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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데탕트(긴장완화) 한답시고 개인적 데탕트(긴장완화)는 용서되어야 하는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이재유
중공이 핵무기를 가진 이후 닉슨독트린, 즉, 미국의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하고,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준수하나, 강대국 핵위협경우외인 내란 침략에서 아시아 각국 스스로 협력 대처와 태평양 국가의 중요 역할 계속하지만 직접적, 군사적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 불가하며 아시아 각국 스스로 의사로 자주적 행동 측면 지원하며, 아시아 각국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여러 나라 상호원조방식 강화해 미국의 과중부담 탈피하고, 아시아의 각국 5∼10년 내 상호안전보장 군사기구구성하기를 기대한다고 선언하면서 아시아에서이 되도록 군사비개입주의와 미군철군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닉슨대통령의 탁구(테이블 테니스)의 작은 탁구공이 현재 거대한 미국 대 중국간 외교성립으로 자유중국인 대만을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버려 버리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았지만,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3367
닉슨대통령은 살아있다면 지금처럼 엄청나게 커버린 지금의 중국을 예상 예측했을까? 현재 중국 대 미국을 보면서, 앞의 핵을 가진 중국에 대한 닉슨을 따라 하기처럼, 트럼프독트린으로 대변되는 어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라는 캐치프레이즈도 미국의 군사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간다. 즉, “남 나라 동맹이 죽든 말든 내 나라 미국만 잘 살면 된다라는 미국최우선주의가 뜻하는 것이 세계경찰국 큰형 빅브라더(Big brother)주의가 아닌 작은 형(Small Brother)주의, 미국의 실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실용주의(practicalism), 내 나라 미국 코앞 이익주의 즉, 키신저식의 현실주의(realism)나 작은 미국을 추구하고, 한미동맹은 남한 너희들의 국방은 남한 너희들 전적인 비용으로 너희들이 모두 죽든, 살든 알아서 해라, 우리는 더 이상 너희 남한을 우리 미국의 돈으로 지켜줄 수 없고, 미국 이익이 침해받으면 언제든 한미동맹도 헛된 종이조각처럼, 신애치슨라인처럼 한미동맹방어선도 버리고 신애치슨라인인 일본 필리핀 등지로 후퇴하거나 파기하고 버릴 수 있다.”라고 암묵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다음 기사문 “트럼프의 대외정책, 제2의 닉슨 독트린”에서 보이듯이 트럼프가 처한 현재의 어려운 미국이 과거 닉슨이 처한 과거의 미국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고, 트럼프의 닉슨 (연설문만 아니라 미군철군) 따라 하기로 가고 있다.:
『기존 국제주의자(globalist)의 제국주의적 ‘개입주의’를 벗어나면서도 동시에 빠르게 기존 ‘주류 세력’과도 타협이 가능한 방향이라 말할 수 있다.
폴 매너포트 선대위원장은 지난 5월 공화당 전당대회 트럼프의 후보 수락연설이 48년 전 닉슨의 연설을 본보기로 삼았다면서 “당시 연설은 오늘날 대부분의 이슈와 궤를 같이한다”고 밝혔다. 트럼프도 “닉슨은 세상이 무너져 갈 때 사람들이 미국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1960년대는 진짜 안 좋았다. 지금도 진짜 안 좋다. 미국인들은 1960년대의 혼돈이 다시 찾아왔다고 느끼고 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주장했다.
트럼프 선거 캠프 외교·안보팀의 수장이었으며, 최근 차기 내각의 법무장관으로 내정된 제프 세션스의 지난 5월 22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 내용을 다시 음미해보자. 그는 "국가방어와 외교정책에 대한 트럼프의 기본적 철학과 접근은 키신저 식 모델에 가깝다"고 했다. 즉,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정통 보수주의를 이탈한 '신(新) 고립주의'라기보다, 철저한 국익 중심의 '현실주의'라는 이야기이다.』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77
그리고, 미군의 한반도철군 내지 미국의 군사개입소극주의 앞에서 정작 우리 스스로 미국없이 남한을 지켜나갈 수 있어야 진정한 한반도 운명의 운전자이다. 그런데, 미국없이 우리 스스로 남한을 지켜나 갈 수 없으면서 한반도 운전자론을 언급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 그리고, 금번 문대통령이 미북정상회담의 장소를 평양, 제주도, 판문점 DMZ 등 한반도내로 하여 문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미북정상회담을 줄기차게 유치하려고 정의용 실장등과 더불어 계속 조언 협조하여 문대통령은 속으로 나도 노벨평화상의 트럼프대통령과 공동수상을 위한 가일층의 업적으로 숟가락이라도 얹어보려던 의도가 성사되지 않았는데, 이런 사실은 강대국 미국이 약소국 북한과 남한에게 끌려가지 않고, 북한을 국제사회인 싱가포르로 미국주도로 미국방식으로 끌어낸다라는 사실이 근저해 있음은 물론이고 남한이 사실상 호가호위식의 여우처럼 호랑이 미국의 힘을 빌어 북한을 조종한다고 폼 잡은 것은 여우인 남한이 호랑이인 미국 앞에서 재주부리는 허구적이고 허황된 한반도 운전자론의 실상이 실패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제반 미국 트럼프대통령의 외교적 주장 내지 입장을 정리하면, 본저자가 개발한 신조어로서 트럼프주의(Trumpism, Trumpianism) 내지 트럼프 독트린(Trump doctrine)이라고 불러야 하도록, 그간 쌓여온 수정사회주의 중국인민의 저임금의 노고와 희생으로, 기축통화 달러화의 세계화폐로서의 종이화폐 발권력만 믿고서 값싼 중국수출품에 현혹되어 마구 사서 써대다가 수정자본주의 미국의 소비와 생산을 고임금직의 미국산업경쟁력이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중국의 저임금수출품의 미국인의 소비와 생산, 재정에서 보조 아닌 보조가 사실상 미국 산업경쟁력 악화 내지 미국이 값싼 중국 수입품에 많이 의존해야 하는 만큼 미국 산업잠식으로 미국 양대적자인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라는 어렵고 무거운 그 미국 스스로가 자신의 짐에 부대끼고 쓰러져가야 하도록 대중국경쟁력에서 여기저기 세계경찰이라는 국제 헤게모니도 도전받고 엄청나게 위험해진 미국이 되어버렸다.
이는 미중간 신냉전의 도래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느끼기는커녕 제 나라를 혼자서 지키지도 못해 미국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지금의 몰골이 나라다운 나라가 되었다라면서 현재의 세월호로 뒤집어지고 안에서 남북한간 핵무장과 비핵화로 다투고, 여야는 정치현안에서 국민의사와 국민여론을 오도, 왜곡하고도 혹은 스스로 민주주의의 정신 근간을 왜곡시키고도 민주주의의 정당정치 여론정치 이상없다라면서 사실상 가짜 허위 민주주의정신의 여론조작사건에서도 내가 하면 삼류 사류 정쟁거리로 하찮고 찌질한 잘못이든 실수든 가볍고 남이하면 일류 상류 정쟁거리인 내로남불로써 안에서 사발이 깨진 것인 국가안위 문제점이 바깥에서도 미국의 입과 귀에 쏠려 있는 것이 제대로 된 국가인지 아예 반성은 없다. 그런 반성은커녕 여야 서로 한쪽은 민주주의원칙과 정신에서 아주 무겁고 중대한 하자나 범죄라 여기며 특검을 위해 단식을 강행하고 있고, 한쪽은 “헌법 제84조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대통령은 재직 중 형사소추 불가권으로 보호되고 있어도 현직 대통령의 형사상 수사를 받는다는 명목으로 여론조작수사의 특검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는 앞선 세월호사건과 전직대통령의 국정농단사건도 특검수사를 받지 않았어야 했다는 주장논리가 합리화되어야 하는가?
쓸데없는 정쟁거리 하찮은 삼류정치논쟁거리라고 치부하면서 갈라져 싸우고 있으면서 현재의 남한이란 국가가 무척 정상상태라고 우리는 착각해도 한참 착각하면서, 북한이 그것이 국방이든 안보든 얼마나 모자랐으면 남한을 빼고 미국을 상대로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데도 그런 국내외 상황이 남북한의 봄에 모든 국민들이 그 남북한 봄에 다 묻혀지기를 바라서인지 바라면서 남북한 데탕트라고 쾌재를 부르고 있다. 사시사철 인류에게 주는 변함없는 자연의 교훈이 알려 주듯이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봄은 반드시 가기 마련이고, 얼마간 또는 잠시간 한반도 여름이 오고 반드시 한반도 핵겨울이 온다.
중국의 세계 경제적 정치적 헤게모니와 영향력의 미국 대비 상대적 확장과 더불어 미중 무역수지적자누적으로 결국엔 미중 신냉전구도의 초래 내지 도래로 갈 것은 틈림 없는 시대조류이고 보면, 그러는 사이 남북한의 새우는 미중의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다는 속담도 모르든지 잊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대통령을 비롯해 모든 정치인 국민은 아직도 꿈도 덜 깬 강보에 쌓인 아이같이 행동하고 쾌재를 부르고 있다. 그런 난관에 봉착한 미국 수정자본주의 결함을 치유 회복치 못하는 미국 국내외 여건하에서 미국 자국이익은 최고 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라면서 사실상 이제 우리는 미국이 남한을 버리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자본주의의 시장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인 가격기구는 효율과 능률은 뛰어났지만 자원배분과 소득분배에서 다소 시장실패를 겪고서 대공황에 빠져 있다가 국가의 보이는 손의 개입으로 그런 자본주의의 결함을 보완하여 왔으나 소득분배와 자원배분에서 여전히 문제점은 남아 있었고 여기에 자본주의 효율과 시장가격기구의 장점을 따라오지 못하던 공산사회주의가 이런 자본주의의 장점을 일부 도입하여 급속히 수정사회주의가 경제력과 경쟁력 확대가 되어왔다.
즉, 1930대 대공황으로 인해 자본주의 위기로 인해 경제에서 보이는 손인 국가의 개입요소인 사회주의 경제요소를 도입해 수정자본주의는 발전을 거듭해오다가 그런 수정자본주의의 발전과 개방화에 힘입어 구소련과 중국의 공산사회주의의 자본주의 요소인 시장경제와 가격메커니즘을 도입하고 소련과 동유럽은 구소련에서 독립분열되었지만 중국은 오히려 수정사회주의가 강화되어 수정자본주의의 결점을 급속히 보완하고 군국주의가 더 강화되어 수정군국사회주의화 되어 2035년이나 그 전후에 경제력이든 군사력이든 미국에 버금가든지 미국을 언젠가 앞질러 갈 것이라는 조바심과 불안감에 휩싸인 미국은 현재 고심하고 있는 즈음에서 트럼프의 미국국익우선주의가 나타났다.
이런 현상을 거시정치경제사적으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론에 입각해 확대추리 해석해보면 인류사회가 희소한 자원배분과 완전히 풍족 만족할 수 없는 소득분배의 문제해결에서 자본주의의 시장자유경제와 공산사회주의의 국가계획경제간 경쟁에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서 먼저 미유럽등지 수정자본주의의 공의 공격에 구소련과 동유럽, 중국 베트남 등이 공산사회주의의 측의 수정방어가 있었고, 다시 수정공산사회주의의 공의 공격자인 중국, 러시아가 수정공산사회주의 거대 국가세력을 동원해서 소득배분을 개인에게 더 많이 하지 않고 오히려 국가주도 군국주의의 국방력과 경제력에 상대적으로 수정자본주의 미국유럽등지보다 더 많이 배분하고 더욱 확장하여서 재차 동유럽, 유로존, 베트남, 동아시아, 나중엔 북한, 남한, 일본으로 확장공격을 받아, 수정자본주의 미국의 헤게모니의 상대적 약화로 인해 그들 중국, 러시아 내지 중러연합연맹체 등 수정공산사회주의 경제권의 영향력과 군사력 지배 하에 들어갈 것으로 예측, 예상해 보면서, 현재의 중국의 주변국인 북한과 베트남은 이미 중국의 영향하에 있고, 동남아로, 러시아로, 중동으로, 유럽으로 계속 확대되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중러를 중심으로 그들의 수정군국공산사회주의의 영향확대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거대 세계수정군국사회주의 경제의 패러다임변화에 준비해야 한다.
또다시 이런 우리 스스로 핵자주국방력도 없이 미핵우산만 오로지 바라다보고 있다간 이런 거대 세계 패러다임변화를 감지도 못하고 준비도 못하면 과거 근세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지배를 당하였듯이 또다시 그런 수정군국공산사회주의 경제의 주축국 중국과 러시아나 그 중러 수정군국공산사회주의의 지배에 들어가서 반드시 패망하게 된다.
미중 데탕트(긴장완화) 시기는 언제였던가? 당시 엄청난 외교적 모험 내지 대결심으로서 자유중국 대만을 버리고 당시 중공을 국제외교의 상대로 인정해야 하는 하여야 하는 상황으로 갔다고 봐야 한다. 이런 역사적 교훈으로 우리는 다음을 직시하고 준비해야 한다.: 즉, 미중데탕트에 미국이 대만을 버렸듯이, 북미데탕트에서 남한을 미국이 버릴 것이다라는 미국국익최우선주의가 있고 미양대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로 미국의 제코가 석자임에서 미핵우산만 믿고 핵자주국방을 등한히 하다 미국의 버림을 받아 북한에 적화통일 되는 한반도 데탕트의 함정에 빠지면 대만처럼 남한은 버림받고 대만이 중국에 복속되고 결국엔 망한다라는 역사적 교훈에서 배워야 한다.
이런 미북패러다임변화와 중러패러다임 변화를 문대통령은 승자의 저주에 빠져서 자신의 한반도봄이라는 데탕트 함정과 비핵화의 덫과 올가미에 빠져 있고, 여론조작수사에서 제살과 제식구 감싸기에 올인하다가 나중에 되를 주고 말로 후회막급한 일을 당할 것이다.
미국과 중공간 데탕트(긴장완화) 노력과 분위기로 미중간 국교성립시키는 외교적 공적이 있었으나, 워터게이트로 대변되는 닉슨대통령 재선거승리를 위한 주거침입도청에 대하여 거짓말 해명도 당시 아무런 문제거리도 되지 않는 하찮은 주거침입정도로 치부되어 삼류정치논쟁거리쯤 되었으나, 미국 민주주의 근간을 흔든 중대한 대통령의 탄핵사유로 닉슨이 하야해야 했듯이, 지금 한쪽은 하찮은 정쟁거리로 돌리려 하나 여론조작사건에서 한쪽은 단식으로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믿지 못하고 특별검사에 의해 책임 있고 엄중한 수사를 바라도록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고 과거 세월호와 국정농단에서 여야 모두 당시 대통령은 물론이고 모든 여야 정치인은 국정농단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은 어디에 가고 없고 자신의 치부와 잘못은 절대로 드러내지도 사실이 아니고 침소봉대라고 무시하거나 우기거나 하고 있으면서 반드시 그런 오류와 잘못은 지금이 남북한 봄의 데탕트 노력과 업적이 더 커서 덮어져야하고 국민은 몰라야 하는지 미국의 미중데탕트 외교노력으로 닉슨이 워터게이트도 덮어져야 하고 국민이 몰라야 하고 용서되어야 하는가?
문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당시 박근혜대통령에 대해 날선 비판을 “닉슨 사임은 도청이 아니라 거짓말 때문” 한 아래 기사에서 보듯이 그것을 거울 삼아 문대통령 자신이 과거에 다음을 말한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 대통령을 포함한 여당정치인은 권력권좌입직 전, 즉, 대통령이 되기 전인 화장실 가기 전에 말한 것과 대통령이 된 후인 화장실 간 후에 남북화해의 봄이라는 국가적 데탕트를 방패와 무기로 여론의 무지에 더해서 다수당 힘으로 내 정당의 이익을 앞세워 정당과 최고실권자와 관계에서의 치부와 내 살을 잘라내야 하는 아픔을 두려워 해서 무시 은폐하려고 하거나 개인적으로 스스로 도덕적 해이나 내로남불식의 개인적 데탕트(긴장완화)가 되어 다른 생각과 태도로서 언행일치가 되지 않아서 비양심적 태도로 일관견지한다면 역사와 국민은 지금이 아니더라도 후에 언젠가 반드시 심판과 평가를 할 것이다.;
『(전략)
문 의원은 이어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강조했던 국민 통합과 상생도 오히려 더 멀어졌다”며 “편 가르기와 정치 보복이 횡행하고 있다. 정치에서 품격이 사라졌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정부가 국가정보원 등의 대선 개입 사건을 철저히 밝히려 하지 않고 오히려 수사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강하게 지적했다. 문 의원은 정부의 국정원 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 “과거 독재정권들도 하지 못했던 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진실을 덮으려고 하는 박근혜 정부의 대응이 오히려 정통성에 대한 공격을 자초하고 있다. 바야흐로 지난 정권의 잘못이 현 정권의 더 큰 잘못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 의원은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언급하며 “워터게이터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사임을 하게 된 시발은 도청 사건이 아니라 바로 거짓말 때문”이라며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그는 “도청 공작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것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일,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며 거짓말 한 책임을 추궁 당해 사퇴를 자초한 것”이라고 밝혔다.
(후략)
』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613442.html#csidx62871cfd8cf55178021c05434eb4508
여론조작사건은 민주주의를 왜곡한 것으로 “나라다운 나라”의 헌법정신위반, 정당정치위반, 국민민주 여론정치위반으로서 “국민이 주인이다”, 즉, “헌법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하자와 결함인 바, 모모 인사만 형사입건하고 선거에 불이익을 주지 않기 위해 나머지는 현직 누구와 가깝다는 이유로 수사선에서 참고인으로 대하거나 명백한 공범관계 내지 주범과 종범관계에서 공범 한쪽만 재빨리 형사입건하고 나머지는 덮어버리든지 경찰이나 검찰이나 그 여론조작수사를 중도에 마감종결하거나 나머지를 떨어버리거나 하여, 사실상 담당수사경찰과 기소독점주의와 기소편의주의를 가진 담당수사검찰이 서로 윗사람과 위선의 눈치보기수사를 하고 제대로 수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아 미필적 고의로 직무유기와 직권남용 내지 즉시 제때 컴퓨터 네트워크 휴대전화 통신수사와 금전수수기록의 압수수색을 하지 않아 공범자들이 범증을 숨기고 없애도록 증거인멸방조를 하면서 수사에 빠져있든지 혹은 검경간 서로 수사를 미루든지 수사대상이나 증거를 알면서 확보치 않거나 모른 채하면서 직무유기, 직권남용과 증거인멸을 하고 있다면 새로운 국정농단이란 역사와 국민 앞에 죄를 짓는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든 현직대통령과 가까운 실세이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윗선, 윗사람 눈치보기식 수사, 상부에서의 수사인물 수사대상, 수사증거에서 유기방기 손괴, 결략은폐 은닉, 직권남용이든 직무유기든 증거인멸든 (교사, 방조) 수사조종이나 수사조작 없이 한 점 의혹 없이 이런 수사권조정을 앞에서 두고서 서로 밥그릇싸움만 할 것이 아니라 이번 여론조작사건은 온 국민이 검경의 수사권을 누가 더 가져야 할지, 더 공정하게 더 투명하게 수사를 하는지 다 지켜보고 있다. 이런 시기에 수사경찰과 수사검찰은 엄중하게 사심 없이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과 입김에 휘둘림 없어야 한다. 공정하게 잘못이 있다면 지위 높은 현직 대통령이라도 심지어 수사대상이 되어야 함은 마땅하므로 역사 앞에 엄중히 심중히 중차대하게 수사에 여야에 휘둘림 없이 국민앞에 공정성과 투명성을 갖고 수사하여야 한다.
(참고자료)
문재인 “닉슨 사임은 도청이 아니라 거짓말 때문”
등록 :2013-12-01 16:47수정 :2013-12-02 09:38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15일 오후 열린 제320회 국회(정기회) 8차 본회의에서 동료 의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지난 대선 되돌아본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 출간
“박 대통령 ‘공안 정치’를 이끄는 무서운 대통령 됐다”
“민주당만으로는 안 되지만 민주당 없이도 안 된다’”
차기 대선에 도전할 뜻을 밝힌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은 ‘공안 정치’를 이끄는 무서운 대통령이 됐다”며 비판했다.
문 의원은 1일 자신의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의 출간 소식을 알리는 보도자료에서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저와 경쟁했던 박근혜 후보와 다른 분 같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그때 박근혜 후보는 국민들의 뜻에 자신을 맞추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지금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 의원은 이어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강조했던 국민 통합과 상생도 오히려 더 멀어졌다”며 “편 가르기와 정치 보복이 횡행하고 있다. 정치에서 품격이 사라졌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정부가 국가정보원 등의 대선 개입 사건을 철저히 밝히려 하지 않고 오히려 수사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강하게 지적했다. 문 의원은 정부의 국정원 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 “과거 독재정권들도 하지 못했던 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진실을 덮으려고 하는 박근혜 정부의 대응이 오히려 정통성에 대한 공격을 자초하고 있다. 바야흐로 지난 정권의 잘못이 현 정권의 더 큰 잘못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 의원은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언급하며 “워터게이터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사임을 하게 된 시발은 도청 사건이 아니라 바로 거짓말 때문”이라며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그는 “도청 공작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것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일,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며 거짓말 한 책임을 추궁 당해 사퇴를 자초한 것”이라고 밝혔다.
문 의원은 지난 대선 패배의 원인도 언급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한 마디로 평소 실력 부족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준비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문 의원은 “거기에 국정원의 대선 공작과 경찰의 수사 결과 조작 발표 등의 관권 개입이 더해졌을 뿐이다. 전적으로 제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대선 전략이 부족했다는 점도 인정했다. 문 의원은 “상대편이 엔엘엘(NLL·북방한계선) 공세나 종북 프레임 등 흑색선전까지 미리 준비한 전략에 따라 선거를 이끌어간 데 비해, 우리는 공을 따라 우르르 몰려가는 동네 축구 같은 선거를 했다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평소에 놀다가 벼락치기 준비로 시험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 때 벼락치기로 준비했던 일들을 5년 내내 하면 된다”며 차기 대선 출마에 대한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문 의원은 또 안철수 무소속 의원의 신당 창당에 대해서는 “지난 대선에서 보여준 건, ‘민주당만으로는 안 되지만 민주당 없이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며 “그것이 정당 정치의 현실”이라고 밝혔다.
문 의원의 책 <1219, 끝이 시작이다>는 오는 9일 출간된다.
이정연 기자xingxin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613442.html#csidx62871cfd8cf55178021c05434eb4508
트럼프의 대외정책, 제2의 닉슨 독트린
이정훈 여명의눈동자
이정훈 국제팀장
승인 2016.12.20 12:21
▲ 트럼프 내각 [사진출처 CNN 동영상 갈무리]
세계가 도널드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궁금해 하고 있다. 트럼프의 차기정부 주요 직책 인선은 그 정책 방향의 가늠자였는데, 그 내용이 전례 없이 파격적이다. 트럼프 차기정부의 정책 방향과 윤곽이 점차 드러나는 순간이다. 트럼프 대외정책은 ‘고립주의’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키신저 식 ‘현실주의’ 경향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대외정책이 동북아 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단순히 한국 방위비 분담증액 문제나, 한-미, 중-미 통상마찰의 문제를 훨씬 넘어설 것으로 판단된다.
1970년대 미-소 냉전 중심의 세계 질서를 중-미 관계 개선으로 극적으로 변화시킨 인물이 있다. 닉슨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미소 냉전이후 세계 외교의 기본 틀을 바꾼 ‘닉슨 독트린’과 ‘닉슨 쇼크’로 상징되는 대외정책과 유사한 파격적 외교행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냉전종료 이후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이 추진한 세계질서의 기본구도를 다시 한 번 뒤흔들 조짐이 보인다. 트럼프 대외정책의 성격과 방향을 전망해보자.
1 트럼프 대외정책은 더 이상 럭비공이 아니다.
선거기간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좌충우돌과 오락가락을 반복했고, 힐러리 클린턴후보로부터 자주 공격받는 취약분야 중 하나였다. 그러나 트럼프가 공화당 유력주자로 등장하는 지난 5월 이후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빠르게 외교정책의 방향을 잡고 기본 내용이 정립되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의 외교노선이 ‘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정책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슬로건에 맞추면서 세련되게 다듬어 가는 모습이었다. 그 방향은 기존 국제주의자(globalist)의 제국주의적 ‘개입주의’를 벗어나면서도 동시에 빠르게 기존 ‘주류 세력’과도 타협이 가능한 방향이라 말할 수 있다.
폴 매너포트 선대위원장은 지난 5월 공화당 전당대회 트럼프의 후보 수락연설이 48년 전 닉슨의 연설을 본보기로 삼았다면서 “당시 연설은 오늘날 대부분의 이슈와 궤를 같이한다”고 밝혔다. 트럼프도 “닉슨은 세상이 무너져 갈 때 사람들이 미국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1960년대는 진짜 안 좋았다. 지금도 진짜 안 좋다. 미국인들은 1960년대의 혼돈이 다시 찾아왔다고 느끼고 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주장했다.
트럼프 선거 캠프 외교·안보팀의 수장이었으며, 최근 차기 내각의 법무장관으로 내정된 제프 세션스의 지난 5월 22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 내용을 다시 음미해보자. 그는 "국가방어와 외교정책에 대한 트럼프의 기본적 철학과 접근은 키신저 식 모델에 가깝다"고 했다. 즉,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정통 보수주의를 이탈한 '신(新) 고립주의'라기보다, 철저한 국익 중심의 '현실주의'라는 이야기이다. 5월 18일 뉴욕 맨해튼에서 만난 트럼프와 키신저의 회동이 단순히 트럼프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언론 홍보용만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미국 패권주의 몰락과 새로운 트럼프 ‘현실주의’ 정립과정
트럼프의 지난 발언을 추적하면 그의 정책이 여러모로 ‘닉슨의 발상’을 채용할 것이라는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향이 단순히 위기에 처한 미국 대통령 선거 전략을 넘어서서, 대통령 당선 후 더 파격적 국제관계와 대외정책으로 전환될 가능성으로 발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냉전붕괴 이후 미국이 공세적으로 추진하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기존 대외정책 실패를 현실적으로 조정하면서도, 위대한 미국의 부활을 슬로건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트럼프 현실주의(realist)’로 다듬어 가는 모습이다.
트럼프는 네오콘이 벌이는 IS와 시리아 전쟁의 기만성을 폭로하며, 국제외교와 관련된 자극적 발언을 자주했으나, 유세기간 미국 외교정책에 관해 의미 있는 기조연설을 한 적이 별로 없다. 그의 의미 있는 몇몇 주요 발언을 역추적 해보자. 4월 27일 트럼프는 워싱턴 연설에서 ‘미국 우선주의’로 명명한 자신의 외교정책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은 말은 한다. “나는 필요하지 않으면 전투에 우리 병력의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한 말이다.” 또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들과 적대국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12월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연설에서는 "미국은 체제전복 시도를 중단할 것이며 정권과 사람을 전복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는 9월 7일 필라델피아에서 의미 있는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트럼프의 좌충우돌 정책이 미국 주류 군산복합체의 요구와 어떻게 절충하며 정립될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전까지 국방비 감축을 주장하던 트럼프는 그 연설에서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라는 로널드 레이건의 대선 공약을 다시 부활시켰다. 그 연설에서 트럼프는 육군과 해군, 파병군 규모의 확대를 주장했다. 중동에서 지상군을 철수시키는 정책을 감안하면 증군(增軍)은 실제로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그는 해군력 강화와 군무기의 현대화를 약속했다. 국방비 중강 문제는 주류정치권의 최대관심사였는데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는 선거구호로 이를 절충해 연결시켰다.
3 트럼프의 현실주의 대외정책의 기본방향
트럼프 최근 언행과 차기 정부 주요 인사 인선과정을 종합하면, 그의 대외정책이 보호무역주의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세계질서의 방향전환을 파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 소련붕괴 이후 네오콘이 추진한 대 러시아 무력화와 적대정책을 전면 전환한다.
2 이에 따라 유럽의 반러 대치전선과 정치지형도 전환한다. 나토(NATO)의 기능과 역할도 중립적으로 전환하거나 해체한다.
3 시리아, 중동문제를 러시아와 협력하여 풀어가며, 중동 도처에서 사실상 미국의 대리전을 치르는 IS를 실질적으로 정리한다.
4 중국의 급속한 부상을 저지하고 미국의 태평양 지배권을 방어한다. 이에 따라 대만의 가치를 재평가한다.
5 북한(조선)의 핵, 미사일 문제의 시급성과 전략적 의미를 재평가한다. 실패한 오바마의 기다리는 전략을 폐기하며 대북 적대정책의 전환을 추진한다. 이에 따라 평화협정을 위한 준비협상을 임기초반에 개시한다.
이러한 트럼프 대외정책 경향에 대해 미국의 정치 분석가 그레그 로슨은 지난 3일자 '더힐' 기고문에서 "트럼프의 '역(逆)닉슨(Reverse Nixon) 전략'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과거 적대적 중국과 친교를 맺으며 부흥하는 소련을 저지했듯이, 트럼프의 현실주의 외교노선은 다시 러시아와 친교를 맺으며 중국을 저지하려 한다는 지적이다. 1970년대 급성장하는 소련, 제3세계 사회주의 확산, 베트남전의 위기, 오일쇼크와 세계 자본주의 경제 위기, 미 달러위기 등에 대처해서, 미국은 ‘불개입 원칙’을 표명한 ‘닉슨독트린’과 금본위제를 폐기한 ‘닉슨쇼크’로 대응한 것과 유사한 행보가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트럼프 외교노선이 방향전환의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이는 결코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의 성격을 결코 벗어나지는 않고 있다. 크게 보면 1991년 소련붕괴 이후 지난 25년간 미국 네오콘이 초당적으로 밀어붙인 일극 패권주의 대외정책으로부터의 후퇴하는 과정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 시대의 등장 배경은 영국의 브랙시트 현상 출현과도 유사하다. 미국 주류 기득권 세력과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세계와 미국국민의 반발에 대한 새로운 지배세력의 출현과 대응이다. 당선이후 트럼프 대외정책은 미 기득권 주류세력이나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와 정면충돌하기보다는 협조하면서도 새로운 대외정책을 빠르게 정립할 것으로 보인다.
4 주요 외교정책의 실행자들; 플린-키신저, 틸러슨, 리차드 하스
트럼프는 정치적 빚이 별로 없다. 미국 기득권 정치 엘리트와 혼자 싸워서 이겼다. 그래서인지 내각 인선의 특징도 노골적이며 강경하며 파격적이다. 언론에서는 차기 트럼프 내각을 ‘3G’ 내각이라 한다. 미국 금융계, 월가를 대표하는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군 장성을 뜻하는 제너럴, 그리고 초갑부를 의미하는 가질리어네어 이렇게 세 단어의 영문 첫 글자 ‘G’를 뜻한다.
여기서는 주로 대외정책과 관련된 일부 인물만 살펴보자. 그가 대통령 당선자 확정 후 처음으로 내정한 사람은 플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폼페오 중앙정보국 CIA 국장, 그리고 법무장관 세션스 등이다. 국가안보보좌관은 국무장관, 국방장관과 함께 미 대외 정책의 3대 축으로 꼽히는 중요한 자리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미국 외교안보 분야 총사령탑 역할을 하게 된다.
플린은 군인출신으로 오바마 행정부에서 DIA(국방정보국) 국장을 역임하다 중동 정책을 둘러싼 이견으로 해임됐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커다란 실책이며 전략적 실패였다"고 지적했다. 플린은 대외적으로 친러파라고 한 적은 없으나, 러시아와 푸틴에 우호적인 사실상 친러 성향으로 볼 수 있다. 또 2013년 국방정보국장 재직 시기, 연방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북조선(북한)의 미사일이 핵탄두 장착능력이 있으며, 미국 본토방위의 직접적 위협이 된다는 현실적 평가로 파란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플린은 강경파라기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보인다. 트럼프의 ‘제2의 키신저’라 불릴만한 핵심인물로 판단된다.
국무장관 내정자인, 엑손모빌 CEO 렉스 틸러슨은 미국의 대표적 친러파 인사이다. 엑손모빌은 록펠레 계열의 대표적 회사이기도하다. 록펠러는 재계뿐 아니라 정계와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움직이는 세계적 재벌이다. 엑손 모빌은 러시아와 다양한 합작 사업을 해왔으며, 틸러슨은 2012년 러시아 정부훈장인 '우정훈장(Order of Friends)'을 받았다. 틸러슨은 버락 오바마 정부가 주도한 서방의 대(對) 러시아 제재에도 비판적 입장을 취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언론은 그의 발탁을 ‘푸틴의 승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 눈여겨 볼 사람이 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국무부 2인자 자리인 부장관에 미국 외교협회(CFR) 리처드 하스 회장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고 12월 15일보도 했다. 국무장관에 지명된 렉스 틸러슨이 외교 실무에 경험이 없는 것을 보안하기 위해 하스가 부상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트는 여러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외교정책통으로 불리는 "하스를 존경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하스 회장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을 역임한 외교 전문가이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도 정통하다. 하스는 지난 9월 의미 있는 CFR 대북정책 특별보고서 작성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다. 그가 의장으로 참여한 이 특별보고서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적대정책의 전환과 한반도 평화협정을 권고하고 있다.
▲ 트럼프 내각 [사진출처 the ONION’ VIDEO 동영상 갈무리]
5 러시아 적대 정책의 실패와 새로운 러시아 전략
만약 트럼프가 큰 그림을 구상하며, 대 러시아 적대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한다면 이는 유럽과, 중동, 세계 정치사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1991년 소연방 붕괴 이후 미국의 대러시아 정책을 요약하면 러시아 ‘흡수 무력화’ 전략이었다. 미국의 목표는 동구권과 해체된 소연방 국가들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신속히 편입하는 것과 동시에 다시는 연방의 중심국인 러시아가 대국으로 등장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미국은 지난 20여 년 동안 반(反)소 군사동맹이던 나토(NATO)를 해체하지 않고 거꾸로 구소련 연방 국가들을 분리해 이들 나라를 단계적으로 나토에 가입시켰다. 종국에는 러시아마저 몇 개의 지역으로 분할해 재기불능의 중간 규모국가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2000년 ‘강대국 러시아의 부활’을 기치로 내건 푸틴의 등장 이후 상황은 바뀌었다. 미-러는 유럽이 핵전쟁을 우려할 정도로 격렬하게 대결했다.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사태는 그 대리전이었다.
결과적으로 푸틴이 오랜 기간 미국과 대립하며 추진하는 전략은 성공하고 미국의 대러시아 전략은 실패했다. 이미 미국의 지원과 추동력을 상실한 시리아 내전은 러시아 주도로 종결되는 국면이다. 트럼프는 힐러리가 거부하고 유지하려던 ‘대러 적대전략’을 우호 협력의 역방향으로 전환하려하고 있다.
6 새로운 유럽, NATO의 성격변화와 해체 가능성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면 반(反)러시아·동맹의 중요성 등 국제 정치 현실을 깨닫게 될 것이란 전망은 이미 빗나갔다. ‘푸틴의 친구’ 틸러슨 국무장관 지명으로 유럽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발트 3국을 포함한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줄 방패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며 극도의 불안감에 빠졌다. 오바마 행정부와 정반대로 미국 외교 노선을 '친(親)러시아'로 바꿔놓으면서 유럽 정치·외교 근본 틀이 크게 흔들 조짐이 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선거 때 "(나토는) 용도 폐기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럽은 나토마저 흔들릴까 봐 우려하고 있다. 유럽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와 나토(NATO)를 통한 군사적 대응 등에서 미국과 손발을 맞춰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최근 양자 회담에서 "대러 경제 제재 연장"에 합의했다. 그러나 틸러슨은 "대러 제재를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미국과 유럽의 대러 공동 전선은 이미 엇박자이다.
트럼프는 유럽이 나토의 방위비 분담을 늘리라는 차원을 넘어 나토를 해체하거나, 나토의 성격과 기능을 변화사킬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적대적 미-러관계가 정리되고 새로운 미-러관계가 추진될 경우 충분히 가능한 전략이다. 트럼프가 푸틴을 만나 국제테러에 중심을 둔 ‘새로운 유럽 안보기구’를 제안하고 러시아를 이 기구의 일원으로 포함시키는 구상이다. 미-러간 대립의 산물인 러시아 국경 주변의 MD를 후퇴하고 러시아는 구소련 발틱 국가들에 대한 안보문제 해소를 약속하는 방안이 현실화 될 수 있다.
7. 긴장하는 중국과 부상하는 대만카드, 한반도 MD
중국은 소련 붕괴 후 미국의 패권전략에 러시아와 다극화 전략으로 맞서며 밀착해왔다. 트럼프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밀착하도록 놔두면 안 된다“는 조언을 수없이 들었다고 했다. 오바마 정부의 러시아 적대전략이 결과적으로 중·러 밀착을 도왔다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해외판은 '푸틴의 절친을 국무장관으로 앉힌 트럼프, ‘연아제화(聯俄制華·러시아와 손잡고 중국을 억제하다)에 나서나'라는 기사를 게재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중국은 다소 과장이 있으나 트럼프 행정부가 '친러 반중'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중미 관계를 악화시키고 중·러 관계에 균열이 일어날 것을 내심 경계하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2일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대통령)과 직접 전화통화를 한 배경에도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미국 현직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자가 대만 정상과 통화한 것은 1979년 양국 간 수교 단절 이후 3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키신저는 2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일부 미국 언론은 키신저가 중국에 화해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키신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대만 측이 일으킨 작은 행동으로 국제사회에 이미 형성된 ‘하나의 중국’이란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의미를 축소했다.
중국은 트럼프의 대중국 정책의 이중성을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를 그대로 밀고 나갈지가 사드 배치를 늦출지 여부가 향후 중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풍향계'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사드배치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협정과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와 연관된 중-미관계의 핵심문제로 트럼프 외교정책의 가장 어려운 난제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8 닉슨의 베트남, 트럼프의 북한(조선)문제
차기 트럼프 내각은 플린 내정자를 비롯해 제임스 틸러슨 국무장관, 매티스 국방장관 내정자, 마이크 폼페오 중앙정보국(CIA) 국장 내정자등 강경파 인사로 채워진 상태다. 한국 주류 언론 보도 분석에 의하면, 향후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이 오바마 정부의 정책보다 훨씬 강경해질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새로운 대외전략 가능성과 내각 인선의 의미를 좀 더 깊이 파악하면,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한반도 문제가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트럼프의 외교정책통으로 불리는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은 11월 14일(현지시간) CFR 뉴욕본부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실 산하 동북아평화협력 의원외교단'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핵무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미국의 이익에도 반한다"고 밝혔다고"트럼프 당선자는 선거와 국정을 구분해 보고 있다“고 전했다. 또 미국의 대북정책문제가 차기 정부가 해결할 최우선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고 전했다.
‘38 노스’로 한국에 잘 알려진 조엘 위트 연구원은 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특보와 함께 11월 17∼19일 제네바에서 장일훈 유엔주재 차석대사, 최선희 외무성 미국 국장 등 북한 외교라인의 핵심 당국자들을 만나 북핵 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왔다. 그가 플린과 직접 정보를 교환한 것으로 예상한다. 그가 시사잡지 애틀랜틱 기고문을 통해 미국 차기 정부에 권고한 내용을 살펴보자.
그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 직후 직접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에게 대화 재개를 위한 구두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정부는 취임 100일 안에 북핵 위협에 관한 현 상황을 평가하고 관련 대북정책을 입안해 행동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런 다음 △2월 초 1차 북미 탐색 대화 △2월 중순 한미 합동군사훈련 축소 또는 수정 발표와 북한의 핵실험 중단 발표 △2월 말 신뢰구축에 초점을 맞춘 2차 북미 대화 △3월 중순 북미협상 공식 재개 및 양측의 담대한 조치 필요성에 관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서한 발송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영변 핵시설 사찰활동 복귀 △4월 북한 대화 재개 미준비시 제재 강화 등의 일정표를 제시했다.
조엘위트는 오바마 행정부 초기처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북미간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첫 단추가 내년 2월 시작되는 한미합동 군사훈련을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우려처럼 만약 차기 트럼프 정부의 대북 초기 대응이 실패할 경우, 북-미간 재격돌과 전쟁위기는 매우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2016 국민혁명이 겨울을 넘어 줄기차게 진행 중이고, 내년은 정권교체기와 맞물려있다. 이어질 2017년 촛불 혁명과 함께 또 하나의 국제 질서의 격변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트럼프 독트린’이 다가오고 있다.
이정훈 국제팀장 wequiwe11@gmail.com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77
'핵무기는 종이호랑이'라던 마오쩌둥이…
핼버스탬은 "중국인에게 한국전쟁은 아주 자랑스럽고 성공적인 전투였으며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이 현대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이뤄낸 쾌거 중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세계 최대 강국인 미국을 보기 좋게 이겼을 뿐 아니라 유엔 전체를 무색케" 함으로써, 또한 "불구경만 했던 소련과는" 달리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구원함으로써, "한국전쟁 후 전 세계 국가들은 중국이 떠오르는 세계 강국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치른 비용도 대단히 컸다. 약 30만명이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는 더욱 피폐해졌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이 중국에게 미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은 양안간 현상 유지의 장기화였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 발표 등을 통해 중국의 대만 통일에 개입하지 않을 뜻을 내비쳤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대만 보호는 중대한 원칙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대만 해협 위기와 미국-중국-소련 삼각관계
한국전쟁이 동아시아 지정학에 미친 가장 직접적이고도 중대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대중(對中) 핵 위협의 증대와 이에 맞선 중국의 핵무장이다. 마오쩌둥은 1946년 인도 총리 네루를 만났을 때는 "중국 인구가 얼만데"라며 미국의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로 비유했을 정도로 미국의 핵 위협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자국의 핵 개발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기에는 "전쟁은 무기가 아니라 인간이 좌우한다"는 그의 신념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바뀌었다. 미국의 핵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핵무장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 참전 결정을 내렸던 1950년 10월 "우리가 원자폭탄을 가질 때 비로소 전쟁광이 우리의 정당하고 이성적인 요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인민일보>는 미국은 다른 나라를 협박하는데 핵무기를 이용해왔다고 비난하면서 "소련을 위시한 다른 나라들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핵 독점에 따른 이점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반도에서 총성이 멈춘 이후에 미국의 대중 핵 위협은 더욱 강해지고 구체화되었다. 미국이 북한과 함께 중국을 대량 보복 전략의 핵심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미국의 핵 위협은 중국의 한반도 및 인도차이나 개입과 대만 공격에 대비한 성격이 짙었다. 1953년 11월에 작성된 미국 합참 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목표는 핵 공격을 통해 "한반도와 극동에서 중국의 추가적인 도발 능력을 제거"하는데 맞춰졌다. 또한 이듬해 1월 NSC는 인도차이나 전략을 승인하게 되는데, 한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이 이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 개입과 직접 관련이 있는 중국의 군사력을 파괴하기 위해 해공군 작전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전략공군사령부(SAC)의 르메이(Curtis E. LeMay) 사령관은 "한반도에는 전략적 목표물이 없지만, 중국, 만주, 러시아 동남부 등에 몇 개의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다만 동맹국들의 반발 및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우려해 중국에 대한 보복은 가급적 선택적이고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미국의 대중 핵 공격 계획은 1954-55년 1차 대만 위기가 발생하면서 시험대에 올랐다. 위기가 장기화되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5년 들어 본격적으로 핵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무고한 민간 지역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도 군사 목표물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며, "새롭고도 강력한 정밀 무기"의 사용 가능성을 시사했다. 아이젠하워는 3월 17일 기자회견에서 "엄격히 군사 목표물로 제한하고 군사적 목적 달성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당신이 총이나 그 밖에 다른 것들을 사용하는 것처럼 왜 그것들은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거죠"라고 말했는데, 그가 말한 "그것들은" 바로 핵무기를 의미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핵문제 담당 특별보좌관인 스미스(Gerald Smith)가 신중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아무리 작은 전술 핵무기라도 그것이 터지면 낙진에 의해 주변 도시에도 피해를 입힐 수 있고, 일단 핵 공격이 시작되면 그 임무를 맡고 있는 전략공군사령부가 대규모의 핵 공격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또한 영국 정부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강해진 미국의 대중국 적대감이 핵 공격을 비롯한 전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정작 중국은 미국의 핵 위협에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1차 대만 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1955년 1월 말, 마오쩌둥은 주중 핀란드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인민은 결코 미국의 핵 협박에 굴복하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6억명의 인구와 9백60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갖고 있습니다. 미국은 핵무기로 결코 중국을 절멸시킬 수 없어요. 미국의 원자폭탄이 아무리 강력해도 중국에 떨어지면 지구에 구멍 하나를 만드는 것이거나 약간의 타격을 입힐 뿐이며, 이 정도는 우주 전체로 볼 때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중략) 만약 미국이 원자폭탄을 탑재한 항공기로 전쟁을 도발하더라도 수수와 소총으로 무장한 중국은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전 세계 인민들도 우리를 지지할 것입니다."
1954-55년 1차 위기 때 날카롭게 대립했던 미국과 중국은 1958년 2차 위기에서는 정면충돌의 위기까지 겪었다. 중국이 대만 해협을 봉쇄하려고 하자 미 공군은 핵무기를 중국에 투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합참의장인 트위닝(Nathan F. Twining)은 "미국 항공기는 아모이(중국의 해안 도시로 오늘날에는 샤먼으로 불림) 인근의 몇 개 기지에 10-15킬로톤의 핵폭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의 공군기지에 핵 공습 준비태세를 갖춘 5기의 B-47 전폭기"를 배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핵무기가 고폭탄과 같은 재래식 무기라는 (공군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산군의 재래식 공격에 핵무기로 보복한다는 '대량 보복' 전략에 따라 미 공군은 핵 공격 권한 위임을 승인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아이젠하워는 첫 공격은 재래식 고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이다.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구분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던 아이젠하워가 놀랍게도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구분한 것이다.
미중간의 대만해협 위기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소련의 반응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핵 공격 위협과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마오쩌둥의 무모해 보이는, 그러나 일관되고도 단호한 입장에 아연실색했다.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미-중 전쟁이 발발하면 소련 역시 휘말릴 것으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에서도 미국의 핵 공격으로 중국인 3억명이 목숨을 잃더라도 "세월은 흘러 우리는 더 많은 아이들을 낳을 수 있다"며 핵전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흐루쇼프는 "정말 역겹군"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안토닌 노보트니(Antonin Novotny)는 "겨우 1천2백만 밖에 인구가 안 되는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고 푸념했다.
흐루쇼프는 1959년 10월 마오쩌둥을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총을 쏘면 그 섬들을 장악해야 하고, 당신이 그 섬들을 장악할 생각이 없다면, 총을 쏠 이유가 없잖아요. 난 당신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 헨리 키신저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대만 해협 위기를 조장한 "마오쩌둥의 진짜 의도는 핵전쟁의 위험을 크게 고조시켜 소련으로 하여금 중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지원하도록 만드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1차 대만 해협 위기를 거치면서 소련이 중국의 핵 개발을 적극 지원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소련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핵 공격 방어를 중국 손에 넘겨줌으로써 미래에 또 다시 위기가 발생하면 말썽쟁이 동맹국(중국)과 거리를 두기 위해 중국의 핵개발을 돕기로 했다"고 분석했다.
중국 핵무장 저지, 소련에게 물어봐?
한편 1960년대 들어 중국의 핵 개발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던 미국은 중국이 핵보유 문턱에 접근하자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중공이 핵무기를 손에 넣으면 세계 정치를 뒤흔들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 서방 국가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월 22일 NSC 회의에서 "중국이 (핵무장에 성공하면) 19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우리의 주적이 될 것"이라며,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이 중국의 핵무장을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1월 하순 <Meet the Press>에 출연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중국의 핵무장에 따른 "심리적, 정치적 영향은 심각한 수준이 될 것"이라며, 케네디 행정부가 핵실험 금지조약 협상에 적극적인 배경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국의 핵보유 예방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중국 핵문제 해결'은 케네디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최대 숙제로 부상했다. 일각에서는 중국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초점은 외교적 해결로 맞춰졌다. 중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나라, 즉 소련 역할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케네디 행정부 내 최고의 아시아통으로 평가받았던 해리먼(Averell Harriman) 국무부 차관이 이 구상을 주도했다. 그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 핵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며, 소련에게 미끼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미끼는 바로 미국이 서독의 핵무장 방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테니 소련도 중국의 핵무장 저지에 적극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케네디는 이러한 협상안에 적극 동의하면서 1963년 7월 해리먼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러나 해리먼은 흐루쇼프를 만나지도 못했고, 소련 정부와 중국 핵문제를 제대로 논의하지도 못했다. 중국과 공산주의 운동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던 소련이 미국과 손을 잡고 중국에 대응하는 모양새를 취하면, 공산 진영에서 자신의 지도력이 실추될 것으로 우려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케네디 행정부는 소련과의 접촉에서 중국의 핵무장 저지를 핵심 의제로 삼고자 했지만, 흐루쇼프 정권은 미국이 다자군(Multilateral Force)이라는 이름하에 미국 핵무기를 서독 등 일부 유럽 국가들과 공유하려는 문제가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이처럼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 핵문제 해결을 도모하려고 했던 꿈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케네디는 1963년 8월 1일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이 핵무장에 성공하면 10년 이내에 "2차 세계대전 종전 때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국의 핵 개발이 가속화되자 대만의 로비도 치열해졌다. 장제스 총통은 아들인 장칭궈를 워싱턴으로 보내 중국에 대한 무력 사용을 요청했다. 그러나 케네디 행정부는 무력 공격이 중국과 소련을 밀착시킬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미국의 '대량 보복 전략'이 인종차별주의를 야기하며 중국의 핵무장을 정당화시켜줄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국무부의 중국 전문가인 로버트 존슨(Robert Jonson)은 1963년 4월에 작성한 메모에서 아시아 전략을 핵무기에 의존하는 것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미국이 아시아인보다 백인의 생명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 존슨은 특히 핵에 의존하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 중국의 핵무장에 인종주의적 정당성을 부여해줄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유색 인종'의 눈에는 중국의 핵무장이 백인의 핵 독점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고, 중국 역시 이를 적극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 역시 흡사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63년 10월 작성된 외교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국은 핵보유국 지위를 확보한 첫 번째 후진국이 될 것이다. 중국 위상의 이점은 핵무기가 히로시마를 기억하는 아시아인들과 또 그들의 이상과는 배치된다는 점에서 약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중국이 유럽과 북미의 선진국들의 핵 독점을 무너뜨렸다는 경외감에 의해 상쇄되고도 남을 것이다. 아시아에서 중국의 지도력 주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미국의 또 하나의 고민거리는 한반도 문제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재래식 군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주한미군을 대폭 감축한 반면에, 한국과 일본에 핵무기를 대거 배치했다. 북한과 중국이 또 다시 남침을 강행하면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에도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대량보복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이 핵을 갖게 되면, 이러한 전략은 큰 차질을 빚게 될 터였다. 미국이 북한이나 중국에 핵을 사용하면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이 중국의 핵보복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케네디 행정부는 재래식 군사 태세 강화를 통해 한국과 일본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1963년 8월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중공의 핵 실험 이후 태평양에 적절한 재래식 능력을 갖추는 것이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훨씬 중요해질 것"이라며, "이를 통해 자유 아시아 국가들로 하여금 우리가 반드시 핵 전쟁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중공의 공격으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적인 해결이 난망해지나, 미 공군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중국의 핵무장 이전에 선제공격을 통해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예방전쟁'론을 펼쳤다. 또한 당시 미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핵무장은 핵확산의 우려를 부채질해 NPT 추진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의견도 강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중국의 핵무장은 공격용이라기보다는 억제 효과를 높이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며 예방전쟁론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부상한 것이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 걸쳐 미국의 중국 핵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 수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존슨은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이 효과적인 아시아 전략을 공산 진영의 도발에 대처할 암묵적인 핵 위협과 명시적이고 가시적인 재래식 군비 태세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중공이 핵 능력을 보유하면 아시아 대륙이 또 다시 핵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아시아인의 공포도 커질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미국이 명시적으로 핵무기에 의존하려고 하면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것을 더욱 꺼려할 것이다." 이러한 권고를 수용한 존슨 행정부는 "중공군의 중대한 도발에 대한 대응"을 제외하곤 선제공격론을 배제키로 했다.
'종이호랑이'에 올라탄 중국
한국전쟁에 이어 두 차례의 대만 해협 위기와 중소 분쟁을 거치면서 중국 지도부는 핵보유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당시 미국의 공세적인 핵 전략은 중국으로 하여금 대미 보복 능력을 확보해 미국의 핵 위협을 억제해야 할 필요성을 증대시켜 주었다. 중국이 독자적인 핵무장을 선택한 데에는 대만 문제를 둘러싼 소련과의 이견도 한몫했다. 중국은 어떤 대가를 치르던지 대만 통일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상정한 반면에, 소련은 중국의 대만 공격이 미국의 개입을 야기해 미국과의 충돌로 비화될 것을 우려했다. 1954-55년 1차 대만 위기를 겪으면서 이러한 차이를 확인한 마오쩌둥은 결국 핵무장을 통해 대소 의존을 줄이기로 결심했다.
마오쩌둥은 1956년 핵무기 개발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하면서 "우리가 오늘날의 세계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핵무기를 가져야만 한다"고 말했다. 소련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베이징에 원자력 연구소와 란저우에 우라늄 농축 공장을 짓는 것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핵폭탄 샘플과 핵무기 제조 정보를 중국에 전달했고, 과학자들의 상호 방문을 통해 중국의 핵 과학자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2차 대만 해협 위기 때 중국의 일방적인 언행, 즉 '미국과 핵전쟁도 불사한다'는 마오쩌둥의 입장에 분개한 흐루쇼프는 1959년 6월 들어 중국의 핵 개발 지원을 중단했다. 이에 따라 중국에 원자폭탄 모델을 제공하기로 한 약속을 취소했고, 이듬해에는 모든 핵 개발 지원을 중단했다. 또한 이즈음 발생한 중소 분쟁 역시 소련의 중국 핵무기 개발 지원 중단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자 중국은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들어갔다. 그리고 1964년 10월 16일 우라늄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다음날, 핵무기와 장거리 로켓 개발을 담당한 전문 위원회를 주도했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세계 각국에 통지문을 보내 핵실험 사실을 알렸다. "중국 정부는 핵무기 사용 전면 금지와 폐기를 일관되게 주장해왔지만 어쩔 수 없이 핵실험을 거쳐 핵무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목적은 핵 강대국들의 독점 체제를 무너뜨리고 핵무기를 폐기하기 위한 것"라고 주장하면서, "핵보유국과 핵보유 잠재력이 있는 나라들의 정상이 모여 비핵국가와 핵보유국 상호간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중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이어 불과 32개월 뒤에는 수소 폭탄 실험에도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원자폭탄 실험 이후 32개월 만에 수소 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 자체가 상당한 기술력을 과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은 86개월이, 소련은 75개월이,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66개월과 105개월이 걸렸다. 핵실험에 성공한 중국은 1966년 10월에 중거리 탄도 미사일인 '둥펑-2호'에 핵탄두를 장착한 상태에서 시험 발사에 성공해 핵미사일 보유 능력도 과시했다. 이로써 중국은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그리고 탄도미사일로 전용될 수 있는 위성 발사 능력을 확보함으로써, 유명한 '양탄일성((兩彈一星)'을 손에 쥐게 됐다.
중국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존슨 대통령은 경제 발전에 사용되어야 할 소중한 자원을 낭비해 "중국 인민들에게는 비극"이라고 비난하면서, 미국의 아시아 안보 공약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정·재계에 긴밀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던 로스웰 길패트릭(Roswell Gilpatric) 전 국방부 부장관에게 중국 핵무장의 파장과 대응책에 관한 조사 보고서 작성을 요청했다. 당시 존슨 행정부 내에서는 중국의 핵무장이 비확산 체제에 미칠 영향과 대응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러스크 는 "중공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해야 할 나라는 항상 미국이어야 하느냐"며, 일본과 인도의 핵무장을 허용해 중국에 맞서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맥나마라는 "일본과 인도가 적절한 핵 억제 능력을 갖게 될지 회의적"이라며, 미국은 중국의 핵무장에도 불구하고 비확산 체제 강화에 나서야 한다고 반박했다. 1965년 1월 21일 존슨 대통령에게 제출된 '길패트릭 보고서'는 핵비확산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특히 이 보고서는 유럽, 중동, 아시아에서 추가적인 핵무장 국가가 나와서는 안 된다며 이를 위해 NPT를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중국의 핵 개발을 지원했다가 국경 분쟁을 거치면서 이를 중단한 소련은 중국의 핵보유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대만은 중국의 핵실험을 강력 비난하면서 핵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미국에게 거듭 요청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중국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인도는 중국을 비난하면서도 비핵화 원칙을 고수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비밀리에 핵 개발에 착수했다. 유일한 피폭국이자 중국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일본 언론의 반응은 엇갈렸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면서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핵 군축을 위한 중국과의 협상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중국의 우방국들인 북한과 북베트남은 "미 제국주의에 일침을 가했다"며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또한 많은 비동맹 국가들은 중국의 강대국화가 가시화된 만큼, 중국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맡아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 마오쩌둥과 리처드 닉슨의 악수
"2.5g의 탁구공이 세계를 흔들다"
한국전쟁 이후 미중관계는 더욱 거칠어졌지만, 미국 내 일각에서는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미 8군과 유엔군 사령관을 맡아 한반도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리지웨이(Matthew Ridgway)는 1954년 8월, 냉전 시대 미국의 최고 전략은 소련과 중국을 분열시키는 데에 두어야 한다며, 핵 공격을 통한 중국 군사력의 제거는 이러한 목표에 부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에서 힘의 공백이 발생하면 다른 나라가 들어갈텐데, 그 나라는 바로 소련"이라며, "최상의 접근은 중공으로 하여금 자국의 장기적인 이익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과 우호 관계를 맺는 데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권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1969년 출범한 닉슨 행정부는 리지웨이가 15년 전에 내놓은 전략을 주목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 부통령으로 있었던 것이다.
닉슨은 1967년 <포린어페어즈(Foreign Affairs)> 기고문을 통해 "지구상에 수억명의 잠재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분노어린 고립 속에 사는 나라도 없다"며, 중국과의 관계개선 의지를 피력했다. 취임사에서 "우리는 열린 세계를 지향할 것이다. 크던 작던 어떤 나라도 분노어린 고립에서 살 지 않는 세계를 추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닉슨이 이처럼 대중 관계 개선을 모색한 핵심적인 이유는 베트남 전쟁 종결 및 소련 견제를 위해서는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소 분쟁이 격화되면서 마오쩌둥도 대미 관계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1969년 3월 우수리 강 부근에서 중?소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온 이후, 중국 정부 내에서는 소련이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마오쩌둥을 비롯한 수뇌부가 소련의 핵공격을 두려워해 베이징으로부터 피신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마오쩌둥은 4명의 원로 장군들에게 대소, 대미 전략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들은 전략 검토를 거쳐 소련의 위협 대처 차원에서 "미국 카드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며, 마오쩌둥에게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권고했다. 1969년 9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제출된 '4인 그룹' 보고서는 중국의 대외 전략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국 지도부가 이처럼 관계 개선 의지는 갖고 있었고 동유럽에서 대사급 접촉도 가졌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1970년 5-6월에 미국이 캄보디아를 폭격하고, 이에 중국이 격렬히 반발하면서 미중간의 즉각적인 접촉은 이뤄지지 않았다. 두 나라의 국내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국민당은 1949년 중국 본토에서 패퇴해 대만으로 쫓겨났지만, 미국은 여전히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간주했다. 미국 내 대만의 로비단체인 '중국 로비'는 미국 의회를 상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중국 내에서도 대미 관계 개선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다. 특히 당시는 문화혁명 기간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미국의 맹폭에 고통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미국 제국주의자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즈음 등장한 것이 바로 '핑퐁외교'였다. 핵무기로 대표되는 '하드파워 시대'에 2.5g의 탁구공이 펼칠 '소프트파워'가 등장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내부 강경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을 설득해 1971년 3월말-4월초에 일본 나고야에서 열리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 중국 대표팀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는 대표 선수들에게 세계 선수권 대회 참가는 "정치 투쟁"이라며 "우정이 첫째이고, 경쟁은 그 다음"이라고 강조할 정도로 탁구 대회를 대미 관계 개선의 기회로 인식했다. 중국 대표팀의 참가를 관계 개선의 기회로 포착한 닉슨 행정부는 미국인의 중국 여행 제한을 해제하기로 했다는 입장을 전달하면서 양국의 탁구 교류를 제안했다. 그러나 중국 외교부는 미국 대표팀 초청이 시기상조라고 답했다.
그러나 대회 막바지에 이른 4월 4일 맞아 극적인 반전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글렌 코완(Glenn Cowan)은 실수로 중국 대표팀이 탑승한 버스에 올라탔고,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기 위해 중국의 탁구 영웅 주앙쩌둥이 코완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면서 중국의 명산인 황산이 그려진 수건을 선물했다.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은 '나비 효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코완이 중국 선수단과 동승한 사실을 안 기자단들은 버스에게 이들이 내리자, 스포트라이트를 터뜨렸다. 코완은 주앙쩌둥이 선물한 수건을 펼쳐 들면서 주앙쩌둥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이는 전 세계에 타전됐다. 다음날 코완은 주앙쩌둥에게 답례로 평화를 상징하는 3가지 색깔로 장식된 티셔츠를 선물했다. 티셔츠에는 'Let it B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각국에서 몰려든 기자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그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대회 폐막 하루 전이었던 4월 6일 밤, 마오쩌둥은 코완과 주앙쩌둥의 선물 교환을 다룬 언론 보도를 접하고는 "주앙쩌둥은 훌륭한 탁구 선수일 뿐만 아니라, 아주 유능한 외교관"이라고 칭찬하면서, 미국 대표팀을 중국에 초청하라고 지시했다. 닉슨도 즉각 이에 동의하면서 역사적인 핑퐁 외교의 막이 올랐다. 중국을 방문한 미국 대표팀 환영 만찬에서 저우언라이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과 미국인은 오랫동안 빈번한 교류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관계가 단절된 기간이 있었지요. 여러분의 방문은 두 나라 인민들의 우호의 문을 열었습니다." 몇 시간 후, 닉슨 행정부는 중국에 대한 경제봉쇄를 완화한다는 방침을 밝혀 이에 화답했다.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일간지들은 연일 미국 선수단의 소식을 전하면서 미국의 우호적인 여론 조성에 나섰다.
특히 일부 언론은 중국의 미국 탁구 선수단 초청에 닉슨 행정부는 중국의 유엔 가입 승인으로 화답해야 한다며, 탁구로 조성된 우호관계 분위기를 정치외교로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귀국한 미국 선수단도 중국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한 중국인들의 환대와 우호적인 분위기, 마오쩌둥의 지도력으로 일심단결하는 중국인의 열의, 양성평등, 무계급 사회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솔직한 방중 소감은 비정치적인 데다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미국 내에서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반증하듯, 1971년 5월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중국의 유엔 가입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사상 최초로 찬성(45%)이 반대(38%)를 넘어섰다.
'나비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핑퐁외교가 절정에 달했던 4월 14일에 닉슨 행정부는 한국전쟁 직후 부과한 대중 무역 제재를 해제했다. 백악관은 이러한 방침이 핑퐁외교에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이틀 후 닉슨은 재임 중에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4월 20일에는 중국 탁구 선수단 답방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4월 하순 들어 중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미국에게 대통령 특사 파견을 제의했고, 닉슨 행정부도 파키스탄을 통해 정상회담에 앞서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비밀 회담을 제안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키신저는 7월 9-11일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와 협상을 가졌다. 두 사람의 회동은 양국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전반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과 캐나다는 이미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중 데탕트를 환영했다. 아시아의 미국 동맹국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이미 패색이 짙어진 남베트남은 미중 데탕트를 미국의 철수 신호로 받아들였다. 미국의 비밀외교에 놀란 일본은 미국에 앞서 중국과 대사급 외교 관계 수립으로 대응했다. 한국은 미국의 안보공약 후퇴를 우려하면서도 미국의 압력을 받고는 남북 특사교환을 통해 7.4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미국-중국 관계 밀착에 두려움을 느낀 소련도 대미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다.
미중관계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71년 10월에는 미국의 승인 속에 중국이 대만을 밀어내고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리고 닉슨은 이듬해 2월 하순에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27일에는 상하이 코뮤니케를 발표했다. 코뮤니케에서 양국은 완전한 관계정상화를 다짐하는 한편, 첨예한 외교문제와 관련해 양국의 입장을 병렬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했다. 특히 최대 이슈인 대만 문제와 관련해, 중국은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라고 주장했고, 미국은 "중국의 입장에 도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또한 대만 주둔 미군을 점진적으로 감축해 완전 철수를 추진키로 했다. 1973년 3월에는 베이징과 워싱턴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개설해 관계정상화에 필요한 실무 협의에 착수했다. 1975년에는 제랄드 포드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 상하이 코뮤니케를 재확인했고, 지미 카터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중국과의 관계정상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78년 12월 15일 양국 정부는 1979년 1월 1일부로 국교를 수립하기로 발표했다. 국교가 수립되면서 미국은 중화민국(대만) 대신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중국의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미국이 대만과 상업적, 문화적 교류협력하는 것을 계속 인정하기로 했다. 미국은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는 대신에,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은 지속하기로 했고, 대만관계법을 제정해 대만에 대한 안보 공약도 유지하기로 했다.
중국은 1972년 2월 미중정상회담을 계기로 서방세계와의 관계 개선에도 본격 나섰다. 그 해 9월에 저우언라이는 베이징에서 일본의 다나카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후 4년 동안 무려 107개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이처럼 핑퐁외교는 20년 넘게 닫혀 있던 미중관계의 문을 여는데 크게 기여했다. 핑퐁외교를 주도했던 저우언라이는 "네트 위를 넘나든 공 하나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중국의 한 매체는 "지구라는 커다란 공이 작은 공 하나에 따라 움직였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핑퐁외교를 중심으로 미중간의 데탕트를 비교적 상세히 언급한 이유가 있다. 전지구적, 특히 아시아 냉전의 결정적 사건이었던 한국전쟁과 그 이후 대만 해협 위기 및 인도차이나 반도 전쟁 때 미국은 수십만명을 몰살시킬 수 있는 거대한 '핵폭탄'으로도 중국을 변화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이 가장 강력한 '하드파워'인 핵무기 대신에 무게 2.5g의 탁구공을 앞세운 '소프트파워'를 발휘하자 중국은 놀랄 만큼 변하기 시작했다. 중국 역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이중 위협'에 맞서 '양탄일성'을 손에 쥐었지만, 중국의 안보딜레마 해소 및 개혁·개방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세계 최강의 탁구 실력을 앞세운 '소프트파워'였다. '나비 효과'를 입증하듯, "2.5g의 탁구공이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미중 핑퐁외교 20년 후, 이번에는 남북 핑퐁외교의 막이 올랐다. 세계적 수준의 탈냉전 분위기를 기회로 포착한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를 통해 한국전쟁을 승인한 소련 및 통일의 꿈을 앗아간 중국과 관계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국제적 고립에 직면한 북한의 김일성 정권도 대외관계 개선을 타진하고 나섰다. 이즈음 열린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은 단일팀을 출전시키기로 합의했고 여자 단체팀은 최강 중국을 꺾고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남북화해협력 의지와 "한민족의 저력"을 과시한 감동적이고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는 평가가 언론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남북관계 차원에서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되는 등 본격적인 화해협력으로 진입하는 듯 했다. 그러나 봄 소식을 전할 것으로 보였던 나비의 날개 짓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국내 강경파는 대북 핵 공격 연습이 포함된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발표함으로써 남북화해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맞서 북한은 이듬해 3월 NPT 탈퇴를 선언하며 '핵 카드'를 전면에 꺼내들었다. 미국 역시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소극적이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도 대북관계 개선 노력을 접고 말았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3367
[세상만사-하윤해] 닉슨 사임 그 이후
포드 대통령은 닉슨과 다른 노선 택해… 청와대와 친박계는 그런 모습 안 보여
입력 : 2016-12-15 18:40
[세상만사-하윤해] 닉슨 사임 그 이후 기사의 사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8월 9일 사임했다. 상원의 탄핵안 의결이 확실시되자 먼저 사직서를 내던졌다. 미국 최초의 탄핵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정·부통령제라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같은 날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포드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아니라 정식 대통령이 됐다. 당시 미국 상황은 현재 한국과 흡사하다. 대통령이 직접 관여된 게이트로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경제도 엉망이었다. 당시 미국은 중동 국가의 자원 민족주의에서 촉발된 오일 쇼크로 휘청됐다. 국민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다. 종전 단계에 접어들었던 베트남 전쟁 영향이 컸다. 중앙정보국(CIA)과 국방부는 공작과 정보 조작, 무능함의 대명사가 됐다.
포드 대통령은 전임자 닉슨과 다른 길을 걸었다. 백악관에 미 의회 흑인의원 모임을 초청했다. 여성 인권확대 지지자들을 만났다. 노조 대표들과 머리를 맞댔다. “백악관이 닉슨 적들의 놀이터가 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포드 지지율은 71%까지 올랐다.
하지만 포드는 “이런 인기가 영원히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알 만큼 정치를 오래했다”고 토로했다. 그 시간이 너무 빨리 왔다. 계기는 8월 28일 포드의 취임 첫 기자회견이었다. 포드는 경제를 포함한 많은 현안을 준비하고 나왔다. 하지만 기자들은 닉슨의 사법처리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포드는 회고록에서 “바로 그 기자회견부터 닉슨 사면을 진지하게 고려했다”고 썼다.
포드는 취임 한 달을 맞는 9월 8일 닉슨 사면을 발표했다. 그의 지지율은 순식간에 폭락했다. 언론은 포드에게 비난을 쏟아냈다. 포드와 닉슨의 ‘사면 밀약설’이 제기됐다. 사면을 전제로 닉슨이 사임하고 포드가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는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포드는 닉슨 사면을 추진할 정치적 힘이 없었다. 닉슨 사면으로 자신까지 위기에 빠졌다. 국정은 다시 뒤죽박죽이 됐다. “포드를 감옥으로 보내자” “포드를 탄핵하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포드의 결정이 옳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닉 래곤은 저서 ‘대통령의 결단’에서 “포드가 닉슨 사면으로 워터게이트를 종식시켰다”고 썼다.
포드는 1976년 11월 대선에서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워터게이트와 베트남 전쟁에 염증을 느낀 미국 국민들은 카터를 택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카터는 해군 장교로 근무한 뒤 가업인 땅콩농장을 경영했다. 정치적 경력은 조지아주 상원의원과 조지아주 지사를 지낸 게 전부였다. 중앙정치의 때가 묻지 않은 게 가장 큰 무기였다. 미국 언론들은 카터의 승리 요인이 ‘워싱턴 냄새’가 가장 나지 않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국민일보가 창간 28주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7.8%가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 사법처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주사를 좋아하는 ‘청담동 아줌마’에게 권력을 갖다 바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포드는 워터게이트에 속죄하며 ‘반(反)닉슨’ 노선을 택했다. 그래서 닉슨 사면이라도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와대와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 진영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면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국민들은 새누리당 비주류들도 한통속으로 보고 있다. 야당은 “마치 대선에서 승리한 것처럼 행동한다”는 비판을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바람’을 등에 업었던 카터가 포드에게 이길 때 득표율 격차는 2.06% 포인트밖에 나지 않았다.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60542&code=11171399&cp=nv
‘닉슨 대통령’ 모든 거짓말 은폐 ‘탄핵 위기서 물러나’
<초점> 최근 ‘브라질 최초 여성대통령 ‘호세프’도 결국 탄핵
소정현기자
박근혜 대통령 하야할까 탄핵수치 감당할까
1974년 8월 8일 닉슨하야 ‘미국 이익 우선’
민의폭발 ‘언론 맹활약 의회 결정적’ 수훈감
브라질 여성대통령 국민에 저항에 무릅끓어
▲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2016년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야한 사건의 계기가 된 스캔들이다.
●워터게이트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헌정 사상 전대미문의 국정농락 완결판인 최순실 게이트가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공범으로 적나라하게 지목된다. 박 대통령의 설명과는 딴판으로 최씨가 소유한 PC에서 ‘정부 조직과 관료 임명안' '기업들 협박'과 같은 국정 운영이나 경제 정책, 인사 등의 공무와 관련된 자료들이 나와 '최순실 국정 개입 의혹'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국정농락은 전방위에 뻗쳐 있다.
이제 최순실 게이트의 비등점은 스스로 물러나는 하야와 법질서에 순복하는 탄핵에 온 관심이 쏠려있다. 네이버·다음 등 포털 사이트에는 ‘탄핵’과 ‘하야’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내리고 있다. 탄핵은 대통령·국무총리 등 고위공무원의 위법 행위에 대해 법적 절차를 통해 파면되는 것이고, 하야는 스스로 사임 의사를 밝히고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박근해 대통령에 대한 탄핵 또는 하야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전 세계 대통령의 사례에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2016년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야한 사건의 계기가 된 스캔들이다. ‘미합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1913~1994)에 대한 탄핵소추로 지금부터 40년이 넘는 1974년 8월 9일 아침 11시에 전격 하야했다.주인공은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M. 닉슨이다.
그는 연방 하원 법사위원회서 탄핵결의안이 가결된(3월 1일) 직후에 포드 부통령에게 자신의 특사를 보장받고 사임 형식을 택했다. 미 국민 전체의 비통한 국치로 충격을 받은 날이다.'게이트'라는 용어도 이 워터게이트 사건이 시작된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따온 것으로 현재 정치권의 대형 비리나 스캔들을 말할 때 사용되고 있다.
▲ 1974년 8월 8일 닉슨은 하야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박근혜 스캔들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보다 심각한 사건”이라는 평을 내놨다. 이는 현직 대통령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수사를 외면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다 결국 하야한 사건이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워터게이트호텔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도청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72년 6월 17일이다. 많은 사람은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연루돼 곧바로 하야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실제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1974년 8월 9일이다. 약 2년2개월 동안 그는 자리를 고수했다.
▲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박근혜 스캔들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보다 심각한 사건”이라는 평을 내놨다. 이는 현직 대통령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려다 결국 하야한 사건이다.
● 의회와 언론의 책무가 결정적 수훈감
닉슨은 1960년 대선에서 총 득표수 0.17%6 차이로 케네디에게 석패했고, 처음 당선된 1968년 대선에서도 겨우 0.7% 앞섰을 뿐이었다. 그러하기에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조지 맥거번(1922~2012)이 민주당 후보로 나서자, 닉슨은 재선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72년 11월 7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538명 선거인단 표 중 520표를 얻으며 압도적으로 재선됐다.
미국에서 대통령 탄핵 논의가 실제로 진행된 경우는 앤드루 존슨(1868)과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1974)과 지퍼게이트로 위기에 몰렸던 빌 클린턴(1998) 등 3명이었다. 자세히 알아본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닉슨 대통령 재선을 위해 가동된 조직이 1972년 6월 워싱턴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게 발각되면서 시작됐다.
백악관 참모들은 1972년 6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비열한 음모를 꾸몄다. 전직 연방수사국(FBI),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총지휘를 맡고 정보 요원들이 배관공으로 위장해 도청 장치를 설치했지만, 이 장비가 호텔 경비원에게 발각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3년 5월 상원이 워터게이트 위원회를 만들어 청문회를 하고, 그 내용이 TV로 생중계되면서부터다. 그해 7월 13일 청문회에 출석한 알렉산더 버터필드 닉슨 부보좌관이 “1971년부터 닉슨은 집무실에서 이뤄진 모든 대화를 녹음했다”고 폭로하면서 사건의 폭발력이 커졌다.
그리고 새로 제출된 테이프에서 닉슨이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들통났다! 닉슨은 계속해서 워터게이트 사건 및 사건은폐 공작과의 관련성을 부인했지만, 테이프에는 CIA국장에게 직접 FBI의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녹음돼 있었던 것이다. 그외에도 주변 측근들과 사건에 관해 논의하는 내용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파헤쳐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에 닉슨은 사건 수사 담당 검사(아치볼드 콕스)를 해임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법무장관(엘리엇 리처드슨)이 이에 반발해 사임하면서 급기야 ‘닉슨 탄핵’ 여론까지 번졌다.
닉슨은 진실을 밝히려는 검찰 및 의회에 맞서면서 여론이 악화, 의회 탄핵에 직면하면서 결국 불명예 퇴진하기에 이르렀다. 주목할 점은 닉슨이 검찰 수사에 직면해서도 ‘대통령 면책 특권’을 내세우며 검찰 및 의회와 힘겨루기를 거듭한 점이다.
그래도 닉슨은 버티려 했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탄핵되려면 하원 전체 과반수 찬성 뒤 상원에서 재적의원 3분의 2의 유죄 판정을 받아야 한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이었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공화당 의원들이 닉슨의 탄핵 심판에서 유죄표를 던지겠다고 경고했다.
상원 법사위는 1974년 닉슨 탄핵안을 상정하기로 했고, 탄핵안 상원 통과가 명료해지자 닉슨은 사건 발생 2년여 만인 8월 9일 대통령직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 주목할 점은 닉슨이 검찰 수사에 직면해서도 ‘대통령 면책 특권’을 내세우며 검찰 및 의회와 힘겨루기를 거듭한 점이다.
1974년 8월 8일 닉슨은 하야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은 모든 시간을 직무에 쏟을 수 있는 대통령과 모든 시간을 직무에 쏟을 수 있는 의회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여러 문제에 직면한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개인적인 변론을 위해 몇 달씩 싸움을 계속하게 되면 대통령과 의회 모두의 시간과 관심이 거의 모두 빼앗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일 낮 12시를 기해 대통령직을 사임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던 스피로 애그뉴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뇌물수수 문제로 이미 사임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연방법상 대통령 계승 순위 3위는 하원의장이나 공화당은 소수파여서 하원의장은 민주당이었다. 그래서 공화당 하원 대표였던 포드가 부통령으로 지명 받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전에 민주, 공화 양당간에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닉슨이 먼저 공화당 하원 대표였던 제럴드 포드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의회의 인준을 받은 뒤에 사임하였고, 포드가 자리를 승계해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닉슨은 탄핵된다면 형사소추까지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닉슨은 사임 요구를 받아들였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 부통령은 그해 9월 여론 반대를 무릅쓰고 닉슨을 사면했다. 닉슨은 사면으로 처벌은 면했지만, 평생을 국민의 따가운 눈총 속에 살아야만 했다.
다만 닉슨은 스스로 하야하면서 ‘탄핵 대통령’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탄핵 당했다면 감옥행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퇴임 후 닉슨은 저술 및 외교사절단 역할에 전념해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닉슨을 옹호했던 공화당도 역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닉슨 사임 이후 부통령 대행 체제를 거쳐 진행된 1976년 선거에서 무명의 땅콩 농장주인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대가를 치렀다.
대통령 사임까지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은 대선 승리를 위해 도청이라는 비도덕적인 수단을 쓴 점도 문제였지만, 사건의 중심에 있던 닉슨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검찰과 맞서면서 불명예 퇴진까지 자초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기는 했지만, 전문가들은 의회와 사법부가 직책을 제대로 완수해 '민주주의'가 수호된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파헤쳐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 닉슨은 스스로 하야하면서 ‘탄핵 대통령’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탄핵 당했다면 감옥행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 미국은 3명의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받아
미국은 지금까지 3명의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받았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 소추를 받았던 인물은 앤드류 존슨 전 대통령이다.미국의 17대 대통령인 그는 1868년 ‘공무원 임기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상원에서 부결돼 탄핵을 모면했다.
24년 뒤인 1998년 민주당 소속의 제42대 빌 클린턴 대통령도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몰렸다. 클린턴은 스캔들 초기 다른 재판에서 “르윈스키와 성적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는 르윈스키가 백악관 동료에게 ‘클린턴과 성적 관계가 있었다’고 말한 녹음테이프를 입수해 클린턴의 거짓말을 밝혀냈다. 당시 의회도 닉슨 때처럼 여소야대였지만 야당이 상원 3분의 2까지 차지하진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하원에선 공화당 주도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지만 상원에선 민주당 의원들이 클린턴에 무죄표를 던져 탄핵안은 가결되지 않았다. 당시 미국민 사이에서도 클린턴에 대한 비판 여론은 있었지만, 닉슨 때와는 달리 ‘탄핵 사유’라는 의견은 적었다.
▲ 호세프(68)는 지지자들을 모아 탄핵 반대 시위까지 벌이며 국민에 저항하다 결국 의회에 의해 지난 8월 탄핵됐다
●‘브라질 최초 여성 대통령 ‘호세프’도 탄핵
호세프(68)는 지지자들을 모아 탄핵 반대 시위까지 벌이며 국민에 저항하다 결국 의회에 의해 지난 8월 탄핵됐다.
2002년 룰라가 당선되면서 호세프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2003년에 자원부 장관으로 재직하였고 2005년에 정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재직 시절에는 업무를 훌륭하게 해내서 브라질의 경제를 부흥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기에 추진력있고 유능한 관료로 인정받았다.
결국, 룰라 정권의 핵심 인사로서 정계와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고, 2010년 대선에 출마해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올랐다.
2011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호세프는 선심성 복지 정책을 통해 2014년 10월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월드컵 개최 비용 문제로 삐거덕거렸고 원자재 가격도 점차 하락세를 보이면서 각종 시위에 시달렸다.
2014년 12월 검찰이 석유기업 페트로브라스에서 수년간 3조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호세프의 측근을 포함한 집권 노동자당 정치인 등 36명을 기소한 것이 신호탄이었다. 최악의 경제난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호세프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럼에도 탄핵 명분은 다른 곳에 있었다. 브라질 의회가 내세우는 탄핵 사유는 호세프 대통령이 2014년 연임을 위한 대선을 앞두고 연방정부의 막대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영은행의 자금을 끌어 쓰고 갚지 않는 등 재정회계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호세프가 혐의를 부인하며 꿈쩍도 하지 않자 야당은 탄핵안을 제출했다. 연방회계법원은 호세프 정부가 재정회계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2014년 국영은행에서 불법 대출한 돈을 제때 상환하지 않은 혐의였다. 호세프 본인의 잘못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측근 비리에 성난 민심을 돌릴 길이 없었다. 지난 5월 직무가 정지되면서 2016 리우 하계 올림픽 개회 선언도 하지 못했다.
이 판결로 탄핵에 속도가 붙었지만 호세프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호세프가 저항할수록 탄핵을 요구하는 국민 시위는 더욱 확산됐고, 결국 지난 8월 탄핵이 최종 확정됐다. 호세프는 상원의원들과 격론을 펼치며 탄핵의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브라질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최악의 경제난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탄핵을 막지 못했다.
결국 2016년 4월 11일 의회에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의견서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2016년 8월 31일, 브라질 상원에서 탄핵소추안이 최종적으로 의결된 것이다. 브라질 상원은 전체회의에서 호세프 대통령 탄핵안을 최종 표결에 부쳐 총 81명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찬성 61표(반대 20표)로 가결했다. 탄핵 찬성파가 압도적이어서 탄핵은 사실상 기정사실화돼 있었다.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었는데도 무리하게 몇 개월을 끌었다.
호세프는 지난 1992년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당한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 전 대통령에 이어 24년 만에 탄핵으로 실각한 권좌에서 쫓겨난 두 번째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떠안게 됐다. 그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온 미셰우 테메르(75) 부통령이 이날 대통령에 정식 취임했다. 테메르 신임 대통령은 호세프 남은 임기인 2018년 12월 말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 호세프는 지난 1992년 브라질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당한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 전 대통령에 이어 24년 만에 탄핵으로 실각한 권좌에서 쫓겨난 두 번째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 떠안게 됐다. 테메르 신임 대통령은 호세프 남은 임기인 2018년 12월 말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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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닉슨의 길을 가는 박근혜
[중앙일보] 입력 2016.12.01 18:59 수정 2016.12.02 01:14 | 종합 31면 지면보기
닉슨은 얼른 하야하고 사면받아
박 대통령은 탄핵전선 교란 잔꾀
국민으로부터 탄핵받았지만
산소호흡기 달고 버티는 형국
혼몽한 주술 벗어나 홀로서야
최순실이 고마운 엄청난 역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최순실 게이트는 워터게이트와 많이 닮았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임기 중에 사임으로 몬 20세기 최대의 정치스캔들인 그 워터게이트다. 닉슨은 1974년 8월 9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국민 사임연설을 이렇게 마쳤다: “…국내외에 문제가 산적한 지금 미국은 풀타임 대통령과 풀타임 의회를 필요로 합니다. 제가 개인적인 혐의를 벗자고 앞으로 몇 달을 투쟁한다면 대통령과 의회의 시간만 낭비할 것입니다…내가 사임함으로써 미국에 절실히 필요한 힐링(healing)의 과정이 빨리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국정에 전념하는 풀타임 대통령과 풀타임 국회는 오늘의 한국이 더 절실하다. “혐의를 벗자고 몇 달을 더 투쟁하면…”이라는 말은 자기에게 잘못이 없다는 암시다. 박근혜 대통령도 잘못은 주위 사람들이 저지른 것이라고, 검찰이 공소장에 명시한 혐의까지 부인한다.
닉슨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버티기와 판박이다. 닉슨은 국민과 기자들에게 자신은 국가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했을 뿐 워터게이트는 알지도 못했다고 거듭거듭 거짓말을 해댔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은폐에 은폐가 겹쳤다. 백악관 대변인 론 지글러는 워터게이트를 “삼류 절도사건”이라고 일축했다. 2014년 정윤회 문건 사건 때 청와대가 “찌라시”라고 한 말의 원조다.
.20세기 미국 최대의 정치스캔들과 21세기 한국 최대의 정치스캔들이 가장 많이 닮은 부분은 닉슨과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두 손을 들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다. 최순실 게이트에서는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PC를 입수하여 그 내용을 보도한 다음 날 박 대통령이 1차 대국민 사과를 했다. 닉슨의 경우도 그가 백악관에서 최측근 보좌관들과 사건 은폐를 모의하고, 돈으로 도청꾼들이 재판에서 위증을 하게 하라, 중앙정보국(CIA)으로 하여금 연방수사국(FBI)의 워터게이트 수사를 저지하게 하라, 고 지시한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어 그때까지 닉슨이 한 말이 모두 거짓말로 밝혀졌다. 박 대통령의 경우도 특검과 국조에서 더 많은 증거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닉슨의 대변인 론 지글러는 기자들 앞에서 “이제 안 되겠다”(These are inoperative!)라고 선언했다. 거짓말과 은폐가 더는 안 통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닉슨은 일단 비서실장 H R 홀드먼과 우리의 민정수석에 해당되는 최고위 보좌관 존 얼리크먼을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해임했다. 박 대통령도 마침내 문고리 3인방과 민정수석 우병우를 잘랐다.
1974년 7월 하원 법사위원회가 닉슨 탄핵 결의를 27 대 11로 가결하여 하원 본회의로 넘겼다. 권력남용과 의회모독과 사법적 정의실현 방해가 탄핵 사유였다. 닉슨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라는 증거물(Smoking gun)이 공개되자 상·하원 의원들 중에서 탄핵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찬성으로 돌아섰다. 상원의 닉슨 친구들이 닉슨에게 탄핵당하기 전에 사임하라고 종용했다. 이틀 뒤인 8월 7일 닉슨은 사임을 발표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백악관을 떠났다.
그러나 “탄핵 확실”에 대한 두 대통령의 대응은 정반대다. 닉슨은 얼른 하야하고 후임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국회로 뜨거운 감자를 던져 탄핵전선을 교란시키는 잔꾀를 부린다. 국민으로부터 이미 상징적인 탄핵을 받았지만 산소호흡기를 달고라도 버티는 데까지는 버텨보자며 광장의 소리를 비웃는다.
닉슨은 사임연설에서 박 대통령이 할 말을 먼저 했다. "제 공직생활 중에 저는 언제나 미국에 가장 좋은 결정만 내렸습니다.” 박 대통령도 11월 29일 대국민 담화에서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들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던 일이었고…”라고 말했다. 여·야당은 청와대에서 날아 온 개헌과 탄핵의 두 개의 공을 들고 힘든 곡예를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닉슨은 미국 사회에 실해(實害)를 끼치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 그는 대기업, 정부와 민간 분야 주요 인사, 대학가, 의료계, 스포츠계를 카오스로 만든 공범이다. 박 대통령은 최태민·순실의 40년에 걸친 혼몽한 주술의 미망(迷妄)에서 깨어나 “본래의 나”를 되찾아 정신적으로 홀로 서야 한다.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1770~1831)은 역저 『법철학』에서 전쟁을 바람에 비유하여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다의 오물이 청소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쟁은 큰 재앙이고 최순실은 미니 재앙이다. 그녀가 폭풍우를 몰고 오지 않았으면 박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한국은 악취가 진동하는 “박·순실” 천지가 될 것이다. 최순실이 “고마운” 이 엄청난 역설을 “박·순실 이후”의 한국을 설계하는 데 교훈 삼아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
[출처: 중앙일보] [김영희 칼럼] 닉슨의 길을 가는 박근혜
http://news.joins.com/article/20953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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