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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8일 목요일
주차장에서 문무리가는 버스를 타고 갔다
문무리 종점에 내려서
엄마가 자주 이야기 해 왔던
문무리에서 고갯길로 두원역 까지 가 보기로 했다
아침 8시 20 분 버스로
문무리에 도착하니
9시 가까이 되었다
동네 아지매 한테 물어서
지금은 거의 나무가 자라서 길도 찾기 어려운 곳을
억지로 개울로 해서 올라가기 시작 했다
원래 김천 지도에서 보듯이
높이가 약 200 미터 정도 되는 괘 높은 고갯 길이었다
30 분쯤 올라가니
김천시에서가 감문면에서 괘 잘 다듬어 놓은 길과 만났다
내가 길을 잘못 찾아서 올라간것 같았다
그곳에서 약 20 분 정도 더 올라가니
조그만 나뭇가지에
"고소 산성 가는 길, 감문면 사무소" 이란
10년 정도 지났을까
낡은 등산 리본 묶은 놓은 곳이 몇개 눈에 보였다
그 길로 따라 올라가니 곧 고소산성 돌 흔적이 조금 나왔다
사진 몇장 찍고 고갯 마루로 해서 구례쪽으로 내려 오려다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카메라를 잊어 버렸다
큰애가 7년 전엔가 50 만원 주고 샀다고 했는데
요즈음은 구닥 다리가 되었겠지만
2 시간 가까이 2,3 번 왔던 길을 찾아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낙엽이 많아서 그랬는가
하여튼 아쉽지만
구례쪽으로 내려 오기 시작 하였다
문무리 쪽은 폭 6 미터 가까이 잘되어 있었는데
구려쪽은 별로 이었다
근처에 무덤 몇개 있고
하여튼 두원역 가까이서 김천 오는 버스르 타고 왔다
두원역은
용문산 능치리 가는 입구였다
고소 산성이 있었던 자리는 낙엽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는가
기와 쪼가리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동신 초등학교 옆 직지 냇가 옆에 있는
개이트 볼 연습하는 크기의 약간 넓다란 곳이 있고
고갯 마루 근 처에 물이 고인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그 곳 성안에서
농사도 짓고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흙도 약간 기름져 보였다
속문산 꼭 대기에도 성이 있었다지만
그곳 우물은 정상에서 상당히 아래에 있지만
고소 산성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문무리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산을 넘어서
60년대 이전 까지는 두원역을 통해서
김천으로 상주로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백운산 정상 조금 지나서
상주쪽으로 있는 고갯 길은
1960 년대만 해도 자주 이용하였다
우리 엄마 친정이 안송문인데
지금 이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살아 있다면 100 살 가까이 되는 이모와 외할머니와
우리 엄마 생일이 같은 날이 되어서
1960년대 여름 방학 때 외갓집에 가서 있으면
문무리에 살고 있었던 이종 사촌 형이 백운산 고개를
넘어서 외갓집으로 오곤 하였다
걸어서 오면 약 1 시간 조금 더 걸렸을까
그 고개 옆에 문무리 쪽으로
"해신 방구"가 있다
엄마가 정신 멀쩡 할 때
시집오기 전에 해신 방구에 가서 놀았던 이야기를 자주 하여서
나도 지난해인가 물어서 가 본 적이 있다
내가 본 것은 그렇게 큰 바위는 아닌 것 같았는데
엄마 말로는
그 주위에 있는 많은 동네 사람들이 놀러 왔다고 하였다
그러니 대충 지금 부터 70년도 더 된 이야기 이니
아마 1930-40 년대 쯤
하여튼 이런 점 고려하여 등산로라도 잘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오가며 알 수 있을 터인데
지금 송문가는 버스 종점 옆에는
"왜터 재"라는 임진 왜란때 일본군이 도망 가던 고개 였다나
아버지 돌아 가기 전에는 '이터재'라고 들은 것 같은데
그 재를 넘어서 상주쪽으로 다닌가 보니다
두원역 가까이도 비닐하우스 만들어 놓고
포도농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다른 농사 보다는 하기 쉬워서 일까
다른 농사를 지으려면
4000 만원 이상하는 터렉터도 있어여 하고
경운기도 있어야 기본인데
포도 농사는 관리기만 있으면 되어서 그럴까
하엿튼 포도 가공을 빨리 연구해서 보급 시켜야 합니다
포도는 나름대로 영양가가 많고
똥 냄새도 향기롭습니다
대양산은 보기에도 뵤족한데
며칠전에 가보니
정상에서 100 미터 가가이 부터 거의 기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낙엽에 발이 미끄러져서 올라갈 수 없어요
나는 60년대 국민학교 다날때 동네 형들과 같이 올라갔을
때는 꼭대기에서 황계동 경지정리 한게 보엿고
더 멀리는 남산동 족 얼마도 보였지요
며칠 전에는 능골 이라는 곳이 있다고 김천 동네
소개란에 나오길래
가 보았는데 나무가 우거져서 찾지 못한 것 같아요
남전쪽으로 댕모라는 곳이 있어서
저지난해인가
금라쪽에 있는 도로 팻말에
대양묘 '大陽妙'
가 있길래 내가 묘를 찾아가겠다고
동내 사람들한데
물으니
'대양묘'가 '댕모'라 하더라구요
이것은 아마 한글이 만들오기 전 만들어져서 내래오는
이두 글자 같아요
한자로 만들어 놓은 동내 이름이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글자가 없으니 한자를 빌려서표기한 우리 고유의 발음
경북 김천시 감문면 문무마을의 마을 회관앞에는 현재 여산팔경(余山八景)의 비가 설치되어 있다,
이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옛날 문무국이라는 소국의 나라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현재는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설화가
무시할수 만은 없는것 아닌가 한다.
余山八景 (여산팔경)
連豊畔照 연풍산이 물가에 비치니
灰野蓮桑 잿들 뽕나무는 연이어 풍년이네
鳥岩怪石 세심산 괴석에 새가 나르고
將胄歸雲 장주산으로 구름이 돌아간다
堂山淸風 당산에서 부러오는 맑은 바람에
五幕之情 오모 사람들 정이 넘친다
姑蘇山城 고소산성의
爐岩獨臺 노암은 홀로 서있네
<김천의 마을과 전설에서 발췌>
위의 여산팔경의 싯귀에 등장하는
팔경(연풍산.잿들.세심산.장주산.당산.오모.고소산성.노암)의
지명은 실제로 마을의 주변에
지금까지 그대로 불리워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문무리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여산팔경의 비(碑)의 싯귀는
위의 여산팔경과 약간의 싯귀순서가 바뀌어 있다.
그리고 연풍반조( 連豊畔照 )가
회관앞의 비에는 영풍반조(嶺風畔照)로 차이가 있는데
향후 다시 연구할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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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문산성
해발 600여m에 흙·돌로 쌓은 산성
향토사학계 “삼한때” 학계 “삼국때”
감문국 멸망 전후로 축조시기 異見
“감문국 4천 인구로는 축성 불가능”
기와 파편 등 유물 ‘신라의 城’무게
향토사학계 “勝者역사에 가려” 반론
◆ 스토리 브리핑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의 주요유적 중 하나는 산성(山城)이다. 김천시 개령·감문면 일원에 위치한 속문(俗門)·고소(姑蘇)·감문(甘文)산성이 감문국의 대표적인 산성 유적지다.
김천지역 향토사학계는 산성의 축조시기를 감문국이 존재했던 삼한시대(三韓時代)로 추정한다. 대부분 군사방어용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천시 개령면 일대의 평야로 외부세력의 침입이 있을 때, 주변 산성을 거점으로 대항했다는 것이다.
반면 학계는 산성의 축조시기를 감문국 멸망 이후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가 축조했거나 그 후대에 지어졌다고 추측한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개·보수를 거치며 사용되다 현재의 형태로 남아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축조시기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이들 산성이 감문국 역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1천년을 훌쩍 넘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기와 파편 등 삼국시대 유물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성벽과 그 부속건물의 흔적은 옛 시대상을 엿보는 자료로 활용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8편은 감문국의 유적으로 알려진 산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속문산성에 관한 내용이다.
# 감문국 멸망의 역사와 함께한 산성
속문산성은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白雲山, 해발 618.5m)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백운산은 소나무가 무성해 ‘송문(松門)’이라 불렸으며, ‘속문산(俗門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향토사학계는 ‘감문국 산성의 정확한 축조시기를 알 수 없다’면서도, 속문산성을 감문국의 주요 유적으로 보고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의 존재는 신라와 같은 승자의 역사에 의해 가려졌다. 지방을 근거로 존립했던 소국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 흔적을 찾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문산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문헌에는 “석축 주위 2천455척, 고 7척, 내유 2천2지 유군창(石築周圍二千四百五十五尺 高七尺 內有二泉二池 有軍倉)”이라며 속문산성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산성의 규모와 샘, 연못의 수까지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속문산성의 현재 모습도 문헌의 기록과 거의 흡사하다. 속문산성은 백운산 정상부를 기준으로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내려가는 계곡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상당 부분이 무너져내렸지만 산 정상부 능선을 따라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토석 혼축성’이 이어져 있으며, 옛 문헌에 기록된 샘도 발견할 수 있다.
속문산성이 위치한 백운산의 지명은 감문국 멸망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천지역에는 감문국의 최후와 관련된 구전이 전해지는데, 그 이야기의 배경에 백운산과 속문산성이 있다.
구전에 따르면 서기 231년, 신라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감문국 백성과 군사들은 속문산성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른다. 감문국으로 쳐들어온 신라군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영남지역 소국을 연이어 정복하고, 잦은 전투를 경험한 신라의 전투력은 여타 읍락국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라군의 수장은 신라 이사금의 동생이자 정복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석우로 장군이었다.
이미 예견된 전쟁이었지만, 감문국 백성들 역시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 비록 소국의 백성이었지만 죽을 각오로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했다. ‘감문국 군사 80여 명이 백운산 속문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묘사한 구전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최후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감문국은 망국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백운산’은 이때부터 불려진 지명이라고 한다. ‘속문산성에서 죽은 감문국 백성들의 영혼이 흰 구름이 되어 산 주변을 떠돌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감문국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구전일 뿐이다. 삼국사기를 제외하고는 구체적 기록이 없다.
김천시민들은 감문국 멸망의 역사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평소 백운산을 즐겨 오른다는 김천 백운산악회 총무 조규철씨(64)는 “어린 시절 신라군이 (백운산에서) 감문국 군사를 모조리 다 죽였다고 (어른들에게) 들었다. 감문국이 신라에 병합되지 않고, 하나의 나라로 이어지고 번성했다면 김천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 신라 방어의 최전선
김천 향토사학계의 주장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속문산성이 감문국 멸망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영남지역 산성을 연구한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속문산성의 축조시기는 5세기 말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6~10세기 신라 기와가 (속문산성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거점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특히 신라와 백제의 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김천지역 산성들이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조 연구사는 “김천 지역을 둘러싼 양국(신라·백제) 간 갈등은 이른 시기부터 있었기에 신라의 입장에서는 군사목적용 산성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사는 학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실제로 신라와 백제는 6세기 들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진흥왕 15년(554)에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의 목숨을 빼앗고 영남 서북지역을 힘으로 압박했다. 그러나 진지왕 2년(577)에는 백제가 신라 서쪽의 영토를 침략하는 등 백제의 저항도 매우 거셌다.
신라 입장에서 김천지역 산성은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김천 북쪽에는 신라의 제2도성으로 불리던 사벌주(상주)가 있었고, 추풍령은 백제·고구려·가야 세력이 만나는 접점이었다. 신라는 고구려·백제·가야를 견제하기 위해 김천지역이 꼭 필요했고, 부속 산성들은 세력 확장의 최전선이었다. 이 때문에 김천지역 산성은 효율적인 방어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고구려·백제·가야가 연합해 신라로 진격한다면 김천지역은 서라벌(경주)로 향하는 가장 짧은 진격로였기 때문이다. 김천지역 산성만 지켜낸다면 능히 서라벌을 지킬 수 있었다.
# 조선시대까지 활용된 산성
김천지역 산성들이 ‘신라의 성’이라는 주장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전문가들은 “감문국과 같은 작은 나라의 규모로는 성을 쌓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삼십인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중략)…’이라는 동사(東史)의 기록을 볼 때 감문국의 인구는 기껏해야 4천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축성에는 대규모 인원 동원이 필요한데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는 그 소요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신라 정도의 규모를 갖춰야 산성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역시 ‘신라의 성’이라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속문산성에서 발견된 기와 대다수는 삼국시대 신라의 것으로, 돌로 된 성곽의 축조방식 또한 신라의 양식으로 알려졌다. 특히 전통시대의 기와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관청이나 사찰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서야 널리 사용됐다.
한편, 김천을 비롯한 전국의 산성들은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한반도 대부분의 산성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다시 사용되었는데, 속문산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5년 김천시와 경북대박물관이 발행한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에 따르면 속문산성의 주요 역할은 평상시에는 교통의 거점으로 백성을 감시 관리하는 것이었다. 전시에는 인근 주민의 대피지 내지 방어 거점의 역할을 담당했다.
"감문국 유적 되살린다" 김천 문화재 지정 신청 | |
산성·고분군 등 선사 유물 분포 확인…등산로·역사탐방로 등 개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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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에 따르면 2004년부터 경북대 박물관에 의뢰, 감문면 문무·보광·송북·삼성리, 개령면 광천·덕촌·동부·서부리 일대에 주요 문화유산 정밀지표조사 결과, 감문·속문·고소 등 산성 3개소를 비롯 지석묘 등 15기, 입석 1기, 고분군 5개소 286기 등 수 많은 선사시대 유물의 분포를 확인했으며 현재 현황 측량 완료 단계에 있다는것.
市는 측량이 끝나는 다음 달 쯤 경북도에 기념물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할 계획이며 지정이 되면 발굴 조사와 함께 문화유적지 정비 및 관광지 개발 사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市는 이 일대에 16km의 등산로 개설, 편의시설 설치 등으로 역사 탐방로 및 삶의 체험장으로 개발할 계획.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보전 및 연구 가치가 높고, 전체를 발굴할 경우 최근까지 발굴된 유물의 수 십배에 달하는 유물이 더 발굴될 것으로 보여 국가 지정 유적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시는 밝혔다.
감문국 되살리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져 23일 김천문화원에선 김천시 지역혁신협의회 주최로 감문국 재조명 및 관광자원화를 위한 세미나가 향토사가, 주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이근구 김천 향토사연구회장은 감문국 유적에 대해, 이석호 향토사가(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는 관광개발 계획을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이석호 위원은 "감문국 유적을 되살리면 직지사·청암사 등 기존의 명승 고찰과 함께 김천은 가야문화와 불교문화 중심의 테마관광 코스로 손색이 없다."며 "지역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이 타지역 박물관, 대학교 등에 임시 보관되고 있어 감문국 박물관 건립이 시급하다." 고 주장했다. 한편 구미·상주와 접경을 이룬 감문국 지역은 청동기시대 유물인 지석묘와 횡혈 석실묘 등이 많이 발견돼 청동기 때부터 사람들이 집단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김천 문무리∼상주 이화리 고갯길은 &&&&&&& 경북 김천시는 김천의 뿌리인 감문국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관광자원화하기 위한 ‘감문국 이야기나라’를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조성한다고 7일 밝혔다. 김천시에 따르면 이 사업은 지난해 중앙투융자심사를 거쳐 지역발전특별회계 및 자율사업으로 실시되며, 총사업비는 160억원 규모로 올해 확보한 예산은 6억 원이다. 감문국은 김천시 개령면 감문면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삼한시대 읍락국가다. 감문국 이야기나라 조성사업은 역사문화전시관을 건립해 감문국 유물을 비롯, 김천 지역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하고, 금효왕릉을 발굴, 감문산성과 고소산성 정비, 양천리 고분 정비, 고인돌공원 조성 등으로 추진된다. 시는 올해 안으로 전시관 건립부지를 선정, 설계 용역을 발주하고 감문면 삼성리의 금효왕릉 부지를 매입하는 등 왕릉발굴 준비를 마칠 계획이다. 박보생 김천시장은 “우리 김천시의 역사인 감문국의 흔적들을 밝혀 김천시에 존재했던 고대국가 감문국의 존재를 알리는 한편 시민들에게 휴식공간 제공과 관광인프라구축에 우리시가 적극 앞장 설 것이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