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2007년 원주에서 대전으로 생활의 거처를 옮겼습니다. 직장을 이직하는데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죠. 낯선 환경, 처음 대하는 사람들. 적응하기 위한 하루하루의 삶은 자신을 돌아볼 겨를을 주지 않았고, 3~4년을 훌쩍 흘려보내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남자는 깨달았습니다. 생존하기 위해, 잘 살아보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사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뭔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지요. 공허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사람 냄새가 그리웠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남자는 인터넷을 뒤졌고, 전화를 걸어 ‘야학’을 찾았습니다. 남자는 서울에서의 대학 시절에도 ‘야학’을 경험했었고, 원주에서도 경험했던 공간이라, 왠지 모를 친근감과 평안함을 느끼며 ‘야학’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2010년 남자는 대전에서 ‘야학’ 교사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원주에서 함께 했던 ‘야학’은 교사 4~5명이 중·고등교육과정을 모두 책임지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일주일에 2~3일 수업을 담당하며, 중등과정 학생들과 고등과정 학생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도와주었지요. 이에 반해, 남자가 찾은 대전의 ‘야학’ 규모는 상당히 컸습니다. 30여 명의 교사가 수업을 담당하고 있었고, 교사의 인력풀이 넓은 만큼, 일주일에 하루 정도의 수업을 담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습니다. 크게 부담이 없었지요.
또 다른 특징은 ‘교사 연수’, ‘수학여행’, ‘운동회’, ‘졸업식’ 등의 교외 행사를 시행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학생 분들께 학교(야학)생활의 추억을 만들어드리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는 교육철학에서 비롯한 행사들이었습니다.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남자에게는 당시 7살 그리고 4살, 유치원을 다니는 딸 둘이 있었고, ‘야학’ 행사에 두 딸은 언제나 남자와 함께였습니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교사 연수’는 물론이고, 매년 기획된 ‘수학여행’도 항상 함께였습니다.
경주, 목천 독립기념관, 용인 한국 민속촌, 여수, 군산 및 서천, 순천, 서울 인사동, 대전 오월드 등. 한 해 한 해, 함께한 추억들이 쌓여갔습니다. 물론 영원불변의 항상 그러한 것은 세상에 없지요! 딸들은 성장하며 스스로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여 나아갔고, 중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는 ‘야학’ 행사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쉬웠지만 그렇게, 또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남자는 ‘야학’에 수업하러 갈 예정입니다. 지난 12년간 오고 갔던 길이지만, 매주 금요일에 항상 해 왔던 수업이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할 것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 여인이 예비 ‘야학’ 교사로 남자와 함께 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유치원복을 입고 ‘교사 연수’와 ‘수학여행’을 따라다녔던 그 여자 아이가, 한 사람의 여인이 되어 ‘야학’ 교사의 길을 걷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