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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鞍山, 무악) 걷기
◇ 무악재 : 서대문구 현저동 1-404
- 안산의 이름을 붙인 무악재는 말안장 모양 같아 길마재, 안현으로 불리던 고개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가려면 고개를 넘게 된다. 이 고개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흔히 ‘무악재’라고 부른다. ‘무악재’란 이름은 고개 왼쪽에 두 개의 우뚝 솟은 봉우리 이름이 무악(毋岳), 또는 안산(鞍山)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연유한다.
이 고개를 ‘길마재, 한자로는 안현(鞍峴)’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두 개의 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마치 말안장(鞍峴) 모양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또 이 고개를 ‘무학재(無學峴)’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 한양 천도 때 무학 대사의 공로가 많았기 때문에 그와 인연이 있다고 하여 부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무악재’를 ‘모화현(母華峴)’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것은 현재 독립문이 세워져 있는 부근에 조선시대부터 중국 사신을 환영하는 모화관(母華館)이 있었기 때문에 ‘모화현’이라 했다.
그런데 차츰 후에 ‘모화현’은 고개 이름보다 지명을 나타내게 되었으므로 고개 이름은 무악재보다 ‘사현(沙峴)’이라고 더 많이 부르게 된 것 같다. ‘사현’이란 이곳에 모래바람이 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홍제동을 흐르는 모래내(沙川)가 있기 때문에 ‘사현’이라고 전하는 설이 있다. 또 ‘무악재’를 일명 ‘모악재(母岳峴)’라고 부르는 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현재 이 고개는 몇 차례에 걸쳐 깎아내려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고개가 높고 몹시 험준하였다. 그리고 양편에 밤나무와 수풀이 무성하여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무서운 고개였으므로 이 고개를 넘으려면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넘어갔기 때문에 ‘모아재’라고 부르던 것이 ‘모악재’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서울의 중심이 되는 산은 부아악(負兒岳, 현재의 북악산)인데 멀리에서 보면 산의 모양이 마치 어린애를 업고 다른 곳으로 나가려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이것을 막기 위해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을 어머니 산의 뜻인 모악(母岳)이라고 이름을 짓고, 그 서쪽에 있는 아현(兒峴)을 “떡을 파는 시장‘이라는 뜻의 병시현(餠市峴)이라고 이름하여 나가려는 아이는 떡을 주어 달래서 머무르게 하였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아이에게 벌을 주겠다는 뜻으로 남쪽의 약수동 고개를 벌아령(伐兒嶺)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악재를 모악재라고 부르게 된 연유가 있지만, 이 고개에 얽힌 역사적 사건 중에 ‘이괄(李适)의 난’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중엽, 광해군을 내몰고 인조를 새 왕으로 세운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큰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는 이괄(李适)에게는 일등 공신 대신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이괄은 당연히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당시 중국에 명나라를 이어 후금이 강성해지자 조정에서는 북쪽 국경에 방비를 소홀히 할 수 없어 장만(張晩)을 원수로, 이괄을 부원수로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은 불만을 품고 1624년 1월, 1만 명의 반란군을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왔다. 이에 서울 장안은 혼란이 일어나 인조는 충청도의 공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15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이괄은 선조 대왕의 아들인 흥안군을 왕으로 삼고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평양에서 서울까지 추격해 온 장만은 부하 정충신의 계략을 써서 밤을 이용하여 무악을 점령하고 이괄의 군대를 유인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이 사실을 알게 된 이괄은 장만의 군세(軍勢)가 약한 것을 업신여겨 성안의 관민들에게,
“장만의 군대쯤은 단숨에 무찔러 보이겠다. 싸움을 구경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성 위에 올라가 구경해도 좋다.”
고 소리를 쳤다. 그리고는 지금의 서대문 로터리 부근에서 군대를 좌우로 나누어 한 부대는 마포 방면으로부터 공격하게 하고, 다른 한 부대는 금화초등학교 부근에서 무악을 향해 공격을 강행했다. 이리하여 양편 군대는 무악 정상 가까운 험준한 산비탈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 장만 군대는 기슭에서 치밀어 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고전했으나 풍향이 바뀌어 오히려 이괄의 군대 편으로 모래바람이 불어 내리면서 싸움의 형세가 역전되어 이괄의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
이에 이괄은 허둥지둥 산에서 내려와 서대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였으나 주민들이 문을 닫고, 열지 않자 할 수 없이 남대문으로 들어왔다가 결국 광희문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괄은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그의 부하에게 죽고 말아 이 난이 평정되었다.
이 당시 무악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서 서대문을 중심으로 남대문으로부터 인왕산까지 많은 구경꾼이 성벽 위에 가득 모여들어 마치 백로 떼의 모습과 같았다고 전한다.
◇ 무악재 하늘다리 : 서대문구 현저동 1-404 ~ 종로구 무악동 산3-10
- 2017년 안산과 인왕산을 잇는 45년 만에 복원된 생태, 보행 다리.
무악재 하늘다리는 안산(鞍山)과 인왕산(仁王山)을 연결하는 서울 도심 속의 생태 · 보행 다리로, 1972년 통일로 개통 이후 끊겼던 연결이 45년 만에 복원된 산책로이다
이 다리는 2017년 12월 13일에 개통되었다. 다리의 폭은 11.7m, 길이는 80m, 높이는 22m의 아치형 ‘강아치교’ 구조로 야생동물 이동 지원을 위한 수목이나 야생화를 심었다.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던 시절에는 두 산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사이에 도로가 생기면서 여러 번 고개가 깎여 지금처럼 통일로 도로가 생겼다.
또, 이 고개가 무척 가파르고 비좁아 넘을 때는 인왕산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서 지금의 독립문이 서 있는 곳에서 열 사람 정도가 모여 함께 고개를 넘었다는 옛이야기도 전해진다.
인왕산, 안산을 오가는 사람은 물론 동식물의 자연스러운 이동을 고려해서 다리의 면적의 반은 통행로로 반은 녹지로 조성되어 있다. 이 다리는 도시의 녹지망을 확장하고, 등산객과 시민들에게 새로운 산책 및 등산 코스를 제공한다.
'하늘다리'란 이름처럼 맑은 날이면 다리 시작점에서 두 산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고 다리 한가운데 서면 남산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 안산 자락길 코스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출발하여 삼림욕을 즐기며 산책할 수 있는 경사가 완만한 숲길이다.
2013년 11월에 개통된 안산 자락길은 보행 약자도 산림욕을 즐기며 편하게 산책할 수 있도록 ‘순환형 무장애 숲길’로 만들어진 코스이다.
메타세쿼이아, 아까시나무, 잣나무, 가문비나무 등으로 이뤄진 숲을 즐기며 흔들바위, 너와집쉼터, 북카페, 숲속 무대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관광포인트로는 조선초 세종 때부터 운영되고 있는 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와 인왕산과 북한산, 청와대와 한양도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이다.
독립공원엔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서대문 형무소’가 눈 아래에 펼쳐져 있다.. 코스 곳곳에 이정표 및 화장실이 위치해 편리하며, 보행자 전용 도로가 설치되어 있다.
◇ 봉원사 : 서대문구 봉원동 산 1번지
- 신라 진성여왕 때 지은 사찰로 ‘새절(新寺)’로 불리는 태고종의 총본산
봉원사(奉元寺)는 한국불교의 2대 종단 가운데 하나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단청(丹靑)과 범패(梵唄)의 맥을 잇고 있는 스님들이 기거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새절(新寺)’이라고도 부르는 봉원사는 신라 진성여왕 3년(889)에 도선(道詵) 대사가 현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부근 자리의 어느 저택을 절로 만들어 반야사(般若寺)로 불렀다.
절의 역사를 기록한 사적기(寺跡記)에 의하면 고려말 공민왕 때 보우(普愚) 스님이 반야사를 증축하고, 수리하여 아름답게 꾸몄다고 하였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동국(東國)의 유명한 절은 오직 큰 강 동북에 있을 뿐이라고 찬탄하여 반야사를 금화사(金華寺)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따라서 지금의 금화산, 금화터널 등의 이름은 금화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1396년(태조 5)에 원각사에서 조성한 삼존불상을 반야사에 옮겨 봉안하자 사방에서 신도들이 몰려들었으므로 태조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원찰(願刹)이 되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지인(智仁) 대사가 곧 중창하였고, 1651년(효종 2) 봄에 큰 화재로 대웅전들이 타버렸는데 극령과 휴암대사 등이 신도들의 정성을 모아 다시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69년(영조 34) 기록에 현재 중앙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懿昭世孫 : 1750~1752)의 무덤 의소묘(懿昭墓)의 원당인 봉원사와 위전(位田)을 모두 양주군에 소속시키고, 사위전(寺位田) 만은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하였다.
1784년(영조 24)에는 왕실에서 절 지을 자리를 하사하여 찬집(贊汁) 대사와 증암(證岩) 선사 등이 현 위치에 절을 세우자, 그 이듬해에 국왕이 ‘봉원사’라는 어필(御筆)을 내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봉원사는 봉은사 · 봉국사 · 봉선사처럼 ‘봉(奉)’ 자가 들어간 절이므로 능을 수호하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88년(정조 12)에는 승려의 기강을 바로잡는 규정소(糾正所)를 전국에 다섯 군데에 설치하였는데 그중 봉원사에도 규정소가 두어졌으므로 사무원이 주재하였다.
봉원사는 조선말 철종 때 법당을 중건하였고, 고종 때에는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6·25전쟁 때에는 개화기의 인물인 승려 이동인 · 김옥균의 유물 등의 중요한 문헌자료들을 보관한 광복기념관(46칸, 180여 평) 외에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한편 소실된 광복기념관 자리에 1962년 마포구 염리동의 동도 중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 아소정(我笑亭) 건물을 옮겨다 약간 변형하여 대웅전 앞에 염불당(큰방)을 지었다. 그러나 1991년 10월 9일에 방화로 인하여 염불당이 불타버렸으나 1993년에 복원하였다.
특히 이 절은 개화파의 온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개화 승 이동인(李東仁)이 머물면서 개화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동인은 봉원사에 있으면서 안산(鞍山) 너머의 일본공사관 천연정에 자주 내왕하여 일본과 서양 문물에 관한 지식을 많이 습득하여 유홍기(劉鴻基, 일명 유대치)와 그의 제자인 김옥균에게 개화사상을 전파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동인은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는 수구파에 의하여 암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절의 만봉(萬奉)스님은 무형유산 단청장으로 지정된 탱화(幀畵)의 대가이다. 그의 화풍은 경산 화원에 속한 까닭에 섬세하고 오밀조밀한 선을 구사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봉원사에는 숱한 탱화들이 소장되어 있으므로 탱화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송암(松岩) 스님은 무형유산 범패(梵唄)의 기능 소유자로 이 절에서 태어나서 경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이월하와 남벽해로부터 범패를 배웠다. 이처럼 단청과 범패의 거장들이 기거하고 있는 봉원사는 전통적인 불교문화를 그대로 보존 · 전수하고 있는 사찰이다.
◇ 무악정(毋岳亭) : 봉원사에서 오르는 산길 중간에 위치
- 안산(鞍山) 동쪽 정상 입구에 있는 정자
안산(鞍山) 동쪽 정상 입구에 있는 정자이다. 이곳은 봉원사에서 오르는 산길을 따라 올라갈 수 있으며, 안산 자락길, 봉수대, 독립공원 등과 연결되는 주요 쉼터이자 조망 포인트로 알려져 있다.
무악정 누각에 오르면 신촌, 연희동, 상암동, 월드컵공원, 강서구, 김포 방향까지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특히 해 질 무렵에는 한강 방향의 전망도 아름답다고 평가받는다
◇ 서대문 홍제폭포 : 서대문구 연희동
- 홍제천에 높이 25m, 폭 60m에 달하는 인공폭포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홍제천에서 볼 수 있는 서대문 홍제폭포는 2011년에 조성되어 높이 25m, 폭 60m에 달하는 인공폭포이다.
이 폭포는 인공폭포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과 잘 어울러져 있다. 계절 변화에 따라 봄, 여름에는 청량감을 주는 폭포 물줄기로, 겨울에는 장관을 선사하는 거대한 빙벽을 조성하여, 봄꽃 및 가을 단풍과 어우러진 풍광으로 많은 시민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이곳에는 작은 도서관을 조성해 많은 즐길거리를 갖추고 있다.
서울시 수변 감성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CAFE 폭포"는 당초에 창고 부지였던 공간을 서대문구민들을 위하여 개방하여 수변 테라스로 조성하였다.
'서대문 홍제폭포' 앞에 위치한 "CAFE 폭포"는 월 방문객 2만명 이상의 서대문구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