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TV가 광복 71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세 번째 순서로 김구·이승만 등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나라와 민족, 교회에 자기 자신을 바쳤던 민족운동의 거인 전덕기 목사의 삶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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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전덕기 목사는 당시 이승만, 김구 등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던 인물이다.ⓒ뉴스미션 |
‘평등한 나라, 민중 목회’ 꿈꿨던 목회자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서울 북창동에서 숯장사를 하며 살아가던 소년 전덕기는 미국 감리교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난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했던 스크랜턴의 영향을 받아 민중을 위하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스크랜턴 선교사가 세운 상동교회에서 전도사로, 담임목사로 재직했던 전덕기 목사는 영혼 구원을 위해 노방전도에 힘썼다. 하루에 천여 명의 평민에게 전도지를 나눠줄 만큼 열정적인 목회자였다.
전 목사는 또한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던 인물이다. 당시 상동교회는 상동청년회란 이름의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어 1900년대 민족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전덕기 목사가 서 있었고 이승만, 주시경, 최남선 등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고종의 명령으로 전 세계의 한일합방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던 ‘헤이그 특사’도 상동교회 지하에서 논의됐고 한국민족운동의 대표적인 비밀결사로 알려진 ‘신민회’도 이곳에서 결성됐다.
이렇듯 전덕기 목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세력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르며 거대한 독립운동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 세력을 ‘상동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1911년 일제는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해체하기 위해 데라우찌 총독 암살을 꾀했단 누명을 씌워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인다.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로 인해 전덕기 목사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신민회 조직은 와해되고 전 목사와 뜻을 함께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뿔뿔이 흩어진다.
전덕기 목사는 1914년 3월 소천하기 전까지 ‘민중을 위한 목회자’로 활동했다. 가족이 죽어도 돈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했던 당시 백성들을 위해 직접 시신을 묻어주고 장례식을 열어주기도 했다.
전덕기 목사의 장례식이 거행됐을 때 십 리(약 4km) 밖까지 백성들의 행렬이 이어졌다는 일화는 전 목사가 살아생전 백성의 친구가 돼 주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상동교회 서철 목사는 “전덕기 목사는 민중을 사랑한 목회자이자 끔찍이도 나라를 사랑했던 독립운동가였다”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의 정신을 본받아 이 시대 소외된 이웃을 돌보며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보탬이 돼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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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교회 전시실에 있는 전덕기 목사 기념비. 백범 김구는 전덕기 목사의 소천 소식을 듣고 이 기념비에 두루마기를 올려놓은 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뉴스미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