생산양식을 제공하는 '산업'과 연결된다면 그러한 공동체적 삶의 유지가 가능했다는, 비교적 시사적이고도 '저항 이후의 세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염두에 둘 성질의 '기억'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러한 '문화적-역사적 기억'이 바로 옥타비오 파스 등을 비롯한 논객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무장봉기의 발생 이유'에 대한 나름의, 그리고 수많은 설명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합니다.
* 뱀다리 : 언제나 그러하듯이 위험한 추정과 논리가 가득한 포스팅인데, 정치적 견해까지 숨기지 않았으니 저 자신도 많이 뻔뻔해 졌군요. (....) 다만 사상적-정치적 견해가 다르신 분들이라도 자유롭게 의견이나 지적-질책을 개진해주시는 것은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도 이러한 '추론'은 물론, 코치닐과 치아파스라는 역사가 현재의 저항운동에 연계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논리적으로 위험한 연결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가 이번 글을 올리고 곧장 2일 동안 타 지방으로 출장을 가는지라, 지적이나 질책에 답변이 늦어질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미리 제현들의 양해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꾸벅)
그리고 뱀다리를 하나 더 추가하자면, 역시나 많은 분들의 지적 말씀을 듣고, 거창한 목적의식(즉 사파티스타 저항운동의 기반이 되는 문화적 기억과 인식을 과거에서 찾겠다는)에 비해서, 저의 노력과 자료수집, 앎 등은 매우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단지 저의 글을 '이런식으로도 문화적 기억의 연원을 추적할 수 있다.'정도로나 읽어주셔도 감사할 노릇일 것 같습니다. 이에 제현 분들에게 송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한편 이런 글이라도, 잘 보아주시고 이오공감에 추천해주시며, 격려와 지적의 말씀을 아끼지 않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 주석
주 1) 꼭두서니로 염색한 옷감을 명반을 이용해서 광택을 내고 보존하는 과정이 문제였는데,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꼭두서니로 염색한 붉은 옷은 금새 변색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처리기술은 인도에서 17세기까지 독점해오다가, 오스만 제국에서 인도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트라키아의 꼭두서니와 아나톨리아의 명반을 이용해 대량생산해내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터키의 직물산업을 빛냈던 '터키시 레드(Turkish Red)'의 탄생이었죠.
주 2) 사실 상품가치가 있는 것이 암컷에 한정된다고 해봐야 이 연지벌레의 세계는 수컷 한마리 당 암컷 200마리의 비율인 사회(?)입니다. (....) 비단 대량생산에 꼭 불리한 환경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음생엔 부디 연지벌레 수컷으로 태어났으면 (...)
주 3) '상대적 무관심'만으로 주변부의 원주민 공동체가 현대까지 유지되기엔 19세기~20세기의 멕시코 사회는 '무서운 사회'였다는 것이 문제였겠죠. (....)
실제로 이러한 남부 치아파스의 원주민들과 달리, 별다른 생산기반도 세계경제와도 연계가 없었던, 북부 멕시코의 야키족은 19세기까지는 상대적 무관심 덕분에 생존합니다만......결국 잔인한 토벌전 끝에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는 '에네켄 선인장(한국에서는 '애니깽'으로 알려진)' 농장으로 노예로 끌려가는 처지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병이나 사역으로 죽어가자 그 자리를 메꾼 것은 중국인들과...익히 알려진 한인 노동자들의 애환서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주 4) 1930년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카르데나스 정부의 에히도 정책은 전면적인 토지개혁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소유권에 입각한 부분적 개혁에 가까웠습니다. 때문에 공유지-목초지로서의 의미를 가졌던 에히도 역시도 '개인 보유지'로서의 에히도와 '집단 보유지'로서의 에히도로 나뉘게 되었죠. 멕시코 전반에서 봤을 때는 개인적 에히도의 비율이 우세하지만, 치아파스의 경우는 어떤지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편 치아파스 전체에서 이런 전체 에히도의 비율은 대토지 소유에 잠식되었어도 1980년대까지는 전체 경작지의 40%를 점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에히도 토지의 90% 가량이 관개시설도 없는 경작지라는 점에서 알짜배기 땅은 대체로 대지주들에게 점유되어 갔습니다만, 1996년 에히도에 대한 시장주의적 조치가 취해질때까지는, 이러한 에히도가 원주민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점은 살펴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 참고문헌
케네스 포머란츠, 박광식 역,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심산, 2004)
주경철, 『문명과 바다』(산처럼, 2009)
조돈문, 『신자유주의시대 라틴아메리카 시민사회의 대응과 문화변동』(오름, 2005)
자크 앙크틸, 최내경 역, 『목화의 역사』(가람기획, 2007)
이성형 외, 「치아빠스 농민반란 연구 - 세계화 시대의 지방ㆍ종족 반란」, 『국제지역연구』7권 3호 (1998)
문남권,「토지 제도를 통해 본 멕시코 대 원주민 정책의 변화 :에히도를 중심으로」, 『국제지역연구』8권 2호 (2004)
박병규,「사파티스타(EZLN) 투쟁의 역사적 의미」, 『이베로아메리카 연구』 13집 (2002)
들꽃향기 2010/07/24 18:14 #
아하...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그렇게 구체적으로 등장하는군요;; 거기서도 비둘기의 피 얘기가 나오면서 연지벌레 이야기가 나왔다니 읽은 책인데도 다시금 깨달아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보통 연지벌레는 생으로 수출(?)되기보다는 건조화된 상태에서, 혹은 이미 염료로 가공되서 수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ㄷㄷ
위장효과 2010/07/23 13:59 # 답글
지금 영국 육군 근위연대의 빨간 제복도 코치닐로 염색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그 곰털 모자에 코치닐 제복이 환경보호론자들의 타겟이 되고 있다고...)
들꽃향기 2010/07/24 18:20 #
아하 그렇군요. 이 글에서도 링크했던 월광토끼님 포스팅에서도 코치닐 염료가 제일 쌌었는데, 20세기에 들어서 코치닐 염료의 부족으로, 근위연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군대의 의장복도 붉은색이 사라졌다는 구절을 보고 의아해 했었습니다. "코치닐의 생산이 수요가 줌으로서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화학염료가 있는데 왜 문제일까.."하고 말이죠. ㄷㄷ그런데 지적의 말씀을 들으니, 지금도 제복 염색조차도 코치닐로 염색하기를 '고수'하는 모양이군요 ㄷㄷ 그렇다면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도 역시 풀린 듯 합니다.
덕분에 이해가 잘 안되던 연결고리가 한결 명확해졌군요. 제보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
ghistory 2010/07/27 22:40 #
들꽃향기/1. 벌레들보다는 곰털을 제공하는 곰들의 희생에 환경보호운동 지지자들이 더 민감하겠지요.
2. 재미있게도 브리튼(영국) 왕실 근위대의 제복과 단마르크(덴마크) 왕실 근위대의 모자는 외양이 거의 동일하고, 다만 단마르크 왕실 근위대의 제복 색상이 브리튼 왕실 근위대의 제복 색상과 다릅니다. 쾨벤하운(코펜하겐)의 왕실 근위대도 모자에 곰털을 쓰는지 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ghistory 2010/08/03 07:04 #
위장효과+들꽃향기/문제의 곰털가죽 관련 서술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Bearskin
진성당거사 2010/07/23 14:13 # 답글
라틴아메리카사 수업 할 때 저 부분을 가지고 세미나를 했었는데, 여기서 간만에 이 글 읽고 잊고 지냈던 사실 하나를 다시 기억하게 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제 주변 사람들은 저 딸기우유를 아주 좋아하는데.....;들꽃향기 2010/07/24 18:20 #
역시나 라틴아메리카를 공부하면 치아파스나 코치닐이나 개별적으로는 빠지지 않는 사실일 것 같습니다. ㄷㄷ 어찌보면 저의 전개내용 자체도 실은 잘 알려진 사실의 '주관적 편집'인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웃음)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부족한 글을 잘 읽어주셨다니, 여러모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 그리고 뭐 사실 저는 이런 글을 쓰고도 딸기우유를 잘 먹습니다 (...) 그리고 뭐 건강을 위해서는 우주인도 솥에 삶을 세상인데 벌레 정도는 뭐....(....)
MessageOnly 2010/07/23 14:21 # 답글
누구나 빨간옷을 입고자했고, 빨간염료를 얻는 공동생산체계...이 공동체를 뒤흔드는 것은 대자본산업체..빨갱이의 신기원설 (도망)
들꽃향기 2010/07/24 18:22 #
사실 마르크스도 부르주아 출신이고, 다수의 한국 초기 사회주의자들도 자본가와 지주의 자제출신 아닙니까. ㄷㄷ그러므로 빨갱이의 신기원설은 타당성을 가지고...(도주)
ygy2011 2010/07/23 14:29 # 답글
세계테마기행에서 연지벌레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벌레를 찍어서 슥슥 문지르니 빨간색 액체가 흘러나오는게 신기했는데 다큐에서는 염색에 쓰인다고만 나왔거든요. 지금도 색소를 비롯해 많은 용도로 쓰이는군요.들꽃향기 2010/07/24 18:23 #
오오 테마기행에서도 그 벌레를 다루어줬군요. ㄷㄷ; 역시나 대중매체는 한발짝 저를 앞서가고...(각혈)죽 찾아보니 식용색소나 비누제조, 화장품 제조 등에서도 쓰이는 것 같더군요. 더군다나 천연추출물이라고 요즘같은 시대에 더 각광받는 것 같습니다. ㄷㄷ
santalinus 2010/07/23 14:30 # 답글
원래 딸기우유 안먹었습니다...;;; 중남미 식민통치역사에 대해서 궁금한 게 참 많은데 알기 쉽게 정리된 개론서로는 참고문헌에 언급해주신 책들 말고 어떤 책들이 있는지요? 라틴아메리카 쪽은 완전히 문외한이라;;;들꽃향기 2010/07/24 18:29 #
전 딸기우유는 사실 원래부터 잘먹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제대로 읽은 개설서라고는 도서관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이성형 등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사상』,존 엘리엇의 『히스패닉 세계』와 같은 개설서들 정도입니다. (각혈)
때문에 저 자신이 남미통이라거나 남미 역사가 전공이 아닌 상태에서 이 이상의 대답을 드리기는 힘들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 __);;
ghistory 2010/07/27 22:41 #
시간과 노력을 조금 소비해야 할 것이라 추정하므로, 상담은 제 블로그에 와서 다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드릴 수 있습니다.스푼맨 2010/07/23 14:42 # 답글
이런 글이 땜빵용이라니 ;;딸기우유에 쓰이는 연지 벌레에 대해서는 예전에 들은적이 있었는데 확실히 알게 되고 그에 엮인 부분도 잘 읽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원주민의 번영 후 몰락은 안타깝네요.
들꽃향기 2010/07/24 18:31 #
땜빵용은 맞습니다. ㅎㅎ 원래 의도하던 다른 주제가 있었는데 자료 자체의 부족으로 중도포기하고, 사실 위험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셨듯이 세부분야에서는 비판받을 소지는 상당하니깐요. (어흑)저 역시 사실 그러한 원주민의 몰락과정 자체에 상당한 안타까움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같 같습니다. ^^ 때문에 부족한 글을 잘 보아주시고, 이처럼 공감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
ghistory 2010/07/23 15:23 # 답글
1. '도시 공동체'→자치권운동을 중세 성기에 전개하여 획득한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도시자치체' 나 '자치도시' 로 표기함이 어떨지요?2. 브라질우드: 브라지우식 포르투갈어로는 '파우-브라지우'(Pau-Brasil).
3. '영국의 여왕'→'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
4. '대농장(hacienda)'→아시엔다. 그냥 대농장이라고 하면 뉘앙스가 안삽니다.
5. 선인장→에네켄 선인장?
6. 스페인 총독부:
1) 정확하게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Viceroyalty of New Spain).
2) 부왕령의 최고통치자는 부왕 겸 총독(부왕은 명예 호칭이고 실제 직위는 총독).
3) http://en.wikipedia.org/wiki/Viceroyalty_of_New_Spain
7. 에스파냐 지배기 원주민 자율성의 강화: 심지어 원주민 집단별 정체성의 강화마저도 상당 부분은 에스파냐인들의 필요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에스파냐인들이 원주민 집단들을 구별하려 가령 의상들 따위를 구별해서 지정해준 게 현재까지 전통들로 전승해올 정도이니.
8. 치아파스 토지문제: 메히코 혁명 이후의 역대 혁명정부들-심지어 라사로 카르데나스 정부까지도-이 정작 헌법상의 토지개혁 공약을 실제로는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책임 때문이기도 합니다.
9. '토지와 혁명'→'토지와 자유'(Tierra y Libertad).
10. '1996년에 이러한 에히도의 시장주의적 개입과 외국자본으로의 매도를 허용하였고':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1994년 직전에 북아메리카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목적으로 에히도 체제의 헌법적 근거를 헌법을 개정하여 삭제하였다고 기억합니다.
11. '치아파스에서 이러한 무장봉기가 발생한 것은 외부집단의 유입이나 사상집단의 준동이 더 크다고 본다는 것':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파티스타 반군의 지도층은 중간계층 출신인 백인들 또는 메스티소들로서 다양한 좌파운동들 출신자들입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 자체가 그 대표적 사례이고.
12. 터키 빨강→터키시 레드. '프러시안 블루' 를 '프로이센 파랑' 이라고 표기하지는 않음. 어디까지나 영어식 표기이므로.
13. 애니깽: 에네켄의 한국식 와음.
14. ''브라질에는 이 나무가 많았고, 브라질의 삼림은 무한정해보였습니다.'
1) 현재는 위협받는 생물종임.
2) http://en.wikipedia.org/wiki/Caesalpinia_echinata
들꽃향기 2010/07/24 17:03 #
오늘도 여러 측면에서 세세한 지적을 아끼지 않아주시니 감사합니다. ^^1. 타당하신 말씀입니다. 도시 공동체가 보다 광범위한 개념임을 상기하자면, '도시 자치체', '자치 도시(Chater를 취득한)'라는 표현이 더 타당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이는 본문에 교정하겠습니다.
2. 다시 보니 영어식 표현을 본문 내에서 계속 쓰고 있었군요, 이에 지적해주신 포르투갈어 표현과 영어식 표현을 병기하고, 나머지 중복 부분에서는 순 우리말로 바꾸고자 합니다.
3. 네 맞습니다. ^^ 사실 주경철 선생님의 기고문에서도 제시된 사례였습니다만, 보다 광범위한 사회층을 망라해보고자하는 표현의 욕심에서 그렇게 썼습니다. =_=;
4. 사실 저 역시 '아시엔다'가 좀 더 착취적이고 악랄한 스멜을 뭉기뭉기 풍긴다는 표현에서 선호하는 표현입니다만,
제 자신의 성향이 '어느 한쪽'에 쏠린 것은 사실이기에, 오히려 저 자신에 대한 경계를 삼다보니 그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넓으신 양해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
5, 13. 맞습니다. 에네켄 선인장이고, 애니깽은 한국식 표현이네요. ㄷㄷ 이에 대해서도 역시 교정하겠습니다.
6. 말씀해주신대로 멕시코(메히꼬) 뿐만이 아니라 페루 부왕령, 나폴리 부왕령 등등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사실 부왕령체제로 표기되었다는 점은 주지하고 있습니다만, 편의상 총독의 개념으로 이를 계속 쓰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병기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
7. 이 지적에 대해서는 일전에 스페인 문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에게서도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보충의 지적말씀에 감사드립니다. ^^
8. 사실 공약이 제대로 이행되었다고 해도, 저 자신의 사견으로는 제도적 한계성 때문에 의문의 소지가 있습니다만, 아래 트윈드릴님의 지적처럼 1950년대까지도 실제적인 시행조차도 치아파스 지역 등은 실제로 이러한 문제가 제대로 실행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9. 지적해주신대로 '토지와 자유'입니다만, 저의 명백한 실수로군요. 이에 대해서는 본문을 교정하고자 합니다.
10. 헌법을 무려 고치는 국제화의 위엄인가효 ㄷㄷ 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적과 검토하여 본문을 교정하고자 합니다. ^^
11. 그렇군요. 사실 마르코스 부사령관 본인이 외부 유입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비단부사령관 본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군요.
다만 '다른 가난한 지방은 다 얌전한데 너희만 말썽인건 순전히 빨갱이들 때문이야.'라는 지적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보고 싶네요.
12. 생각해보니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저 자신은 본문에서 브라질우드라는 영문 표기를 쓰고서도 정작 여기서 고유명사화된 것은 한글로 제멋대로 바꾸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14. 그렇군요. 이 역시 본문에 반영하여 교정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여러 문제들을 지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여타 다른 문제에서의 실수나 저의 잘못 혹은 비약 등이 있다면 역시 기탄없는 지적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위장효과 2010/07/28 20:20 #
덴마크 왕실 근위대 역시 쓰긴 씁니다. 공식 홈피 들어가서 사진 찾아보니까 곰털모자 쓴 모습이 나오는군요.들꽃향기 2010/07/29 21:03 #
위장효과님// 그렇군요. 덴마크 왕실도 욕먹을 건덕지가 한가득....ㄷㄷ 정보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ghistory 2010/08/03 07:05 #
위장효과+들꽃향기/참조바람:
http://sldn84.egloos.com/2648445#4594234.04
액시움 2010/07/23 15:26 # 답글
참고로 저 연지벌레는 몇 십 년 전까지 립스틱 원료로도 사용됐다죠.(...)들꽃향기 2010/07/24 18:32 #
지렁이, 개불, 날곤충 날개 등만 쓰인 줄 알았는데, 연지벌레 자체도 쓰였군요. 하긴 그러니 연지벌레라는 명칭이 생길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근데 왠지 저는 선물로 그런 립스틱을 더 선호할 것 같군요. ㄷㄷ
휴메드슨 2010/07/23 16:00 # 답글
동양에서는 노란색이 유명한(?)색이라던데요그 벌레가 딸기향에 들어가는 건 몰랐습니다
들꽃향기 2010/07/24 18:36 #
사실 노란색이야 중앙과 황제의 색이니깐요. ㅎㅎ 조선 태종도 중국 사신과의 연회자리에서 자신이 노란색 깔개를 썼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식은땀을 흘렸다는 일화도 있더군요 (...)사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선호한 황색의 염색제는 강황(울금, 타마린드)입니다만, 이것이 딱히 부족했을 정도는 아니라고 보고 싶습니다. 물론 염색을 할 재력을 가진 계층은 제한되었겠지만, 『동국여지승람』등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전라도와 경상도 남부에서 재배하고 특산물로 지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
검투사 2010/07/23 16:50 # 답글
상품가치가 되는 벌레(짝짓기 전의 암컷) ....문득 외계인들이 지구의 숫처녀들만 잡아다가 그 피를 뽑아 약을 만든다는 내용의 SF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그냥저냥...)
들꽃향기 2010/07/24 18:37 #
사실 저의 경우는 멀리 갈것 없이 외계인들이 식용동물로 인간들을 사육하고, 오겹살을 만들기 위해 가두어서 먹일것만 준다는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그냥저냥의 뭔가 만감이 교차하는군요. ㄷㄷ검투사 2010/07/24 22:04 #
하긴 그 설정은 H. G. 웰즈 본좌께오서 100하고도 수십 년 전에 <우주전쟁>에서 써먹으신 것이죠... ㄷㄷㄷ그 전직 포병의 발언에 그런 게 있었으니...
:D 2010/07/23 16:58 # 삭제 답글
언제나 즐겁게 보는 포스팅입니다. 우리나라 홍화가 생각네요.들꽃향기 2010/07/24 18:39 #
사실 홍화도 그렇고, 꼭두서니 자체도 우리나라에서는 붉은색의 염색제로 자주 쓰였던 것 같습니다. ㅎㅎ그리고 누추한 곳에 찾아와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언제나 즐겁게 보아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
크핫군 2010/07/23 17:14 # 삭제 답글
.... 딸기 우유 안먹을래...들꽃향기 2010/07/24 18:39 #
천연색소라도 의학적으로 위험하다는 견해가 있지만, 그래도 뭐 벌레라는 자체는 어떻습니까. ㅎㅎ누군가의친구 2010/07/23 18:34 # 답글
딸기우유의 색깔의 원인이 연지벌레라는건 알았는데 그게 애초에는 염색용이라는 건 몰랐네요. ㄷㄷㄷ들꽃향기 2010/07/24 18:40 #
사실 이런저런 분야에 써보면, 여기여기에도 쓸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발상이 생기는 것이 바로 인간사회인 것 같기도 합니다. (....)때론 그 응용력이 발전을 부르지만 파국을 부르는 경우도 상당한 것 같기도 (....)
까마종이 2010/07/23 18:53 # 답글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식민지 경제에 코치닐의 영향력이 저 정도였을 줄은..
치아파스가 나오길래 사파티스타가 떠올랐는데 이런 식으로도 볼 수 있는 거군요.
들꽃향기 2010/07/24 18:44 #
사실 금은을 제외하고는 코치닐 자체는 다른 교역품들에 비해서 우월적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ㅎㅎ 특히 멕시코 독립 이후 재배지가 중미 전역, 그리고 페루로 퍼지면서 더욱 그러했었죠.니카라과의 경우 이런 코치닐과 인디고 염료를 담보로 영국에서 돈을 빌린 경우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ㄷㄷ
사실 코치닐-지역 원주민 공동체-사파티스타 간의 '이런식의 연결'은 저 스스로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이처럼 이해해주시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
shaind 2010/07/23 20:51 # 답글
(속류맑시즘에서 말하는) "인프라스트럭쳐" 라는 느낌이네요 이건들꽃향기 2010/07/24 18:42 #
사실 저 스스로가 '속류맑시즘'을 벗어나지 못한 탓이 큰 것 같습니다. (웃음)다만 그런 속류 맑시즘 자체를 '신봉'하고 싶지는 않네요. ㅎㅎ 때문에 사상적인 문제에서도 덧붙여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기탄없는 지적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
로크네스 2010/07/24 00:09 # 답글
세상 모든 것이 이리저리 다 연관이 되어 있군요. 좋은 포스팅 잘 보았습니다!들꽃향기 2010/07/24 18:45 #
사실 이런 연관되어 있는 것의 의미를 찾거나 해석하는 것이 역사학의 기쁨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 그리고 부족한 포스팅이라도 잘 보아주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ArchDuke 2010/07/24 02:54 # 답글
딸기우유는 벌레의 맛..........악!들꽃향기 2010/07/24 18:45 #
맛 자체야 설탕이고 색깔만 벌레인데 어떻습니까 ㅋㅋ 그래도 석탄 추출물을 섞어주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한 노릇으로 여겨야 하려나요. ㄷㄷumberto 2010/07/24 03:06 # 답글
기술의 발전, 국제 무역구조의 변화에 따른 전통 공동체의 해체라.... 참 씁쓸합니다. 영화 <씨티 오브 엔젤>을 보면서 느낀 것인데, 남미지역 국가들이 지금같은 범죄 막장국가 꼴이 된 이유 중의 상당부분이 식민지적 착취와 전통 공동체의 붕괴라는 측면이 강한 것 같습니다.들꽃향기 2010/07/24 18:51 #
사실 언급해주신 측면, 즉 기술의 발전과 국제무역구조의 변화로 인한, 지역 공동체와 사회의 변화라는 논제는, 남미사 분석의 주요한 틀이 되는 것 같습니다.특히...한때 역사학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폴 스위지의 사학연구에 대해서, 저 자신은 교역과 해당 지역사회의 연계, 그리고 그 사회의 변동과 그에 대한 인민의 저항을 매우 중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런 그가 자신의 연구에서 남미의 사례를 주로 언급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ㅎㅎ
사실 남미사 연구에 있어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런 식민지적 착취와 공동체의 붕괴라는 점은 일반화된 연구시각인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는 '반미'라는 코드와 이상하게 얽혀서 좀 괴상하게 해석되고 정론화되는 감도 적지아니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socio 2010/07/24 04:05 # 답글
제가 팔랑귀인지라(...) 들꽃향기 님의 글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ghistory 님의 리플을 읽어보니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봉기의 주동자들은 외부에서 유입이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집합행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구조적 조건은 들꽃향기 님께서 글에서 언급해주신 공동체의 기억과 경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치아파스와 사파티스타 반군, 연지벌레 등은 모두 개별적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서로 연결되는 것을 보고있자니 역시 정식 역사학도와 취미생활자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는군요-
모쪼록 출장 잘 다녀오시길 바라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들꽃향기 2010/07/24 18:55 #
사실 저도 엄청난 팔랑귀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각혈) 사실 저의 포스팅 자체가 다소 위험스런 추론에서 출발하고 있고, 세부부분에서는 언급해주신대로 지도부 문제에 대한 사실관계 등과 같이 재고하거나 비판받을 부분이 있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이러한 저의 글이 '그냥 이런식으로 연구해보면 어떨까요?'로 고려되어도 감사할 일인데, socio님께서 이렇게 나름의 말씀과 논의로 정리해주시고 인식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망극할 사안인 것 같습니다. (엉엉)
그리고 사실 저 자신은 전공자라기보단 전공을 즐기는 한량에 더 가까운 편이라고 봅니다만(켈룩),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상찬의 말씀을 해주시니 각골난망할 따름입니다. ^^ 그리고 덕분에 갔다온 일은 잘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ghistory 2010/07/28 09:26 #
socio/ 아래에 추가 설명들 적어놓았습니다.트윈드릴 2010/07/24 05:29 # 답글
우선 내용이 알차면서 흥미롭게 쓸수 있는 글솜씨가 부럽네요, ^^b 앞의 코치닐 염료에 대해선 잘 몰랐는데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어 즐거웠고, 또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다만 몇가지 사실에 대한 오류 지적과 함께 주관적인 견해를 남길게요. (...라고 쓰긴 했는데, ghisotry님이 사실쪽을 지적해 주셔서 별로 남은게 없네요. OTL)[사실 지적]
*NAFTA 체결은 1996년이 아니라 1994년입니다*
"사실 '토지와 혁명'을 표방했던 멕시코 혁명의 여파와 카르데나스 정부의 정책으로 이러한 치아파스의 공동체적 삶과 공유지(에히도)의 연계는 어느 정도 수명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결과는 피지배층이었던 메스티조와 원주민들과 옛 지배층이었던 스페인 출신 대지주들 사이의 타협으로 끝납니다. (주 4)에서도 얘기했듯이 대지주들은 개인 소유의 토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 공동체들 역시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토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위태로운 형태의 공존이었죠. 1950년대까지 치아파스를 비롯해 멕시코 남부 지역은 부분적인 근대화를 겪는 중심권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가난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1950년대가 되어서야 멕시코 정부는 남부 지역의 원주민들에게도 '새마을 운동' 비슷한 근대화 노력을 시도하는데, 제일 먼저 한 일이 대공황 탓에 황폐화가 된 타지역의 토지를 원주민들에게 주고 이주를 시킨 거예요. 그런데 (1) 살던 지역에서 거의 강제로 이주한 원주민들 (2) 놀리고 있던 토지였지만 어쨌든 토지를 빼앗긴 대지주 모두 불만을 품게 되지요. -_-;; 게다가 이주한 원주민들은 화전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열대우림을 급속도로 지도 상에서 지우게 됩니다. [...] 결국 멕시코 정부는 이주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숲 파괴를 금지하고 손을 놓게 됩니다.
그리고 "에히도에 대한 시장주의적 조치가 취해질때"는 1996년이나 1994년이 아니라 1982년입니다. 이때 멕시코는 재정위기를 맞이했기 때문에 IMF에게 구조요청을 했고, IMF는 약 40억 달러의 긴급융자를 하면서 각종 개혁을 요구했는데, 그 와중에 멕시코 정부는 헌법에도 적혀있는 토지개혁을 사실상 공식적으로 포기하게 되죠. (그런데 이게 또 아이러니한 건 남동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멕시코 지역에서는 제한적으로나마 토지개혁이 끝난 상태였다는 거죠 -_-;;)
트윈드릴 2010/07/24 05:44 #
아, 토지개혁을 공식적으로 헌법에서 삭제한 해는 1992년입니다. "사실상 공식저으로"에서 "공식적으로"는 빼고 읽어주세요. ^^;;[출처: http://www.globalexchange.org/countries/americas/mexico/slope/section3.html ]
들꽃향기 2010/07/24 16:49 #
사실에 관련된 지적을 기탄없이 해주신 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① 언급하신대로 NAFTA 채결은 1996년이 아닌 1994년이 맞고, 사파티스타 반군의 처음 투쟁도 1994년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잘못이 맞는 것 같네요. ㄷㄷ;;
언급하신 부분은 본문에 수정하여 반영하고자 합니다.
② 언급해주신 1950년대 멕시코판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는 그 세부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군요. ㄷㄷ 이건 뭐 윗돌 빼어 아랫돌 괴는 식이라고밖에 달리 할말이 없습니다. (....)
③ 에히도에 대한 시장주의적 조치는 NAFTA 채결이 아니라, 1982년의 IMF의 권고와 그로 인한 개혁이라는 점은 처음 알았습니다. 보통 사파티스타 운동의 시작을 NAFTA 채결과 연결해서 보려는 시각을 제가 별다른 검토를 거치지 않고 받아들인 잘못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을 교정하고자 합니다. ^^
④ 조금 핀트가 벗어난 얘기이긴 합니다만, 지적 중에서 언급해주신 원주민 화전의 양상도 사실 제가 참고한 레퍼런스 다수에서 언급을 하지만, 양상은 다소 다르게 서술을 하고 있더군요.
즉 "치아파스는 멕시코 제 2의 벌목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삼림 황폐화의 원인을 정부는 벌목산업이 아니라 원주민의 화전에 돌리고 있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ㄷㄷ
사실 어찌 본다면 '진영논리'에 가까운 시각-서술이지만, 저 자신은 이런 레퍼런스의 시각을 수용하면서도 소농민들의 화전이 덜 파괴적이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네요.
일단 저 자신이 강원도에 살면서 옛 화전민들의 자취나 행적을 조사-수집하면서, 화전 역시도 삼림파괴에 있어서는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_=;;
이처럼 여러 측면에서의 지적을 해주신 것도 저에게 도움이 될 일인데, 여러 문제점이 있음을 직시해주시면서도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아주시니 진심으로 망극할 따름입니다.
때문에 감사의 말씀은 오히려 제가 트윈드릴님께 해야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트윈드릴 2010/07/26 04:54 #
1.우선 제가 다행히도 올바른 지적을 한 것 같아 다행스럽네요^^a
2.
"③ 에히도에 대한 시장주의적 조치는 NAFTA 채결이 아니라, 1982년의 IMF의 권고와 그로 인한 개혁이라는 점은 처음 알았습니다."
IMF에서는 자신들이 명시적으로 토지개혁을 포기하라고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고 있습니다만 -_-;; 구제금융을 받는 측에서는 암묵적인 압박이 상당했다고 "들었습니다." <- 카더라 통신이므로 (회고록이나 기사는 있긴 해도) 명확한 레퍼런스는 없습니다만, 스티글리츠의 책 '세계화와 그 불만'을 읽어보면 저런 짓을 하고도 남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지요. -_-;;
3.
"④ 조금 핀트가 벗어난 얘기이긴 합니다만, 지적 중에서 언급해주신 원주민 화전의 양상도 사실 제가 참고한 레퍼런스 다수에서 언급을 하지만, 양상은 다소 다르게 서술을 하고 있더군요.
즉 "치아파스는 멕시코 제 2의 벌목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삼림 황폐화의 원인을 정부는 벌목산업이 아니라 원주민의 화전에 돌리고 있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ㄷㄷ
사실 어찌 본다면 '진영논리'에 가까운 시각-서술이지만, 저 자신은 이런 레퍼런스의 시각을 수용하면서도 소농민들의 화전이 덜 파괴적이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네요."
위의 시각-서술이 맞을 수도 있어요. 저는 1950-60년대의 삼림파괴가 화전 탓이라고 명시했을 뿐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벌목산업이 그 지역으로 진출해 벌목으로 인한 삼림파괴가 화전으로 인한 삼림파괴보다 더 컸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정도로 판단하겠습니다)
덧. 아무래도 제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글쓰기를 하는 것 같은데 OTL 들꽃향기 님에게 다른 레퍼런스가 있으시면 그쪽을 우선시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들꽃향기 2010/07/27 16:27 #
1. 저에게도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죠. ㅎㅎ2. 사실 스티글리츠 옹이 그런 책을 쓴것도 미스테리이긴 하지만, 그런 압력이 사실상 멕시코정부에게 가해졌을 가능성은 저 역시 공감합니다. ㄷㄷ
그래도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약정서에 제대로 싸인하는지를 감독하시던 캉드쉬 총재께옵서 "사진을 찍는 자리인 줄은 몰랐다."라고 호걸급 항변(?)을 하신 것에 비해선 양심적(?)이군요(...)
3. 아아. 오해를 불러일으키셨다니 전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단은 저 자신이 자잘한 설명을 덧붙이길 좋아하는 성질이기도 하고 ^^;
사실 제가 참조한 레퍼런스 다수가 오히려 사상적으로는 분명한 색깔을 보이는 것(혹은 편향성)이 사실이기에,
제 논의의 레퍼런스가 이런 점도 있다는 것을겸사겸사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화전에 관한 생각을 덧붙인 것도 사실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ㅎㅎ;)
그런 점에서 제가 트윈드릴님께서 이런 치아파스의 삼림 파괴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계시다는 식의 오해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되려 저의 이런 쓸데없는 부언이 트윈드릴님을 번거롭게 한 것 같아 송구스럴 따름이군요. ^^;;
ghistory 2010/07/27 23:34 #
들꽃향기+트윈드릴/1982년 중남아메리카 대외채무위기(브라지우와 메히코와 아르헨티나가 위기의 핵심 진원지들)는 1929년 세계경제대공황 이래 중남아메리카 경제발전 양식의 기본형으로 존재하던 수입대체공업화(ISI)를 끝장내버린 역사적 사건이었고, 메히코의 경우 1938년의 석유산업 국유화 이래 석유수출로 창출한 이익을 국가경제 전반에 고루 배분하여 제도혁명당의 유사권위주의적 장기집권이 야기하는 불만들을 무마해 왔는고로, 그런 경제작동양식의 종식은 메히코의 경제와 사회에 역전불가능할 정도의 심원한 충격들을 야기했습니다. 당연한 것이, 에히도 체제와 연관성을 지니는 국가의 옥수수 수매나 가격안정체계 따위에는 당연히 돈이 들어가고, 통화주의 교리에 따르면 국가재정에의 규율 부과는 당연하니 이런 활동들은 당연히 신자유주의적 개혁-간섭에서는 철폐하거나 축소해야 하는 활동들입니다.
에히도 체제가 그냥 토지 나누어주는 게 아니라 주곡인 옥수수를 국가가 수매해서 저소득층에게 원가나 원가 이하로 판매하는 동시에 에히도를 매개로 국가가 자금신용 · 경영지도 · 기술지도 · 장비지원 · 기술지원 · 행정체계를 이용한 정치적 동원과 압력행사로서 제도혁명당 1당우위체제를 지탱하는 하부기초였음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에히도 체제를 포기하겠다는 결정은 제도혁명당의 혁명적 성격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당의 성격규정을 살리나스 시대에 '혁명적 내셔널리즘' 에서 '사회적 자유주의' 로 변경해버리기까지 한 정당이었으니!-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ghistory 2010/07/27 23:44 #
들꽃향기+트윈드릴/언급하시고들 있는 1950년대 이래의 메히코 농촌진흥정책은 메히코 혁명의 귀결이 각인시킨 역사적 특성인 제도혁명당 1당우위체제-유사 권위주의 체제에서의 수입대체공업화에 기반한 사회경제적 무마-타협의 지속이라는 1920년대 후반~1982년까지의 상황을 집약해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혁명의 최대 쟁점이었던 토지문제는 불완전한 미봉으로 끝난 것인데, 다원주의적 정치질서를 부정하고 사회의 모든 부분들을 포섭하는 포괄정당으로서의 제도혁명당은 그들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기에 제한적 토지개혁+수입대체산업화와 석유산업 국유화로부터의 이익이전+근대주의적 발전주의에 입각한 토착 전통의 배제(녹색혁명 기조의 도입과 자원집약적-에너지고소비형 현대농업의 이식)이라는 정책들의 조합을 채택하게 되었다고 보며, 이는 성공할 때든 실패할 때는 비서구 제3세계 발전주의의 절정을 풍미한 대표적 사례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트윈드릴 2010/07/28 11:24 #
ghistory// 우선 보론에 감사드리고, 저는 시장친화적 (저 자신은 '시장근본주의자'란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경제학도이기 때문에 멕시코의 개혁에 대해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1982년 멕시코의 개혁에 관해 치아파스와 토지개혁에관련된 사실만 기술했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자 합니다. ^^ 하지만 저는 남미의 쇼크세라피에 대해선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어요. 기존의 문화적 풍토나 사회구조를 무시한채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개혁을 유도했다고요. 실제로 멕시코는 그 이후로도 2번이나 커다란 금융위기 -- 자잘한 건 수도 없죠 OTL -- 를 겪게 되니까요.트윈드릴 2010/07/28 11:28 #
들꽃향기//스티글리츠 선생이 세계은행에 들어가고 나서 현실의 맛을 톡톡히 봤으니까요. -_-;;
"그런 점에서 제가 트윈드릴님께서 이런 치아파스의 삼림 파괴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계시다는 식의 오해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라기보다는 제가 밝힌 사실이 확대해석되는 걸 경계한 것뿐이예요. 들꽃향기 님을 존중하기 때문에 잘못된 지식을 전하기 싫어서요. 제 입장이야 오해를 받아도 상관없지만(오해가 일상사니까요)^^ 사실은 사실로 남아야 하니까요.
덧. 과공이 비례라고 지나치게 예의차리지 않으셔도 되어요.^^;;
들꽃향기 2010/08/03 06:28 #
ghistory님//1. 이번 리플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확인했습니다. 이에 상세한 답변을 달아주셨음에도, 이를 뒤늦게서야 깨달았으니 감사하면서도 또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지적해주신대로 저 역시 에히도는 토지분배적 양태가 아니라, 토지를 단위로 하되 그에 대한 인적 결합양태는 일종의 공사나 조직체를 중심으로 하여 언급하신 자금신용-행정조치-각종 지도-국가수매 등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체제가 일본에서의 자민당과 농민의 결합관계(?)처럼 PRI 1당 독재체제의 기본여건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은 처음 알게 되었군요. ㄷㄷ
말씀하신 신자유주의 개혁과 에히도 폐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사드립니다.
들꽃향기 2010/08/03 06:31 #
트윈드릴님//언급하신 스티글리츠 선생처럼 세계은행에 들어가서 현실의 맛을 톡톡히 본 사람은, 저도 즐겨읽는 책의 저자인 벤저민 이스터리도 비슷한 케이스인 것 같네요 =_=;;;
그리고 그런 의도이시라니, 비로소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 말씀하신대로 저 스스로도 트윈드릴님의 말씀이 확대해석되기를 바라지 않는만큼 말씀에 공감합니다.
덧 : 사실 과공비례는 저 자신의 단점으로 종종 지적받는 사항입니다만, 잘 고쳐지지 않는군요 ^^;; 다만 말씀하신대로 좀더 자연스러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ㅎㅎ
트윈드릴 2010/08/03 08:08 #
과공이 편하시다면야 들꽃향기 님의 개성으로 받아들일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들꽃향기 2010/08/03 08:56 #
트윈드릴님//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그래도 저 역시 노력하겠습니다!
트윈드릴 2010/07/24 05:40 # 답글
ghistory님도 지적하셨듯이 "파티스타 반군의 지도층은 중간계층 출신인 백인들 또는 메스티소들로서 다양한 좌파운동들 출신자들입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 자체가 그 대표적 사례이고" 더 재미있는 것은 저 지도층이 5-60년대 원주민들의 이주 때문에 토지를 빼앗긴 뒤 오직 추가적인 토지개혁만을 바라보던 중소지주계층의 자식들이란 점입니다. [...] 그러고 보니 지도층이나 반군 병사들이나 이해관계가 한데 묶이긴 했네요.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염료와 사파니스타 반군을 '원주민 공동체'란 고리로 엮는 것은 재미있는 역사 해석이긴 해도 약간 무리가 아닌가싶네요. ^^ 물론 위의 책들을 읽어보지 않아서 제가 모르는 사실이나 뒷얘기를 비롯해 더 깊은 내용이 있다면, 제 견해는 무시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덧. 레퍼런스라고 하긴 좀 그런데 -_-;; 제가 태어난 곳이 저기서 그리 멀리 떨어진 데가 아니라 (멕시코는 아닙니다만^^) 대학에 있는 멕시코 친구들하고 친한데, 얼핏 들은 얘기예요. 일단 wiki를 확인해 크로스체킹을 거친 대목만 적었습니다. (뒷얘기가 무궁무진하더만요 ㅎㅎ)
들꽃향기 2010/07/24 17:04 #
실은 글을 쓰는 저 자신도 '약간의 무리'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ㅎㅎ 사실은 상당한 혹은 엄청난 무리가 '논리의 연결구조'에서 있다는 것을 잘 통감하고 있습니다. (각혈)지적해주신 부분은 저의 논지 전개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고, 오히려 이에 그쳐주신 것에서. 짐승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활을 거두어주시는 인자함(?)을 감히 느끼기도 합니다. (웃음)
사실 지적해주신 포인트를 앞에 두고 제 글의 문제점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뉩니다.
① 원주민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16~17세기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장대한 시간의 삶을 쉽게 연결지을 수 있는가?
② 사파티스타 운동이 단순히 원주민 게릴라 운동으로 단순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메스티소 중간층이나 기타 외부세력의 유입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라는 것은 트윈드릴님이나 윗분들께서 해주신 타당한 지적이며 저 역시 통감하는 바입니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③ 치아파스에서의 에히도 소유의 실상이 사실 '집단 에히도'보다는 '개인 에히도'로서의 성향이 강하다면, 에히도와 마을 공동체의 '연속성'을 통해서 이를 바라보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④ 코치닐 염료생산을 통한 '공동체적 생산방식'이 치아파스를 비롯한 남부 멕시코 지방에 성행했던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타 생산분야와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거나 압도할 만큼, '다수적 생산양식'이었는가?
등의 문제가 제 글에서 상존하고 있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저 자신은 타당한 논리나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앞으로도 힘들 것 같네요.ㄷㄷ)
더군다나 제 레퍼런스의 성향을 보시면 짐작하시겠지만, 한국에서의 남미연구는 진보적 성향과 입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고 저 자신도 여기에 '우호적 의존'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현지 형편을 아실 수 있는 상황이신 트윈드릴님의 '뒷얘기'가 궁금합니다. 사실 저 자신도 사파티스타 반군에 우호적이고 현재도 그렇습니다만, 정작 그 실상과 현지의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매우 협소하기 그지 없거든요. ㅎㅎ
때문에 알고계시는 '무궁무진한 뒷얘기'가 사실은 매우 궁금하고, 언젠가는 이런 얘기들을 격없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으리라고 감히 기대하고 싶습니다. ^^
트윈드릴 2010/07/26 05:00 #
들꽃향기 님께서는 본문의 추신에 '추정'이라고 명시했으니 그것을 받아들이냐 마느냐 여부는 독자들에게 달려있지, 제가 굳이 태클 걸 사항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역사학계에 있어 '상상력'이 얼마나 위대한 발견의 계기가 되었는지 많이 들었기 때문에, 굳이 '위험한 추정'이라고 해도 바탕이 되는 근거가 있으면 하나의 가설이 될 수 있다고 보고요.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제가 대답을 드릴 역량이 부족하지만, "③ 치아파스에서의 에히도 소유의 실상이 사실 '집단 에히도'보다는 '개인 에히도'로서의 성향이 강하다면, 에히도와 마을 공동체의 '연속성'을 통해서 이를 바라보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선 '집단 에히도'가 대부분 -- 토지개혁을 못했으므로 -- 이었으리란 타당한 추정을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덧. '뒷얘기'는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함부로 언급할 엄두가 안나네요. ^^ 한국 사람이 어느 정치인 험담이나 특정 사건의 뒷얘기를 했을 때 100% 믿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냥 '이럴 수도 있겠구나'라면 모를까, 그 멕시코 친구들도 '카더라 통신'인 건마찬가지이니까요.
들꽃향기 2010/07/27 16:33 #
부족한 추정을 이처럼 이해해주시고, 상상의 방향에 대해서 이처럼 따뜻하게 말씀해주시고 격려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면서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만큼 앞으로도 이런 말씀에 부끄럽지 않게 노력해야 할 것 같네요. ㅎㅎ
그리고 치아파스에서 토지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집단 에히도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저 자신도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오히려 토지개혁이 상당수 진행된 멕시코 전반의 에히도 형태가 개인소유적 형태에 가깝다는 점도 대조되는 사실로서 고려될 수 있을테니 말이죠.
말씀대로 뒷얘기, 혹은 정치적 사견 얘끼를 할때 100% 믿을 수가 없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ㅎㅎ
하지만 1960~1980년대 한국의 경우처럼 그런 사견과 소문에서도 '행간'을 읽을 수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트윈드릴님께서도 그런 행간을 읽으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감히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ㅎㅎ
ghistory 2010/07/27 23:10 #
트윈드릴/그런데 사파티스타 반군의 최상층부(형식상 선주민 봉기로만 위장하려 자신들을 겸손하게 '부사령관들' 이라고 지칭하는 실질적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치아파스 출신 메스티소들이나 백인들이 아니라, 대체로 북부-시우다드 데 메히코(멕시코시티)-가 대표하는-출신의 중간계층 급진파 배경을 지닌 인물들도 섞여 있습니다.
이들이 혁명적 봉기전략과 봉기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에서 핵심적 역량을 담당하였음도 부정할 수 없으며, 이는 1994년 이후 치아파스에서 사파티스타 반군의 봉기를 그들의 주장대로 '선주민의 자본주의적 지구화에의 저항' 만으로나 메히코 지배엘리트층의 치부처럼 '순진하고 가난한 선주민들을 선동한 구 마륵스주의자들의 난동' 이라고만 해석할 수 없게 하는 복잡한 층위들과 동기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ghistory 2010/07/27 23:14 #
트윈드릴/사실 사파티스타 반군 조직의 구성은 정확한 통계의 산출은 불가능하겠지만 멕시코 국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백인들이나 메스티소들만의 전제적 지배에 있다고만도 추정할 수 없고, 그렇다고 사파타스타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선주민들이 독자적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고만도 설명할 수 없다고 봅니다.
ghistory 2010/07/27 23:20 #
들꽃향기/또한 치아파스의 경우에는 에히도와 직결하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수력과 광물들을 포함한 천연자원들을 국가가 개발하여 이익을 획득하면서도 정작 지역개발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 주민들의 불만이 누적해 있던 상황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ghistory 2010/07/28 09:26 #
트윈드릴/ 아래에 추가 설명들 적어놓았습니다.트윈드릴 2010/07/28 11:33 #
ghistory//저는 지도층이 "5-60년대 원주민들의 이주 때문에 토지를 빼앗긴 뒤 오직 추가적인 토지개혁만을 바라보던 중소지주계층의 자식들", 즉 치아파스가 아니라 타지역 출신의 사람이라고 했는데요. ;;; 그리고 원주민들을 '치아파스' 출신이라고 한정한 적도 없고요. -_-;;
그리고 맨밑의 글은...죄송하지만 제 관심분야를 너무 벗어난 것 같아서 OTL 지식의 공유에는 감사드리지만 마음만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죄송해요.ㅜ.ㅜ [후다닥]
들꽃향기 2010/07/29 20:59 #
ghistory 님// 넵. ㅎㅎ 제가 본 레퍼런스에서도 벌목산업이나 석유산업, 수력산업 등에서 치아파스주가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지역 산업이나 재투자 등이 이뤄지지 않는 소외지역이라는 점과 함께, 미국의 현대사학자의 말을 빌어 '부유한 땅,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더군요.다만 저 역시 트윈드릴님의 말씀을 트윈드릴님께서 부연하신대로 이해했습니다.ㅎㅎ 즉 "중소지주계층의 자식들, 즉 치아파스가 아니라 타지역 출신의 사람"으로 말이죠. 사실 그래서 제가 지나치게 치아파스를 한정해서 바라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 했습니다.
어릿광대 2010/07/24 06:28 # 답글
딸기우유에 그게 들어가다니 충격이네요 ㅠㅠ들꽃향기 2010/07/24 18:56 #
뭐 몸에만 나쁘지 않다면 뭐 어떻겠습니다. 켈룩. 다만 의학적으로 천연염료라고 과잉섭취가 다 좋은게 아니라는 견지도 있더군요. =_=;;닷오-르 2010/07/24 10:10 # 답글
1. 판초 비야와 사파타의 협력이 잘 되지 않은 이유에는 북부 출신의 비야 세력과 사파타가 주장하는 원주민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아서라는 설명도 있더군요.2. 주경철 선생님이 소개한 원주민과 브라질리안 나무 상인의 대화
원주민: 백인들은 나무를 먹고사냐능? 브라질나무가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함?
상인: 이 나무를 잘라서 염료를 만든 다음에 시장이 팔아서 어쩌구저쩌구...
원주민: 그렇게 돈 벌어서 뭘 함?
상인: 다른 물건도 사고 브라질 나무도 더 많이 사고...
원주민: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됨?
상인: 자식한테 물려줌.
원주민: 풉~ 백인들은 좀 짱인듯. 남한테 물려주려고 여기까지 와서 그 고생을 하는 거임?
들꽃향기 2010/07/24 19:00 #
1. 일전에 멕시코에 대해서 얘기해주던 어느 분께서도 멕시코 북부와 남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말씀을 해주시더군요.말씀해주신 비야와 사파타의 대립에 대해서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비야 개인의 측면에 두어서 냉소적으로 서술하는 측면이 강합니다만, 사실 양자간의 대립은 닷오-르님께서 말씀해주신 측면이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2. 말씀해주신 사례는 포머란츠의 책에서도 짧게 등장하더군요.ㅎㅎ 보다 구체적으로 프랑스 출신의 거래상으로 나오던데,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을 그래서 '미친사람'취급을 했다는 얘기로 등장하더군요 =_=;
정말로 '제대로 사는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볼 여지를 주는 훈훈한 대화인 듯 합니다. ㄷㄷ
ghistory 2010/07/27 23:06 #
+1:언급하신 선주민과 유럽인 상인의 이야기는 현대에도 다양한 판본들로 변화해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제한없는 물질적 욕구의 허망함을 비웃는 교훈을 담은 것인데, 가령 이렇습니다.
백인 사업가: "이렇게 어족자원이 풍부한데 그냥 놀리지 마시죠?"
비백인 선주민: "그럼 뭘 하자는 것입니까?"
백인 사업가: "저와 같이 수산업사업을 합시다."
비백인 선주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백인 사업가: "선박들을 사들이고 창고와 공장도 지어 큰돈을 버는 겁니다."
비백인 선주민: "좋은 생각이군요. 그런데 큰돈을 벌고 나면 무얼 하지요?"
백인 사업가: "돈을 많이 벌면 놀면서 보트나 타고 낚시나 하면서 즐기고 살면 되지요."
비백인 선주민: "아니 그렇다면 굳이 고생을 해서 일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소. 나는 지금도 시간만 나면 보트를 타고 낚시나 하는데. 공연히 헛수고 하지 말고 당신도 그냥 낚시나 하시구려."
대략 이런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2:
닷오-르씨가 무언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비야던 사파타던 혁명세력들 내부에서 농민들의 이해관계들을 대표한 대표적 급진파 인사들이며 혁명파 부르주아들은 이들을 경계하여 무력화시키고 제거하게 됩니다. 메히코혁명이 오래 끈 이유는 바로 디아스-우에르타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하여 봉기했던 이들의 개별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들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었습니다. 따라서 비야와 사파타의 협조 미비는 개인적 성격들 사이의 차이 · 성장배경의 차이 · 근거지들의 차이 · 단기적 전술들과 목표들과 관련한 의견들의 차이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닷오-르 2010/07/29 01:20 #
ghistory//뭐 저도 멕시코 혁명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을 이는 없고 우연히 도서관에서 봤던 개론서에서 본 내용이라 그런지 역시 정확하지는 않았군요. 그리고 사실 원주민과 백인의 대화라는 판본 이외에도 '일해라 니트'를 외치는 노인과 니트 청년의 대화 등 다양한 버전이...ㅇㅇㄴ 2010/07/24 21:25 # 삭제 답글
그래도 석유에서 뽑아낸 '합성착색료 n호' 보다야 낫지 않겠슴미까..OTL석유먹기 vs 벌레먹기!? 나는 고자가 되겠다!!!
들꽃향기 2010/07/27 16:34 #
헐퀴. 용자분이 계셨군요. 이거시 진정한 대인배의 기상!2010/07/27 01:39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들꽃향기 2010/07/27 16:35 #
말씀하신대로 홍색 옷도 왕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고, 신하나 백성들은 완전한 홍색이 아닌 비슷한 계통의 색을 입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말씀하신대로 염료의 문제도 상당하고, 홍색이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에서 황색을 제외한 최고의 색으로 간주된 탓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ㅎㅎ
★ 2010/07/27 01:53 # 답글
저 역시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처음 접했었지요.잘 보고 갑니다!
들꽃향기 2010/07/27 16:36 #
역시나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파워가 ㅎㄷㄷ 하군요. ㅎㅎ잘 읽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ghistory 2010/07/27 22:15 # 답글
15.'네덜란드 공화국': 공식명칭은 '네데를란트 7주연합공화체'(Republiek der Zeven Verenigde Nederlanden)-단일국가라기보다는 국가연합이었음.
http://en.wikipedia.org/wiki/Dutch_Republic
http://nl.wikipedia.org/wiki/Republiek_der_Zeven_Verenigde_Nederlanden
16. '자줒빛'→'자줏빛'.
17.
'농장이 아닌 삼림속에서 작업해야한다는 특성은 노예의 도입도 제한하는 특성이 있었죠': 브라질에는 실제로 식민지 지배 초기로 갈수록 삼림지대들이 많아서 도피하기가 다른 아메리카 식민지들보다 용이했기 때문에, 노예 도주들은 그야말로 일상이었을 뿐 아니라 노예 반란들이나 심지어 도주 노예들의 독립적 정치공동체들도 드물지 않게 존재했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보통 흑인들이 아닌, '도주노예 후손공동체' 라는 사회적 범주가 존재할 정도입니다.
18. '대량으로 재배(?)'→'대량으로 사육(?)'?
19. 소아시아→초기 근대 이후이니 아나톨리아가 더 적절해보임.
20. '터키쉬'→'터키시'!
21.
'인도에서 17세기까지 독점해오다가, 오스만 제국에서 인도의 기술자를 초빙하여'→인디아아대륙 전체인지 아니면 무굴 제국인지 구체적 설명이 필요함.
22. '노동력 부족에 시잘리는'→'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는'.
23. '그 자리를 매꾼'→'그 자리를 메꾼'.
24. 메히꼬→메히코.
25.
그러고보니 한 15년쯤 앞서 소설『애니깽』인가를 영화화하려다 주연 남성배우 임성민이던가 하는 사람이 급사하는 바람에 영화를 말아먹은 일이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들꽃향기 2010/07/29 18:48 #
15. 역시나 당시의 네덜란드는 통합적 국가조직이나 관료기구라고 할만한 것도 드물었으니 공화국이라는 표현보다 '영방'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네요.16. 곧 수정하겠습니다. ^^
17. 말씀하신대로 브라질과 수리남과 같은 대륙의 농장에서 탈주한 노예들의 얘기를 의식한게 컸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섬이 플랜테이션으로 선호된 것은 그러한 맥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브라질의 탈주노예 공동체 같은 경우는 추격자들도 함부로 못건드릴 정도의 위세를 가진 곳도 상당했다고 알고 있고, 언급해주신대로 현재에도 상당한 사회적-문화적 집단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8. 다른 플랜테이션적 작물과 비교를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역시나 사육이 더 타당한 표현이겠지요. ㅎㅎ
19. 그렇군요. 본문에 반영하겠습니다.
20. 네 교정하겠습니다. ㅎ
21. 사실 '목화의 역사'에서 참조한 부분인데, 거기서는 인도의 기술자라고만 햇지 무굴제국인지, 기타 군소왕국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해장 부분은 다시 목화의 역사를 빌려볼 형편이 되어가 다른 자료를 좀더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 ^^;
22. 교정하겠습니다. ^^
23 . 교정하겠습니다. ^^
24. 발음상 메히꼬인줄 알았는데, '코'였나 보군요. 교정하겠습니다. ㄷㄷ
25. 주연배우 급사로 영화 자체가 다운이라니 이거 참 ㅎㄷㄷ 하군요. ㄷㄷ 당시 풍토상 막상 영화화 했다고 해도, 내용상 '이렇게 고생하는 약소국민의 설움'이라는 스토리였을것 같긴 하지만요. ㄷㄷ
ghistory 2010/08/03 07:41 #
들꽃향기/+1 메히코: 인도유럽어들은 한국어처럼 3음 체계(평음-경음-격음)를 지닌 언어들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듣기에 '메히꼬' 라고 들린다고 그렇게 표기함은 부적절하다는 의미입니다. 인도유럽어들에는 경음표기 구별이 없잖아요.
+2 도주노예 후손공동체: 지금도 존재할 뿐 아니라 열악한 사회경제적 지위들을 지니고 있어서 각종 사회정책들의 주요한 표적대상집단입니다.
+3 서인디아제도 플랜테이션들: 노예도주 방지에 유리하다는 이유 뿐만 아니라, 기후조건 때문이기도 하고 후발 유럽 국가들이 브라질이나 에스파냐로부터 중남아메리카 본토를 탈취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네데를란트 서인디아회사가 한때 브라질 일부를 점거했지만 끝내 축출당했듯이.
들꽃향기 2010/08/03 08:42 #
ghistory님//1. 그렇군요 ㄷㄷ;; 보충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
2. 그렇군요. 이번에 룰라정권 출범으로 이들에 대한 사회정책들이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_=;;
3. 말씀하신대로 브라질 북동부 일부를 네덜란드가 점거했지만, 포르투갈이 오히려 30년전쟁에서 에스파냐-포르투갈 연합왕국이 밀리는 와중에서 이를 되찾았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입니다. (....)
ghistory 2010/07/27 22:21 # 답글
질문들:1. 초코우유나 커피우유에는 무엇들이 들어가나요?
2. 요즘 딸기과즙을 넣었다고 차별성을 강조하는 딸기우유들이 있는데, 그런 제품들에도 저 벌레들이 들어가는지요?
3. 저 벌레들은 인체에 무해한지요?
4. 어떻게 저 벌레들이 붉은빛이 아니라 분홍빛을 내는지요?
5. '잡동사니와 일용품을 반강제로 주고': 가령 무엇들을 주었는지요?
6. '개신교로 개종을 했나니': 당시 치아파스 등지에서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의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했는지 궁금하군요.
들꽃향기 2010/07/29 18:56 #
1.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켈룩) 다만 제가 알기로는 초코향 같은 경우는 카라멜 색소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것은 모르겠군요. ㄷㄷ2. 과즙 함유율을 높였다고 하더라도 순수 딸기로 색을 내려면 좀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ㄷㄷ 이래저래 들어갈 것 같기는 하네요. ㄷㄷ
3. 19세기경 요리의 르네상스 시절때부터 식용염료로 쓰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인체에 유해하다는 의견도 상당한 것 같네요.
이에 대해서는 한겨레도 기사를 내서 다룬적이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4.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켈룩)
5. 옷감이나 철물 등으로 알고 있는데, 그 가치가 큰 것은 아니어서 '강제 교환'이라기 보다는 '강제 공납'의 성격에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6. 조돈문, 『신자유주의시대 라틴아메리카 시민사회의 대응과 문화변동』에서 읽은 사항인데,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미국출신 프로스테탄트 선교사들이 치아파스에서 활동했고 수백명 가량이 개종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마을 공동체에서 이들을 축출할때 종교의 차이를 드는 경우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ghistory 2010/08/03 07:07 #
들꽃향기/답변들 감사드립니다.
ghistory 2010/07/27 22:45 # 답글
26. '개신교로 개종을 했나니'→'프로테스탄트 종파들로 개종을 했느니'.27. '1982년의 IMF의 권고에 따른 에히도에 대한 개혁조치': 1982년 중남아메리카 대외채무위기의 결과였음. 이때 최대 위기발생 국가가 바로 메히코(멕시코)였음.
28. 'NAFTA 채결':
1) '채결'→'체결'.
2) 1992년 12월에 조인했고 1994년 1월 1일부터 발효함.
3) 북아메리카자유무역협정 발효와 거의 동시에 사파티스타 반군의 무장봉기가 발생했음. 마침 당시 대통령이던 카를로스 살리나스는 가족들 · 측근들과 신녀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고 함.
29.
역설이게도 살리나스 행정부와 세디요 행정부가 사파티스타 반군을 이전처럼 잔혹하게 처리하지 못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북아메리카자유무역협정 채택을 비롯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자기정당화 수단이었던 '제1세계' 로의 진입이라는 선전과는 잔혹한 봉기진압전략이 잘 어울리지도 않았고 대외적 이미지들에 큰 손상을 미칠 수 있다고 염려했기 때문이었음.
30. 1917년도 메히코 헌법:
http://en.wikipedia.org/wiki/Political_Constitution_of_the_United_Mexican_States
http://www.juridicas.unam.mx/infjur/leg/constmex/pdf/consting.pdf
들꽃향기 2010/07/29 20:55 #
26. '개신'이라는 말보다는, '프로스테탄트'라는 표현이 나을 것 같습니다.27. 그렇군요. 저는 아르헨티나나 다른 지역으로 알고 있었는데, 메히코가 가장 큰 피해지역이었나 보군요.
28. 1)은 수정하고자 하오며, 2)와 3)은 잘 보았습니다. 살리나스 대통령의 심기가 영 볼만했겠군요. ㅋㅋ
29. 하긴 그 시기에는 자유주의 정부로서 이미지를 갖추고 OECD나 각종 제 1세계 진입을 외치던 시기에서 강경 드라이브를 택하기는 힘들었었겠군요.
30. 잘 보았습니다. 다만 외국어에 능통치 못한 관계로 대충 짐작만 해야겠군요. ㄷㄷ
들꽃향기 2010/08/03 06:21 #
지적해주신 오타 및 기타 사항은 오늘에서야 교정했습니다. 그간 사정이 있어 글을 세세히 살피면서 교정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교정하겠다고 말까지 해놓고 뒤늦게 이를 반영하였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ghistory 2010/07/28 09:25 # 답글
들꽃향기+트윈드릴+socio/일단 논의의 핵심이 되는 치아파스의 사회경제적 구조변천과정과 사파티스타 반군 봉기의 상관성과 관련하여 저의 의견들을 진술하는데, 3인의 논의들과 모두 관련이 있다고 보기에 모두 각자 읽어보시길 권유합니다.
31. 치아파스 반군 봉기와 관련한 메히코 지배엘리트층의 시선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멕시코 정부나 지도층의 반응인데, 특히 대문호 중 하나인 옥타비오 파스 등의 반응은, 비단 치아파스 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가난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인데, 치아파스에서 이러한 무장봉기가 발생한 것은 외부집단의 유입이나 사상집단의 준동이 더 크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다만 '다른 가난한 지방은 다 얌전한데 너희만 말썽인건 순전히 빨갱이들 때문이야.'라는 지적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보고 싶네요"
1) 일단 메히코 지배엘리트층으로서의 북부-중부 백인들과 메스티소들의 인종주의적 오만함을 적절히 지적하신 점은 저도 동감합니다.
2) 사실 이는 매우 깊은 연원을 지닙니다. 메히코혁명 이후 메히코 국가의 자기정당화 논리는 메히코는 메스티소들의 국가이며, 메히코 문화는 유럽 백인들과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역사적 결합으로 탄생한 '우주적 문화' 라는 경지에까지 나아갑니다. 사실 이는 제도혁명당이 주도하는 신생 메히코 국가의 국민통합에 필요하고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소들에게 전파하기 좋으면서도 메히코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의 백인 국가들보다 열등하지 않고 대등하거나 오히려 더 우수한 문화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방식으로 국민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참 요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남부의 선주민들을 투명인간화시키고 심지어 야만시하게 만드는 데 은연중에 기여한 논리라는 점에서 허구적이며 더는 지속불가능한 시대착오적 논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메히코 메스티소들의 선주민들 야만시는 심지어 혁명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3) 옥타비오 파스는 비록 제도혁명당 체제의 억압적 성격에 항의하여 종종 갈등을 일으킨 작가이긴 합니다만, 정작 혁명체제가 유포한 체제의 자기정당화 논리 자체를 의심해본 적도 없고 그의 문학세계 자체가 이런 세계관에 기반을 둔 인간이니만큼 그에게 자기교정이나 반성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4) 1968년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이래 실제로 메히코의 혁명적 마륵스주의 집단들은 국가의 통제가 잘 미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한 남부의 삼림-산악지대에서 체 게바라 방식의 게릴라전쟁을 시도하다가 잇달아 분쇄당했고, 사실 사파티스타 반군의 조직을 주도한 외부 출신 백인들과 메스티소들도 1970년대~1980년대에 치아파스 등지로 침투해서 오랫동안 게릴라전쟁을 준비해 온 사람들이므로, 메히코 지배엘리트들의 초기 반응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이들의 매도들은 자신들의 실정-차별-무시-억압이 봉기의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며, 이전의 실패한 게릴라전쟁 시도들과는 달리 사파티스타 반군의 조직자들은 탈냉전 국면에 재빠르게 적응하여 선주민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던 마륵스주의적 교리들을 재빨리 포기하고 선주민의 정체성 인정투쟁으로 자신들의 정당화 논리를 교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 덕분에 현지 주민들의 호응과 이해가 빨라졌고(사실 독실한 전통종교나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마륵스주의 설교해봐야 그다지 효과도 없지요), 외부 세계에 자신들을 '500년 동안 착취와 학대에 시달려 온 선주민들의 자기 대변' 으로 미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초기의 호응들은 엄청났습니다.
32. 치아파스에서 사파티스타 반군의 봉기에 이르는 정치적 선택지들이라는 문제
들꽃향기 씨의 논의는 치아파스를 포함한 메히코 남부의 사회경제적 소외를 적절히 언급하였습니다만, 가장 취약한 부분은 그런 구조적 문제가 자연스럽게 행위자들의 어떤 특정한 정치적 목적 추구로 나아가는지를 설명해 주지 못했다는 측면입니다.
명쾌하게 진술하자면, 치아파스에서 사파티스타 반군의 봉기는 사회경제적 조건들+특정한 정치적 행위자들의 의식적 행위추구라는 조합에서 한 가지라도 결여했으면 발생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이미 들꽃향기씨가 충분히 진술했으니 배제하고 후자만 논의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치아파스만이 아니라 메히코 남부의 다른 주들에서도 유사한 문제점들이 존재했음에도 치아파스에서만 봉기가 발생하여 반군이 활동하게 된 사실은 당연하게도 이 주에서만 사파티스타가 조직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조되게도 다른 주들에서는 제도혁명당(PRI)의 조직기반이 더 강력하거나, 선주민 공동체들의 밀도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낮거나, 로마가톨릭교회 내부의 좌파적 사목운동과 제휴하고 선거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 정당인 민주혁명당(PRD)를 지지하는 경향들이 더 우세하거나 하였기 때문에 봉기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치아파스의 선주민 공동체들이 사파티스타 반군의 지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봉기 발생 이전에는 제도혁명당의 개입주의적 유산에 기대를 거는 부류들과 민주혁명당-로마가톨릭교회 좌파 사회운동을 지지하는 부류로 분화해가고 있었는데, 사실 사파티스타 반군의 봉기는 이들 가운데 후자와의 경쟁관계 또는 적대관계를 상정하고 있었고 또한 봉기 이후에는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는 사회운동의 고전적 딜레마인 개혁주의 대 혁명주의의 한 변형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장황한 설명을 요약하자면, 사파티스타 반군의 봉기와 활동은 그런 지향을 합리화하고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열악하고 부정의한 사회경제적 조건들에 근거하여,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해석들을 부과함으로서 실천의 정당화 근거들을 마련한 뒤 이를 행동으로 감행한 귀결이라고 이해함이 가능합니다.
33. 봉기 이후-2001년 이후의 지속적 쇠퇴
그럼 지금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사파티스타 운동은 있으나마나한 경향으로 사실상 몰락해버렸습니다. 애초에 형편없는 무력으로 무장봉기를 감행한 이유 자체가 무장투쟁보다는 외부의 관심을 끈 뒤 자신들의 주장들을 계속 전파하여 지지와 지원을 유지하려는 고려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무력으로 국가를 전복할 실력도 되지 않거니와 계속 메히코의 정치와 사회에서 쟁점이 될 만한 의제들을 설정해서 전파하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사파티스타 운동 스스로도 인정하였고, 그래서 2001년 시우다드 데 메히코로의 지도자들의 역사적 행진과 메히코 연방의회에서의 연설과 선주민 권리증진 입법과 관련한 사회적 논의의 진행이라는 그들의 운동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순간에 도달하였으나, 그때부터는 사실상 몰락해가서 존재조차 미미해졌습니다. 일단 2001년 입법이 자신들의 요구들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완전한 거부를 공표한 이후 메히코 사회로부터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감퇴하였음이 사실이며, 제도권 정치와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정치적 쟁점들이 급변하고 제도혁명당이나 국민행동당이나 민주혁명당의 새로운 정치인들이 새로운 정치적 대결구도를 형성하였으니, 정당으로도 평화적 사회운동으로도 변신을 못하거나 거부한 사파티스타 운동은 무의미해져 버렸습니다.
더욱이 현재의 메히코 국가는 1982년 이전과는 달리 개입주의적 국가지향을 사실상 포기하고 빈곤계층들을 사실상 방치하기로 결정한 이후인지라, 설사 치아파스의 몇몇 구역들을 사파티스타 운동이 통제한다고 해서 그다지 손해볼 가능성도 없습니다.
위협하지도 못하고 존재감도 없어져버렸으며 내부의 비민주성이 탄로나버린 절망이 사파티스타 운동의 현재입니다. 완전히 무시당하는…
34.
주의: 갈무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조정환(과거 수배시의 필명은 이원영)은 1대략 15년 이전부터 사파티스타 운동을 현지의 맥락과 분리시켜 책장사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에 요긴한 전유의 대상으로 활용하는 약장수 행각을 벌이고 있으니 유의하시길 바람.
35.
조언: '부사령관 마르코스' 와 관련한 탈신화화로는『마르코스, 게릴라의 전설』(휴머니스트, 2003) 참조바람-1쇄는 인명표기상의 오류들이 심각해서 본인이 교정에 간여한 2쇄 이하를 읽으시길 바람.
들꽃향기 2010/07/29 21:44 #
말씀하신대로 '메스티소 민족주의'는 사실 PRI의 승리와 함께 더욱 가속화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호세 바스콘셀로스가 거기에 앞장선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도 하고요 ㄷㄷ말씀하신대로 그런 메스티소 민족주의가 자신들을 '과거의 문화와 유럽문화의 중재자'로 위치지으면서도, 원주민들을 '과거의 문화의 소유자'들로 객체화한다는 기만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저 역시 그런 의식이 있는 이상, 말씀하신대로 1968년 이래로 멕시코 운동권의 방향젼환(?)에 호응하는 그런 '초기의 호응'에 포함될 수 있겠죠. ^^;
32. 사실 저 자신이 언급하신, '사회경제적 조건들+특정한 정치적 행위자들의 의식적 행위추구'중에서 전자를, 그리고 후자조차도 '문화적 조건'에서 찾는 성향이 강하다 보니, 후자의 문제를 제대로 주목해보지 못한 것은 부끄러이 여기고 있습니다. ^^;
결국 ghistory님의 지적을 통해 제 글의 문제점을 요약하자면,
① 치아파스 주에서만 봉기가 발발했던 것은, 사파티스타의 1968년에의 유입과 PRI, PRD가 얼마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느냐는 '현대정치적 기반문제'가 더 크다는 것이며,
② 그리고 치아파스의 선주민 공동체가 곧장 사파티스타 운동으로 직결되었다고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선주민 내부의 특정 정파에 대한 '대응적 행동'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시실 이렇게 보면 치아파스 사회경제적 변화의 역사적 양상을 현대에까지 연결한 것은 역시 무리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33. 사실 '역사적 행진' 이후로 사파티스타 운동의 행보에 대해서 별다른 얘기가 없어서 많이 놀랐습니다.
특히 사파티스타 운동에 호의적인 국내 레퍼런스나 매체들도 대체로 침묵하고 있기에 더욱 그런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사항을 대충^^;; 추려서 들어보면, 결국 2001년의 타협 거부 이후로는, 정치적 대결자로서의 위치를 타 정당의 혁신파 조류에 빼앗겨버리고,
스스로는 오히려 대중적 지지는 물론, 그나마 언론황동과 PR 등을 통해서 획득한 제도권 내에서의 입지도 상실해버렸다는 결말로 이해될 수 있겠군요.
34. 사실 그 갈무리 출판사의 조정환씨에 대한 인식이 저 자신이 운동권(?) 학생들과 친밀하던 시절에 대 사파티스타 정보와 관념을 형성하는 주요한 레퍼런스임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_-;;
그나마 운동권 친구들과 멀어지면서, 그책 자체도 너무 사파티스타 운동을 자기이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는데, 과연 그랬군요;;
35. 하지만 저 역시 그런 부류들에서 나온 '긍정적인 파악'의 박수갈채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군요. 혹시 『마르코스, 게릴라의 전설』2쇄판 이래로 이 문제에 대해서 좋은 텍스트를 권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문제는 저 스스로 궁구함이 마땅할 노릇이나,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이 분야 관련, 아니 남미사 자체는 '남미의 저항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성격을 부각시키는 것들이 대다수인것 같아서, 이렇게나마 특별히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에드워디안 2010/07/28 11:42 # 답글
중세 유럽에서 붉은색이 그토록 귀한 색깔이었다니, 놀랍군요. 근현대 반공주의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련지...ㅎㅎ카르데나스 이후 제도혁명당은 그 당명에 어울리지 않는 노선을 걸어갔지요. 특히 에체베리아 정권 이후 부패가 격심해져, 완전히 기득권 수호에만 급급한 공룡적 존재로 전락해 버렸구요... 아무튼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이래저래 참 안습입니다.;;
들꽃향기 2010/07/29 21:02 #
사실 붉은색도 붉은색이지만 제대로 된 붉은색이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ㅎㅎ 사실 반공주의자들이 본다면 사실 악랄한 빨갱이들이 본래 빨간색의 고귀함을 모독했다...라고 할지도요 (각혈)말씀하신대로, 제도혁명당의 그 이후 행적은 카르데나스 정부 시절의 화려한(?) 조치(석유 국유화 시도 등)를 '쇼'로 보여준 이후에는 별다른 행적도 없이 퇴조되어가다가 에체베리아 정권 시기에는 아주 대놓고 '좌파관료주의적 지배'의 전형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ㅎㄷㄷ =_=;;
ghistory 2010/08/03 07:15 #
들꽃향기/제도혁명당 체제의 이완과 해체는 '범체제적 포괄정당' 으로서의 제도혁명당 내부에서 오랫동안 준수해 왔던 암묵적 합의였던, 대통령 6년 단임제하의 좌우 진자운동 관행을(전임자가 좌파적 경향을 지니고 통치했다면 후임자는 우파적 경향을 지니고 통치할 인물로 선택) 데 라 마드리드가 종식시키면서 본격화합니다. 데 라 마드리드가 선택한 후계자가 바로 카를로스 살리나스였고, 이 때문에 1988년 선거들을 앞두고 제도혁명당의 좌파가 탈당하여 라사로 카르데나스의 아들 콰우테목 카르데나스를 독자 대통령후보로 옹립하게 되지요. 이들이 민주혁명당의 결성을 주도한 인사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합니다.
들꽃향기 2010/08/03 08:44 #
그렇군요;; 좌우파 로테이션(?)의 체제가 이런식으로 해체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ㄷㄷ어찌 본다면 민주혁명당 역시 종전의 관료주의적 지배의 수혜집단 중 일부라는 얘기도 되니 뭔가 씁쓸하네요...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