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리 여행6 - 숭본당을 나와서 운하를 걸어서 운하변 가게에서 홍주를 구경하다!
2023년 10월 27일 쑤저우 (苏州)에서 수향 마을인 퉁리(同里 동리) 로 가기위해 쑤저우역 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퉁리역에 내려 전철을 타고 퉁리 마을에 도착해 입장권을 끊어
마을로 들어가 호텔에 체크인 하고는 퇴사원 (退思园) 과 진주탑경원 (珍珠搭景圓) 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진주탑경원을 나오니 그 앞은 바로 운하이고 저만치 예쁜 홍예교 가 보이며
송나라시대 의복을 입은 여인을 지나쳐 숭본당 을 찾아가 구경을 하고는 나옵니다.
여기 퉁리 고대 마을 (Tongli Ancient Town) 은 호수로 둘러싸인 매력적인 수로마을로 강남 수향
마을 중에서도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오래된 유서깊은 건축물들이 많습니다.
과거는 복이 많이 들어 복의 땅, 福地(복지) 라고 불렸으나 당나라 초기에 퉁리(同里 동리)
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수로 주변에는 상점들이 즐비하고 떠들썩한 분위기지만
골목의 안쪽으로 가면 조용한 마을이 있어 수로 마을의 양면을 살펴 볼수도 있는 곳입니다.
수향마을 퉁리의 볼거리는 1월 2당 3교 라는 말이 있으니 1원은 퇴사원 (退思园) 이고 2당은
숭본당과 가맹당 이며 3교는 태평교, 길림교, 장경교 로 Y 자형 수로 각각에 있습니다.
태평교를 건너면 1년 4개월 건강 하고 길리교 를 건너면 사업이 번창하며 장경교
를 건너면...... 영원히 늙지 않고 청춘 을 유지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소교유수인가 (小橋流水人家) 라는 말이 있으니 작은 다리, 흐르는 물에 주민가옥 이라는 뜻으로
주변이 5개 호수로 둘러쌓인 마을은 15개의 작은 수로와 7개 섬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풍경의 49개 석교로 연결 된다는데.... 수로 주변 가옥의 3분지 1은 명청시대 건물이라고 합니다.
명나라 건물로는 경락원(耕樂园), 삼사당, 오학문루, 승은당등 10여곳 이고
청나라때 건축물은 퇴사원, 가음당, 숭본원등 20여곳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은 동아일보에 “경영 전면 나서는 화웨이 여제 멍완저우
‘조국이 없었다면 자유의 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기사를 올렸습니다.
2018년 12월 캐나다에서 미국의 이란 제재위반 혐의로 체포된뒤 1029일간 억류됐던 멍완저우
(孟晚舟) 중국 화웨이 순회회장 내정자가 2021년 9월말 선전공항에서 밝힌 귀국 소감
이다. 당시 그는 “오성홍기가 있는 곳에 신념의 등대 가 있다” 며 중국 공산당에 무한
충성을 맹세했다. 중국 또한 이런 그를 “무역 분쟁의 순교자” 라며 홍보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 이전에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갈등을 상징했던 화웨이 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멍완저우는 다음 달 1일부터 6개월간 ‘화웨이 2인자’ 순회회장직에 오른다. 화웨이는 3명의 부회장이
6개월씩 돌아가면서 순회회장을 맡는데 이번이 그의 차례다. 그의 부친 겸 창업자인 79세 런정페이
(任正非) 최고경영자(CEO)는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딸의 승계가 머지않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자 발찌를 차는 등 약간의 불편을 제외하면 억류 기간동안 멍완저우 가 많은 것을 얻었다는 분석
이 지배적이다. 1993년 화웨이에 입사한 그가 창업자의 딸임이 알려진 시기는
20년이 흐른 2013년, 회사 내에서도 한때 부친의 비서였던 쑨야펑(孫亞芳) 전 부회장이 더 잘나갔다.
억류 후 상황이 달라졌다. 각국 언론은 그가 집에서도 샤넬 가방을 들고 마놀로블라닉 구두를 신었다는
등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 보도하며 그를 세계적 유명인 으로 만들었다. 중국은 그를 최고위
관료급으로 대우하며 줄기차게 석방을 요구 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2021년 9월 초 통화에서도 그의 석방이 주요 의제 였다고 중국 외교부가 직접 밝혔을 정도다.
그가 귀국한뒤 관영 언론은 입을 모아 칭송했다. 미중 갈등에 따른 벼락을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혼자
받아낸 ‘피뢰침’ 같은 존재이며 서방에 굴복하지 않고 개선 장군 처럼 귀국했다는
낯간지러운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달 회장에 취임한 뒤에도 비슷한 보도가 뒤따를 가능성이 높다.
런정페이의 세 자녀 중 그가 유일하게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멍완저우는 첫 부인 멍쥔
(孟軍) 의 소생. 런정페이는 창업 전부터 멍쥔의 부친 멍둥보(孟東波) 전 쓰촨성 부성장의 덕을 많이 봤다.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을 위해 일했던 부친을 둔 탓에 런정페이 가족은 문화대혁명 시기 ‘반동’ 으로 몰려 모진
탄압을 받았다. 장인을 통해 신분 세탁 을 한 뒤 인민해방군에 입대할 수 있었고 창업으로도 이어졌다.
런정페이는 이혼과 관계 없이 멍둥보를 존경하며..... 그래서 딸에게 외조부의 성을 붙였다고 줄곧 언급했다.
군 재직 시절 런정페이 가 근무했던 부대는 현재 법률전, 여론전, 심리전, 즉 삼전(三戰) 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정보 부대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1987년 화웨이를
창업한 뒤에도 군, 국영기업 등에 집중적으로 납품하며 중국 최대 통신장비 기업으로 성장했다.
2022년 매출이 926억 달러(120조 원)가 넘지만 상하이, 선전, 홍콩 증시에 상장하지 않았다. 런정페이 또한
일종의 ‘바지 사장’ 이며 실질적인 지배자는 일부 당, 군 간부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비상장 기업으로
남아 있다는 설이 제기된다. 화웨이 라는 기업명 자체가 ‘중화유위 (中華有爲·중화민족을 위한다)’ 의
줄임말 이다. 미국 등 서방이 화웨이를 민간 기업의 외피를 두른 사실상 중국의 정보기관으로 보는 이유다.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대립 은 계속될 것이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 대만 등을 둘러싼
양국의갈등 또한언제 전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에 다다랐다. 원했건 아니건 한 개인을
넘어 신냉전의 상징이 된 멍완저우. 이 위험한 시기에 그가 어떤 경영 능력을 보여줄지 관심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거어서는 우리 부부는 숭본당 이라는 건물로 들어가는데
여긴 퇴사원이나 진주탑 처럼 연못을 가진 넓은 정원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저택인가 본데..... 이 동네에서도 촨신농(串心弄 관심롱) 이라는
골목은 천년을 내려오는 좁은 골목으로 마음을 꿰는 골목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 마을는 부자가 많아 富土(부토) 로 불렸는데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부자 마을은 세금을 2배로
가두기로 하고 관리가 오자 청년이 나서 미을 임구 비석을 가리키며 저 부(富) 자의 위에 점이 없는
것을 가리키며 동((同)자로 읽을수 있고 토는 밭 전자와 합쳐 리(里) 로 읽으니 동리(同里) 라고 우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좀 전에 우리가 운하에 걸친 홍예교 다리를 건넜는데... 태평교였으면 1년여를 건강하고, 장경교를
건넜으면 영원히 늙지 않고 청춘을 유지한다는데 시내 지도를 보니 아마도 장경교 였지 싶습니다.
그러고는 외곽을 한바퀴 돌아서 운하들을 구경하고는 다시 중심부로 돌아오는데....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 밖으로 나갔던 모양으로 검문소에서 문표 를 보이고 다시 들어와 걸어서 운하를 찾아갑니다.
운하변에 자리한 식당으로 들어가서 밖으로 내 놓은 탁자에 앉는데 가게에 음식들 사진이 있으니 살펴보다가
소면이나 완당 처럼 보이는 20위안짜리 국수 하나에 만터우 나 빵 처럼 보이는 15위안 짜리 음식을 시킵니다.
술은 바로 옆 집이 同里紅酒馆(동리홍주관) 이라는 가게가 보이는데..... 술병이 붉은 것을 보니 문득 진도
홍주 가 떠오르는데 하지만 이 식당에서는 팔지 않으니 부득이 12위안 하는 칭따오 맥주 를 시킵니다.
홍주(紅酒) 는 전라남도 진도군 특산품인 술이니 진도의 삼보삼락(三寶三樂) 의 하나라고 하며, 전통 약소주로
만들어지는데 지초로 색과 맛을 내기 때문에 리큐르 로 분류되며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 라고 합니다.
이름 그대로 새빨간 색깔 이 특징으로 척 보기에도 아름다운 붉은 빛이 일품이며.... 오래 보관
하여 시간이 지나면 자색 으로 변한다는데, 40도 의 꽤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며 향긋하면서 살짝 남는 달달한 뒷맛이 과연 명주라 부를만한 전통주 입니다.
홍주(紅酒)의 역사는 고려시대 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원래는 다른 지역에서도 널리 만들어졌으나 후대
에는 진도의 특산물 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진도에만 남게 된 이유는 분분하여 정설이 없다고 합니다.
성종이 윤비 폐출을 확정하던 날, 허종은 출근길에 낙마 했다는 핑계로 어전회의에 결근하였고, 덕분에
나중에 갑자사화를 면하게 되는데...... 야사에 따르면 허종의 배우자인 한씨 부인이 후환이 있을
것을 알고 아침상에 홍주를 권해 허종을 만취하게 하여 음주운전 으로 낙마의 핑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야사는 거짓일 확률이 높은게 허종은 연산군이 즉위하던 해인 1494년에 이미
죽은 상태였다니.... 물론 부관참시 정도야 피했다지만, 이후 허씨 가문의 허화자
여사가 그 비법을 지켜오다가...... 방송 등에 알려지며 진도의 명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간혹 진도사람들의 구전으로는 삼별초 가 전해준 것이라 하지만, 이는 완전한 허구
이니 삼별초가 항쟁하던 시기에는 고려에 증류기술이 전무 하였고, 원나라의
고려 침략 이후 원나라가 페르시아의 증류 기술 을 가져와 고려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뒷받침할 근거로는 페르시아의 증류주 를 '아락, 아라키, 아라크' 라고 부르는데.... 아직도 북한
에서는 증류식 소주를 아락주 라고 부르고 있으니 증류식 소주에 지초를 얹어 만들기 까지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일 것이며 고려 말기 ~ 조선 초기에 홍주 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재료는 쌀, 보리, 자초(紫草, 芝草) 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판매되는 홍주는 진도산 쌀 100% 에
자초를 사용해 만드는데, 원주(原酒) 를 자초(紫草) 에 통과 시켜 색과 맛을 가미 하는 것이
전통적인 제조법이고..... 오늘날에는 자초에서 천연 색소를 추출하여 원주에 첨가해서
만들기도 하며 홍주를 만들고 남은 지게미는 진도의 소에게 먹여 특산품 쇠고기를 생산합니다.
진도에서 여러 제조 업체가 각각 홍주를 만들어왔으며 2000년대 들어 진도군이 홍주를 신활력사업으로
후원하면서 통일된 품질 기준과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제품이 두 가지 나왔는데..... 도수
40% 제품인 '루비콘' 과 35% 제품인 '아라리' 가 그것이니 이 제품에만 진도 군수의 품질인증이 붙습니다.
대형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지역특산품 답게 우체국에서도 판매 하는데 원래 주류는 인터넷
으로 살 수 없지만 전통주는 판매 장려 를 위해 예외적으로 우체국을 통한 인터넷 주문이
허용되며..... 생각보다 가격이 비싼 편이 아니라서 전통주 중에서도 가성비가 훌륭한 축에 듭니다.
홍주는 새빨간 색상 때문에 칵테일 재료로도 쓰이니 보통 증류주와 음료로 칵테일을 만들 때는
술과 음료를 잘 섞이게 하기 위해 증류주를 먼저 넣지만, 홍주는 홍주의 붉은 색상 을
살리기 위해 나중에 붓는 방법이 일반적이미 잔의 위쪽에서 부터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이 생깁니다.
흔히 맥주와 함께 홍맥 을 만들며, 막걸리에 더해 홍막 혼돈주 를 만들기도 하는데.....
한 애주가에 의해 백화수복과 홍주를 2:1의 비율로 더한 홍복주 가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홍주 처럼 붉은 빛을 낸다고 알려진 술로 감홍로 라는 술이 있으니 감홍로는 전주의 이강고, 정읍의
죽력고 와 더불어 최남선에 의해 조선 3대 명주 가운데 하나로 꼽힌 바 있는데 지초로 색 을
낸다는 발상은 같지만...... 제조법의 변화로 현재는 색이 크게 달라 졌으니 홍주는 빨간색에
드라이한 풍미 를 보이며, 감홍로는 누런빛을 띄고 달고 매우며 강한 계피향을 비롯한 한방향을 냅니다.
불현듯 이생진의 “許女史” 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그제야 술이 묻는다.
너는 술만큼 투명하냐?
너는 술만큼 진하냐
너는 술만큼 정직하냐?”
이때 물음에 답한 것은 내 얼굴빛
내 얼굴빛이 홍주빛일 때
비로소 내게 홍주 마실 자격을 준다!“
홍주 는 글씨와 그림 그리고 소리 를 자랑하지 말라는 예향인 진도의 전통주
인데 석양 무렵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세방 마을로 달려가 붉은 노을
을 바라보며 마신다고 했으니.... 오늘 황혼녁 을 지나 어둠이 내리는
이역만리 동리의 운하 에서 혼자 앉아 술을 마시며 되뇌이기 좋은 시 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