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륵보살 [彌勒菩薩]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한다. 미륵보살에 관한 경전으로는 미륵3부경(彌勒三部經)으로 일컬어지는 〈미륵상생경 彌勒上生經〉·〈미륵하생경 彌勒下生經〉·〈미륵성불경 彌勒成佛經〉 등이 있다.
이에 따르면 미륵보살은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으나 석가모니보다 먼저 죽었으며, 현재는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兜率天)에 머무르면서 천상의 사람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또한 설화에 따르면 보살은 초발심 때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자씨보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일찍이 석가모니로부터 수기(受記)를 받았는데, 도솔천에서 4,000세(인간세상에서는 56억 7,000만 년)의 수명이 다한 후에 인간세상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3번에 걸친 설법으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할 것이라 했다. 이처럼 미래에 석가모니를 대신해 부처가 되어 설법한다는 의미에서 보처보살(補處菩薩)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부처가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륵불·미륵여래라고도 한다. 이로 인하여 미륵보살과 미륵불을 나타내는 2가지 조상(彫像)이 있게 되었다.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미륵상생경〉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현재 미륵보살이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상생신앙(上生信仰)이며, 다른 하나는 〈미륵하생경〉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미래에 미륵보살이 성불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할 때에 그 세계에 태어나 설법에 참여함으로써 성불하고자 하는 하생신앙(下生信仰)이다. 상생신앙은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정토신앙이 흥성하면서 점차 쇠퇴했으나, 하생신앙은 역사를 통틀어 면면히 이어져왔는데, 특히 어지러운 시대에 성하게 일어났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시대가 지나가고 하루빨리 평화로운 미륵불의 세상이 오기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 하생신앙은 미륵불을 자칭하는 자들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미륵불에 대한 신앙이 유포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널리 유행하고 있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익산의 미륵사는 삼국시대 최대 규모의 사찰로서 미륵이 하생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함으로써 이상적 세계를 이룬다는 미륵하생신앙에 의거하여 세워진 대표적 사찰이다. 신라 화랑으로 유명한 김유신은 자신의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는데, 이는 미륵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리라는 예언에 입각하여 이상적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희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미륵신앙 彌勒信仰
미륵신앙이란 지난날 석가모니불이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미륵에게 장차 성불하여 미래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授記)한 것을 근거로 삼고, 이를 부연하여 편찬한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 신앙이다.
이 삼부경은 각각 상생(上生)과 하생(下生)과 성불(成佛)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을 다루고 있다.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閻浮提:사바세계)로 내려와 제일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미륵하생경≫과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갔고, 지금은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하여 56억7000만 년이 지난 뒤, 인간의 수명이 차차 늘어 8만 세가 될 때 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며, 3회의 설법〔龍華三會〕으로 272억 인을 교화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다시 태어날 때까지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심을 품고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자세가 곧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미륵보살을 믿고 받드는 사람이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없을 때는 현재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上生〕, 또는 미륵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기를〔下生〕 염원하며 수행하는 신행법이 인도·중국·티베트·한국·일본 등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현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이념으로, 지나치게 이론적인 종교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불교가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신앙형태가 곧 미륵신앙이다.
미래세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표출된 희망의 신앙이라는 면에서 우리의 불교사 속에서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전 파〕
삼국시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미륵신앙은 면면히 이어 오면서 많은 영향을 끼쳐 오고 있다.
우리 나라 지명이나 산이름·절이름 등에 미륵·용화·도솔 등이 자주 쓰였던 것도, 각 절에 미륵불을 봉안한 미륵전(彌勒殿)이 흔히 있는 것도, 상당수의 미륵불상이 전해지고 있는 것도, 미륵신앙에 얽힌 설화가 민간에 널리 퍼진 것도 모두 미륵신앙의 영향이었다.
신라시대의 화랑(花郎)과 미륵신앙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은 분명 미륵신앙의 신라적 수용의 한 특징이었다. 미륵신앙의 이상세계를 신라사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화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미륵이 출현하는 유토피아적 이상세계를 제시하고 있는 미륵신앙은 주로 하층민의 희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우리 나라에서의 미륵신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그 초창기에 관한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으나,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순도(順道)를 파견하였던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서역으로 사신을 보내 간절한 마음으로 미륵불상을 구해 왔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부터 미륵신앙이 전개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평양에서 발견된 신묘명금동삼존입상(辛卯銘金銅三尊立像) 광배(光背) 뒷면에 있는 명문을 통하여 미륵신앙의 전개를 살필 수 있다. 여기에는 죽은 어머니가 미륵삼회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발원하여 미륵상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에서는 6세기 이후부터 미륵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미륵사·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 등의 절이 세워졌고, 미륵반가사유상의 조상(造像)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미륵불광사는 그 사적의 문맥으로 보아 성왕 때의 중요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552년(성왕 30)에는 왕이 일본에 불상과 불경을 보내 주었는데, 이 때 전해준 불상은 석가불과 미륵석불(彌勒石佛)이었다.또한 미륵선화설화(彌勒仙花說話)에 의하면, 위덕왕 때 신라의 승려 진자(眞慈)가 미륵화신(彌勒化身)을 친견하고자 웅진(熊津)의 수원사(水源寺)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 설화는 삼국시대의 미륵신앙이 공주지방에 전래되어 그곳을 중심으로 유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634년(무왕 35) 낙성된 미륵사는 왕이 익산에 별도(別都)를 경영함에 따라 세운 삼국 제일의 규모를 가진 대가람이었다. 창건 연기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절은 왕과 왕비의 원찰(願刹)이었고, 백제 미륵신앙의 중심 사원이었다. 특히, “용화산(龍華山) 아래의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미륵신앙은 주로 하생신앙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신라사회에 미륵신앙이 넓게 퍼져 있었음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기사와 불상 등을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신라 최초의 절이었던 흥륜사(興輪寺)의 주불은 미륵불이었다.
진평왕 때의 흥륜사 승려 진자는 항상 미륵상 앞에서 ‘대성(大聖)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출현해 줄 것’을 발원하였다. 그는 미륵선화를 만나기 위하여 웅진 수원사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다시 경주로 돌아온 그가 미시(未尸)라는 아름다운 소년을 만나 7년 동안이나 국선(國仙)으로 받들었다는 미륵선화설화는 화랑도와 미륵신앙의 깊은 관련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아울러, 이 설화는 미래에 상카(Sa○kha)라는 전륜성왕이 다스릴 때 미륵이 출현한다는 미륵신앙의 이상세계를 신라사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화시키고자 한 욕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진평왕 때 화랑으로 활동하던 김유신(金庾信)은 그의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용화란 미륵보살이 장차 성불할 용화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륵하생신앙과 관련이 있다.
화랑 출신으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바 있는 죽지(竹旨)의 탄생설화에도 미륵신앙의 영향이 보인다.곧, 죽지의 아버지 술종공(述宗公)이 죽지령(竹旨嶺)의 길을 닦는 한 거사(居士)를 죽지령의 북봉에 장사지내고 무덤 앞에 돌미륵상을 안치하였더니, 그로부터 부인이 임신하여 죽지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화랑과 미륵신앙과의 관련은 귀족층의 합목적적인 의도와 민중의 구원론적 이상이 합일된 데서 나타날 수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 전반적인 불교학의 발달과 함께 미륵사상에 대한 학문적 논리체계를 세우게 된다. 원효(元曉)는 ≪미륵상생경≫에 대한 종요(宗要) 및 소(疏)를, 원측(圓測)은 ≪미륵상생경약찬 彌勒上生經略贊≫을, 의적(義寂)은 ≪미륵상생경요간 彌勒上生經料簡≫을 각각 저술하였고, 특히 태현(太賢)은 미륵삼부경에 대한 고적기(古迹記) 각 1권씩을 저술하였다.
경흥(憬興)은 ≪미륵상생경소 彌勒上生經疏≫·≪미륵하생경소 彌勒下生經疏≫·≪미륵경수의술문 彌勒經遂義述文≫·≪미륵경술찬 彌勒經述贊≫ 등의 많은 저서를 짓기도 하였다. ≪삼국유사≫의 백월산이성설화(白月山二聖說話)에서 볼 수 있듯이 ≪미륵하생경≫에 나타나는 미륵 부모의 이름이 신라인의 이름에까지 쓰이고, 수행을 통하여 미륵불로 현신성도(現身成道)했다는 것은 미륵신앙 관계 경전의 폭넓은 유통을 토대로 미륵하생성불사상이 신라적으로 변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덕왕 때의 승려이자 낭도였던 월명(月明)은 〈도솔가 兜率歌〉를 지어 꽃을 통해서 미륵을 친히 모셔 줄 것을 기원함으로써 미륵왕생의 이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경덕왕 때의 충담(忠談)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불상에게 차공양을 올렸다. 이 삼화령의 미륵불상은 일찍이 선덕왕 때의 승려 생의(生義)가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모셔 둔 것이었고, 현재까지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특히, 경덕왕 때의 진표(眞表)는 참회의 행법(行法)을 통하여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받고, 미륵보살로부터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상징하는 두 개의 목간자(木簡子)와 수기를 받은 뒤, 망신참(亡身懺)과 점찰법(占察法)을 통하여 독특한 미륵신앙을 확립시킨 대종주(大宗主)이다. 그는 미륵과 지장을 연결하고 참회와 깨달음을 통하여 새로운 정토를 여는 근본 도량으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였다.
경덕왕 때의 고승 태현은 항상 용장사(茸長寺)의 미륵장륙석상을 돌았는데, 그 미륵상이 따라서 얼굴을 돌렸다는 설화, 그리고 죽은 아이를 묻었던 땅에서 미륵석상이 나왔다는 조신(調信)의 꿈 이야기 등, 미륵신앙과 관련된 설화들이 민중의 입을 통해서 유포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사회에 미륵신앙이 그만큼 널리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신라 이후 올바른 미륵신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오늘날까지 미타신앙·관음신앙과 함께 하나의 전통으로 여전히 대중들 사이에 살아남아 있다.
다만, 고려 초기 이후 특별히 미륵신앙에 관심을 가진 승려가 많지 않았고, 미륵신앙을 중요시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선종(禪宗)이나 화엄종(華嚴宗)의 세력에 밀려났으므로 신라시대와 같이 열렬함과 독특함을 함께 갖춘 미륵신앙은 다시 꽃피어날 수 없었다.그러나 특수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미륵신앙은 왕실 및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갔다. 고려의 개경에는 태조 때부터 미륵사에 공신당(功臣堂)을 두고 매년 10월이면 법회를 열어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현종은 모후(母后)의 원찰로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한 뒤 법상종 승려들을 주지로 임명함으로써, 현화사를 근거로 하는 법상종은 미륵을 신봉하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 교단의 하나가 되었다.
현화사에는 대지(大智)·혜소(慧炤)·지광(智光)·영념(英念)·혜덕(慧德) 등의 고승이 차례로 머물면서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 이 절에서는 현종의 발원에 의하여 매년 미륵보살회와 미타불회가 열렸다. 특히, 매년 4월 8일부터 3일 동안 개최되던 미륵보살회는 국가의 번영과 사직의 안녕을 축원하기 위함이었다.
현화사 금당의 주불은 미륵불이었고, 특히 혜덕은 미륵보살상을 모시고 매년 승려를 모아 귀의하게 하였으며, 입적하는 순간까지도 미륵의 명호를 염하였을 정도로 미륵신앙에 독실하였다.
1070년(문종 24) 흥왕사 내 자씨전(慈氏殿)이 창건되었고, 1109년(예종 4) 4월 예종은 미륵사에서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충렬왕 때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용화회(龍華會)가 열렸는데, 1301년(충렬왕 27) 9월과 1302년 2월에 각각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왕사 무외(無畏)가 주관하는 용화회가 조계산에서 7일 동안 열리기도 하였다.이상은 주로 왕실 주변에 있었던 미륵신앙의 사례이다.
민간에서도 이 미륵신앙은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 사원으로는 금산사나 현화사 그밖에 관촉사(灌燭寺)·금장사(金藏寺)·도솔사(兜率寺) 등이 있었다. 광종 때 혜명(慧明)에 의하여 창건된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의 관촉사에는 1006년(목종 9)에 완성된 미륵석불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미륵불상에 얽힌 영험설화는 당시 사회에 미륵신앙이 폭넓게 유포 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992년(성종 11) 현탄(玄旦)이 창건한 용두산(龍頭山) 금장사 금당의 주불은 미륵삼존이었는데, 1310년(충선왕 2) 당시의 왕사 진감(眞鑑)과 제자 굉지(宏之)가 이 미륵삼존에 금을 다시 입히기도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 南行月日記〉에 의하면, 옥구에서 장사(長沙)로 가는 길가에 도솔사가 있었고, 그곳에 미륵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하던 고려 후기의 민간에는 미륵신앙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미륵불이 하생하여 교화하는 용화회에 참여하여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하며, 향목(香木)을 해변에 묻어 두는 풍속이 행해지고 있었음은 곧 미륵하생신앙의 유행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미륵하생신앙은 고성삼일포매향비(高城三日浦埋香碑) 및 사천매향비(泗川埋香碑) 등에 잘 나타나고 있다. 1387년(우왕 13)에 세워진 사천매향비에 의하면 1,000인이 결계(結契)하여 발원하였고, 1309년에 세워진 삼일포매향비에 의하면 지방관 10여 명을 비롯한 존비(尊卑)가 함께 발원하고 있다. 특히, 1309년에 있었던 매향은 동해안의 9곳에 향목 1,500조를 묻었던 것이다.그러나 고려 말에도 또 한 차례 자칭 미륵불이 나타났다. 곧, 우왕 때의 이금(伊金)이다. 심지어는 나무에서 곡식이 열리게 할 것이라는 말까지 신봉하고 따랐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금도 역시 고통받는 민중을 구제할 미륵불은 아니었고, 민중들을 우롱하다 처형당한 사이비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도 미륵신앙은 하층민을 중심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688년(숙종 14) 요승 여환(呂還)이 일으킨 역모만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여환은 아내 원향(遠香)과 무녀인 계화(戒化), 아전이었던 정원태(鄭元泰), 그리고 황회(黃繪) 등을 규합하여 “석가불이 다하고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 하며 양주군 청송면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널리 퍼뜨렸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차차 황해도·강원도 등지에까지 퍼져 갔다.
여환은 “이제부터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하면서 아내를 용녀부인이라 불렀고, 그녀의 신통 변화는 가히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정씨 성을 가진 무당 계화는 정성인(鄭聖人)으로 탈바꿈하여 민중들을 유혹하였고, “7월에 큰 비가 와서 도성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미륵 신봉자들에게 장검과 군복을 준비시켰다.
이들은 폭우로 도성이 무너질 때 대궐로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비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하늘은 오히려 맑기만 하였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아직은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아 하늘이 응하지 않는다고 탄식하면서 양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조정에 알려졌고, 여환 등 주모자 여러 사람이 처형됨으로써 이들의 허망한 꿈은 무너졌다. 여환 등은 미륵신앙과 민간신앙인 용신앙을 교묘하게 관련지었고, 또한 무녀들이 이에 적극 합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막연히 미륵이 내세하여 이상사회를 구현한다고 믿었던 듯하며, 초월적인 힘과 천변재이를 기대하고 있었다.그리고 이들에게 호응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주로 하층민과 노비층이었다. 불안하고 어두운 사회에서 흉년과 질병 등으로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이상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미륵하생신앙은 그들의 소박하고 막연한 기대감을 자극할 수 있었다.
〔근 대〕
불교계에서 분파된 신흥종교 중 전통적인 불교의 미륵신앙을 그들의 교리 속에 절충하여 가진 경우가 있다. 주로 증산교(甑山敎) 계통과 용화교(龍華敎)가 그 대표적 예이다. 증산은 평소 제자들에게 금산사의 미륵불로 강림할 것이라고 말해 왔다고 한다. 또는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 불양탑(佛養塔)이나 차지하리라.”,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들어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증산은 금산사와 미륵불에 대하여 관심을 표하였으며, 이로부터 증산의 제자들은 금산사를 차지하여 후천세계(後天世界)를 주재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의도는 순수한 불교의 미륵신앙이라기보다 증산의 가르침에 의한 미륵불의 출세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금산사 미륵전을 중심으로 찾아들었던 대부분의 미륵 신자들은 증산교 계통의 신흥종교 신도들이었다. 이들의 미륵신앙은 불교의 전통적인 미륵신앙과는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으므로, 전통적인 미륵신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이종익(李鍾益)은 불교십선운동본부(佛敎十善運動本部)를, 송월주(宋月珠)는 미륵정신회(彌勒正信會)를 각각 조직하기도 하였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제78호)(金銅彌勒菩薩半跏像(國寶第七十八號))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로 앉아서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상을 하고 있는 불상을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라고 부른다. 반가사유상은 불전(佛典)의 내용 중에서 석가가 태자였을 때 궁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 날 궁전 밖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는 고통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인생에 무상함을 느끼고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중생들은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된 도상이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彌勒菩薩)'로 부르게 된 것은 일본 야쮸지[野中寺]에 있는 666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반가사유상에 '미륵상'이라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반가사유상이 대부분 '태자사유상'으로 기록되어 있고 간혹 '용화수사유상(龍華樹思惟像)'이라는 명문도 발견되고 있다. 이 용화수란 석가불(釋迦佛)의 제자로서 미래에 성불(成佛)하리라는 언약을 받고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있는 미륵불(彌勒佛)이 석가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서 남아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화수 밑에서 세 번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하생(下生)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경주 근교에 있는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중에 반가사유상이 '미륵석상'이라는 명문을 가지고 있으며 또 신라에서는 청년귀족집단인 화랑제도와 미륵신앙을 연결시켜 흔히 '미륵보살반가상' 이라고 불렀다. 특히 삼국시대인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초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금동 또는 석조로 만들어졌다.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은 머리에 특이한 형태의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 위에 초생달과 둥근 해를 얹어놓은 일월식(日月飾)의 장식이 표현되어 있어 일명 '일월식삼산관사유상(日月飾三山冠思惟像)' 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일월식 보관은 이란의 사산조(朝) 왕관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ㆍ일본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보관 밑으로는 관대(冠帶)가 양쪽 끝에 있는 둥근 고리를 통해 두 가닥으로 나누어져 어깨 위에까지 내려와 있으며 목에는 가운데 끝이 뾰족한 굵은 목걸이가 장식되어 있다.
얼굴은 약간 네모난 편으로 눈을 가늘게 떴으며 코는 유난히 오똑하게 표현되어 있고 입가의 미묘한 미소 등에서 사색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매우 날씬하게 표현되었는데 좁은 어깨와 가는 허리ㆍ팔 등에서 부드러운 곡선미가 잘 드러나 있다. 얇은 천의(天衣)는 양쪽 어깨에서 넓게 펴져서 양끝이 뻗어 있고 몸 앞쪽으로 내려온 천의자락은 무릎 부분에서 교차하여 다시 양 팔에 걸쳐 내려오다가 대좌 양쪽에서 리본으로 묶여져 있다. 이와 같이 날개처럼 뻗어있는 옷깃은 중국에서는 피건(被巾)이라 하며 북제(北齊) 후기에서 동위(東魏) 초기의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천의형식이다. 허리에 걸친 군의(裙衣)는 띠 매듭으로 묶여 있는데 두 다리 위에 표현된 층단식 주름이나 대좌를 덮고 있는 Ω형의 옷 주름은 입체감이 없고 형식적이면서도 예리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이 불상은 뒷모습까지도 완벽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특히 천의가 U자형으로 길게 늘어지게 표현된 점이나 의자에 보이는 투각 장식은 매우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이 금동반가사유상에 보이는 날씬하면서도 탄력감 있는 신체표현과 날개와 같은 옷깃, X자형의 천의, 형식적인 옷 주름 표현 등은 대체로 중국 동위 및 서위의 불상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상과 함께 6세기 후반경의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현재 출토지를 알 수 없어 그 제작지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전체적으로 둥근 맛이 적고 평면성이 강조되어 있는 직선 위주의 조형감 때문에 고구려 불상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나왔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제83호)(金銅彌勒菩薩半跏像(國寶第八十三號))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일제 때 밀반출되어 출토지가 불분명한 것으로 그 제작지를 알 수 없으나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함께 삼국시대 불상 중에서 대표적인 예로서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성도(成道)하기 이전의 태자시절에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형(太子思惟形)에서 유래한 것이나 불교 교리의 발달에 따라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인간 세상에 나타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중생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하겠다는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彌勒佛)의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머리에 세 개의 둥근 산 모양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三山冠半跏思惟像)'이라고도 한다. 이 불상은 두 줄로 융기된 목걸이 외에는 몸에 전혀 장식이 없는 것으로 전반적으로 단순함을 강조한 둥근 조형감이나 좀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옷 주름 표현, 움직이는 듯이 조각된 두 손과 두 발의 모습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생동감이 잘 나타나 있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 사유하는 모습이며 양 눈썹과 콧등의 선은 길게 연결되면서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얼굴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종교적인 평온함을 주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준다. 날씬하면서 둥근 맛이 강한 신체에는 천의(天衣)가 몸에 완전히 밀착되어 옷주름이 전혀 표현되지 않은데 비해 군의(裙衣)의 옷 주름은 두 다리를 덮으면서 무릎과 다리의 볼륨감을 강조하고 대좌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또한 허리 양쪽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양다리 옆에 있는 둥근 고리를 통해 늘어져 엉덩이 밑으로 감추어져 있다. 특히 양감이 강조된 두 다리의 형태나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주름 표현 등은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하반신 부분만 남아 있는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석조반가상과 양식적으로 비교된다.
이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도 양식상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되나 침울한 얼굴표정이나 입체감이 적은 두 다리와 옷 주름 표현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목조반가상은 많은 부분이 보수된 상태로 변형되어 있으나 수리 이전의 모습을 보면, 얼굴 표현에서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더욱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에 대해서는 백제와 신라의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고류지를 창건한 진하승(秦何勝)이 신라계의 도래인(渡來人)이었다는 사실이나 신라에서 온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하는《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은 이 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류지의 목조반가상이 우리 나라에 많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시 삼국과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통해서 볼 때 우리 나라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고류지 반가상은 목조상으로 서로 재질은 다르나 형태상으로나 양식상으로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우리 나라 반가사유상의 국적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어진다.
금동반가상의 왼쪽 다리는 별도로 마련된 연화족좌(蓮花足座) 위에 놓여 있는데 왼쪽 발과 족좌의 앞부분은 후에 수리된 것으로 원래는 크기가 조금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으로 받침대 위에 둥근 방석이 놓여 있는 특이한 등나무 의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보이는 균형잡힌 신체 비례나 생동감있고 안정감 있는 불신(佛身)의 모습 등은 중국 동위(東魏)에서 북제(北齊)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대체로 7세기 전반 경에 조성된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상 전체에 나타나는 둥근 맛이나 단순한 조형감 등은 백제적인 요소로 백제 무왕대(武王代 ; 602-641)에 조성된 반가사유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 삼국에서 모두 조성된 것으로 보아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서 다수 제작되고 예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에서는 청년귀족집단인 화랑제도와 연관되어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함에 따라 미륵의 화신으로서 반가사유상의 의미가 부각되면서 많이 조성되었다.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 (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보제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상은 경상북도 월성군 내동면 신계리에 있는 감산사 절터에서 석조아미타불상(국보 제82호)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191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와 전시되고 있다. 현재 절터는 전답지로 변했으며 삼층석탑과 작은 불당 2채만 남아 있다.
이 불상의 광배 뒷면에는 22행 381자의 긴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절에서 함께 발견된 아미타불상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명문이 있다.
즉“개원칠년기미이월십오일 중아찬김지성 봉위망고인장일길찬 망비관초리 경조감산사일소 석아미타상일구 석미륵상일구개문지도현미 불생불멸 능인진적 무거무래소이현법 응지삼신 수기증제 표천사지십호유원함성제자 지성생어성세 역임영반무지략이 광시근토 이어형헌 성해산수 모장노지소요 지중진종희무착지현적 연육십유칠치왕사 어청조 수귀전어한야 피열오천언지도덕 기명위이입현궁 연십칠지지법문 괴색공이구멸 심복강정명어초려 전이도지극무 수재관이염속진외 지심무사경지성지자업 건감산지가람…(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 重阿飡金志誠 奉爲亡考仁章一吉飡 亡妣觀肖里 敬造甘山寺一所 石阿彌陀像一軀 石彌勒像一軀盖聞至道玄微 不生不滅 能仁眞寂 無去無來所以顯法 應之三身 隨機拯濟 表天師之十號有願咸成弟子 志誠生於聖世 歷任榮班無智略以 匡時僅 罹於刑憲 性諧山水 慕莊老之逍遙 志重眞宗希無著之玄寂 年六十有七致王事 於淸朝 遂歸田於閒野 披閱五千言之道德 弃名位而入玄窮 硏十七地之法門 壞色空而俱滅 尋復降旌命於草廬 典邇都地劇務 雖在官而染俗塵外 之心無捨罄志誠之資業 建甘山之伽藍…)”이다.
이 명문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의 최고 행정기구인 중아찬의 집사시랑을 지냈던 김지성이 67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성덕왕 18년(719)에 자신의 땅 감산장전을 바쳐 감산사를 세우고 국왕과 부모ㆍ동생ㆍ부인 등 그 일족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조아미타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조성하여 절에 안치했다고 한다. 또한 명문의 내용 중에는 김지성이 불교을 중히 여겼을 뿐 아니라 원래 자연을 좋아하여 노자ㆍ장자의 사상을 흠모했다고 하는 도교적인 성향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어 당시 신라 귀족들의 사상적인 측면까지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삼국유사(三國遺事)》권제3 탑상 제4 남월산조(南月山條)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감산사와 석조미륵상 1구는 그의 아버지 인장일길간(仁章一吉干)과 어머니 관초리부인(觀肖里夫人)을 위해 조성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감산사 석조보살입상은 등신대(等身大)의 크기로 몸을 오른쪽으로 약간 틀고 있는 삼곡(三曲)의 자세로 부자연스럽게 서 있으며 불신(佛身)에 비해 두 발도 유난히 작게 표현되어 있어 신체 비례에서 다소 불안정한 감을 준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형(舟形)의 거신광배(擧身光背)와 불상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는데 반해 대좌는 따로 만들어 결합시킨 것이다. 머리에는 복잡한 장식이 있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보관 위에 좌상의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명문에는 미륵보살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륵보살일 경우에는 보관에 탑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므로 이 상과는 도상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미륵보살은 석존 다음으로 부처가 될 보살로 도솔천(兜率天)에 살면서 석존이 입멸한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 이 세상에 출현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석존 때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미래의 부처이다. 중국에서는 미륵신앙이 일찍부터 유행하여 북위(北魏)시대의 석굴사원에 조상이 많이 남아 있고 당대(唐代)와 송대(宋代)에는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의한 미륵정토변상도(彌勒淨土變相圖)도 그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에 미륵신앙이 널리 퍼졌으며 조각이나 불화에 그 예가 많이 남아 있다.
감산사 미륵보살상의 얼굴은 풍만하여 턱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눈ㆍ코ㆍ입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눈을 지그시 뜨고 있어 명상에 잠겨있는 듯하다. 목과 팔에는 두 줄로 된 목걸이와 비천(臂釧)이 각각 장식되어 있고 가슴 앞에는 영락장식이 길게 내려와 무릎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천의(天衣)자락은 가슴을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걸쳐 입고 다시 양쪽 팔을 감으면서 내려오다가 끝 부분에서 구불거리며 늘어져 있다. 허리에 걸친 군의(裙衣)는 여러 겹의 주름이 접혀서 굵은 띠매듭으로 묶여 있고 두 다리 위로는 형식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층단식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세 줄의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고 가장자리에는 화염문(火焰紋)을 장식하였다.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으로 구성된 연화대좌는 표현방식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며 그 아래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된 팔각형의 받침대가 놓여 있다.
이 미륵보살입상에 보이는 넓은 어깨와 양감있는 신체표현이나 초보적인 삼곡자세, 천의와 군의를 걸친 형식 등은 인도 굽타(Gupta)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요소로서 중국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8세기의 당대 보살상에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와 양식적으로 유사한 예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남산 칠불암 삼존불(보물 제200호)의 양쪽 협시보살상과 경주 남산 굴불사지 사면석불(보물 제121호)의 서면 삼존불의 보살상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감산사 미륵석조보살입상은 명문에 의해 719년에 조성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인도 굽타 불상 및 중국 당대 불상과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8세기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