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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강의 (1)
하나님이 애쓰는 것을 보시고
손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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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메시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피터정 (미국)
마태복음/ 6:31-33
요절 6:33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산상수훈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의 결단을 하고 사명인의 길을 시작했지만 장래 시큐리티에 대한 여러 가지 염려가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권면의 말씀을 명령형으로 주셨습니다. 첫째, 염려하지 말라. 둘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셋째,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셨습니다.
첫째, 염려하지 말라
둘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셋째,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결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신실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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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_4 <자비량 선교 및 기타>
최리야 (ㅂ국)
행 18:2b,3,20절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찾아 갔습니다.마침 그들의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과 함께 묵으면서 그들과 같이 일했습니다. 천막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직업 이였습니다. 아볼로가 회당에서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1) 성경적인 근거
성경에 자비량 선교사의 삶을 사셨던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구약에 애굽과 바벨론에 선교사로 하나님의 생명을 보전한 총리 요셉과 다니엘, 페르시아에 취직해서 예루살렘 성벽과 이스라엘의 신앙을 재건한 느헤미야 등이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신약에 사도바울과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자비량의 좋은 롤 모델입니다. 바울은 고향인 다소의 특산물인 장막을 만드는 기술을 익혀서 선교지에서 필요한 물질을 자립하며 선교를 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도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제자 양육 했고 이후 이 부부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에 더 자세히 설명하여 주님의 바른 제자로 세웠습니다(행18:26) 이처럼 자비량은 첫째 주의 말씀을 선포하여 주의 바른 제자를 양육하며 둘째 선교 현지에서 물질 자립을 하는 선교사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저의 자비량 선교 20년
저는 86년 1학년 때 눅10장 선한사마리아 사람 되신 예수님을 통해 죄로 인해 강도만나 거반 죽은 자와 같았던 자를 구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눈을 떴고 롬3:24-26절 말씀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87년 부산 센터 신년 수양회에서 고이삭 정갈렙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이방의 빛 열방의 선지가로 일생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며 주의 바른 제자를 양육하는 목자요 선교사로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96년 청주 센터에서 5년간 인턴선교후보 훈련을 받고 행3:6절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행3:6) 말씀을 통해 그나라 호나오 선교사로 파송 받아 20년을 그곳에서 선교사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저는 파송 당시 진짜 은과 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당시 저희 교회가 성전을 지을 때 인데 저희부부는 정혼하기 전에 서로 따로 약정을 해서 합해 놓고 보니 약국을 하시는 목자님 가정과 함께 액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저는 선교를 앞두고 단기간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는 가스배달을 하면서 새벽 신문배달부터 저녁 늦게까지 물질을 감당 했습니다. 결혼반지까지 뽑아드려도 부족한 350만원을 외국 간다고 장모님이 기막힌 시간에 주셔서 저희는 약정한 헌금을 빚 없이 다 갚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준 34만원을 가지고 간 저희는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말씀만 의지해서 선교지에 나갈 때 감사함과 기대감이 충만 했습니다.
96년 처음 선교지에 나가 저의 동역자가 한글선생으로서 매월 5만원씩 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희는 거할 숙소도 없었지만 먼저 와 계신 팍 좋은 선교사님의 주선으로 그 시골회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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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을 만나 기숙사 금불을 때 주는 조건으로 무료로 기숙사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캠퍼스 목자로 왔는데 몇 달이 되도록 캠퍼스는 밟아 보지도 못하고 (몇 달 만에 캠퍼스 땅을 밟아보고 감격하여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6개월 넘게 시골에서 금불 때며 옥수수 심고 토끼 키우고 고슴도치 잡아다가 제자 양육을 했습니다. 1년 직장이 없이 힘들 때 고후 12:9말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족하다고 말씀을 주사 조급한 마음을 회개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선교를 맡기게 하시고 지금 할 수 있는 어학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딱 1년 만인 아침 금식 100일째에 당시 목재라고는 소나무 밖에 몰랐던 저를 노송가구 370여명이 넘는 가구회사 지사장으로 인도 해 주셨습니다. 나이가 40세 이상 이여야 하는데 저는 30세 밖에 안 되서 퇴짜 놀 뻔 했습니다. 그때 “술도 안마시고 열심히 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전임 지사장이 하도 술을 좋아해서 회사가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술 안 마신다는 말에 한국 사장님은 감동을 받고 저를 회사 총책임자로 발탁을 해주셨습니다. 30세에 저는 갑자기 총(경)리가 되어 기사 딸린 회사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4년간 가구 회사를 경영하며 그 나라의 실상을 깊게 이해하게 하셨고 또한 물질문제도 해결 해 주셨습니다. 4년 후 야구 글러브와 공을 만드는 체육용품 회사 책임자로 축복을 주셨습니다. 또한 2001년부터 지금의 무역회사인 새로운무역 회사를 설립해서 지금까지 가구와 농산품을 수출하며 물질을 자립하며 복음역사를 섬기는 자비량 선교를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저희는 첫해 한국어과 학생들을 성탄 때 18명을 초청해서 금방 뭔가 일이 일어 난 것처럼 흥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방학 끝나고 한명도 안 남고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 후 전도한 양들 중에 유일하게 남은양이 유반입니다. 이분은 전형적인 38병자였습니다. 오전 10세에 일어나 일주일 머리도 안 감고 수업시간을 빠지고 삶이 엉망 이였고 희한하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헌금말씀을 가르치면 무슨 계를 드는 것으로 생각하며 나중에 우리가 도망가면 어떡하나 의심하며 망설였습니다. 아무런 기독교 기초도 문화도 없는 그곳에 믿음의 조상을 세우는 것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이야기에서 시저가 갈리아 정복을 위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는데 물살이 너무 쌔서 매번 교량이 세워졌다 하면 휩쓸려 가버리는 것처럼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관계전도와 1:1을 병행 할 때 가장 연약한 이 형제가 남아서 3년 만에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 했습니다. 정상적으로 세수도 하고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 그 과에 큰 이슈였습니다.
같은 과에 한 자매는 당시 부모가 이혼을 해서 깊은 절망감에 빠져 위로 받고자 파룬 공에 빠져 더 힘들어 하다가 이 형제가 성경공부를 통해 변화된 것을 보며 본인도 소개 시켜 달라고 해서 성경공부를 시작 했습니다. 이 자매에게 졸업 후 저희 집을 오픈해서 2년을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섬겼습니다. 지금은 킹 펠스 목자와 가정을 이뤄 이 목자는 교회 조상이요 현재 체육용품 무역회사 부장으로, 킹 이불 목자는 전문대 관광학과 교수목자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현재 저희 철나간 복떵이숲 교회는 1부를 오일장 구두 목사가. 2부를 참 이스라엘 목자가 섬기고 있습니다.
지난 6월 9일 단오절 여름수양회에 100명이 넘게 참석하여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 하였습니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개척하고 있는 서도에서 10여명, 남도 14명, 그외 여러 곳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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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역자들이 기차를 타고 와서 함께 은혜를 받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처음 썰서도를 개척할 때 썰북 사범대 대학원 다니는 매 목자를 돕기 위해 저의 아내는 학교수업이 끝나는 금요일 기차를 타고 그곳에 6개월을 매주 가서 말씀 섬겨주고 일요일에 저녁 돌아 왔습니다. 매 목자는 혼자 너무 힘들어 개척을 포기 하려 했다가 저의 동역자가 매주 밤새 기차타고 와서 말씀 섬겨주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회개하고 중심을 지키며 개척역사를 섬겼습니다. 지금은 하케오에서 하이얼 다니던 점 폴 목자와 믿음의 가정을 이뤄 개척하고 있고 점 폴 목자는 더 좋은 직장을 주셨고 올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현재 하노이 대학 2년 때 1:1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그곳 이공대학 교수인 하탄 요한 교수목자와 그 아내 비전목자 가정과, 의대를 졸업하고 하노이 대학 대학원 의대를 들어가 의사가 된 고 죠이목자 등이 잘 동역하여 치매 (믿음 소망)교회를 사범대 중심으로 15-20명 예배를 드리며 개척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도시에서 박사과정을 감당하는 함 아브 목자, 또한 10년 넘게 함께 동역 했던 경희문 출신 디도 빌레몬 리디아 선교사님 가정, 한짜지에 우요한 리브가 목자가정, 에스터 목자들이 개척도 하며 현지 선교사 가정과 동역을 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세계 선교에 스페인에서 박사과정을 감당하는 양 페트라 선교사님이 파블로스타 오, 경 여호수아 선교사님 가정과 동역하고, 15년을 함께 동역 했던 요한 한나선교사님을 다른 나라에 파송 하도록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저희 하노이 교회는 비록 갈리리 같은 작은 도시에 오병이어와 같이 미미한 교회이지만 주께서 저희를 들어 쓰셔서 2031년까지 전 캠퍼스에 주님을 사랑하는 헌신된 목자를 세워 주시도록, 또한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 220개 세계 선교를 파송하는 초대 에베소 교회와 같이 성령께서 쓰시는 교회가 되도록 항상 기도하며 준비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또한 98% 불신자들을 전도해 돕다보니 명절 때만 되면 부모님들의 핍박이 너무 심해 민감한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당시 우리는 함께 기도할 때 성령께서 감동을 주셔서 적극적으로 부모님을 전도해서 가정복음화를 이루고자 부모수양회를 하고자 기도 했습니다. 그해 농촌 출신이 많아서 8월 농한기에 부모님들을 초청해 구경도 시켜 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고 편지 소감 발표와 성경공부 예배를 참석하도록 도왔더니 31분의 부모 가족들이 참석해서 많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올해가 7년째인데 매년 이 부모님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일부는 제자로 성장하여 마을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고, 또 믿지 않는 목자들 부모님들을 함께 전도해서 도우며 좋은 복음의 동역자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특히 결혼 역사 같은 것에서 많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도 3가정의 부모님들이 스스로 참석해서 환경을 예비 해 주시고 함께 교제 하며 섬겨 주셨습니다.
3) 자비량 선교의 장단점
주의 은혜로 지난 20년 한손에는 성경을 한손에는 직장을 섬기는 자비량 사역을 섬기며 저의 현장 경험을 중심으로 장점과 어려웠던 점을 정리 해 보고자 합니다.
자비량의 좋은 점은 첫째 물질을 스스로 자립함으로 누구의 눈치 보지 않고 주님만 의지해서
소신 껏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40-50명의 다양한 소속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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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을 접해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특이한 선교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교단이나 단체는 대부분 지원을 받고 후원자를 모집해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처음 제가 직장도 없이 그냥 자비량 선교하겠다고 나왔다하니 "과연 자비량 선교가 진짜 가능하겠느냐"며 의아해 하는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직장생활을 하며 제자들이 성장하는 저희 모임을 보면서 여러 선교사님들은 자비량 선교가 최고로 좋은 선교 모델중 하나라며 부러워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한 성결 교단 선교사님은 아무것도 안하고 나실인 처럼 살았던 마인드를 바꿔 저처럼 자비량하겠다고 누나에게 돈을 빌려 여행사를 만들어서 소수민족 선교를 하는 분도 계십니다.
실제 일반적으로 선교사님들은 교회 후원에 대부분을 의존해야 하는데 자녀교육 생활비 건강 등 문제들이 많은데 지원은 한계가 있고 더군다나 지교회가 문제가 생겨서 어느 날 지원이 줄어들거나 끊겨지는 것으로 귀국하는 경우도 봤습니다. 거기다가 물질을 지원해 주는 교회에 뭔가 실적을 보고 해야 하는데 우리가 경험 해 보셨다시피 생명역사가 어디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됩니까? 뜻대로 되지 않아서 마음 고생하시는 선교사님들, 오죽하면 일반 사람들 모아서 사진 찍어 보냈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듣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다 이런 것에 한두 번 길들여져 가다 보니 선교가 변질이 되어가고 도대체 선교사인가 프로젝트를 만들어 투자자를 끌어 들이는 사업가인가 헷갈리는 경우도 봐 왔습니다.
현재 저희는 학생회 목자를 양육하면 총신대 유상섭 이한수 김지찬 김의환 김영욱 교수님 등을 중심으로 현지 목자들을 3년 단위로 대학원 신학 교육을 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선교사님들이 먼저 신학을 해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벌써 이곳 목자들이 3기로서 이번 기수도 17명의 목자들이 여름 겨울 각각 보름씩 새벽5시부터 방11시까지 대학원 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교수님들은 저희를 접해보며 볼수록 저희 모임을 참 귀하게 여기고 들어가는 비용의 대부분을 지원하시며 (어느 해는 총신 대학원에서 장학금으로 1600만원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에 적지 않게 드리는 강사료를 거절하고 매학기 3-4일가 오셔서 순수하게 선교를 위해 섬겨 주시고 계십니다. 원장님은 성남에서 2000-3000여명 목회를 하시는 분이신데 본인도 교회를 하면서 10-20명 목사 전도사와 함께 섬기고 있지만 우리 선교사들이 가진 목자로서 사명감과 자비량 선교마인드는 그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우리 모임만의 특징이라며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실제 본인도 교직자들에게 아무리 사명에 대해 교육을 해도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이토록 다들 흠모하고 소망하는 자비량 선교사로 지난 20년 축복하여 주시고 단체나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소신껏 성령님을 의지해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 감당케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자비량은 물질을 공급하는 사람이나 단체의 돈주머니를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하여 선교함으로 자질구레한 것에 매이지 않고 정말 본연의 선교목적인 오직 성경이 말하는 복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선교에 집중해서 소신껏 선교사역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둘째 자비량선교는 보편적인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하십니다. 우리는 당연히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배워 가고 주의 제자로 성장 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우리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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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형상을 찾아 더듬어 발견해 가는데 성경 진리를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을 주셔서 품성을 다듬어 가십니다. 실제 삶속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자기 십자가와 수많은 문제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불순물이 제거되고 다듬어져 가며 그분 안에서 성화되어 갑니다. 이런 면에서 자비량 선교는 신앙과 삶, 신학 이론과 실제가 분리되지 않고 말씀을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 현장 적용해 감으로 성장을 이뤄가는 좋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양들과 제자들을 도울 때 평신도의 어려움을 실제 체득 적으로 잘 알고 이해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붙잡도록 도울 수가 있습니다.
셋째 거주 및 안전문제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이곳에서 선교하며 뼈를 묻고자 결단하고 갔습니다. 무역을 하며 거주할 집을 마련하게 하기고 그곳에서 정 예배를 드리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직접 정식 무역회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자 문제가 해결 되고 국가에 세금을 납부함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로 일단은 감시 선상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현지에 적응하기에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적지 않은 Full time 전임 선교사님들이 비자문제가 쉽지 않아서 학생 신분으로 5-6년 비자를 하다보면 의심하고 조사가 들어가다 추방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껏 제가 알기로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추방 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우리 모임이나 유비에프도 4-5분이 추방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량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그 속에 적응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자비량의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우선적으로 선교와 물질자립 2가지를 동시에 하다 보니 말씀 연구하고 양육하는 준비하는 시간 생명역사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출퇴근 시간은 회사에 온전히 매여 있어야 하고 나머지 시간에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노송 지사장 이였을 때는 8시간 출근해서 집중해서 3-4시간 업무를 처리 하고 꼭 해야 할 1:1공부 등을 탄력성 있게 조절해서 생명역사를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반면 체육용품 회사를 맡을 때는 회장님께 주일 오전에는 예배드리는 일을 양해 구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바쁠 때는 일요일도 출근을 하는데 오전 주일 말씀 전하고 밥도 못 먹 교제도 못하고 출근해서 일을 해야 할 때가 꽤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깨닫기를 자비량 목회를 하려면 내가 사장이 되던가 아니면 어찌되었던 오너가 되어야 이것도 하고 저것도 노치지 않고 다 할 수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면서 2001년부터 무역회사를 만들어서 직접 경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비량은 슈퍼맨이 아닙니다. 상대방 주머니의 돈을 내 주머니로 옮긴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물질 자립의 자비량도 혼신을 다해야 하고 생명사역은 몸과 마음과 성품을 다 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다 보니 육신이 한계가 있습니다. 직장에서 복잡 다 난한 업무에 시달리다 갑자기 집에 와서 거룩하게 은혜롭게 양들과 1;1을 하려고 채널을 싹 바구려 하면 기분전환이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어느 날 저는 제품 품질과 수출통관 문제로 머리를 쓰다가 퇴근해서 넋을 놓고 소파에 파 묻혀 TV를 보는 보고 있었습니다. 저의 아내는 이런 저의 모습을 보며 조금 있으면 양들과 공부를 해야 되는데 은혜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내가 회복 되어 가는 중이니 내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30
분은 무슨 짓(?)을 하던지 그냥 그대로 놔두라고 해서 지금도 퇴근해서는 서로 30분은 절대 간섭을 안 하고 있습니다. 이로 회복이 되고 다시 사고를 쓱 전환시켜서 말씀을 인도하고 양들을 도우면 또 매번 신묘막측하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이 주는 힘을 덧입고 생명역사를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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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선교사로서 오로지 선교사역의 영적 환경에만 전념하면 좋겠는데 자비량은 철저히 세상과 소통을 해야 하기에 세상적가치관에 그대로 노출되기 쉽습니다. 특히 물질의 유혹과 육신주의 유혹의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정말 깨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세상적인 가치관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특히 이곳의 경우는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 가구 회사에 한 달에 15번 정도 식사초청을 했습니다. 사실 제가 가구회사 출근할 때 가구일도 생소해서 걱정이 되었지만 더 걱정이 되었던 것은 ‘과연 내가 이 술 문화를 극복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저는 죽으면 죽으리라’ 말씀을 붙잡고 통역 및 술 상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은행장 부시장 당서기 세무국장들과 열심히 대화를 하며 기독교인으로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선포하고 정중히 양해를 구하지만 술판에서 잘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세상말로 ‘개야 짖어라 기차는 달린다! 정면으로 술 문화에 도전 했습니다. 이렇게 몇 달을 견지 할 때 서기가 어느 날 와서 술친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친구(zhixin fengyou)도 있다. 나 너 맘에 든다 하면서 좋은 친구가 되어 IMF때도 많은 도움을 줬고 지금은 큰 도시 국장을 하고 있는데 지금껏 서로 좋은 친구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부회장, 사장 등 임원진이 오면 책임자로 접대를 해야 하는데 지혜가 필요 했습니다. 선교사 이전에 같은 남자로서 나 자신도 예쁜 아가씨가 그런 분위기에 옆에 앉아 있으면 유혹이 됩니다. 그때는 저의 영발로는 기도해도 힘이 없습니다. 책임자로서 중요한 손님을 접대해야 하기에 벗어날 도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손님 앞에서 큰소리로 집 사람에게 뻔뻔하게 전화를 걸어 “나 이런 모임인데 11시까지는 집에 갈께” 하면 바이어도 찝찝하지만 양해를 해 주십니다. 또한 잠시 그 분위기에 있는 저도 하나님도 안 무서운데(?) 이 상황을 알고 있는 동역자가 더 의식되고 무서워서 위기를 넘어가기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점점 술 좋아하는 공장장 부장들이 “걱정하지 말고 이런 기회를 자기들에게 맡겨 달라고 ”어찌 되었건 저를 이런데서 지켜주고자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은 무역회사를 직접 경영 할 때였습니다. 사장 바이어는 업무 이외에는 선교사인 저를 이해 해주는데 간혹 직원이 파견 나오는 경우는 거의 100%접대를 원했습니다. 참 난감 했습니다. 접대를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그렇구. 저는 기도하다가 이러다가 “시험 들고 큰일 나겠다” 싶어서 "예 할 때 예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산상수훈 말씀을 붙잡고 거래처에 선포를 했습니다. “저녁 식사 대접하고 숙소 이후 무간섭, 토요일 오후 일요일 핸드폰 오프”를 선포 했더니 정말 2개 거래처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 오히려 진짜 일을 하려고 하는 바이어들이 배로 모여 들어서 잘되었고 퇴근해서 저녁에 섬기는데 복음역사를 아무런 방해 받지 않고 접대 술 문화 속에서 자유롭게 지금껏 순탄하게 섬길 수 있었습니다.
자비량을 하며 불리한 점도 많지만 어떤 상황에도 우리가 깨어 기도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께서 저희와 동행하사 위기를 극복할 지혜와 믿음을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시며 생명역사에 사용하여 주시고 이로 점점 주안에서 강하게 만들어 가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4) 자비량선교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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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품을 개발해서 무역상에게 가구와 농산품을 수출 해 주면 무역상들은 중 도매나 식자재 납품업체에 납품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수출 이후에 대해서는 신경 안 쓰고 다만 선교 역사에 비교적 집중 할 수 있었습니다. 가구도 잘 나갈 때는 4000여개 가맹점이 있는 비비큐 치킨에 7년을 의자 테이블을 전수 납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세계 경기가 나빠지고 한국도 세월호 메리스 등 영향으로 경기가 점점 안 좋아 지고 있습니다. 인건비 원부자재 상승으로 가구도 사양 산업이 되었습니다. 계속 이런 옛날 시스템으로 무역을 하게 되면 현상 유지를 하다가 점점 도태됩니다. 낡은 가죽부대에서 탈피해서 새 가죽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찾은 방향은 수출 단계를 한두 단계를 줄이는 것입니다. 마윈의 알리바바처럼 직구 직판 하듯이 무역상에게 공급하는 것을 직접 중 도매상을 모집해서 한국에 창고를 만들어 수출해야 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서 올해 3월에 20년 만에 안식년을 갖고 한국에서 현재 시장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매일 전국 5일 재래시장 울산 밀양 울주 달성 선산 구미 안성 오산 부여 온양 군산 대야시장 등을 돌며 한국제품인 버섯과 파프리카를 니어카다 가득 싫고 판매하며 물질을 자립과 시장을 이해하고, 한편으로 농산품을 필요로 하는 중도매인들을 구축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끔 시장이 서는 곳에서 요청하면 장사를 접고 주일 말씀도 증거 해 줍니다.
현재 저는 이 안식년 하프타임에 4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 자립, 둘째는 이후 20년 선교지에서 먹고 자립 할 수 있는 중도매인 시장을 만들어 작동 되도록 하는 것. 셋째 전반 20년을 부족한 저를 자비량 선교사로 사용해 주셨는데 안식년 하프타임에 한국교회를 잘 배워서 후반 20년 선교에 바른 말씀선포와 주님의 바른 제자를 양육하는데 온전히 준비되는 것. 넷째 이곳 도시들에 새로 세워진 주의 종들이 자립신앙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은 이 자립의 기초가 다져지고 때가 되면 회사를 현재 직원에게 위임하여 넘기고 회사에서 일부 지원금을 받으며 복음이 증거 되지 않은 내륙 캠퍼스로 “가라! 제자 삼으라!”(마28:20)하시는 우리 주님의 대 사명에 순종해서 새로운 지역 개척과 현재 이후로 계속해서 다는 지역개척하시는 목자들을 격려하며 동역하여 이 나라를 주께로 돌이키는데 일생 썩는 밀알 되신 주님을 배워 나가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안식년 기간 새롭게 시장을 개척해 나가길 기도합니다. 이 안식년 기잔 영육 간에 준비 되고 재충전하여 일생 자비량 선교사로서 자립하며 바른 말씀 선포와 주님의 바른 제자를 양육하는데 인생의 후반기를 삶으로 주의 영광에서 영광에 나가는 삶이되길 원합니다.
Stage_4 <자비량 선교 및 기타>
신다니엘 (미국)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Matthew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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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량 선교
1.자비량 선교의 평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많은 선교사들을 CMI를 통해 파송하셨습니다. 세계 구속 역사우리를 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자비량 선교는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전형적인 선교 형태입니다.
우리는(신철영 John Shin, 신 충현 Daniel Shin), 지금까지 미국 CMI 역사를 기준으로 자비량 선교사 사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미국 역사는 1970 년대 초기에서부터 전문인들을 캠퍼스 개척을 위해 한국에서 자비량 선교사들을 캠퍼스 중심으로 파송했습니다. 그 가운데 소수 지역을 제외하고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개척이라는 방향으로 한두 가정씩 가정 교회를 이루어서 10년 혹은20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또 시카고 혹은 다른 큰 도시에 사시는 선교사님들은 개혁 이후에, 기존 UBF센터와 관계 절단 후에, 지역교회에 가입하여 섬기던지, 홀로 가정 교회를 세워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동참하며, 선교 사역을 감당해 왔습니다. 또 최근 한국에서 보낸 미주지역 파송 선교사들의 명단에 있는 분들 가운데, 미주 CMI에 연결되지 아니하고 혼자 지내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본국 파송교회와 연결이 되지만, 어떤 분들은 CMI와 아무런 연결도 없이 실종된 분들도 있습니다.
이는 선교자원적 차원에서 막대한 손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 문제, 부르심의 문제, 개인적인 삶, 직장에서 삶, 가정에서 삶 등 많은 개인적인 문제가 있겠지 만은, CMI 선교차원에서의 선교 전략의 부재, 개혁 후에 한국과 미국, 유럽과 동남아, 호주 및 뉴질랜드 외의 각 지역 네트워킹 부제 등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부족한 부분 때문에 우리 미주CMI에서 원래 기대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교의 열매 대한 기대에 못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2. 자비량 선교의 방향
A,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기초한 사역 (Ministry based on Kingdom value )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Matthew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우리의 사역의 궁극목표는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서 이 땅의 선교사로 보셨습니다. 각 개인의 삶과 사역의 궁극목적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야 합니다. 우리 CMI사역의 궁극목적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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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 세계 선교 사역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접근해야 합니다. 각 선교사님들이 삶과 사역, CMI지역교회의 사역, 선교목표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연구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 우리 국제대학선교협의회의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제의하고자 합니다.
B. 실제적 접근(Practical approach)
첫째, 예배공동체강화: To Build up Worship community
한국교회에서는 문제가 안 되겠지만 선교지에서는 소수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도시에서 동역자들 끼리 같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며, 각각 나눠서 예배를 드린 경우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떠하였든지 Kingdom First 마인드로 예비 공동체를 형성하며, 지역 교회를 강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는 예배공동체/로컬 처치 튼튼함에 기초해서 발전, 부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선교 자원 은행 시스템을 만들기를 제안합니다: To create mission resources bank
선교에 관한 모든 자원들---people, materials, technique, computer-hardware and software, bible study material, counseling, medical care for missionary medical/health care area, teaching, library/books
지역별 분류---각 대륙, 국가, 지역, 선교사들의 특성에 따라 어디에 어떤 자원이 있고, 나눌 수가 있는가?
Data gathering/sharing and supporting
Co-operation with Kingdom First(value ) mind
How to do it ?
Via- internet communication—Web pages and Face-book and other SNS
Examples:
MOM(Messengers of Mission) ministry
Missionary Peter Chung—Myanmar ministry
Dr. Alterto Guerrero
Building funds-Myanmar,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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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전문인 선교사 양성: To build excellent professionals
각 분야에서 전문인 선교사들이 자기들이 전문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도록 도와주고, 격려해 주며, 협력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선교사라고하면 직접 복음사역에 참여하여서 성경을 가르치든지, 일대일 제자 양성하던지, 주일 예배를 인도하던지 하여야 사역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역에는 여러 가지 다양성이 있습니다.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는 자기직장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과 요셉입니다. 우리 전문인 평신도 선교사들은 이세들에게도 영적인 유산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우리만 market place missionary /minister로 살 뿐만 아니라, next generations도 선교정신을 갖고 market place missionary로 살도록 인도하며 도와줘야 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의사로서 또 교수로서 현재 평양과학기술대학 의과대학 설립 팀 멤버 중에 한 사람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넷째, 다음 세대 리더십을 세워야 합니다: To build up next generation
다음 세대 리더십은 현지인 지도자 중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second 제너레이션 선교사들 가운데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각 선교지 형편에 따라서 잘 이루어지는 데도 있지만 우리 전체가 고민하며 기도하며 준비해야 될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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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_4 <자비량 선교 및 기타>
이슬람지역 사역
함아혁 (K국)
I. 서론 :
요즈음 세상에서 가장 hot 한 뉴스는 아랍의 봄을 기점으로 발생한 IS(일명 다에시)와 관련된 뉴스입니다. 이슬람스테이트, 정통순니이슬람국가를 만들고자 이라크와 시리아지역에 세운 테러단체입니다. 이들의 잔혹한 살상행위는 입에 담기조차 역겨운 일입니다. 이들의 잔혹함을 견디지 못하고 수백만의 피난민들이 지금 유럽과 미국과 카나다, 호주등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전세계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것은 난민을 가장한 이슬람 전파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그저 먼 곳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한국도 직면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익산에 할랄식품단지를 조성하는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대통령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모두 중동으로 가라고 해서 시끄러운 적도 있습니다. 유럽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한국에 있는 무슬림들이 경찰의 보호하에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다라고 피켓들고 시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에 이미 10여개의 회교사원과 60여개의 기도처가 전국각지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의 1/4인 16억의 인구가 믿는 종교가 이슬람입니다. 단일종교로는 세계 최대입니다. 이제는 이슬람국가인 중동이 아니라 이슬람국가인 유럽이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됩니다. 전 세계 58개국이 OIC 즉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국가입니다.
지난번 내가 한국에 왔을 때,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의 다문화가정문제로 이슬람을 알기 위해 대학 강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 초청강사가 이슬람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이슬람을 포장하여 강연하였고 순진한 교인들은 그러려니 하고 듣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슬람의 알라나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같은 신이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은 여러 문명의 이기를 한국에 전달해 주었다” 등등 이었습니다. 이것이 맞는 말입니까? 그래서 없는 시간을 내 그 교회에 가서 다시 이슬람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50%가 넘는 목회자들이 이슬람의 알라나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다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이슬람은 무엇입니까?
II. 본론 :
1. 역사적 배경 :
- AD 570년 사우디 메카에서 이슬람의 창시자 모함마드가 태어났습니다. 당시 메카는 고대 향신료 길의 중간에 위치한 아라비아반도의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반도의 각종 우상들이 모셔졌던 만신전이 있었던 곳입니다. 매년 행해지던 종교적인 행사를 보며 자랐던 모함마드는 종교에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특히 디아스포라를 통해 아라비아반도로 흘러온 유일신 종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유복자인 그를 받아주고 가르쳐주는 종교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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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없었습니다. 그의 나이 25살에 돈 많은 과부인 카디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돈으로 대상(카르반)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요르단과 시리아등지에 흩어졌던 단성론을 주장했던 에시온파의 성경선생들을 통해 성경의 단편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40살(610년)에 메카에 있는 히라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는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 체험이후 모함마드는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유일하신 신으로 알라를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상을 숭배하던 메카의 주류사회(쿠라이쉬족)의 반대에 부딪혔고 이를 피해 제 2의 도시인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것을 이슬람은 헤즈라(622년, 이슬람신년)로 부릅니다. 메디나에서 모함마드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신정일치의 움마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결국 메디나의 통치자의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 후 3차례에 걸친 반대자들과의 전쟁을 승리함으로 모함마드는 명실상부한 아라비아반도에 최초로 세워진 이슬람국가의 최고 통수권자가 되었고, 자신이 도망쳐 나왔던 메카로 다시 무혈입성하게 됩니다(630년). 그리고 나서 2년 후 모함마드는 그의 아내인 아이샤의 품에 안긴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칩니다. 모함마드 사후 그의 뜻을 추종했던 4대 칼리프(아부바크르, 오마르, 오스만, 알리)에 의해 이슬람은 종교로서 형식화되었고,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레반트지역과 아프리카지역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마이야드 왕조와 압바스 왕조에 의해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키르키스탄(탈라스)까지, 남쪽으로는 소말리아까지, 서쪽으로는 스페인까지, 북쪽으로는 시리아까지 이르는 대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 후 몽고제국 때 인도를 거쳐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필리핀까지 팽창하였으며 현재 10과 40의 창으로 알려진 이슬람국가가 분포되게 됩니다. 1970년대 석유파동이후 막대한 석유자본을 통한 유럽진출의 야욕을 드러낸 이슬람은 동유럽은 물론 영국,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독일, 스웨덴 등 유럽전역을 이슬람화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0년 현재 영국에는 전체인구의 약 10%인 550만명의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고, 1800여개의 회교사원과 5000개의 이슬람센터가 세워졌고, 영국 전역에 85개의 샤리아법정이 세워져 이슬람법에 따라 판결되고 있습니다. 무슬림 유권자 비율이 18%로 정부나 관공서 요직에 근무함으로 영국에 이슬람적인 요소를 공식화, 법제화하고 있습니다. 버밍험은 이미 이슬람 자치구로 변해버렸습니다. 오랜 역사를 간직했던 교회들이 모스크로 바뀌어 크리스천들이 예배 볼 곳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지금 전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난민문제 쉽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정착하게 되면 자식을 많이 낳을 것이며 공동체 역사를 통해 한 지역을 장악하고(이슬람화), 문화적인 충돌을 일으키며 결국 이슬람문화만이 작용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제 이들의 표적이 한국, 중국, 미국을 향해 있습니다.
2. 이슬람의 주장
이슬람이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것 3가지는 첫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는 따와히드 신학입니다. 둘째, 이 한분이신 유일신 알라에게 절대 복종함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이슬람), 셋째는 이 복종의 방법으로는 6가지 믿음(이만)과 5가지 실천(딘)을 반드시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이슬람은 알라의 유일성을 강조합니다. 알라는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이면서 유일하신 분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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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의 첫 번째 고백이 “라 일라 일랄라(알라 이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입니다. 이 따와히드 신학이 이슬람 신앙의 기초이자 전부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그 분을 알아가는 첫걸음이라면 이슬람은 따와히드 입장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입장에서 범접할 수 없는 관계로 끝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자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고,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을 3신을 믿는 우상 숭배자들로 보고 처단을 명한 것입니다. (코9:80)
결국 모함마드는 따와히드를 내세워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하면서 선지자중의 하나로 치부하고 자신을 카팀인 납비로 마지막 율법을 받은 선지자로서 특별취급하면서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둘째, 이 한분이신 유일신 알라에게 절대 복종함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슬람), 이슬람이란 복종, 위탁이라는 뜻입니다. 즉 알라에게 복종함으로서 내적, 외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평화가 공동체의 규율에 복종할 때만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공동체를 깨트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는 그를 죽여도 명예죄라고 하면서 정당화합니다. 오히려 이런 지하드를 할 경우 바로 천국으로 인도될 것이고 그곳에서 72인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수종을 들 것이며 포도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호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함마드는 메디나시절 힘이 없었던 처음에는 유대교나 기독교인들에게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이나 내가 말하는 알라나 같은 하나님입니다(코 29:46) 라며 접근합니다. 그러나 그가 힘을 가졌을 때 그는 더 이상 기독교도와 의논하지도 말고 유대교나 기독교인을 배신자로 몰아 알라가 그들을 토벌해 주기를 바란다(코9:30), 그리고 배신자들을 위해 70회 용서를 구한다 해도 알라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코9:80)하면서 기독교인들을 저주합니다.
또한 이교도를 발견하면 살해하라(코9:5), 불신자들의 목을 쳐 죽여라(코8:12)고 명령합니다. 이슬람은 결코 평화의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들에게 복종할 때만이 평화를 약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인이나 테러도 용납하는 종교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IS치하의 세상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너무 많이 봐 왔습니다. 또한 이슬람에서는 이해나 설득이 아닌 왜? 나 어떻게? 라는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냥 믿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결코 평화의 종교가 아닙니다.
셋째, 이 복종의 방법으로는 6가지 믿음(이만)과 5가지 실천(딘)을 반드시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6가지 믿음이란 무슬림은 6가지를 믿어야 하는데 이것은 유일신 알라, 경전(모세오경, 시편, 복음서, 코란), 예언자와 사도(모함마드), 천사들(신과 인간의 중재자), 내세에 대한 믿음(심판), 정명관(알라가 정해준 운명, 인샬라)입니다. 그리고 5가지를 실천해야 하는데 이는 샤하다(신앙고백), 살라(기도), 사움(금식, 라마단), 자카트(구제), 하지(성지순례)입니다. 이 5가지를 반드시 행해야 무슬림으로 인정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5가지를 하지 않아도 지하드(알라나 이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를 할 경우 바로 구원받아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 복음에서 다시금 그 이전에 행하던 행위에 기초한 구원방법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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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슬람의 허구
- 알라에 대해 : 모함마드가 우리의 신과 너희의 신은 같은 신이니 우리는 그분께 순종한다고 했습니다(코29:46). 물론 창조주, 절대자, 유일신, 심판주 등 같은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동명이인처럼 이름을 공유할 수 있으나 분명 다른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으로 진화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면, 이슬람의 하나님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복종과 심판만이 있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에게는 당연히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구원의 방법 또한 다릅니다. 같은 하나님에게서 구원의 방법이 달리 나올 리가 없습니다.
사실 알라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섬기던 메카의 최고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압달라인데 이는 알라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메카에서 섬기던 우상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의 신관으로, 유일 신앙으로 포장하여 나타난 현상입니다
- 코란에 대해
무슬림들은 기독교의 성경이 변질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선지자인 모함마드가 받은 코란이야말로 진정한 경전이라고 말합니다. 코란은 114장으로 이루어진 이슬람의 경전입니다.
모함마드가 23년 동안 받은 계시를 전달했는데, 모함마드 사후 3대 칼리프인 오스만이 집대성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기간에 만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메카와 메디나의 계시가 다릅니다. 경전이라면 진리로서 변함이 없고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코란은 그렇지 못합니다. 문맥을 보면 화자가 수시로 바뀌면서 역사적 내용적으로 잘못이 많습니다. 무슬림들은 코란이 한 언어인 아랍어로만 쓰여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은 경전이라고 하는데 한 언어로만 쓰여 있다고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잘못된 책이 코란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학자들도 수세기를 거치면서 코란을 보충하기 위해 하디스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부족할 때는 전능한 알라가 하는 일이니 묻지 말라 라고 결정지어 버립니다.
- 구원관에 대해
이슬람은 은혜에 의한 구원에서 다시금 행위를 통한 구원으로 회귀한 종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5가지 행위를 반드시 행해야만 무슬림이 될 수 있고 무슬림이 되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슬람은 알라의 유일성을 강조하다보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고, 모 함마드를 마지막 선지자요 신앙의 핵심으로 주장하다 보니 예수님의 완성된 복음을 인정할 수 없어 은혜의 복음을 부인하고 그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카바 신전에서 행해지던 제사의식을 복원하여 행위를 통한 구원의 방식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나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무슬림은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 육체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모든 은총의 관계 개념을 육체적이고 물질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 평화의 종교
이슬람은 알라에게 복종하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평화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과연 평화의 종교인가? 금세기 들어 수많은 폭력과 테러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에 모두 이슬람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하고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금이나 심정적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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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코란에 이교도를 발견하면 살해하고(코9:5), 불신자들의 목을 쳐 죽여라(코8:12)고 쓰여 있어 신앙적으로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힘이 약하면 화평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힘이 강해지면 굴복시키라고 명하는 종교입니다. 들어올 때는 양의 탈을 쓰고 들어와서는 강탈하는 늑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슬람에 대해 너무 극단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은 결코 평화의 종교가 아닙니다.
III. 결론
610년 모함마드로부터 시작된 이슬람은 100여년 만에 정복전쟁을 통해 서쪽으로는 스페인부터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지역까지 이르는 대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그 후 무역(750-1500)과 이민(1500-현재)을 통해 지금의 10과 40의 창에 이르는 팽창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분쟁과 테러를 통해 이슬람은 세계 이목의 중심이 되었고 그런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팽창은 계속되었습니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이슈거리가 무슬림들의 난민유입일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유럽만의 일이 아니고 미국과 캐나다, 호주등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권과 긍휼의 틈바구니를 이용하여 무슬림들은 현재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창끝이 한국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선교단체는 공식적으로 세계에서 기독교 선교사를 제일 많이 파송하고 있는 미국과 한국을 2020년까지 이슬람화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2080년까지 세계의 이슬람화입니다.
2020년이라면 이제 4년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벌써 한국 내에 10여개의 모스크, 7개의 선교센터, 60여개의 기도처를 전국각지에 세우고, 20만 무슬림들이 포교활동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한국 내 기독교단체의 대비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과반이 넘는 목회자들이 알라와 하나님이 같을 것이다라는 생각하고 있고, 유일신을 믿는 아브라함의 종교이니 결국 뿌리가 같은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이슬람에 대한 전문가가 없어서 교회에서 버젓이 이슬람 전도자가 이슬람 강의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장 아랍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아랍어과 유학생들은 무슬림이 되어 선교지에 있는 기독교선교사 동정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언어가 어렵고, 선교하는 것이 불법이라 목숨 내놓고 해야 하는 중동지역으로 나오는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습니다. 올해 4월경에 제가 있는 이나라에도 정보부에서 한국인 선교사의 구체적인 명단을 제시하며 대사관을 통해 선교활동 금지를 요청하고 있으며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몇 명은 자진 출국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본국인 한국의 상황을 더 걱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중동은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를 이어주는 세계의 중심축입니다. 중동을 다스리면 세계를 다스립니다. 또한 우리 주님의 지상명령인 선교의 땅 끝인 곳입니다. 우리가 결코 가볍게 여길 지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CMI에서는 중동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10년이 넘도록 선교사 한명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나마 있는 선교사들도 자립이 쉽지 않고, 오랜 시간 방치되다시피 하여 부끄럽지만 신사도나 전도해야할 다른 종교로 넘어갔습니다. 중동에 관심 갖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젊은 사람들이 오면 좋겠지만 구지 젊은이가 아니더라도 자립이 어려우므로 연금 받을 정도가 되었으면 성지에 오셔서 성경도 연구하고, 후배들도 가르치시고 선교도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곳이 그 징검다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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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_4 <자비량 선교 및 기타>
김요엘 (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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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_4 <자비량 선교 및 기타>
하나님의 자비량 세계지성인복음화사역
김야곱 (미국)
저는 지난 39 년 간 미국 대학 지성인복음화와 선교사역을 섬겨 왔습니다. 그 중 약 35 년간은 자비량으로 섬겼는데 거쳐 간 직장들만도 20 여개가 넘고 수십 번의 생사의 고비를 거쳤습니다. 최근에 간호사직에서 조기은퇴하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부르심을 새롭게 합니다.
1. UBF선교시절의 혼돈과 고통, 그리고 개혁의 필요성 (1977 년 -1997)
1977 년 10월 4일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로 미국선교지에 도착하니 내가 수천 년 살아 온 땅처럼 느껴졌다. 내게 미국선교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 벅찬 감동에서 내가 깨어나기도 전에 UBF의 증기밥솥식 압력과 비밀주의 졸속결혼정책의 무서운 여파가 일어나 내 인생을 산산조각으로 깨어 버렸다. 오랜 후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여자선교사는 자기가 그전에 오래 사랑하였고 또 결혼하고자 하였던 남자 대신에 조급히 설득되어 나와 결혼했었던 것이었다. 그 여자선교사는 화가 잔뜩 나서 아예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았었고, 내게 거의 절대적이었던 UBF 세계대표와 공공연히 싸웠다. 나는 절망하고 방황하였다. 나사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난 후 교민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다음 해 3월에 나는 오하이오 주의 톨레도사역지로 3 개월 동안 있다 오라는 지시를 받아 갔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활발한 사역이 일어나던 Toledo 캠퍼스사역에 동참했다. 그러나 3 개월은 3년 3개월이 되었고, 그간 정신이 완연히 이상해진 여자선교사의 소송으로 가정이 깨졌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내겐 일생 가는 큰 상처가 남았다. UBF는 개혁이 필요하였다.
튀김 닭집의 쿡, 접시닦이, 자동차 수리장 청소부 등으로 여러 힘든 일을 하고, 차가 없어 걸어서 달동네 아파트에 돌아오면 수천 마리의 바퀴벌레가 와르르 나왔다. 외롭고 암담해서 태어나서 세 번째 울었다. 김제임스/김복순 선교사님이 한 번만이라도 나를 마음 아프게 했더라면, 나는 그 때 선교사명을 버렸을 뻔하였다. 하나님께서 한 형제를 돕게 하셨고, 조교직장도 주셨다.
1981 년 6월 박사과정에 입학이 되어 East Lansing의 미시간주립대학교 (MSU) 개척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 때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다가 차가 갑자가 반대방향 차선으로 튀어 들었다. “나 이제 죽었어!” 체념하는데 18 바퀴 트럭 두 대 사이의 공간이 갑자기 넓어지며 그 사이로 내 차가 안전한 곳에 앉았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것이었다. 아멘. 그 때 기요시라는 일본학생과 1:1성경공부를 했는데 그는 큰 목자로 자랐다. 돈이 떨어져 박사과정을 중단하였다. 선교사님들도 더 왔고, 미국 형제자매들이 주일예배에 많이 참석하였다.
하나님께서 미국자매목자 Mary를 내 평생의 반려로 주셨다. 그리고 사랑스런 세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때 본부에서 미국목자를 지부장으로 내려 보냈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디프로그래머들에게 데려 가는 일이 발생했다. 지부장이 돌아오자마자 대부분의 형제자매들이 의심병이 들어 떠났다. 이 때 나는 주입식 속성 성경공부보다 관계적인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과, 말씀과 하나님의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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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성령에 의해 숙성되는 사역을 해야 함을 절감하였다. 양들의 가족들도 동역자들로 키워야 함을 배웠다.
나는 미시간지부장으로 세움 받아 1989 년까지 섬겼다. 그런데 약속된 생활비가 중단되는 일이 발생해서 나는 땅파기 등 여러 일용직 일을 하였고 아이들에게 우유를 사 줄 돈이 없어 피를 팔러 갔다. 그 때 자비량으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자비량으로 사역 섬기고 가족도 부양하겠다고 결심하였다. 1989 년 시카고에 돌아 왔다. 곧 30 여명의 선교사님들이 부흥회에 참석했다고 쫓겨났다. 그리고 미국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도 이 개혁운동을 돕고 내부로부터 개혁을 시도하다가 1997 년에 밀려났다. 그리고 곧 노스팍 신학대학원에서 신학교육을 받았고 졸업 후에 목사안수도 받았다.
2. CMI 개혁사역 초기의 도전과 연단(1997-2015년)
한국에서 CMI 개혁운동이 2,000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 해 11월에 시카고 근교의 <Ramada Inn>에서 북미주의 개혁운동에 창립멤버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동역자들과 더불어 북미주 CMI를 결성하였다. 나중에 CMI NA 노회도 결성하였고 초대 노회장으로 섬겨 오면서 작년에는 안수위원님들과 같이 5 명의 CMI 새 목사님들을 안수하였고, 8명의 창립목사님들에게 CMI 목사 자격증들을 드렸고 한 분의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위임하였다. 이제 CMU NA 동역자들 가운데 신학대학원을 세우는 일이 논의되기 시작하는데 자비량선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2001 년 8월 26일에 순생명교회/시카고 CMI 창립예배를 보았다. 그런데 창립예배 16일 후인 9월 11일에 뉴욕에서 이슬람문명권의 과격 분파원들에 의해 근 3,000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상되는 참극이 일어났다. 곧 여러 전쟁들이 따랐고, 이슬람국가가 성립되었으며 세계 도처에서 자살폭탄테러들이 일어났다. 미국에서는 흑백 인종분규가 반복하여 일어났고, 한국과 북한은 핵까지 포함하는 가공할 충돌로 치닫고 있다. 기독교는 과학을 확실히 통합하지 못해서 물질주의와 세속향락주의, 무신론, 다원주의의 득세 속에 변방으로 밀리고 급격히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이런 가슴 아픈 상황에서 하나님은 순생명교회/시카고 CMI를 다음과 같은 사명으로 부르셨다: (1) 인류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성서적으로 통합하고 지성인/대학생 복음화를 이룬다. (2) 원주민들을 포함하는 성서미국, 성서 북남미 대륙 (3) 유럽교회 부흥 (4) 공동체 건설을 병행한 세계복음화.
그러나 개혁사역은 몹시 어려웠다. 처음에 참여했던 몇몇 동역자들이 일 년 내에 떨어져 나갔고, 몇몇 미국목자들은 미국교회에 얼마간 참여하더니 거기에 머물렀다. 그들이 미국교회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어려운 문제들을 우리 사역에서 해결한 뒤에 미국교회 맛을 보면 곧 미국교회로 가는 것이었다. 1:1과 제자양성을 넘어서는, 고유한 우리 선교공동체사역에 대한 부르심이 있는 사람들만 남는 자가 될 수 있었다. 미국교회에는 없는, 서구신학을 앞선 신학과 우리 교회만의 부르심과 특성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그것들이 무엇인가? 그것들은 과학을 신앙에 통합하는 사역, 기독교인들의 수가 인구의 5 %도 못되는 미국원주민들을 통합하는 사역, 유럽교회를 부흥하는 사역,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견지하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온갖 비기독교인들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데려 오는 <성서적 통합>사역이었다.
그런데 <성서적 통합신학>을 계발하고 <성서적 통합> 사역을 섬기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바퀴달린 가방에 책들을 넣고 다니며 토막시간을 내어 십여 년간 말씀과 신학을 연구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성서적 통합신학>을 계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사역으로 연결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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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다. 그래서 어느 추운 겨울날 포기하려 하였는데 예수님이 나를 무서운 얼굴로 꾸짖으셨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나는 눈물로 회개하였다.
3. 이제 현실화하기 시작하는 비전 (2016-)
오래 사역이 지지부진하였다. 그런데도 구에스더 선교사님과 아내 Mary가 열심으로 충성하였다. 그러자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왔다: (1) 평소 주일예배 때에는 얼굴보기도 힘든 사람들이 예수뮤지컬과 예수극, 성탄맞이 동지팥죽 등의 예수문화사역에는 40여 명씩 왔고 그것이 꼬투리가 되었고 사역에 활력을 주었다. (2) 영남신학대학원의 최태영 교수가 내게 <성서적 통합>을 계속해서 연구하도록 종용하였고 대구에서 <성서적 통합신학>에 대하여 약 200 명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선교사들 앞에서 강연하도록 초청하였다. 이 강연을 위해 처음으로 작은 책자를 발간하였다. <성서적 통합연구원>이 설립되었고, 유태종 박사 등 연구원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조금씩 모여 들었다. 선교신학학술지 <성서적 통합>이 발간되어 이번에 3호가 나왔다. 2호부터는 영문-한글판으로 찍어 내는데, 미국교수들과 세계에 퍼진 한국계 교수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 이제 단기선교 가는 교수가족도 나오고, 교수들을 중심한 <딸기식 번식사역>이 일어나고 있다. 교수들은 핵심지성인들이어서 대학캠퍼스사역의 신실한 멘토가 된다. 새 책 <삼일통합의 길>을 막 탈고하였고, 여러 책들을 집필하고 있다. (3) Mary의 꾸준한 인격적 관계사역으로 Nellie 등 준비된 자매목자들이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 새 동역자들이 열심을 내어 새 양들을 초청하고 나도 이제 양들이 모이는 곳에 나가 정기적으로 복음공부 클래스들을 섬기고자 한다.
(4) 국보사역. 지난 9 년간 중앙일보에 성경칼럼을 쓰고 지난 3 년간 영어성경과 삼국사기 등 한국역사를 지역 교민들에게 가르쳐 오는데 한국계 기독교인들이 선교외곽조직으로 기도부대, 문화사역 지원부대가 되었고, 그 중 한 은퇴하신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아들 장덕수형제가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 사역을 통해서 믿음의 연장자들이 국가의 보물로 존경됨으로 폭력으로 고생하는 미국사회가 조금씩 존경의 사회로 바뀌고 있다. (5) 한국에서 동역자들이 단기간 와서 음악, 웹 사이트 설정, 메시지 섬김, 인터넷 등으로 도와주었다. (6) 그룹성경공부가 정착되고 있다. (7) 하나님께서 다섯 명의 동역자들을 일으키셨다. 이제 지성인복음화 사역 위해 박사과정에도 다시 등록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나와 동역자들에게 점점 더 크게 들린다.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이사야 54:3)
(기도제목) (1) 성경교재개발과 <성서적 통합신학>관련 저술 그리고 예수뮤지컬과 예수극/영화, DVD 40 개 제작. (2) <성서적 통합>카페사역으로 2025 년까지 40 개 대학 개척. (3) 그 40 개 대학사역으로부터 많은 선교사들을 미국 내외에 파송하여 성서미국, 성서 북남미, 유럽교회부흥과 세계지성인복음화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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