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 깊은 대전교구 최초의 성당
합덕 성당은 충청도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내포 평야에 복음을 밝힌 지 100년을 넘는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이 성당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지는 아니지만 신앙의 유산을 찾기에 충분한 교회 사적지다. 사제 40여명, 수녀, 수사 약 70명을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이기도 하다.
합덕 본당이 위치한 내포 지역은 충청도 복음 전파의 요람지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1784년 이후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이 전교 활동의 터전으로 삼은 곳이다. 이후 내포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언제나 주목을 받는 곳이 되었고, 신해박해(1791년) 이후 무진박해(1868년) 때까지 박해가 있을 때마다 어느 곳보다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초기 교회사에서 유명한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집안도 이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박해를 피해 가며 전교 활동을 편 선교사들도 이곳에서 활동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중 이 지역을 가장 먼저 담당한 선교사는 1836년 초,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였다. 또 1845년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1808~1853, 高, 요셉)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1857년에 주교가 됨), 1849년에 귀국한 최양업 신부도 합덕 일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1861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가 전국을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눈 이후 이 지역을 담당하게 된 선교사는 랑드르(Landre, 洪, 1828~1863, 요한) 신부였다. 그러나 랑드르 신부가 황무실에서 병사한 뒤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이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그 결과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신리에서,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쇠재에서,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가 거더리에서 각각 체포되었다.
박해가 끝나자 합덕 인근 지역에는 다시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81년부터 내포 지역을 담당하게 된 두세(Doucet, 丁加彌, 1853~1917, 가밀로) 신부는 이들 공동체를 방문하고 각처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1890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1844~1890, 요한) 주교의 사망으로 임시로 교구의 장상이 된 코스트(Coste, 高宜善, 1842~1896, 요한) 신부는 두세 신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 지역에 본당 중심지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내포 지역에는 1866년 이래 24년 만에 2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중 합덕 본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양촌 본당에는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레오) 신부가, 간양골 본당에는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1866~?, 베드로) 신부가 거처하였다. 후에 양촌 본당은 간양골 본당을 병합한 후 현 위치로 옮겨 오면서 합덕 성당으로 개칭되었다. 합덕 성당은 충청도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내포 평야에 복음을 밝힌 지 100년이 넘는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합덕 성당은 성소의 못자리로도 유명하다. 사제 40여 명, 수녀, 수사 약 70명을 배출하였다. 성당 구내에는 성직자 묘지와 순교 기념비가 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