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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으로 가득 찬 축생의 삶, 비굴해 보이는 육식동물과 기품 있어 보이는 초식동물
사람 몸 받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이를 ‘맹구우목’의 비유로도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구멍의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하나의 구멍이 뚫린 멍에게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번 타락한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고 나는 말한다.”(S56.47)라 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되었지만 낮은 지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쩌다 인간이 되긴 했지만 이전에 세 가지 원인 없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도 마치 축생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 전생에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한 자라면 보다 높은 마음을 계발하여 선처에 나거나 해탈하여 열반에 들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들은 전생에 무탐, 무진, 무치라는 원인 있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먹는 것과 번식하는 것에만 신경써서 마치 축생처럼 살아갑니다. 이렇게 축생처럼 살다 죽으면 다시 인간 몸을 받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축생의 삶이란?
부처님은 인간 몸 받기 힘든 것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적고 인간과는 다르게 태어나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S56.61)라 했습니다. 여기서 인간과 다르게 태어나는 뭇삶들이라 지옥, 축생, 아귀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러한 세계는 괴로운 곳입니다. 이와 같은 악처에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S56.61)라 하시면서 사성제를 설합니다.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관찰하면 존재 자체가 괴로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괴로움은 느낌이 아니라 형성된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괴고성’이나 ‘행고성’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세 가지 악처 중에 인간의 눈으로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축생입니다. 축생의 삶이야말로 괴로움 그 자체라 볼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축생이라 했을 때 소나 돼지, 개와 같은 가축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태어난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물에서 사는 것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에서 사는 것들이 육지에서 사는 것들 보다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물의 경’에서도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육지에 생겨나는 뭇삶들은 매우 적고 물에서 생겨난 뭇삶들은 매우 많다.”(S56.65)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육지 보다는 물에서 생명체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생명체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잠부디빠에 풀과 나뭇가지가 모두 고갈되더라도 커다란 바다 속에는 작은 꼬챙이로 꿰뚫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생물들이 있다.”(S56.36)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생명체들의 특징에 대하여 부처님은 “괴로운 세계는 이와 같이 넓고 넓다.”(S56.36)라 했습니다. 축생이라는 세계 자체가 괴로운 세계임을 말합니다.
연민으로 본 축생의 탄생
요즘 유튜브에서 동물영상을 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탄생과 관련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새의 탄생을 즐겨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새의 부화와 양육, 비상에 대한 이야기는 TV의 자연다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생의 탄생에 대한 것은 TV에서 한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튜브시대를 맞이 하여 개나 돼지 등의 탄생에 대하여 여과 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개나 돼지의 탄생 순간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유튜브에서 본 개나 돼지 새끼 탄생순간을 보니 기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축생들도 우리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때가 되면 암수가 짝을 이루어 그 결과로서 생명체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입니다.
유튜브에서는 성장과정도 보여 주는데 새끼들을 보면 귀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축생은 축생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축생으로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결국 괴로운 세계에 태어나는 것에 대한 연민심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악처에 대하여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A7.74)라 했습니다. 여기서 네 가지 세계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괴로움의 존재처이고 의지처인 까닭에 나쁜 곳이고, 성냄이 많아 사악한 업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처라 나쁜 곳이고, 악한 일을 저지른 자들이 분리되어 이곳에 떨어지는 까닭에 비참한 곳이고, 혹은 멸망하는 자가 여기에 사지와 지체가 찢겨져 떨어지는 까닭에 비참한 곳이다. (Vism.13.92)라 했습니다. 정리하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은 차례로 축생(tiracchana), 아귀 (petivisaya), 아수라(asuranikāya), 지옥(niraya)을 말합니다.
축생은 괴로운 곳으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 아무리 귀여워도 축생의 운명을 생각하면 비참하기 그지 없습니다. 모든 축생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빨리 성장하기 위해서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어미개의 젖을 빠는 새끼개들은 필사적입니다. 이런 현상은 새끼돼지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가축들은 태어나는 순간 운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닭은 일령으로 따져서 30일이 지나면 출하됩니다. 돼지는 월령으로 따져서 3개월이상 되면 출하 됩니다. 소는 최소 6개월 이상 걸립니다. 돼지가 태어나는 순간 필사적으로 어미의 젖을 빨지만 몇 개월 지나면 사람들의 식탁에 오를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폐되어 있는 죽음과 탄생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죽음은 은폐되어 있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도 죽은 자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영정만을 보면서 추도할 뿐입니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장례식장에서도 문상객을 위하여 식사가 제공됩니다. 마찬가지로 탄생도 은폐되어 있습니다. 아기는 병원에서 태어납니다. 의사와 간호사의 도움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가족이라도 탄생의 순간을 볼 수 없습니다. 마치 공중파나 케이블 TV에서 탄생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과 탄생은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죽음과 탄생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요즘은 유튜브시대라 죽음은 몰라도 탄생의 순간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탄생은 고통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죽음도 고통입니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탄생에 대하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탄생은 결국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절망이라 한 것입니다.
입태의 괴로움을 보면
아기가 탄생할 때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기는 울음으로서 이 세상에 나왔음을 신고합니다. 울음이라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긴 하지만 어쩌면 이후 전개되는 험난한 삶의 과정을 미리 예견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탄생의 순간은 괴로움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이에 대하여 입태의 괴로움, 임신에 기인하는 괴로움, 출산에 기인하는 괴로움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입태에 대한 괴로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뭇삶이 모태 가운데 생겨나면서 청련, 홍련, 백련 등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위장 아래에 직장 위에 복벽과 척추 사이에 극히 좁은 암흑의 여러 가지 악취로 가득 차 있는, 심히 더럽고 혐오스러운 자궁에서 마치 썩은 생선이나 부패한 죽이나 오물구덩이 등의 가운데 벌레처럼 생겨난다. 그는 그곳에서 생겨나 열 달 간 모태에서 발생한 열에 의해서 자루에 들어간 음식처럼 삶아지고 경단처럼 쪄져서 구부리거나 펼 수도 없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이것이 입태에 기인한 괴로움이다.”(Vism.16.37)
입태가 되려면 성적교섭이 있어야 합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는 순간 생식세포의 분열이 시작됩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는 등 시간에 지남에 따라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처음에는 벌레와 같은 작은 모양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형태가 갖추어집니다. 이와 같은 태아의 성장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인다까의 경’에서는 “최초로 깔랄라가 생겨나고 깔랄라에서 압부다가 되고 압부다에서 빼씨가 생겨나고 빼씨가 가나로 발전하고 가나에서 빠싸까가 생겨나고 머리카락과 털과 손톱 발톱이 생겨나네.”(S10.1)라 했습니다.
출산의 괴로움에 대하여
태아는 태내에서 연꽃처럼 우아하기 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막에 둘러싸여 잔뜩웅크린채 성장하는데 이때 “구부리거나 펼 수도 없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라 했습니다. 마치 오물구덩이의 벌레처럼 생겨난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산달이 되어 태어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출산의 괴로움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출산할 때는 업생적 바람에 의해서 회전되어 지옥에 떨어지는 것처럼 두려운 산도를 향하면서 열쇠구멍으로부터 끌려나오는 큰 코끼리처럼, 압착되는 두 산 사이에서 가루가 되는 지옥의 뭇삶처럼, 극히 좁은 산문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다. 이것이 출산에 기인하는 괴로움이다.”(Vism.16.40)
보통 산모가 아기를 낳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산모들의 말에 따르면 아기를 낳는 다기 보다 ‘아기가 밀고 나오는 듯한’ 느낌이라 합니다. 출산의 조건이 맞았을 때 진통이 시작되는데 극심한 산통을 겪는 것도 출산하는 것도 때가 되어서라고 보는데 청정도론에서는 이에 대하여 “업생적 바람에 의해서”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출산의 고통은 산모뿐만 아니라 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하여 “열쇠구멍으로부터 끌려나오는 큰 코끼리처럼”라고 비유했습니다.
대포를 쏘듯 한배에서 여러 마리가
유튜브에서 개나 돼지의 출산장면을 보면 사람처럼 힘들게 낳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배에서 여러 마리를 낳기 때문입니다. 돼지의 경우 보통 열 마리 가량 낳습니다. 새끼를 낳을 때 장면을 보면 마치 대포를 쏘는 듯합니다. 힘 한번 주면 쑥하고 나옵니다.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새끼가 많은 경우는 출산의 고통은 덜한 것 같습니다.
개나 돼지의 출산장면을 보면 측은 하기 그지 없습니다. 눈도 뜨지 못하는 새끼들은 태어나자 마자 어미젖을 찾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먹을 것을 찾는 것은 생존본능이 마치 프로그램 된 것처럼 작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나 돼지의 경우 보통 2열로 모두 10개 내지 12개 가량의 젖꼭지가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두 개이상의 유방이 있다면 동물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열 마리 가량 되는 새끼가 열심히 젖꼭지를 빠는 모습을 보면 생존에 대한 원초적 욕망이 발동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갓 태어난 누우새끼는
일반적으로 개나 돼지와 같은 가축들은 새끼들을 많이 낳습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크게 기뻐할 일일 것입니다. 돼지가 새끼를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수익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튜브동영상을 보면 야생의 염소나 소, 말 등은 한마리 낳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중에 누우(Gnu)의 출산장면을 보면 감동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누우를 와일드비스트(Wildbeest)라 합니다. 누우는 무리지어 있습니다. 때가 되면 풀을 찾아 이동합니다. 이동하는 장면은 장관입니다. 그런데 매년 이동하는 과정에서 출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갓 태어난 누우새끼는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스스로 일어납니다. 몇 십분이 지나면 어미를 따라 이동합니다. 그것은 사자, 치타, 하이에나와 같은 육식동물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가축의 특징은 많이 낳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성숙된 상태입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야생에서의 동물은 뱃속에서 이미 다 자란 상태로 나옵니다. 나오자 마자 일어서고 걷기시작하고 뛰기 시작합니다. 만약 걷지 못하고 뛰지 못한다면 주변에 있는 육식동물의 먹잇감이 될 것입니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보다 더 낫다
유튜브에서 누우의 출산장면을 보고서 초식동물이 육식동물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사자, 치타, 하이에나와 같은 육식동물은 사냥을 해서 먹고 살지만 누우와 같은 초식동물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풀이나 나뭇잎파리 등을 먹고 살아도 커다란 몸과 우람한 뿔을 갖추고 있습니다. 육식동물이 공격을 하면 피하기도 하지만 뿔로 물리치기도 합니다.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으면 안심입니다.
사자, 치타, 하이에나와 같은 육식동물은 주로 초식동물을 공격하여 먹이로 삼습니다. 그러나 사냥한다고 하여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냥을 못하면 굶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초식동물이 훨씬 더 낫습니다. 비록 축생이 괴롭다고 하지만 먹을 것을 확보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이 훨씬 더 낫습니다.
누우의 모습을 보면 마치 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몸집이 커다란 황소가 연상됩니다. 실제로 황소는 믿음직 해 보입니다. 덩치가 큰 코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사냥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풀과 나뭇잎만 먹어도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소나 코끼리와 같은 초식동물이 늘 배고픈 사자나 호랑이, 치타, 하이에나 보다 덜 괴로운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에 대하여 소나 코끼리로 묘사한 장면이 눈에 많이 띕니다.
비굴한 육식동물 기품있는 초식동물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을 개나 돼지로 묘사한 장면은 없습니다. 부처님에 대하여 사슴, 황소, 코끼리, 사자로 묘사된 경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초식동물이 대부분입니다. 육식동물로서는 사자가 유일합니다.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 하지만 힘이 빠지면 비참한 상황에 처해집니다. 늙고 병들어 힘이 빠지면 사냥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역에서 쫓겨나 방황하다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초식동물은 그래도 굶주림에 있어서는 육식동물보다는 자유스럽습니다.
같은 축생이라 하더라도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육식동물이 유리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육식동물이 사냥을 못하게 되었을 때 이제 갓 낳은 누우 새끼를 사냥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몹시 비굴해 보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비록 풀을 뜯지만 날카로운 뿔을 가진 당당한 체격의 누우가 오히려 더 기품 있어 보입니다.
황소로 비유된 부처님
축생의 세계는 지옥 다음의 악처로서 괴로운 곳입니다. 그런데 축생도 축생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사자, 치타, 하이에나와 같은 육식동물일 것입니다. 갓 태어난 초식동물을 먹잇감으로 삼는 비굴함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개나 돼지 같은 잡식동물이 있습니다. 잡식동물은 주인에 의해 먹이가 보장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먹잇감이 된다는 점에서 비참한 존재입니다.
같은 동물이라도 누우나 소나 말과 같은 초원의 초식동물은 먹을 것에서 자유롭습니다. 하나만 출산하는데 거의 자란 상태에서 낳기 때문에 금방 뛰어다닙니다. 그래서 육식이나 잡식보다는 품위가 있어 보입니다. 유튜브동영상을 보니 비굴한 육식동물보다 기품있는 초원의 야생 초식동물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에 대하여 소나 코끼리 같은 기품 있는 초식동물을 비유로 들었나 봅니다.
“황소처럼 기품 있는
영웅, 위대한 선인, 승리자,
욕망을 여윈 님, 목욕재계한 님, 깨달은 님,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Dhp.422)
2018-12-13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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