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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이야기
섬진강을 두고 어느 시인은 열두 폭 치맛자락이 굽이굽이 흘러간다고 표현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젖줄인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에서 발원하여 임실, 순창을 거쳐 남원, 곡성, 구례를 경유하여 하동 포구를 통해 남해로 빠져나간다. 여느 강처럼 번듯한 대도시가 하나쯤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거대한 평야를 거느린 것도 아니라, 여기저기 크고 작은 산을 에돌아 수수한 시골 아낙네처럼 흐르는 강이다. 강 따라 흩어져 있는 가난한 마을들, 비탈진 경사면 아래 비좁은 농토들이 띠를 두르고 있는 강, 굳이 권역을 나누어 보자면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이 상류라면 나의 고향은 중류에 속하고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토지』의 무대가 되는 섬진강은 하류다.
내 고향은 섬진강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뒤에는 지리산 연봉이 시작되는 곳이고, 오로지 출구는 강을 건너야만 했다. 지금은 마을 앞 섬진강이 하천공사가 되어 삼사백 미터의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고, 마을 뒤로는 구례 산동과 광의면으로 통하는 관광도로가 뚫려 있어 격세지감이 있지만 옛날에는 오로지 섬진강을 나룻배 타고 건너야만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이미지 하나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는 신작로를 책가방을 들고 걸어 들어가는, 읍네 중학교와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는 형과 누나들의 모습이다. 그 시절 형과 누나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길을 걸어 섬진강을 건너 읍내로 통학을 했다.
그때의 섬진강은 강폭이 오륙백 미터가 실하였다. 이 강둑에 서면 저 건너편이 아스라하였다. 물론 넓은 강폭에 거대한 장강처럼 물이 넘실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물이 흐르는 강은 폭이 오십 미터 이내, 깊이도 어른들 정강이에서 몸통 정도였다. 상류에 큰 댐을 막아 수량을 조절하는 듯했다. 강둑에서 강변으로 내려가 물가에 다다르면 사공이 나룻배로 건네주거나 아예 사공 없이 줄배를 설치해 놓았다. 배에서 내려 맞은편 강둑에 오르기까지는 거대한 은빛 백사장이다. 모래가 어찌 그리 잘고 눈부시게 고운지 손아귀에 한 줌 쥐면 어느새 손가락 새로 다 빠져나가 빈손이다. 한여름에는 해수욕 흉내를 내어 모래찜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길 없는 백사장을 한참 다리가 퍽퍽하게 걸어 마침내 맞은편 강둑에 올라서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섬진강이 수줍은 색시 모양 가슴으로 흐르고 있었다.
섬진강 모래 이야기부터 해 보자. 섬진강 모래만 생각하면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지키지 못한 어리석음이 분노와 함께 치솟음을 억제할 수 없다. 섬진강 모래는 요즘말로 하자면 천연기념물로 보호하여 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내가 성장하여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 강이며 해수욕장을 다녀 봤지만 내 고향 섬진강의 모래만큼 풍성하고 질 좋은 것은 볼 수가 없었다. 바닷모래하고는 질적으로 다르지만 대천 해수욕장도 해운대의 사장도 섬진강의 백사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 햇볕 좋은 날 고봉밥처럼 넘치는 깨끗한 백사장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신기루처럼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 좋은 모래를 밖의 사람들이 탐내어 호시탐탐 노리더니 일제시대에 전라선이 개통되자 기차가 서지 않아도 되는 오곡면 압록리 강변에 간이역을 만들어 놓고 숫제 기차떼기로 이 모래를 퍼가기 시작했다. 아마 전국 각지 교량이며 건축 자재로 쓰였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새마을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을 때 이 강변에 거대한 새마을 공장이 들어섰다. 서울 청계천 철거민들을 농촌으로 유치하여 소득 증대를 꾀한다는 사업이었다. 한때 이 사업의 삼환기업이 성공사례 1호로 중앙 일간지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서울의 철거민이 전라도 섬진강변까지 내려와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면 온 국민이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낼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잘 몰랐다. 삼환기업이라는 회사가 하는 일이 바로 도둑질이라는 것을. 그들은 거의 무한정한 섬진강 모래를 도둑질하여 국내에서 가장 질 좋은 콘크리트 전봇대, 콘크리트 관, 콘크리트 구조물을 그 너른 강변에서 산더미처럼 만들어 전국으로 실어나가는 것이었다. 지역주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세워진 공장과 낯선 사람들과 하루에도 수없이 들고나는 차량들만 보았을 뿐이다. 철저히 관 주도의 사업이기에 누구 하나 그 속을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이 지나자 고향 앞 섬진강의 모래가 정말 감쪽같이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하천을 제방으로 공사하여 강폭이 많이 줄고(사장이 엄청나게 훼손되었다.) 백사장 아래에서 모래만 솔솔 빼먹으니 그 많던 모래가 정말 약에 쓰려고 해도 보이질 않는다. 모래가 없는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것은 자갈밭에 물때가 끼고 썩은 물이 흐르는 하천에 불과하다. 오수를 청정수로 걸러주는 필터 기능을 하는 모래가 상실되자 그 많던 물고기들 역시 사라져버렸다. 더불어 유년의 추억마저 도둑맞고 말았다.
강가 마을에서 자란 사람들의 저 의식의 밑바닥에는 침전물처럼 강에 대한 기억이나 이야기들이 쌓여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고향을 떠난 지 거의 반백년이 다 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멀리 가면 갈수록 나의 내면에서는 새록새록 옛것이 떠오르는 것이다.
공직에 있던 부친께서 주말이면 어머니를 제외한 우리집 식구들과 작은집 형, 누나, 삼촌들을 인솔하여 강가로 천렵 가기를 좋아하셨다. 집에서 어머니께서 챙겨준 백솥단지, 양념, 쌀, 마실 것, 먹을 것을 잔뜩 들고 지고, 아버지는 삼천리 자전거 짐 싣는 데다 투망을 실고 강가로 가는 것이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세 조로 나누어 여자들은 밥 짓고 매운탕 끓일 준비를 하고, 남자 한 조는 강가에 떠내려 온 마른 나뭇가지며 땔감을 마련하고, 한 조는 투망을 든 아버지를 뒤따라 은어 떼를 쫓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투망질을 잘 하셨다. 발목께 모래 위 잔잔히 흐르는 물 아래 은어들이 햇살에 반짝이며 떼 지어 물살을 거스르는데 노리고 있던 아버지께서 은어 떼를 쫓아 몇 걸음 첨벙거리며 급히 다가가더니 드디어 한 쪽 어깨에 걸치고 거머쥐고 있던 투망을 좌악 펼치면 단번에 열 마리 정도가 잡히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은어떼를 몰기 위하여 못줄처럼 생긴 기다란 줄에 나무 판대기 가짜 물오리를 양쪽에서 끌고 아버지는 강 가운데서 투망을 던지기도 했다. 지금은 강이나 하천에서 투망으로 고기를 잡는 것이 법에 저촉되는 일이지만 그때는 어찌나 고기들이 많은지 투망질이나 낚시질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강을 오르내리다 보면 제법 고기를 담은 구덕이 묵직하다. 이윽고 자리로 돌아오면 잡아온 고기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고 갑자기 부산스러워진다. 막내 삼촌이 급히 고기를 손질하고 작은집 형이 강둑에 올라 가까운 밭에서 열무며 배추를 뽑아오고 누나들은 불을 때 매운탕을 끓이고, 우리 조무래기들은 아버지와 함께 물장구치고 논다. 한참 물놀이를 하다 보면 허기질 즈음에 강가에서 부르는 소리. 대가족이 둘러앉아 하얀 쌀밥에 은어 매운탕을 먹는 맛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나이 들어 시골 출신답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사람이지만 나에게도 나 나름대로의 맛에 대한 절대 기준이 있다. 절대미감이 아마 이때 새겨진 것이 아닌지. 내가 맛있다라고 할 때에는 그 어린 시절 섬진강가에서 먹었던 은어 매운탕 맛에 비교적 가깝다라는 뜻이다. 비교적 가까울 뿐이지 그것에 버금가거나 더 이상은 맛보지 못했다. 물론 솔직히 말하자면 살면서 소박한 그때보다 어찌 맛있는 음식을 접하지 못 했겠는가. 그때의 그 맛은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강이 주는 시원함, 운치, 가족들의 정다움… 뭐, 이런 것들이 혼합된 맛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지금도 민물 매운탕이라 하면 사족을 못 쓴다.
은어銀魚라는 고기는 어미의 경우 몸길이가 15cm 가량의 바다와 민물에서 사는 고기다. 등은 회갈색이고 배는 은백색이어서 햇볕에 은빛 빛살을 되쏘면서 떼 지어 강물을 거스르기에 은어라고 한 듯하다. 민물에서 부화한 치어들이 곧 바다로 내려가 성장했다가 봄에 하천을 거슬러 올라와 8월에서 10월에 사이에 무리지어 집단으로 산란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니까 고향의 은어 맛은 봄부터 여름까지이다. 여름 이후에는 산란기로 은어를 잡지 않는다. 요즘 섬진강변의 식당에 가 보면 한겨울에도 맛이 담백하고 오이향이나 수박향이 나는 은어회나 매운탕, 튀김을 맛볼 수 있다. 알고 보니 요즘은 은어도 양식을 한다는 것이다. 강이 황폐화 되고 상류에 댐을 막아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곳이 없는 은어가 점점 씨가 말라가는데 강가를 찾는 사람들이 은어를 찾으니 요즘은 손바닥보다 더 큰 은어들이 양식이 되어 섬진강변 어느 식당이고 사철 수조를 가득 채우고 있다. 실지로 양식 은어를 몇 번 먹어 보았지만 자연산에 비해 미감이 떨어진다. 수박향은 여전한데 더 이상 은어에게 강의 특유의 맛이 나질 않았다. 여름에 잡은 은어를 햇볕에 잘 말려두었다가 한겨울에 어린 아이들이 배앓이를 하면 한두 마리를 약탕기에 달여 그 물을 먹이면 직방으로 효험이 있는 신기한 고기였다. 우리 마을 도갓집 어르신은 여름에 은어 사냥을 많이 해서 아예 동이김치 담듯 독에다 무와 함께 담갔다가 1년 내내 별식으로 드신다고 했다. 그때 섬진강 은어는 디스토마가 없는 은어라 하여 참게와 함께 전국적으로 미식가들을 불러들였는데, 오늘의 섬진강은 그런 보물들을 몽땅 도둑맞았다.
또 여름이면 동무들과 멱 감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이 굽이돌아 제법 시퍼런 물색이 보이는 곳이 우리의 수영장이었다. 자맥질도 하고 물장구도 치고 고추를 손으로 가리고는 물살에 깎여나가는 둑에 올라 아래로 뛰어내렸다. 얼마나 놀다가 배가 허전하면 둑 넘어 지키는 사람이 없는 참외밭이나 수박밭을 노리는 것이었다. 이것도 싫증이 나면 해맑은 물밑 모래 위를 걸었다. 뭔가 발밑이 꿈틀하면 손으로 더듬어 모래 속에 숨어 있는 모래무지를 잡았다. 이때의 환호, 내 어린 손아귀에서 꿈틀대는 생명의 요동침, 이것에 취해 발자국도 없는 물 위를 뙤약볕 아래 한없이 걸었던 것이었다. 그 시절 아이 중에 유독 고기를 잘 잡는 한 아이가 있었다. 모래무지뿐만 아니라 모래에 숨어 있는 강조개도 잘 캐내고, 물속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더듬거리다 이윽고 깊은 들숨소리와 함께 한 손을 번쩍 들고 고개를 들면 그의 손에는 메기며 참게, 실장어, 꺽지가 눈부셨다. 그 아이가 그 시절 나에게는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 아이만큼 고기를 잘 잡을 수가 있을까?
나는 읍내 중학교 3학년이던 막내삼촌에게 피리 낚시와 낚싯줄을 사달라고 졸랐다. 그것은 우리 마을에는 없고 읍내에만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 들었다. 돈을 주고 심부름 시킨 것이 아니라 무조건 사오라고 떼를 썼다. 그때가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던가 모른다. 시달리다 못해 삼촌이 낚싯대 없는 줄과 낚시 바늘을 사다 주었는데, 이것이 나의 최초의 개인 낚시 장비였던 셈이다. 나는 학교만 파하면 친구들과 놀거나 해찰도 부리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날듯이 뛰어서 책보를 던져 놓고는 부엌이며 마루의 파리를 잡아 손성냥곽에다 넣었다. 미끼인 셈이다. 그것을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죽은 파리 수십 마리가 든 성냥통과 나의 낚시 도구를 챙겨 키가 맞지 않아 발판이 닿지도 않은 아버지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를 내달아 강가로 가는 것이었다. 이윽고 설레는 마음으로 낚시에 파리를 꿰어 강물에 줄을 내리면 얕은 여울의 물살에 낚싯줄은 떠내려가고 나는 가끔 손운동을 하는 것인데 이윽고 드드드 손가락 끝에 강피리가 요동치며 딸려오는 그 느낌, 걷어 올린 낚시에 주둥이가 뀐 손바닥만 한 강피리를 잡아 기다란 띠풀에다 아가미를 꿰어 허리춤에 찬다. 이렇게 한두 시간 열중하다 보면 스무 마리 이상은 잡은 듯하다. 나는 강 건너 읍내 뒷산인 동악산에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나의 도구와 포획물을 챙겨 들고 바람을 일으키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집에 도착하면 저녁을 지으시던 어머니는 내가 잡아온 고기를 보고 화들짝 놀라고 누나며 동생들도 나를 대견스런 눈빛으로 본다. 어머니께서 잡아온 강피리를 뚝딱 손질하여 채소 넣고 얼큰하게 뚝배기에다 끓여 저녁상에 내 놓으시는데, 입이 까다로우신 아버지도 그날 저녁은 만족스럽게 밥그릇을 비우시고 나에게 낚시를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신다. 이것이 나의 조력釣歷 반백년의 첫 장의 모습이었다. 지금도 가끔 출조하여 낚싯대를 손에 잡으면 어린 시절 섬진강에서 강피리를 혼자 낚던 소년의 그때로 돌아간다.
섬진강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늘 잔잔하고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폭우가 쏟아지고 지서의 망루에 매달린 오포午砲(사이렌)가 요란하게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의용소방대원들이 이번에는 불 끄러 가는 것이 아니라 수재를 막기 위하여 마치 전쟁터에라도 출정하듯 장비를 갖추고 강변으로 나아간다. 바야흐로 우리나라 삼대 다우多雨 지역의 하나인 남원 인근 섬진강 중상류 지역에 폭우가 내리면 고향 앞 섬진강 중류에는 강물이 범람하기 일쑤였다. 아무리 강물이 넘쳐도 우리 마을까지는 상거하여 끄덕도 없지만 강과 마을 사이의 전답이 물에 잠기고 또 인근 강과 가까운 저지대 마을에 물이 들기도 했다. 이때는 나룻배를 띄울 수가 없어 읍내로 통하는 길목이 차단되어 물이 빠질 때까지는 우리 면은 완전히 고립무원이다. 읍내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으로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읍내 중·고등학교에서도 홍수주의보가 내리면 또 고달면 학생들은 가정학습을 하겠구나 하고 이미 연중행사가 되어 있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로 세상 구경 중에 물 구경, 불 구경, 싸움 구경이 삼대 구경인데, 그 중에 물난리 구경이 으뜸이라는 것이다. 나는 섬진강이 범람할 때 단속하는 집안 어른 몰래 의용소방대 수레 뒤를 따라 아이들과 함께 물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강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이 내지르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마침내 강가에 섰을 때, 귀가 멍멍하게 소리 내며 거대한 북적물이 뛰어 올라 몸을 뒤집고 굽이치고 넘어지고 뒹굴면서 방방하게 흘러가는데 저 건너 끝이 보이질 않았다. 나중에 연암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한 대목, 요하의 강들이 범람하여 황룡들이 다투듯 꿈틀댄다는 말을 나는 그때 목격하였다. 그런데 떠내려가는 것이 물뿐이 아니었다. 집에서 키우는 소, 돼지, 가축은 물론이고 지붕이 둥둥 떠내려가고 전봇대나무, 목재, 살림도구, 쓰레기 할 것 없이 온갖 잡것이 흙탕물에 잠겼다 떴다 떠내려가는데 개중에 물가로 접근하는 것을 의용소방대원 아저씨들이 용감하게 장대 끝에 꽂은 낫으로 걸기도 하고 밧줄을 던져 끄집어내는 것을 보았다. 설사 사람이 떠내려간다고 해도 멀뚱히 바라볼 뿐 어찌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실로 범람하는 물은 어린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엄습해오는 공포 그 자체였다.
내가 기억하는 섬진강은 또한 안타까운 사연도 많았다. 먹굴 안골목 진씨 중에 수기 형님이 있었다. 그 형님은 읍내 농고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가 부족하던 시절 양성소 과정을 거쳐 교사가 되어 고달초등학교 분교인 두가리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해 결혼을 하여 아직 신혼 때 여름에 역시 섬진강에 홍수가 났다. 그때는 우리 마을 앞은 섬진강 다리를 놔서 아무리 범람해도 읍내까지 갈 수 있었다. 두가리분교를 가려면 읍내에서 압록 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나란히 나 있는 길을 가다가 가정리에서 강을 건너야만 하는데 사공 없이 줄배가 매어져 있었다. 수기 형님은 사람들이 극구 말리는데도 건너가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혼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다가 기어이 전복되어 순직하고 말았다. 말이 거기서 떠나려 가면 하동에서나 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제대로 장사를 치렀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에 없다. 이때가 전두환 정권 시절인데 안타까운 이 소식을 들은 대통령이 특별히 유가족을 위로하고 나룻배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쇠다리를 놓으라 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크게 보도 되었다. 오늘날 그 분교는 곡성군 청소년 야영장으로 변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신리新里 아이들과 돌싸움을 하던 일이라든지, 한겨울 그 추운 날씨에도 동네 처녀 총각들이 나룻배로 건너지 않고 아랫도리를 걷어 올린 채 살얼음이 낀 강을 건너(겨울 섬진강은 수량이 극히 적다.) 읍내 극장에서 영화 구경을 하고 왔다는 이야기며, 풀이 난 강둑을 거닐며 혼자 불러 보았던 숱한 노래들이 강물 되어 지금도 조용히 흐르고 있다.
아직도 고향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심하게 고동친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강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 신화나 전설이 되어버린 이야기들, 그리고 그 강가에 살았던 사람들, 그 가운데 내가 있음을 강하게 느낀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여태껏 도시를 떠돌면서도 항상 내 가슴에는 유년의 강이 흐르고 있다.
첫댓글 그간 저의 재미없고 장황한 글을 읽어주어 감사합니다. '고향 이야기'는 8부작으로 매주 한 편씩 여덟 주를 연재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고향 이야기는 더 써 보려고 합니다만 기억들이 가물가물하여 갈수록 어렵습니다.같이 느껴주는 고향 친구가 있었기에 여덟 편이나마 썼던 게 아니가 생각되어 감사합니다.
5월 21일 동창회에서 만나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친구 고맙네
어떻게 그렇게 오래된 섬진강에 대한 추억을 자세히도 나열해서 올렸는지 공감가는 글이네
오랫동아 잊고 지냈던 섬진강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거 같네
보는것도 나누어서 봤는데
쓰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게 기억을 더듬으면 썼을까
좋은 기억 생각나게 해줘서 고맙네
긴 글 8탄까지 수고많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