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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마태오 8,5-17)
"Lord, I am not worthy to have you enter under my roof;
only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말씀의 초대
애가는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된 다음 쓰였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파괴와 성전의 무너짐에 전율하면서 백성이 하느님 앞에 용서를 청하도록 일깨워 주지 않은 예언자들을 비난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남은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기도할 것을 촉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오셨지만, 로마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 종의 중풍을 고쳐 주신다.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악에서 자유롭도록 풀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청을 들어주시어, 하느님 나라는 특정한 경계가 없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로마 사람인 백인대장은 유다인이 아니며, 하느님에 대한 신앙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주님께 자기 종의 병을 낫게 해 주십사고 청원을 드립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진정 어린 청을 드립니다. 이 말에 주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신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가 믿음만으로 병이 나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기도 합니다. 물론 의심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치유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그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 지구촌에는 아직도 비참한 곳이 많습니다. 전쟁과 재난으로, 질병으로,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욕심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들만이 하느님께 구원받을 수 있다는 특권 의식과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이방인의 청을 들어주심으로써 그러한 특권 의식과 선민 의식을 허물어 버리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특권 의식과 선민 의식의 범위를 뛰어넘습니다. 그 백인대장의 청원은 오늘날까지,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청하는 공동체의 신앙 고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과, 지금 우리가 성체 안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일들이 지금이라고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천 년이라는 세월은 인간의 시간이지 하느님께 적용되는 시간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처럼 ‘그분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을 낫게 하셨는지요? 답변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심으로써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니 치유는 은총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병을 낫겠다는 마음보다 주님의 권능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러면 치유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그러한 악의 세력들과 싸우셨습니다. 질병, 기아, 고독, 소외를 악의 세력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6)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병자들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비참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주님으로 자처하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이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또한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에게 배고픔을 면하게 하고, 소외된 사람을 찾아가고,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며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다고 가르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사람만이 희망이다 - 남궁영미 수녀- 중풍은 전신이나 반신 또는 사지 등 몸의 일부가 마비되는 병을 이르는 한의학상의 병증을 말합니다. 무언가 막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도 이런 중풍처럼 삶을 무력하게 하고, 주저앉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모순과 갈등과 대립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고 꼼짝달싹 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는 중풍병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요즘처럼 세상과 자연이 제대로 순환하지 못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그 자연스러운 질서가 다 깨진 듯한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런 위기감은 우리 삶의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목적과 방향을 잃은 듯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내적 혼돈을 경험합니다.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삶의 경향의 경험입니다. 4대강을 파헤치는 공사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일을 통해 먹고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4대강은 일터인 것입니다. 오염되지 않은 유기농 먹을거리가 좋다고 하지만, 당장 오염된 것이든, 유전자 조작이든 배를 채워야 살아갈 수 있는 몇십 억의 배고픈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삶의 현실에서 인간적 무력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모순이지만 부딪쳐야 할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모순 한가운데에는 더러움도 거룩함도 처절함도 아름다움도 고통과 죽음도 살림과 펄떡거리는 생명도 다같이 서로가 서로를 휘젓고 아우르며 보이지 않는 희망의 몸놀림을 펼쳐 나가야 합니다.” (어느 농부의 말에서)
소통이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운데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긍정과 부정) 축이 통합되어 갈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축이 생활 안에서 충돌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움직이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삶이며 우리의 완고하고 부자유한, 마비된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삶일 것입니다.
자연이 없는 인간 세상은 참혹하지만 인간이 빠져버린 자연은 공허합니다. 자연을 배반한 것도 인간이지만 끝내 자연을 살리는 것도 인간의 몫입니다. 결국 다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이 건네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추장님, 올겨울은 추울 것 같습니까?”
추울 것이라고 말했다가 안 추우면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추장은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몰래 자기 천막에 들어가서 기상대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올 겨울은 추울까요? 따뜻할까요?”
추장의 질문에 기상대에서는 웃으면서, “겨울이니까 당연히 춥겠지요.”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추장은 기상대에서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올 겨울은 추울 것이니, 땔감을 충분히 준비하도록 해라!” 하며 인디언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땔감을 준비하던 인디언들은 하나의 의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땔감을 준비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거든요. 불확실한 추측으로 땔감이 모자라면 큰일이기에 다시 추장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올 겨울이 얼마나 추울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추장은 또다시 천막으로 들어가 몰래 기상대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번 겨울은 얼마나 추울까요?”
이에 기상대에서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사상 최악의 한파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인근 인디언 마을에서 벌써부터 추위에 대비해 땔감을 구하느라 지금 난리이기 때문입니다.”
추장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 어리석은 추장처럼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쓸데없는 것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정말로 필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인데, 그보다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믿음이 더욱 더 강해서 주님을 뒷전에 모시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주님께 대한 믿음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기에, 그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도 충분히 고쳐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지요.
사실 말로써 치유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바로 옆에서 직접 만지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더욱더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로마의 백인대장이라는 지위를 통해서 예수님을 억지로 끌고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믿음 하나면 족하다는 생각을 가졌고, 예수님께 그 마음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 쓸데없는 것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을 가졌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믿음은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세상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내 모습에서 부족한 믿음을 발견하게 되네요.
쓸데없는 것에 의지하면서 살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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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인 믿음
-김대선 신부-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해주십니다. 백인대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탄압하던 로마의 장교이고 이방인이었습니다. 당연히 유다인들로서는
그를 도와줄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방인이면서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전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난 널 믿어!”라고 입으로 말하면서 마음으로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신념이 되고 그 신념은 세상과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잘 될 거야!”라는 생각과 “혹시 안 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백인대장과 유다인들의 차이였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에
의심을 품습니다. 만에 하나에 너무나 많은 신경을 씁니다. 만에 하나는
어디까지나 만 가지 중 한 가지입니다. 나머지 구천구백구십구 가지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구천구백구십구에
믿음이 더 필요합니다. 아니 만에 하나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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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대로
- 전봉순 수녀-
어느 날 성경 공부를 마친 후 한 어르신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공부도 많이 하고 지식도 많은 그분은 종교에 관심이 많아 불교·유교·도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계셨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최근 3년 동안 성경반에 열심히 나오셨다. 나는 속으로 그 어르신이 언젠가는 하느님을 믿고 성당에 나오실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관심 있게 대했다. 그래서 어르신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는 순간 혹시 성당에 나오고 싶다고 하면 얼른 교리반을 소개해 드릴 생각부터 했다.
그런데 어르신은 꽤 심각한 표정으로 하소연 반 고백 반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남은 것은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뿐이고 정말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큽니다. 그러니 이제 그냥 인생을 정리해야 옳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성경을 읽어왔는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인가 싶었다. 내가 어떻게 성경 말씀을 전했는가? 성경을 읽어준 내 모습에서 전혀 하느님을 느낄 수 없었다는 말인가? 허무했다. 실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생명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사람 앞에서 무력감을 절감했다.
그래도 그분을 최대한 위로하면서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그 어르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믿기가 그렇게 힘든 것일까? 그래서 믿음을 주님의 선물이라고 했던가? 하느님한테서 생명을 받은 존재로서 스스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 된다. 모든 것은 믿는 대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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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겸손과 자비의 교각>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 예수님 시대 당시 그는 로마군단 조직의 하급 장교였습니다. 백인대장이란 계급은 현재 우리 한국 군대편제에 따르면 소대장이나 혹은 중대장 정도에 해당됩니다. 그가 통솔하는 병사는 100명이었기에 백인대장으로 불렸습니다.
백인대장은 여러모로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도움을 한 가지 청했는데, 그것이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부리고 있는 종의 병을 치유해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상한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종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백인대장의 진급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백인대장 가정의 가사를 돌보기 위해 그저 얼마간 몸값을 치르고 산 노예였습니다. 당시 많은 주인들은 종이 병에 걸려 죽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더 건강하고 ‘품질 좋은’ 노예를 사오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철저하게도 달랐습니다. 그는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가 특별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종의 치유를 청하는데 있어서 그 마음 자세가 지극히 겸손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아주 탁월했습니다. 백인대장의 말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잘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다 예수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너무나 흐뭇했던 예수님이었기에, 그가 청하는 바를 기쁜 마음으로 들어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백인대장의 확고한 믿음과 겸손한 자세를 극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도달하게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다리가 하나 필요합니다. 다리를 놓기 전에 먼저 튼튼한 교각 두 개가 필요하지요.
우리 쪽 강변에는 ‘겸손’이란 교각을 세워야 합니다. 가난하고 부족한 우리는 겸손이란 교각을 통해야만 부유하고 완전하신 하느님께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쪽 강변에는 ‘자비’의 교각이 세워져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 건너가야 할 것입니다.
겸손과 자비란 두 개의 교각 위로 사랑과 믿음이란 다리가 놓이면 죄인이고 부족한 우리 인간이지만 그 크신 하느님께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다리를 건너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과 약속의 땅인 건너편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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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만큼 믿음과 은총이
-김찬선신부-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는 사람은 하나같이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은 은총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고
그래서 요청치도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총이 필요치 않은 사람,
은총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은 교만한 사람이 은총이 더 필요한 사람이고
이미 은총 가운데 살고 있는데도
다만 은총이 필요 없다고 할 뿐이겠지요.
이에 비해 겸손한 사람은
은총이 필요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은총을 겸손하게 청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받는
겸손하고도
믿음과 인품이 훌륭한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풍으로 고생하는 종을 둔 백인대장입니다.
백인대장은 우선 은총을 받기에 충분히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겸손이 더욱 두드러짐은
로마군의 백인대장이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나병환자가 천대를 받아온 사람이었다면
백인대장은 스스로 얘기하듯
남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백인대장은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고 할 때,
바로 그 사람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 위에 있어도 그것으로 자기의 위치를 착각하지 않는,
참으로 대단한 겸손의 소유자입니다.
요즘 우리는 선거 때는 섬기겠다고 하고서는
뽑히고 나니 군림하는 지도자들을 보면서 실망하는데,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늘의 백인대장은 권한을 가지고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종을 위해 봉사하는 겸손하고도 인정이 있는 지도자입니다.
백인대장은 이런 겸손과 더불어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실상 믿음은 겸손만큼의 믿음입니다.
골짜기의 깊이만큼 물이 고이듯
겸손만큼 믿음이 크고
믿음만큼 은총이 머뭅니다.
백인대장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조차 없다 생각할 정도로 겸손하였기에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지 않고도 종이 치유된다는 믿음을 가졌고
그런 믿음을 가졌기에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지 않고도 치유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한 말씀만으로 치유하실 수 있다는 믿음.
이런 믿음을 가졌기에
친히 손을 얹어주시길 청할 필요도 없었고
더더욱 가시는 수고까지 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또한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는 영광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고,
주님 친히 방문해주시는 큰 사랑을 독점하고 싶었을 것이지만
주님의 그 고귀함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겸손으로 감히 그러지 못하고
주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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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오열과 통곡으로 기도하는 예언자
- 경규봉 신부-
예루살렘 성벽이 완전히 허물어지고 성전은 약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불타버림으로써 하느님 백성은 끝장난 듯하였다. 그리하여 아시리아와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람들 이외에도 많은 백성이 죽음의 땅이라고 생각되는 이스라엘 땅을 스스로 떠나갔다.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이스라엘 땅을 폐허로 만드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다고 믿었다.
더욱이 아이들, 젖먹이들이 먹을 것을 조르다가 숨져가는 처절한 상황에서 예언자는 애가 끊어지는 듯한 비통함에 잠긴다. 예루살렘이 이처럼 처참한 상황에 놓인 까닭은 거짓 예언자들이 헛된 환상을 보고 백성을 달래려고 거짓 예언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진정 주님께 울부짖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해야 한다. 처참한 상황을 벗어나고 죽어가는 자식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고 예언자는 외친다.
예언자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수많은 백성의 처참한 죽음을 보면서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통곡한다.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보면서 오열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처절한 상황에서 통곡하며 울부짖는 것, 그것이 기도이다.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 그것이 기도이다. 예언자는 통곡하며 울부짖음으로써 기도한다.
그 처참한 상황에서 다른 어떤 말로써 기도할 수 없다. 머리에 재와 흙을 끼얹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고 울부짖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 그것이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는 기도이다. 예언자는 그렇게 기도하면서 백성도 그처럼 땅을 치며 통곡하고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처럼 흘림으로써 기도하라고 외친다. 하느님께 목을 놓아 울부짖음으로써 기도하라고 외친다.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시다. 언제 어디서나 결코 우리를 잊지 못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당신을 외면하고 돌아서도,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려도, 우상을 섬기며 당신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도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비록 사람의 잘못을 보시고 매를 드시고 진노하실지라도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매 맞는 자식은 육신이 아파 울지만, 때리는 어머니는 우는 자식보다 훨씬 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인간이 그럴진대 하느님께서야 오죽하시랴! 당신께서 창조하시고 당신께서 사랑하시며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백성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은 오죽하랴! 인간은 처참한 현실이 고통스러워 울부짖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울부짖는 통곡 소리에 애가 끊어지고 가슴이 새파랗게 멍들고 미어진다.
예언자는 그처럼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백성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통곡한다. 예언자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땅을 치고 통곡함으로써 그토록 사람을 사랑하시며 가슴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백성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는 하루가 되자.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는 하루가 되자. 때로 우리를 질책하시고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더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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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대장의 신앙 자세
- 계만수 신부-
예전에 비해 이민이나 해외여행, 외국 유학이 그냥 먼나라 이야기는 아닌 듯 합니다. 미주나 유럽,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 등 많은 분들이 비행기나 배를 타고 외국 나들이를 하고 오신 분들이 꽤 많습니다.
제가 학생 때는 수학여행을 가도 경주, 속리산, 설악산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중국이나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학교도 있다 들었습니다.
가끔씩 유학이나 교포 사목으로 외국에 나가 있는 동기 신부들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기도 하는 등 실제 이 지구라는 별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고, 누가 어디에 있든 안부를 쉽게 주고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도 세계 곳곳에서 일이든 여행이든 기타 여러 이유로 찾아 온 외국인들이 많고, 그들의 모습을 보거나 대화할 수 있는 기회는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아직 외국에 나가 볼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우리 나라 땅을 벗어나는 것이 막연한 두려움이 있고, 또한 우리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외국인들을 만나는 것 자체도 저에겐 벅차게 다가올 때도 많습니다.
이번 월드컵을 즐기면서도 느끼는 바이지만 다들 내 나라가 승리하기를 원하고, 우리나라와 역사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의 경기는 승리보다는 패배를 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저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서로를 이어주는 어떤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다면 어떠한 명승부가 이어지는 경기라 할지라도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마련인 것 같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주변을 아니 우리나라 민감한 역사의 과제를 안고 있는 나라인 경우, 그냥 막연한 이미지 때문에 그 나라와 그 나라 국민을 폄하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 그리고 미국인을 비하하는 표현을 우리는 우리의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사용하지 않습니까? 축구 경기를 봐도 그렇지만 어떤 정치적인 이슈나 단순한 사건 사고가 생기더라도, 우리 나라, 우리 나라 사람에게 그들로 인해 안타까운 일이 생길 때 자연스레 그들을 비하하는 명칭이 우리 입을 통해 표현되곤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우리 못지 않게 외국인들을 비하했고 멸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민족이 아니면 ‘이방인’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야훼 하느님을 믿었던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모르는 민족을 무식한 족속들로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이란 말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외국인들을 비난하고 멸시하는 의미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특히나 예수님 시대의 로마인들을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힘으로 눌러 버리고, 자신들의 땀의 결실을 빼앗아 버리는 미개하고 포악한 이들로 여겨습니다. 그래서 힘 앞에서 비록 고개를 숙이지만 그들을 향한 분노와 저주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듯이 로마인들 중에서 로마의 권력자 중 한명인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백인대장이라 하면 백명의 군인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백인대장은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신의 종을 고쳐줄 것을 예수님께 청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유다인이었기에 막연한 반감과 두려움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께 던진 한 마디는 혹시나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예수님의 마음까지도 바꿔 놓을 정도의 대단한 위력을 드러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음에도 그의 한 마디는 어떤 유대인들보다도 주님을 향한 더 깊은 믿음과 신뢰를 담고 있음을 주님께선 발견하신 것입니다.
우린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엔 그저 가난한 나라 출신이란 이유 하나 만으로 차별받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잘 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영어 한 마디 잘하면, 일본어 한 마디 잘하면 이 땅은 너무도 그들을 너그럽게 받아줍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햇살과 바람, 똑같은 하늘과 비를 내려주십니다. 굳이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린 어떤 태도로 그들을 바라보고 대하고 있습니까?
나를 잘 대해주고, 나의 이야기를 잘 이해해주고,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내가 힘겨울 때 기꺼이 손을 내미는 이를 우리는 원합니다. 헌데 내가 그렇게 하기는 왜 이리 힘이 듭니까?
내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그만큼 누군가에게 해 주어야 합니다. 나의 겉을 화려하게 치장하기 보다는 내 마음을 다스리고 진실된 마음으로 그를 대한다면 내가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내가 주님께 원하는 것만큼 나도 주님께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개된 기적의 힘은 바로 진실된 마음과 굳은 신뢰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대할 때, 우리를 마주하는 이들을 대할 때, 좀 더 진실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여러분들의 기도덕분에 인천교구 사제연수가 어제로 끝났습니다. 솔직히 그 시간이 너무나 좋아서(물론 강의 듣는 시간은 제외입니다) ‘며칠 더 했으면’하는 생각도 간절했지만, 저 편하자고 그 규정을 어길 수도 없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성지로 다시 되돌아와서 사제 연수때 있었던 일들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건이 하나 기억되네요.
사제 연수중에 석모도에 있는 공소를 방문한 뒤에 등산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공소에서 공소회장님을 비롯한 교우들을 만나고 함께 기도한 뒤에, 우리들은 공소 신자들의 안내로 석모도의 산을 등산하였지요. 그런데 등산 전에 공소회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이 산을 오르는 길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거리는 짧지만 조금 험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조금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완만합니다. 따라서 저는 두 번째 길을 권하고 싶습니다. 조금 멀기는 해도 시간 차이는 15분 정도만 나니까 이 길이 훨씬 괜찮을 겁니다.”
이 말씀에 대부분의 신부님들이 두 번째 길을 향했습니다. 그러나 산을 좋아하시는 신부님들은 “그래도 험한 산이 재미있지.” 하면서 첫 번째로 안내하셨던 험하다는 길로 출발하셨습니다.
첫 번째 길로 가셨던 신부님들은 40분 만에 산을 넘어서 모임 장소인 보문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길로 가셨던 분들은 언제 도착하셨을까요? 공소회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15분 뒤인 55분 만에 도착해야 했겠지만, 거의 2시간 만에 도착하셨답니다. 그리고 모두 ‘속았다’라는 얼굴표정을 하고 있더군요.
공소회장님의 원래 뜻은 이랬습니다. 산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더군다나 자신의 걸음으로는 얼마 차이도 나지 않으니 조금 먼 길로 유도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공소회장님의 그 깊은 뜻(?)으로 인해서, 험한 길을 가고자 했던 신부님들은 아주 편한 길을 가게 되고, 편한 길을 가고자 했던 신부님들은 반대로 험한 길을 가게 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하나의 길로 표현하곤 합니다. 즉,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를 향하는 길 위에 서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그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참 다양합니다. 어떤 길은 멀고 험할 수도 있고, 또 어떤 길은 가깝고 편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쉽고 편한 길을 지향하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어떤 길이 그런 길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 맡기는 것이 최고의 방법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그 증거가 나오지요. 사실 백인대장은 편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즉,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부를 수 있었고, 강압(“만약 못 고치면 네가 죽음을 당할 것이다.”라는 식)이라는 편한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는 구체적인 말보다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상황만 말했던 것이지요.
여러분의 앞길을 과연 주님께 모두 맡기고 있나요? 이렇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게 하기가 참 어렵네요.
장마랍니다. 비 피해가 없도록 점검을 해보세요.
빠다킹신부
참된 믿음의 조건은 순명 성경 속에서 참된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는 이들은 어김없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신앙의 덕목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겨우 사제품 받은 지 3년,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가 만만치 않음을 고백해봅니다. 교회에 순명하고,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이 참된 평온을 얻는 길임을 알면서도 언제나 꿈틀대는 욕망에 사로잡혀 아버지의 뜻은 뒷전으로 슬며시 접어놓고 사는 게 아닌지 새삼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반성해 봅니다.
-여성국 신부-
평온으로 가득한 한 손이 노고와 바람 잡는 일로 가득한 두 손보다 낫다”(코헬 4,6). 사제품을 앞둔 부제반 끝 무렵, 그때 눈에 띈 성경 구절이 코헬렛의 이 말씀이었습니다. 그 뒤 서품 성구에 대해서는 별 고민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평온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추상적이었기 때문에 조금 망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신학교 성모의 밤 강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성모님의 신앙 고백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한손 안에 꽉 잡아야 하는 것은 바로 성모님과 같은 순명이고, 이 순명을 붙잡아야 비로소 평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순명을 주제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이었으면서도 순명할 수 있는 겸손함을 지닌 백인대장의 믿음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이정희 수녀-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며 또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다. 이 세 이적사화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점은 예수께 대한 단순하고 순수한 신뢰다.
아름다운 참 신앙
광산촌에서 활동할 때 있었던 일이다. 세계 관구장 회의가 일본에서 있어 다른 몇 나라 관구장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가 광산촌에 들렀다. 그분들을 모시고 시장 구경(시장이라야 손바닥만하지만)을 하는데 교우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교우는 우리를 보자마자 반가이 맞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당신 가정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말하면 당시 그 교우 집 며느리가 임신중이었는데 아주 위험한 상태라 거의 누워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수녀님들이 당신 며느리와 태아의 건강을 위해 기도를 해주면, 게다가 언어가 다른 수녀님들이 똑같은 지향을 두고 기도를 하면 예수님이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 교우의 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그분의 가정을 위해 함께 기도를 드렸고, 그 교우도 수녀님들 한 분 한 분을 축복해 주시며 기도를 해주셨다.
우리 모두는 그 교우의 단순한 마음과 예수께 대한 순수한 믿음에 감탄을 하였다.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고 도움을 청하는 모습과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간절한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고 하신다.
우리 역시 백인대장이 예수께 자기가 데리고 있는 종의 병을 고쳐 달라고 도움을 청한 것처럼 단순한 믿음으로 다가갈 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게”(히브 11,3) 된다.
-강지원 신부-
오늘 우리는 복음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참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확고하고 신실한 믿음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파르나움에 들어 가셨을 때에 만나게 된 한 이방인 백인 대장
그가 바로 참 신앙인이였습니다.
우리가 매일 미사 때마다 성체 를 영하기 직전에 바치는 기도인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고백하는
이 기도의 원형이 바로 이방인 백인 대장이였던 것입니다.
복음은 이방인 백인 대장의 입을 통해 온 세상에 신앙을 고백하게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자신이 하인이 곧 낫게 될 것이라 는 굳은 믿음이
참으로 놀랍기 그지 없습니 다.
중풍에 걸려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의 하인에 대한 백인 대장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과
그 하인을 낫게 할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다는 백인 대장의 확고한 믿음이
바로 병든 하인을 깨끗이 낫게 한 기적의 원동력이였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수 많은 종류의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들 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공통되는 점을 몇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치유 기적 사화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선 살펴보면, 병자들이 직접 자신의 발로 걸어서 예수께 치유 받으로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즉 많은 경우 이웃의 사람들이 그 병자를 옆에서 부축한다든지, 들것에 들고 온다든지,
아니면 업고서 예수께 데리고 와서 낫게 해 주십사 하고 청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백인 대장이 병든 하인을 대신하여 예수께 왔고
병든 자신 의 하인을 낫게 해주시길 청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
그건 병자들의 고통 을 더불어 함께 느끼고 조금이나마 병자를 돕고자 하는 이웃들의 측은지심,
즉 사랑 의 고운 마음씨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실질적 으로 돕는 이러한 사랑의 행위야말로 바로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놀라운 힘이라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이웃들의 아름다운 사랑이 주님을 감 동시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통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 는 것은 바로 주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는
이들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당신만이 진정 주님이시 고 당신만이 진정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구세주이심을
의심없이 믿는 그 확고한 믿음 그 자체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은총을 주시고 나서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라고 말입니다.
단 한번도 "나의 신적 능력을 보이려고 너를 낫게 해주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역시나 백인 대장의 믿음 에 감탄하시며 "가 보아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셨고
바로 그 시간에 하인의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과 믿음은 놀랍고도 위대한 힘 을 발휘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웃에 대해 가지는 사랑의 마음과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사랑 의 행위와 자신의 신앙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나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나아가 온 세상을 바꿉니다.
참 신앙인은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한 이기적인 복을 주님께 빌지 않습니 다.
참 신앙인은 자신을 벗어나 이웃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복음이 보여주는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 고 온 사람들처럼 실천적인 사랑의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 다.
참 신앙인은 사랑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사랑만이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 로
이끌 수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신앙인은 우리가 죄중에 있고 늘 주님께 죄를 짓지만 그래도 주님은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늘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참신앙인은 이러한 자신의 믿음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참신앙 인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주님의 사랑을 의심없이 믿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믿음, 이것이 참 신앙입니다. ♡
† 백인대장의 아름다운 고백 †
-박상대 신부-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8절) 이 기도문은 온 세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중 영성체 예식 직전에 사제가 축성된 성체를 높이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는 외침에 응답하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에서 유래된다. 마태오가 모아놓은 10가지 이적사화집성문(8-9장)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적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보도된다. 두 번째 기적은 백인대장의 하인을 원격(遠隔) 치유한 기적이고, 세 번째의 기적은 베드로 제자의 장모를 열병에서 치유한 기적이다. 물론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있는 집단 치유와 구마기적은 구체적인 기적사화의 범주에 들기보다는 예수님의 치유활동에 대한 서술적인 보도에 속한다고 하겠다.
우선 열병을 앓고 있었던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기적을 보자. 이는 마르코복음(1,29-31)과 루가복음(4,38-39)에도 똑같이 보도되는데 사건의 맥락을 살펴보면 차이점이 많이 발견된다. 우선 치유의 장소는 다 같은 갈릴래아 지방의 가파르나움이다. 그런데 마르코와 루가는 마태오복음과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분에 이 기적을 배치하고 있다.
마르코는 첫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에 배치하여 이미 제자가 된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루가는 베드로가 제자의 소명을 받기 전의 시점으로 당겨 놓았다. 마태오는 이적사화 집성문을 따로 편집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기 위해 가파르나움에 오신 김에 베드로 장모의 치유도 함께 엮어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태오는 자신의 고유한 편집방법을 따라 기적들을 보도하고, 마르코는 베드로 장모의 치유를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에 가깝게 서술하고 있으며, 루가는 이 치유사건이 예수께서 첫 제자 4명을 얻는 동기(動機)로 소개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한 기적은 루가복음(7,1-10)과 요한복음(4,46-54)에도 똑같이 보도된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마태오와 요한은 백인대장이 직접 예수를 찾아와 자비를 청한다는 점이다. 반면 루가는 백인대장이 먼저 유다인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간청하게 한다. 유대인 원로들은 백인대장이 회당까지 지어 줄만큼 유다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소개한다.
이에 도와 줄 마음을 먹은 예수께서 길을 가시는 도중에 이번에는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시켜 예수님의 직접 왕림(枉臨)의 수고로움을 사양하고 그저 한 말씀만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루가가 늘 강조하는 기도의 다양함을 엿볼 수 있다. 즉, 기도란 하느님께 직접 드릴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 또는 성인이나 천사들을 통하여 전구(轉求)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우리 또한 고통받고, 역경에 처해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인대장이라 함은 통상 로마제국의 군사편제에 따라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임무와 역할을 행사하는 백부장을 뜻한다. 원문에는 서민출신이 아닌 "왕궁의 관리"로 표기되어 있다. 당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37?-100)는 "백부장이란 명령을 내리는 자로서, 지나치게 위험을 자처해서는 안되고, 행동에 있어서 침착하고, 믿음직한 인물이어야 하며, 성급하게 전투에 뛰어 들어서도 안 되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위치를 사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자격을 서술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은 게다가 자기 종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이 백인대장을 로마군대의 고위 관리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헤로데 안티파스 군대의 이방인 백부장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이 기적사화를 행하신 예수님의 활동장소가 갈릴래아 지방의 가파르나움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방인으로서 백인대장의 자기 종에 대한 자비심과 예수께 대한 놀라운 믿음과 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은 우리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어떤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고야 믿으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와는 절대적인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그렇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보다 다른 곳에서 더 아름답고 위대한 믿음을 보았어야 되겠는가?............◆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겸손한 믿음과 행복선언 †
예수님을 흠모한 제자나 추종자 중에서 백인대장만큼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인대장은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세는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신망애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왜 이 세 가지가 중요한 것인가?
여러분이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고 기대를 걸어준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 때의 기분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어드리고 사랑해 드리고 하느님께 내 인생을 맡기고 당신의 뜻을 따라드려야 기분이 좋으실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바로 이러한 좋은 자세를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회사에 들어온 사람이 회사일이 남의 일이라고 열심히 일하지 않고 노상 다른 일자리를 보려고 밖을 기웃거리거나, 주인에 대하여 긴가민가 하는 자세로 대한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열 받을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주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행복선언을 하고 싶으면, 하느님께 사랑받는 삶을 위해서 백인대장의 어떻게 고백하고 행동하는지를 잘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 분께 나의 삶을 봉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세요, 하느님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깊은 묵상을 제공합니다. 우선 백인대장이라는 인물의 등장은 주님께서 그동안 길고긴 신상수훈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과 그 뜻을 따르는 하느님 나라 사람에 대한 교훈을 모두 마치신 후, 처음으로 소개되는 인물입니다. 주님은 백인대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주님을 기다리며, 이상적인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모범적인 신앙인 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인대장은 당시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한다고 자처하는 바리세이나 율법학자도 아니요,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처하는 어떤 다른 유다인도 아니며, 외교도인, 즉 이방인이면서 그것도 주님을 감시하는 로마군인, 백인대장입니다.
이 백인대장이 왜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소개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말한 그의 말속에 예수님께 대한 깊은 믿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는 확고한 신뢰심과 자기 하인의 어려움을 돌 볼 줄 아는 백인대장의 인자한 마음과 사랑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신뢰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9장 14절에서 29절에 나오는 악령들인 아이의 아버지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의 치유를 청하면서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말에서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누구 신지? 당신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우쳐 주십니다.
백인대장이 자기의 집까지 오시지 않더라도 한 말씀으로 충분히 하인이 치유될 것을 믿은 그에게 예수님은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칭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저리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 17.20)고 말씀하시고, 더 나아가서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24)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물론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구하면 얻지 못한다고 야고보서 4장 3절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이 백인대장의 믿음 찬 말씀을 오늘날 미사 중에 영성체를 모시기 전에 신앙고백으로 외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정말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자기 하인에 대한 백부장의 생각은 참 아름답습니다.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그 하인이 평소에 얼마나 주인, 백부장에게 충성을 잘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종을 위한 주인의 배려, 걱정과 보살핌은 정말 아름답다고 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푸는지요? 한국 속담에 '남의 염병이 내 감기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이웃에 대한 사랑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그것도 내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하수인에게 대한 관심과 배려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형제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장)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남이 나와 이해 관계가 있을 때는 잘 합니다. 만일 이해 관계가 없으면 거들다 보지도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겠느냐?"(마태 5.46)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호세아 6,5)이다는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하면서 백부장의 사랑과 믿음을 우리신앙의 거울로 삼읍시다...............◆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