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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아낙네들의 한과 절망을 그린 화가 ....변시지
변시지 선생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으며 여섯살 때 인 1931년에 부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뒤 대판에서 성장하며 화가의 길로 접어 들었다. 대판미술학교에서 양 화를 전공하고 8.15민족 해방을 거기에서 맞이하였으며, 그 후에도 일본에 머물렀다.
1945년 이후의 그의 화가 기반은 동경에서 이루어졌다. 1947년부터 그는 동경의 한 유력 미술단체인 광풍회의 신인작품공모전과, 일반적으로 한층 권위가 인정되던 일본 문부성주최의 "日展"에 거듭 입선하면서 신진으로 빛을 받기 시작하였다. 1948년의 광풍회전 출품에서는 수석상을 차지함으로써 각광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정회원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광풍회와 유대를 갖고 있다.
일본에서의 변시지의 작품활동과 작가적 위치는 광풍회 신인상 수상회원이라는 계보적인 비중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반을 갖고 31세때인 1957년에 서울로 귀국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그 는 고국의 미술계나 화가들과 거의 관계를 가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어려움도 내색함이 없이 자신이 택한 기법의 작품행위 그 자체로서 서울의 화단에 발붙임을 굳히는 의지를 보였다. 귀국 다음 해에 가진 화신 백화점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을 통하여 그는 일본에서의 저간의 작품내면을 보여 주었고, 그때 그 작품전을 눈여겨본 사람들은 그의 기법적 수준과 예술역량의 탄탄함 및 많은 가능성을 주목하고 평가했던 것이다.그는 구미의 새로운 미술사조에 편승하려는 시류의 작품형식보다는 전통적 회화의식으로 자신의 화면을 충실히 내실화하는 자세와 태 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때 새로운 탐구적 태도로 현대의 조형의식을 내보인 추 상적 혹은 반추상적 화 면을 시도했었다. 귀국전후였다. 그 시도적 작품이 귀국 작품전에 여러 점 전시되어 본색의 사실주의 작품계열과 대비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비구상 추구는 없이 자신의 체질적 자연주의적 정 신 구현으로 일관성을 나타냈다.
서울에서 집착하게 된 세밀한 묘사력과 감성적인 시각의 풍경화에 앞서는 일본에서의 청년기 작 업은 주로 인물 주제로 구도, 색채, 붓놀림의 회화적 성과 및 표현력도 감성이 매우 두드러진 내면이었다. 당시의 작품 하나하나에서 그 내면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23세때인 1948년의 광풍회전에서 최고의 영예를 안겨준 "베레모의 여인" 과 "만도린을 가진 여자" 는 모두 실내의 좌상으로, 구도상의 포우즈화 얼굴 및 손의 표정, 그리고 색채구사와 붓놀림의 질 감등이 기법적 수준과 작품역량의 확실성을 확인 시켰다. 최고상 수상의 신예로 즉각 정회원이 되어 다음 해 광풍회전에 출품했던 "휴식"과 "바이얼린을 가진 남자"에서는 필치와 색조의 표현질이 한층 눈길을 끈다.
전체적인 화면 분위기에 주제의 인물상을 부각시키는 이 시기의 확실하고 탐구적인 조형성은 1947년부터 입선한 日展 출품작 "FEMME", "여인"등에서도 살펴진다. 글머리 에서 언급했듯이 변시지의 광풍회 참가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지만, 한편으로 日展에도 거듭 입선하면서 귀국할 때까지 동경화단 진출을 착실하게 다져 나갔다. 그 시기의 작품 정진을 " 네모의 상", "등잔과 여 인", "K씨의 상", "남자", "3인의 나부" 등의 인물화에서 엿볼 수 있다. 이중에서 특히 눈여겨 지는 것은 "3인의 나부"로 여기서는 사실적인 형태이면서도 적갈 색조의 통 일적 분위기와 변화속에서 세나부의 서로 다른 자세와 표정을 부드러운 곡선 및 특이한 구도로 전개되어있다. 화면 성과가 대단히 두드러지고, 조형적 묘미가 특출하게 구현된 작품으로 1950년대의 한 대표작으로 여길만 하다.
그밖에 드물게 그려진 풍경화의 하나로 1950년의 日展에 입선했던 "오후" 는 명상적인 시각으로 어느 공장의 일각을 소재로 삼으면서, 조형적 계산이 매우 엄밀하게 의도된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수평구도를 취하면서 건물, 담, 구내 철로등이 직선 사선 곡선의 질서로 강 조되어 있고, 여름날 오 후의 정직한 시간과 공간 분위기를 잘 포착하고 있다. 그러한 변시지 풍경화의 특색있는 초기 작례는 1946년 작품인 "백색가옥과 흑색가옥"의 심정적인 시각에서 이미 시도되고 있다.
이상의 청년기 작품들은 동경시기에 다져진 기반이다. 그리고 그 기반을 서울로 연결시켜 그의 국내활동을 새로이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하면서 변시지는 마치 마음속에 깊이 쌓여 있던 모국 의 자연의 향수를 싫것 풀려는 듯이 교외 산야의 나무숲과 호젓한 산책길 등을 소재삼은 풍경화에만 열중하는 변화를 나 타 내었다. 아카데믹한 사실적 수법으로 되돌아가 인적없는 조용한 자연 풍경을 눈과 마음으로 어루만지듯 섬세하고 치밀하게 묘사하려 들면서 그는 나무와 지면에 하늘 거리는 빛이며 대기감으로 화면에 생기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1960년과 1961년에 제작된 "길"이 그 무렵의 관심을 보여 준다.
서울의 화단에서 여전히 외로운 위치였으나 그는 그만큼 남모르게 작품에 열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비원의 역사적 시점 및 자연미와 어우러짐은 그의 회화감정을 마음 깊숙히 자극했던 것이다. 1975년에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가 국립제주대학 교수로 다시 안착할 때까지 그는 끊임없이 비원을 찾아가 무수한 역작을 남겼다."가을비원", "부용정", "반도지", "애련정" , "가을의 비원"등이 그의 연작이다. 그밖에 창덕궁 풍경과 경복궁의 "향원정", "연회루"등에도 발길 을 옮기며 눈을 사로 잡은 곳곳의 고궁미를 가능한한 사실적 현실감과 회화적 재현의 감흥으로 포착하려고 한 일련의 작품들은 모두 일본에서 성장한 변시지의 기일층의 진한 모국애 심정이 반영된 것으로 말할 수 있으리라.
그는 그 고궁풍경들을 녹음의 여름, 단풍든 가을, 눈덮힌 겨울 의 정취로 그렸으나 눈부시게 꽃이 핀 정경은 피하려고 했다. 너무 화사한 춘색은 고궁의 말없는 역사적 분위기의 깊이를 오히려 방해한다고 본 때문일까. 게다가 그의 모든 풍경화는 어떠한 인적도 배제된 정막한 시계로 다루어 진다. 이 또한 작가의 내밀한 심사를 엿보게 하는 하나의 측면이다.
그러나 여기서 부연할 만한 것은 1970년을 전후한 시기의 화면에서 변시지는 한결 신선하고 투명한 색채 구사를 보이는 수법상의 적잖은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 점이다. 전과 달리 여름과 가을 풍경을 색상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생명감으로 강조하려고 한 듯한 그? 화면 성과가 "가을길", "여름" 등에 잘 빚어져 있다.
앞에서 살펴본 서울에서의 심정적인 풍경작품들은 1965년부터 회원으로 참가한 신기회전과 한국 미술전 등에 출품되기도 하면서 변시지 작풍의 철저한 사실주의 정신이 주시될 수 있었다. 그 철저성은 시기를 같이 했던 손응성(1979년 작고)의 비원풍경과 비교되면서 주목을 샀다.
그러다가 제주도에 안착하면서 작품수법과 표현의식에서 그는 근본적인 전기를 맞이하였다. 남국 적인 풍광의 고향, 제주섬으로 돌아간 그는 그곳의 낭만적이며 토속적인 강렬한 풍정을 중년의 나이로 새로이 재발견하면서 더할 수 없는 애정을 쏟는 새로운 감정의 작풍을 탐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제주도 출신 화가의 가슴에서 집약되고 상징적 표상화라고 할 수 있는 향토애의 진한 내면성과 함께, 서울시기의 사실주의와는 일획을 긋는 선명한 심상의 압축형태였다.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추구였다..
제주 작품환경의 변환중에서도 처음엔 서울에서의 풍경 수법을 한동안 지속하던 변시지가 집중적인 심취로 자신이 태어난 남국의 풍광미와 그곳의 특이한 삶의 정서를 가슴으로 소화하면서 놀랍게도 동양화적인 수법으로 급선회한 것은 1976-77년 무렵이었다. 창망한 바다와 아득한 수평선, 후련한 하늘과 구름, 그리고 제주도 특유의 검은 암석이 돌출하는 해안과 멀리 떠 있는 어선들을 배경으로 한적하게 위치하는 검은 돌담의 독특한 초가 모양등이 유채로 된 묵필화 처럼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해촌", "이어도", "제주도의 여름",에서 그 급선회의 초기 양상을 볼 수 있다.
저간의 사실적인 대상묘사와 색채표현 및 엄정한 객관적 표현에서 완전히 떠나 향토적 감흥을 유발하는 엷은 황갈색을 화면 전체에 일률적으로 바른 위로 아주 까맣거나 그런 성질의 유채선으로 풍경의 구체적 형태를 간명하게 표현하는 이 제주시기의 비사실적이고 평면적이며 기묘한 낭만주의의 독자적 실현은 변시지 양식으로 정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대한으로 단순화 되는 주제 전개와 바탕의 황갈색조 및 검은 필선외에, 극히 제한적인 자연적 색조 보완으로 제주도의 풍서미를 농축시키며 변시지는 가장 제주도 화가 다운 예술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풍서미에 삶의 움직임을 도입하기 위해 토종의 조랑말이나 소나 인물(해녀 포함)이 나타나는 것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요소이다. 여기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농부나 어부 모습이 아닌 형태로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옮기는 인물의 등장이다. 이는 분명히 변시지 자신의 심정적 도입이다. 바다에 면한 언덕의 작은 초가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앉은 인물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 그 를 명료하게 밝혀준다.
1981년에 변시지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이탈리아의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품페이, 나폴리의 풍경으로부터 파리, 런던 풍경을 여정이 넘치는 화면으로 연작했다. 그러나 수법은 제주도에서 정립시킨 저 황갈색 바탕의 검은 필선 그대로의 작업이 엇다. 다만 그것들은 사 실적인 현장감에 비중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여기서도 자주 개입되는 변시지 자신의 화중 자화상의 모습은 하나의 복합적 심리에서 의도된 것으로 말해질 수 있다.
그 나이브한 변시지의 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형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럴수록 그의 예술성향을 이색적인 매력으로 평가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동양적 회화성이 원용된 검은 필선 작업의 묵화같은 그 이질적 유화의 성과는 뚜렸한 창의성의 구현인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서울로 귀국한 직후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나이를 먹음 에 따라 민족적 기반위에 나의 예술을 세워야겠다는 것을 느끼고 귀국했습니다."(경향신문과의 인터뷰) 그리고 제주도로 떠나던 해에 "양화로서 우리나라 고유의 동양적 화풍을 살린다"는 정신에 뜻을 같이 한 화가들 의모임으로 "오리엔탈 미술협회"를 창립하고 수년간 그 동인전을 이끌었던 노력도 바로 동양적 회화정신의 유화지향의지를 행동에 옮기려고 한 것이다. 그 무렵부터 그 는 전통적인 수묵화도 직접 손대곤 하였다. 그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작가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매우 중요하다.
변시지화백의 끝없는 제주도 소재의 화면은 앞으로도 그의 귀착적인 집착으로 계속 추구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자기몰입의 그 유심적인 리얼리즘을 누가 어떻게 보는 가에 개의치 않으면서 더욱 자기 실현을 보여줄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구열
이생진(1929 ~) 시인은 성산포바닷가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운 을 두어 시린 감회를 노래 했다.
서산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외딴 섬을 좋아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섬이라면 유인도, 무인도 가리지 않고 찾다 보니 그의 발길이 닿은 섬이 천 곳이 넘는다.
-바다를 품에 안은 여인-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이생진(1929 ~) 시인은 성산포바닷가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운 을 두어 시린 감회를 노래 했다.
섬과 바다, 그리고 그 곳의 질박한 바탕색이 시의 언어를 통해 파도가 되어 넘실거린다.
예리한 시인의 시선은 척박한 섬 제주에서 절망과 한을 보았고 모든 절망을 품에 안았던 아낙네들의 서글픈 사연을 시를 통해 읊었다.
이 사연은 깊은 물 속에서 한차례 물질을 하고 수면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쏟아내던 아낙네들의 노래이다.
오래 전에 고기잡이를 떠난 후 소식이 없는 남편을 그리워하거나
난리 통에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들에 대한 서러운 상념을 담고 있다.
또한 홀로 지새워야 하는 흉흉한 밤과 동네 남정네의 야속한 시선 때문에 남모르게 겪어야 하는 속병인가 하며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한 푸념이다.
이렇듯 성산포의 아낙네들은 한없이 서럽다.
젊은 며느리가 홀로 추슬러야 하는 애 타는 마음을 시어머니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항상 친절하지만은 않았다.
언제나 한 두 겹쯤 꼬아 건네는 시누이의 언사가 겨우내 불어 닥치는 바닷바람보다 더욱 서럽다.
아무도 그녀의 서러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속절없이 쌓이는 조그만 앙심 덩어리들과 투기들만이 노래가 되어 흐른다.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힘겨운 상대를 타이르기 위함일까.
아낙네들의 가슴에 빼곡이 묻어 둔 정염이 까만 앙금으로 가라 앉을 때면 그 노래는 이내 욕이 되어 쏟아진다.
욕으로 자신을 다그쳐 보지만 그것은 본의가 아니며 오직 반어법일 뿐이다.
정염은 버거운 대상일 뿐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금율이기에 끝내 그녀는 뜨거운 마음을 한사코 경원(敬遠)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젊은 날의 정염을 바다의 품에 묻어 몰아쉬는 긴 날숨에 담아 허공에 흩트린다.
어쩌면 꽁꽁 묻어 두었던 사연들을 물질로 다시 캐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인들의 가슴속에 정염은 열기를 더한다. 그러나 제풀에 꺽여 이내 힘없이 사그라진다.
여인들은 오직 무심한 바다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잃어버린 로맨스를 확인할 뿐이다.
서러운 여인들은 모든 절망과 한을 스스로 품안에 끌어안았다.
이 척박한 땅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커다란 젖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여인들의 힘이었다.
그래서 시인은 제주 아낙네들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그 절망을 삼킨다고 읊었는지도 모른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난 떼오놓을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때 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일을 못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못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 주었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시인의 목소리가 변시지(1926 ~)화백의 손끝에서 갈색물감이 되어 번진다.
화면을 가득 메운 붓 자국에서 대기의 숨결이 느껴진다. 적막한 바닷가에 거친 바람이 소용돌이 치고 이 거친 바람이 또다시 그의 화폭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멀리 일출봉과 초가집이 잇고 무기력해 보이는 노인이 척박한 황토색을 배경으로 또각또각 걸음을 재촉한다.
조랑말, 까마귀, 초가집, 그리고 검은색 돌담과 황토 빛 바탕이 만드는 강한 대비에서 화가의 유별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남도의 강렬한 햇살에 발색된 듯한 이 황토 빛은 원시성을 담은 태고의 빛으로 우리에게 근원의 이야기를 전한다.
성긴 붓 자국에서 이 지방 화산석의 뾰쪽한 모서리가 보인다.
흙 냄새와 시름이 흠씬 배인 화폭이 황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한없이 고독한 리듬이 배어있다.
그 고독 하기만한 뉘앙스가 이 갈색 캔버스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화백은 일관되게 제주도의 질박한 풍광에서 그림의 모티브를 찾았고 화폭 속에 노인을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갈색 물감 속에 동화되어 잇다.
이렇듯 변시지의 제주 그림들은 인간의 삶에 뒤섞여 있는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요소들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마주하며 소박하고 거침없는 표현들로 우리에게 강렬한 감동을 선사한다.
어망에 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
수문에 갇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갈매기가 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하루살이 하루 산 몫의 바다도 빠져나와
한 자리에 모인 살결이 희다
이제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 자리
그대로 천년만년 길어서 싫다
꽃이 사람 된다면 바다는 서슴지 않고 물을 버리겠지
물고기가 숲에 살고 산토끼도 물에 살고 싶다면
가죽을 훌훌 벗고 물에 뛰어들겠지
그런데 태어난대로 태어난 자리에서
산신에 빌다가 세월에 가고
수신께 빌다가 세월에 간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는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이름 모를 바람-
제주도. 이곳은 예로부터 임금님 용안에서 벗어난 단절의 땅이었다.
좌천되었다 싶은 관리들이 만든 소외와 유리감 때문에 더욱 멀리 떨어져 있는 세상이었다
하루 속히 붓짐을 싸서 뭍으로 떠나야 하는 이방인들이 모인 곳이었고 이제나저제나 임금님 부름에 목을 빼고 기다리던 관리들이 연북정에 가부좌를 틀고 모여 앉아 발바닥 만지는 일밖에 할 일이 없던 곳이었다.
이렇듯 제주는 언제부터인가 군마 사육을 위한 장소로 폄하 되거나 좌천된 이들의 자조 섞인 농담 속에 유배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방인들이 만들어 놓은 나그네 문화가 제주도에 자리잡게 되었고 그 피해는 작고 순박한 갈색 잠방이를 입은 사람들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졌다.
불과 반세기 전에는 이데올로기의 탈을 쓴 집단 히스테리와 그 광풍이 다시 한번 이곳 순진한 섬사람들을 원한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고 그들은 다시 입에 담기 꺼려지는 묵시록을 안은 채 살아가야 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시인이 노래한 절망의 배경인지도 모른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이 음악에서 아일랜드와 몽골의 가락의 미묘한 관련성을 느끼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게다가 이들이 서로 어우러져 제주의 풍광을 노래하는 것을 보면 대단히 절묘한 섞임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매우 다양한 연주 형태를 보이는 것은 양방언의 가락이 뿜어내는 흥은 이제 희망을 이야기한다.
제주의 가락이 섞여있을 새로운 월드뮤직, 혹은 ‘에닉스 퓨전’을 들을 것 같은 예감이다.
성산포의 어느 장날에는 굿거리 장단에 태평소의 익살스런 가락이 있어야 할 듯 하다.
밝은 색으로 제주도의 새로운 경치를 그려 놓은 양방언의<제주의 왕자 Prince of Cheju>를 연주 했으면 좋겠다.
양방언이 들려주는 분명한 가락에는 오히려 죤 테시(1959~)의 톤이 섞여 있고 에냐(1961~)의 소리결 속에 갈색 잠방이를 입은 사람들의 노래가 숨어 있다.
무척 자유로운 그의 음악적 시선과 섞임에 대한 의지가 과거 해녀들이 바다에 쏟아 놓앗던 넋두리에 밝은 새 옷을 입혀줄 것만 같다.
바다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제주도를 품에 안았고 기꺼이 젖줄이 되어주었던 여인들은 바닷가 언덕 위에 석상 하나를 남기고 모두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타고난 정염과 로맨스가 버겁기만 했던, 생존의 인고를 한 몸에 끌어 안았던 여인들이었다.
이제 누구도 떠나버린 여인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유람객들의 들뜬 웃음소리가 뿌려진 자리에 고허함이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여인들이 떠난 자리에 어느새 시인과 화가와 음악가만이 물위에 뜬 정염을 음미하고 있다.
화가는 질박한 잠방이 속에서 여인들의 체념을 보았고 음악가가 그 조화를 노래한다.
시인은 성산포 앞 바다 파도 소리에 아낙네들이 밷어놓은 크고 작은 앙심을 다시 듣는다.
일어설 듯 일어설 듯 쓰러지는 너의 패배 발목이 시긴 하지만
평면을 깨뜨리지 않는 승리 그래서 네 속은 하늘이 들어앉아도 차지 않는다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아니면 일제히 패배하라
그러면 잔잔하리라 그 넓은 아우성으로 눈물을 닦는 기쁨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성산포에는 살림을 바다가 맡아서 한다 교육도 종교도 판단도 이해도
성산포에서는 바다의 횡포를 막는 일 그것으로 독이 닳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오늘 아침 하늘은 기지갤 펴고 바다는 거울을 닦는다
오늘 낮 하늘은 낮잠을 자고 바다는 손뼉을 친다
오늘 저녁 하늘은 불을 켜고 바다는 이불을 편다
바다가 산허리에 몸을 굽힌다 산은 푸른 치마를 걷어올리며 발을 뻗는다
일체에 따듯한 햇살 사람들이 없어서 산은 산끼리 물은 물끼리
욕정에 젖어서 서로 몸을 부빈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칼이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양이다
그릇 밖에서 출렁이는 서글픈 아우성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갈증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 데서 더 깊은 데서 더 여유 있게 산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하늘이여 바다 앞에서 너를 쳐다보지 않는 것을 용서하라
하늘이여 바다는 살았다고 하고 너는 죽었다고 하는 것을 용서하라
너의 패배한 얼굴은 바다 속에서 더 아름답게 건져내는 것을 용서하라
그 오만한 바다가 널 뜯어먹지 않고 그대로 살려준 것을 보면
너도 바다의 승리를 기뻐하리라..
하늘이여 내가 너를 바다 속에서 너를 보는 것을 용서하라.
하지만 제주도는 아름다운 그림이 잇는 곳이다.
크지않은 오름들이 겹쳐져 구름 위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다.
섭지코지에 부딪치는 파도가 아름다운 음악으로 흐른다.
알 수 없는 신령한 기운이 배인 삼방산이 있고 일출봉이 커다랗게 솟아오르는 해를 품에 안는다.
양방언(1960~)의 <이름 모를 바람 Wind with no name> 선율에서 어두운 황토색보다 더 맑은 색채의 제주도 풍광을 보게 된다.
화가와 시인이 노래했던 어두운 제주의 풍광을 언듯 엿들을 수 있지만 선대의 고통스러운 고향을 경험하지 못한 그의 가락은 밝은 빛을 띠고 있다.
키보드 사운드가 비교적 낮은 음을 들려주고 한 몽골 여인의 목소리가 멜로디 전반을 애잔하게 물들인다.
양방언의 피아노와 귀에 낯선 이국 악기 ‘마두금’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무리없이 대화를 이어가며 아주 섬세한 멜로디 라인을 이룬다.
몽골여행에서 언은 악상을 연주하며 뜻 모를 이국가락의 가장 밑바닥에 제주여인들의 이야기가 묻어난다.
아일랜드풍 가락의가장 밑바닥에 제주 여인들의 시린 사연이 가라앉아있음을 보게된다.
아침 여섯시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필거야
아침 여섯시 태양은 수 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성산포에서는 푸른색 이외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설사 색맹일지라도 바다를 빨갛게 칠할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말만 하고 바다는 제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약하다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
모두 막혀 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있는 것처럼 보일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거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원한을 만들고
바다가 그 원한을 삼킨다’
출처 : 미술, 뉴에이지를 만나다 : 시공아트 2005 양한수 지음
양방언 - A Wind With No Name <이름 모를 바람>
노래 - 치치크마(QIQIgemaa, 내몽골)
첫댓글 내고향성산포성산포`
터진목이라는 곳이있는데 옛날 4.3사건때
남자들을 전부 잡아다가 죽여버렸다는곳
아픔도많고 아름다움도 많은곳
성산포,,,,,,,아픔도 많치만,,,,,,, 일출의 美............ 그 아름다운 고장
아지니님 고향..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올린 글이 좀 길어서 읽기에 불편하지는 않았는지요?,,,,,,,,,,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변시지님의 아름다운 그림이
엄마 품같은 생각이 들었네요
좋은 자료 잘봤습니다
바다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제주도를 품에 안았고 기꺼이 젖줄이 되어주었던 여인들은 바닷가 언덕 위에 석상 하나를 남기고 모두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타고난 정염과 로맨스가 버겁기만 했던, 생존의 인고를 한 몸에 끌어 안았던 여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