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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의병장 고종경과 고씨동굴
(임딘왜란시 영월서 의병을 일으킨 고종경이 평창에서 형행되는 사건입니다)
후세백작2010.11.08 09:25
아래의 글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평창 현감 남천 권두문의 "호구록< 虎口錄>이라는 난중일기에 서술되어 있는 고씨동굴로 피난간 고종원 형제와 그의 아우 고종경이 의병을 일으키다 실패하여 평창으로 압송시킨 후 처형되는 장면들이다. 고종원의 <기천록>이 있다 하나 저는 아직 접하지는 못하였고 그 기천록은 고종원 형제의 당사자의 글이나 당시 임진왜란을 겪는 일지인 이 호구록 7장에 쓰여진 고종경 형제들 일부의 이야기는 3자적 입증의 글이라 할 수 있다. 아래의 호구록 7장은 권두문 평창군수가 왜구에 잡혀 왜구들의 임시 강원도 본거지 원주의 강원감영에 수감되어 있는데 고종원 형제도 고씨동굴에서 잡혀 와 옥중에서 만남으로 시작된다. ************************************************************************************************ (아래의 호구록이란 인용글은 420년전 당시 권두문 평창군수가 왜구에 의해 원주 감영에 투옥되며 고씨동굴에 피신하였다가 체포된 고종원 두 형제와의 해후에 의병의 책임을 지고 평창으로 압송하여 형행하라는 강원도백의 명에 따라 권두문 군수가 형행하고도 서로 위로하는 남천 권두문 군수의 임란 일기로 13장중 제 7장을 인용한다) <虎口錄> 7장 南川 權斗文 萬歷 壬辰 8월 19일 낮에 영월 선비 고종원, 종길 두 형제가 잡혀 왔다. 먼저 내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공께서 어쩌다 그렇게 되셨소? " 한다. 나는 "평생에 악을 쌓은 게 많아서 부자와 함께 호랑이 굴에 들어왔으며 늙으신 아버지께선 올해 연세가 71세인데, 난리 통에 쫒기어 어디 계신 줄도 모르니 나는 속히 죽원이나 그렇게는 되어지지 않고 적의 칼날이 내 머리로 떨어질때 강녀가 몸으로 나를 덮어 나는 살고 그녀는 죽고 여기에 잡혀 온 후에는 내 아들 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오늘까지 나를 죽이지 않았으나 내일 어떻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소"라고 했다. 고(高) 군이 이르되 "소무나 문산 같은 분이 다 악을 쌓아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다 운명이로소이다" 공의 처지도 저와 비슷합니다. 저도 팔십 노부가 난리에 쫒기어 방금 산곡에 계시고 아우 종경이가 의병을 불러 모으다 비명에 죽고 내 처는 나를 살리려다 암굴에서 죽었으니 처지가 어찌 그리도 흡사합니까??"한다. 나는 말했다. " 영재(令第) 종경이의 죽음을 샐각한다면 슬프기 한이 없고, 지금 생각하면 나의 과실이 적지 않다"하니 고 군의 말이 "내 동생의 죽음은 비록 애매하다고는 하나 본 읍(本邑)에서 구명( 求命)의 첩(牒)이 영문( 營門)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이미 형이 집행되었다고 하니 이 어찌 운명이라고 아니할 수 있으며, 공의 과실이라고 탓 하겠습니까? 한다. 고종원은 횡성 세족(世族 )으로 영월로 이거해 살다가 왜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그의 아우 종경이가 고향 마을에 통고해서 병사를 모으니 온 마을이 모두 종경이의 문무재주를 추앙해서 그를 우두머리로 삼아 의병에 참가하니 그의 향병(鄕兵)이 수백 명이라, 장차 홍천과 영춘 사이의 험한 곳을 거점으로 하여 왜군의 진로를 차단할 준비를 하고 있슬 때였는데 도백이(지금의 도지사)가 찾아와 종경이의 의(義)가 가상타고 격려하며, 당시 흥원진(興原陳)이 약하다고 종경이가 모은 영군(營軍) 500명으로 흥원진을 도우라고 지시하고, 이 뜻을 흥원진에 알렸건만 영군이 중도에서 흩어지는 바람에 때를 놓치게 되었다. 흥원진장(興原陳將)이 이를 도 영문(道營門)에게 보고하니 영문에서는 종경이 군율을 범하였다고 체포하여 내가 근무한 평창으로 이송하여 그를 행형(行刑)토록 지시했다. 종경이 처음에는 구국일념으로 모병을 한 공과 의가 있다해도, 영문절제(營門節制)에 부진망진(赴陳亡陳)하여 때를 놓쳤으니 사형을 집행하라는 상부의 명이었다. 그때 마침 나도 관직을 겸하게 되어 군(郡)에 당도해 보니 평창 읍내 많은 사람들이 군청 뜰에 가득 모여 진정과 호소를 하는데 종경이는 가상한 의는 있슬지언정 죽일 죄는 없다고 하며, 영진(營陳)이란 것이 군진 (軍陳)과는 달라 오늘 모였다가 내일 흩어진다 해도 종경이 사율(師律) 이 엄하지 못해 그런 것도 아니고 군 (軍)의 신망을 잃어서 그런것도 아니며, 종경의 재주와 혈기는 가히 한 구석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나라가 위급할 때 죄 없는 의사를 죽인다면 원통하고 아깝다고들 하였다. 그때 마침 한양에서 평창으로 피난을 온 한산군 이축과 前 부사 윤면, 선전관 신경등, 교관 홍재식이 앉아서 말하기를 " 이 사람이 먼저 창의( 倡義)를 했으나 가위(可謂) 쓸만한 인물이니 석방을 하여 국가에 이롭게 함이 옳다" 하니 나도 이 뜻을 위에다 보고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에도 오래도록 상부의 회신이 없어 수령의 도리로 윗 사람의 명을 어기며 오래토록 기다릴 수 없어 애석하긴 했지만 그의 형을 집행하였다. 그러나 사형을 집행한지 얼마 않되어 도백으로부터 종경에 대한 형을 정지하고 무죄 석방하라는 첩문(牒文)이 왔으니 놀랍고 아깝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애매하다" 한 점이 바로 이런 뜻이다 . 고 군이 내 아들 주를 보며 한숨 지우며 하는 말이, "충효의 가문에는 기가 반드시 통할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며 왜들도 해하지 못할 것이다""한다. 나도 대꾸하여, " 고 형(高兄)도 역시 이 나라 사직에 은혜가 있고 의병을 도우다가 이루지 못한 한을 안고 죽은 동생의 의가 형제간에 서로 통할 것이니 하늘이 만약 우리 부자를 도우신다면, 고 형 형제분들도 꼭 도우실 것입니다""하고 서로 위로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갔다. 나의 증조부 익장공(翼蔣公)을 생각하면 삼도(三道)의 감찰사(監察使)로 그 이름이 방방곡곡에 진동하여 왜구들이 스스로 겁을 먹고 접근하지 않아 임금께서도 교지로 지용(智勇)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칭찬하셨는데 이제 그 자손이 오히려 왜노(倭奴)에게 잡혀와서 땀을 흘리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하며 흐느껴 우는 지라. 무슨말로 어떻게 위무를 해야 할줄 몰랐다. ------ 이상 *주- 아들 주는 권 군수의 둘째로 평창에 따라와 아버지를 도우며 또한 과거 공부를 준비하였다. 당시에는 영원산성에서 대적한 원주시장 김제갑 옹도 그의 아들이 같이 싸우다 전사하였고, 율곡 이이도 판운수운인 아버지를 도와 율곡 형제들 모두 뱃길로 세금을 거두는 것을 도왔다. 지금의 직업관과는 다른듯,,, ********************************************************************************** 이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강원도 영월에서 의병을 모아 왜구에게 대항한 고종원 형제에 대한 이야기로 강원도 영월군 진별리에 고종원, 종길, 종경 삼 형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종경이는 자는 사근(士近), 호는 화수 화전군(花田君) 인비(仁庇)의 10세손이며 안릉참봉(安陵參奉) 광후(廣後)의 3남으로 중종 33년(1588) 5월 18일 출생하였다. 그해 6월 26일 영남지방의 전병사(前兵使)인 김성일(金誠一)과 호남지방의 동래 부사였던 고경명 (高敬命)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감격하여 도내 각읍에 통문(通文)을 돌려 군량(軍糧)과 병기주철(兵器鑄鐵)을 모으고 청, 장년을 소집하였다. 이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강원 감사 유영길은 고종경에게 그 솔선창의(率先倡義)하였다. 강원감사는 이를 가상히 여겨 관군 오백 명을 첨송(添送)해 주며 새로 모집한 관군 오백 명을 주어 흥원진까지 통솔해 가기를 명하였다. (흥원진은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지역으로 일본군이 한양 공격의 주 루트에서 남한강을 건너 원주로 들어 온다는 예상의 남한강을 건너는 관문으로 흥업앞) 군사를 통솔하여 가는 도중 고종경은 관군의 도망이 심해 다시 군사를 모으고 이끄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서 제시간에 흥원진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송 수감시켜서 행형을 할것을 하명하였다. 이때 평창에 피난 온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 전부사(前俯使), 윤면(尹勉), 선전관(宣傳官) 신경징 (申卿澄) 교관(敎官) 홍식(洪湜)등이 창의(倡義)인재임을 들어 사죄성공케 하려고 힘썼으며 권군수 (權郡守)도 공의(公儀)로 사죄공문(赦罪公文)을 감영(監營)에 보냈으나 공문은 길이 막혀 전달치 못하게 되니 상사의 명을 지연시킬 수 없다 하여 행형을 하고 말았다. 참으로 애통 가석(哀痛可惜)한 일이다. 후일에 조정에서 명령전도(命令顚到)의 책임을 물어 도백은 파출(罷黜)되었다. 형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영월의 백성들이 “위급존망의 날을 당하여 무죄한 의사(義士) 한 명을 죽이는 것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사면을 요청했고, 군수 권두문이 이러한 사정을 원주 감영에 보고했지만 길이 막혀서 제시간에 가지 못했다. 유영길은 바로 파면당하였으나 영월 사람들은 고종경의 부당한 죽음을 보고는 의병에 참여하길 꺼려하여 모두 흩어져 버렸다. 여기서 정선은 왜장의 항복하라는 서신을 들고간 첨병에게 항복하고 왜병의 수중에 들어갔고, 8월 7일 평창에 왜병이 들어오며 9일에는 적장의 항복권유 서신을 가지고온 첨병 조선인의 목을 베어버리고 권두문 군수는 노성산에서 항전하라는 제사를 지내고 나아가 대항하여 싸웠지만, 평창에선 관군 70명을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 지원하고 남은 관군 60명 정도와 주민을 합해서 100여 명이 강원도를 향하여 철원, 김화, 고성, 강릉, 삼척을 거쳐 백봉령을 넘어 정선, 평창, 영월,신림에서 원주로 향하여 원주 영원성(치악산성)에서 원주시장 김제갑 옹을 처형하고 승리하여 강원도를 장악하는 왜장 모오리 요시나리(森吉成)가 이끄는 쓰미즈 번의 왜구 4번대의 4,000명의 왜구에 대적하기란 중과부적으로 응암굴로 피신하였다가 응암리 전투에서 패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영월은 의병장 고종경의 처형에 따른 불만과 세 규합이 용이치 않자 영월은 싸움 한번 못하고 영월 고을을 내주게 되었다. (당시 영월은 군수가 없어 권두문 평창군수에게 고종경의 처형의 명을 내렸는데 시중에 권두문이 영월군수라는 인터넷 글들의 확산은 오류임을 지적한다) 8월 17일 적이 영월에 쳐 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원은 가족을 이끌고 노리곡 (지금의 진별리 고씨굴) 석굴 안으로 피난했다. 다음날에 적이 영월까지 진입하여 남아 있는 농민들을 협박하여 의병을 일으키려던 고종원 형제의 숨은 곳을 알아냈다. 18일 왜군은 뗏목을 타고 진별리 강을 건너 노리곡으로 집결하여 피난민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노리곡굴 입구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고종원의 아내 조 씨 부인은 노리곡굴 안에 있는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하였고 고종원 형제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굴 밖으로 나와 포로가 되었다. 두형제는 모진 고문을 당해도 결코 투항하지 않았다. 같이 잡혀 원주로 압송되어 목책(木柵)속에 수감되었다 위의 호구록에 8월 19일 자 기록은 고종원 두 형제가 원주 감영에서 평창의 권두문 군수를 만나서 서로를 위안하며 앞날에 의(義)로서 앞날의 왜를 이겨나가자는 결의속에 권군수의 아들 주가 비밀리에 파던 탈출구를 이용하여 9월 1일 폭우가 심한 밤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여 권군수(權郡守)는 평창으로 무사히 돌아가고 형제는 영월로 가다가 단구역(丹邱驛) 근처에서 적에 잡혀 종길은 그 자리에서 죽고, 공은 요행이 방면돼 9월 6일 포로된 지 20일 만에 천신만고 끝에 영월에 돌아와 노친(老親)(71세)을 만났다. 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9월 6일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기천록(祈天錄)이 남아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강원도 의병의 면모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고종경의 억울한 죽음과 당시 백성들이 전쟁에 임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대항하려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이 피난했던 노리곡 석굴은 그 후 고씨굴(高氏堀)이라 일컫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하여 본다면 미완에 그친 고종경 의병장의 의병활동은 강원도의 골짜기는 왜병들이 이동통로라는 생각에 장차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영춘서 홍천까지 주 무대로 게릴라성 의병활동을 그린듯 한데. 강원도백의 명은 남한강에서 섬강으로 건너는 장호원 목계쯤의 앞에서 남한강을 건널 왜군을 원주 흥업면의 흥원진에서 적의 대군을 막으라는 명에 싸움 한번 해본 적이없는 의병들이 지레 겁부터 먹고 대열이 흐 트러지기에 흥원진에 도착시간이 늦었던 것입니다. 이를 탓하여 의병장을 평창으로 압송하여 행형하라는 도백의 명령엔 의를 의로 받아주지 않아서 민의가 돌아서서 영월군은 현감이 잠적해 버리고 왜구에 대항 한번 못하고 왜의 손에 점령당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의 생각으로는 윗글 호구록에 영진(營陳)이냐 군진(軍陳)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의병도 목숨을 조국에 바치고 나가 싸우는 군진이겠지만 그들의 인원과 무기 등의 특성과 성격을 파악하고 요소에 맞는곳에 배치를 하여야 효율적이란 점입니다. 윗글 호구록의 다음 장에는 영원성(원주를 사수하는 치악산성)에서 관군 4,000명이 왜군 3,000명에 패하고 원주 목사 김재갑의 목을 베는 일례에서 보면 관군은 성의 안쪽에서 아래로 향한 전투에서 3,000명에 패를 당한 것입니다. 당시 왜군은 조총을 지녔지만, 그것이 그리 효율성 있는 우월한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조총은 유효사거리 50 m이기에 우리가 활과 활촉을 많이 지녔더라면 먼저 선재공격도 가능하였슬 터인데, 돌을 던지는 육박전에서 조총의 무기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의병이 무기도 변변치 못한 상태에서 나아가 흥원진에서 왜구를 차단하란 것은 그 위급한 사정은 이해가 가나 무모한 죽음이 될 수 있다는 의병들의 생각이 도망가는 것의 생각이 아니었슬까요?? 전투는 어디까지나 승리가 목적이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최상이지만 여의치 않을 땐 연안장정을 돌더라도 모택동 전법 중 하나인 빠지는 전법도 훌륭한 전법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고종원 형제의 의병의 용기와 그 충정을 기려야 합니다. 저는 영월에서 문화행사는 잘 모릅니다만 평창을 미루어보면 임란 당시 응암굴에서 왜구에 체포되자 응암굴 절벽에서 푸른 강물로 투신한 권두문 군수의 소실부인 강소사는 소문이 나자 선조께서 강절부(節婦)라 추존하였지만, 이 임란 420여 년이 지난 작년에 천동마을의 선각적 주민들에 의해 강절부님의 진혼제를 처음으로 올렸습니다. 이렇듯 또한 고씨굴에 피난하였다 체포되어 능욕을 당할 끔직한 일을 미루어 고씨굴 연못에서 자결을 한 고 종원의 처 조씨에 대한 진혼제도 드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매년 제의 예를 기려야할 이땅의 후예 후손들의 몫 입니다. 의병을 발하면 국가의 명령과 규율을 엄수해야 되지만 이 의병모집은 아직 세를 전열 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강원도백의 무리한 명령에 의병활동을 시작도 못하고 의병장 고종경 어른은 의병장으로서 명령을 충분히 수행치 못하였다고 하여 형법에 의한 비운을 맞이한 것입니다. 올라야 합니다. 강원도백의 잘못 판단으로 비록 미완으로 끝난 고종원 형제들의 의병활동은 국난의 어려운 형세에 국가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선 용기와 기백은 분명 의병으로 기록되어야 하고 앞으로도 영월의 상징으로 버금가야 할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 국가를 구하려는 구국의 그 기상과 충정은 우리들의 영원한 애국심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후손인 저로서는미완의 혁명장 고종경과 그의 형제들의 충정에 머리 숙여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저는 엇그제 이 호구록의 번역을 하신 남천 권두문군수님의 직계12대 종손 분과 인터넷 대화에서 이 호구록내의 의병장 고종경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점을 다시 적어 알려드립니다. 위 호구록의 19일자 일기 하단에 고종원이 이야기하는 "나의 증조부 익장공"에 대해서는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고씨굴에 피난한 고종원일가는 제주고씨 화전군파(일명 횡성파)이며 아이디 "나무귀인"님이 말씀하신 고경명 의병장은 제주 고씨 장흥백파 입니다. 그럼, 삼도 관찰사를 하신 익장공 고경명 어른에 관한 권두문 군수의 표현양식이 좀 부정확한 면이 있지않나 하는 점 이다. 제가 화전군파 고씨로 이때 영월로 이사를 하셔서 임 영월고씨라 불리워지며 종원의 후손들은 영월고씨 문곡파라 하며 종길의 후손들은 정선 고씨라 불리워 집니다. 420년전 임란때 개인의 삶을 뒤로 미루고 목숨울 바쳐 조국의 국난극복의 길로 나서서 의병을 모집하여 국가의 존위에 힘쓰고자 하셨던 저의 윗대 제주고씨 화전군파 어르신들의 충정에 13대 문곡파 후손으로서 머리숙여 깊이 조의를 드리며 이 글을 마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쳐들어와 계속 승리하며 북진하고 있었다.
이를 추포(追捕)하느라 기일을 어기게 됨에 도백은 종경의 지휘책임을 물어 그를 체포하여 평창군으로
일부 도망친 군사들을 대신하여 강원 감사 유영길은 사정은 가상하지만 군율을 어겼다고 해서 사형을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강원감사 유영길은 고종경을 사면한다고 하였으나 이미 사형이 집행된 후였다.
굴 안에 불을 지펴 생포하려 하자 부인 조씨(曺氏)는 굴 안 벽상에서 투신자결 하였고 계제(季弟)종길과
이 일은 42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당 국가의 명이므로 고종경 어른의 형행은 복권되어야 하며 의병장 대열에
이 노래는 코카셔스지방의 용감한 병사들이 전쟁터에 나가 한마리 학이되어 돌아온다는...
세계에 제일 용맹한 병사들에게 바치는 노래 입니다.
2부) 영월 노리곡(현 진벌리)의 고씨굴 이야기 유래
영월 노리곡(현, 진별리)의 고씨동굴은 그곳 안내판이나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그저 임진왜란때 고씨일가가 피난하여
고씨굴이라 부른다 라고만 알뿐이다. 그렇다면 임란때 조선팔도의 모든 사람들이 피난다녔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고씨일가는 왜 그 동굴로 피난하였는지 그 이유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월의 모든 역사 이야기들에서는 그저 고씨 일가가 피난하여 고씨굴이라 부른다는 이야기만 있슬뿐이다.
김삿갓 묘를 발굴하여 김삿갓 면으로까지 확장하는 영월인들,,,그 발굴자 박영규 당시 문화원장같은 창의성은 보이지
않는 영월인듯,,고씨굴로 피난가기까지에 임란당시 의병을 일으킨 집안이라 할 수 없이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피난가야
했다는 절박한 상황 묘사는 없다.
(*김삿갓 묘를 1982년 박영규 영월문화원장이 이곳을 소개하여 학계에 인정을 받아 김삿갓 묘라 한다. 하지만 그의
둘째아들 익균은 평창읍 천동리에서 살며 훈장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의 묘는 천동리에서 영월 북면 도마치로
가는 입구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묘와 비슷한 형태의 묘가 그 위에 있었다 한다. 그것이 난고 김삿갓의 묘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왜냐면 첫째아들은 김삿갓의 형에게 양자로 가고 둘째 익균은 안동김씨 가문이라 유교적 문화로 예를 중시한듯 하고,
아버지 시신을 거두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화순에서 시신을 거두어 영월에 묻었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기록은 아닌 다만 추정치일 뿐이다.
좀더 자세히 이해하여 본다면 조부 선천 방어사 김익순이 반란군에게 항복한 대역죄로 사형당하자 그의 부하 김성수가
병하, 병연, 병호 삼형제를 피신시켜 위 두형제에게 한문을 가르치는등 하였다.
당시로서는 조부가 사형이후에 멸문지화의 화를 걱정하였기 때문인데 다행이 멸족으로 확대되지는 않았고 폐족이 되어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자 반역죄의 가문이라 어머니는 삼형제를 데리고 여주, 가평등지에서 더 깊숙한 평창 미탄에까지
이주하였고 영월 삼옥리에 거주하게 되었다.
여기서 병연은 영월읍내 백일장에 장원급제하는데,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6년(순조 32년), 영월 읍내의 동헌
뜰에서 백일장 대회 시제(詩題)인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을 받아 본
그는 시상을 가다듬고, 정의감에 불타는 그의 젊은 피는 충절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고, 김익순의
불충의 죄에 대하여는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였다.
김병연이 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어머니가 그 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들려 주었다.
그는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 스토리에서 영월읍내는 크지도 않은 마을에 백일장이 열렷는가 하는 의문부터 확인해야 할 사항이고, 또한 조부가
사형당할때 병연의 나이는 여섯살, 위의 형 병하의 나이는 여덟살이라 최소한 조부의 사건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으리란 점이다.
그리고 병연의 아들중에 맏이 병하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갔고, 둘째 익군이 가장으로 그는 평창 천동리에서 도마치로
가는 초입에 살았다 한다.
그렇다면은 익균이 전라도 화순에서 아버지 시신을 거두어 올때 그는 영월에 거주한 것이 아니고, 영월의 어릴적 집은
폐가가 되었슬 터인즉, 그 집옆에 아버지 묘를 쓴다는 점도 어패이리란 점이다.
혹,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셔서 묘를 쓴것 아닌가 하는 가상도,,
아마도 김삿갓의 아들은 유교적 예를 중시하여 안동김씨중에도 스스로도 장동 김씨라하는 세도가문이라
아버지 묘의 관리를 위해 그의 생활권에 가까운 곳에 묻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익균은 죽어 아버지 곁에 묻힌것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익균의 묘는 천동리 고, 강병준씨의 집터 근처이고 "80년대 이후 언제인지 이장하였다 하는데 그 위의 묘도 같이 이장을
했다면 혹시나 그들의 문중 선영에 난고의 묘가 있슬지도 모겠다는 가상도 하여 봅니다)
아예 좀더 한다면 병연 형제는 멸족이 되지않고 폐족이 되어 황해도 곡산에서 여주,가평등지로 돌아다니다가
고단한 삶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남의 눈을 피하여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평창에서 미탄에서 깊은 산골인 영월 삼목리로 이사하였는데 당시 영월은 큰 동리가 아니고
군 소재지도 아닌 현으로 백일장이 열릴만한 인원이 못 되었슬 것이다.
이야기는 다시 돌아와 영월은 고씨동굴에 대한 역사 이야기를 다시 정비하여야 한다.
위에 이야기한 고광후의 아들 3형제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대항할 것을 구체화 하고 이를
실행을 한 것이다. 다만 강원 감사의 바람직하지 못한 명령과 이를 이행 못했다고 형횡을 하달하여 고종경은
평창으로 압송되어 사형당하는 미완의 의병장이 되었고, 평창을 지나 영월로 들어서는 왜구들에 그의
가족들은 목숨을 보존하려 진벌리 고씨동굴로 숨어 들어갔다.
왜구들은 이 동네 주민들에게 수색하여 의병을 일으킨 고씨 일가를 찾았는데, 그때 밀고자에 의해 굴에 있는
것을 알고 입구에서 연기를 들여보네 종원, 종길 형제가 포로가 되었으며 그의 어머니 조씨부인은 굴내 샘물에
떨어져 자결 하였다.
이제 420여년이 지난 지금엔 사람들은 강을 가로 지르는 멋진 다리를 놓고 고씨굴을 유람하며 그저 고씨
일가가 임란때 피난하였다고만 글들을 쓴다.
하지만, 이제라도 영월군은 그의 역사의 편저에 고씨동굴의 절규스럽고 슬픈 내용의 이야기로 다시 다시금
수정하여 명시하여야 마땅하다.
이제 이 역사를 알고서도 수정을 안 한다면 그도 역사의 배임이고 능욕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완으로 그친 고종경 의병장의 의연한 죽음은 당 국가는 존망하였기에 이제는 지역사회에서
그 부음에 대한 제를 지내야 하는 것이고 또한 조씨부인의 순절에 이도 강원도백의 여하 잘못에 기인한
것이기에 진혼제라도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월 후대시민들이 해야할 책무이기도 하고 또한 조국의 부름에 분연히 일어선 의병장
고종경은 후대의 영월인의 귀범이 되며 또한 영월의 기상을 높이는 자랑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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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당시 평창 주변의 상황들,,,
임란당시 일본의 조선정벌군은 요즘말로하면 시드배정을 하고 침략하였다.
강원도를 정벌하는 왜군은 규수의 사스마현(현 가고시마)의 "시마즈 가문"은 센코쿠(전국시대) 말기 큐수의 다른
다이묘들을 거의 제압하여, 토요토미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대신 사스마번을 보장받게 된다.또한 4번대의 총대장 모리
요시나리는 나가사키 윗쪽의 시마즈 가문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부젠국의 다이묘가 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며
그는 자기의 병력 2,000명에, 사마즈 번의 병사 14,000명을 지휘하며 강원도를 정복할 임무를 가지고 침략하였다.
이러한 요즘말로 먼 변방의 전라도라,, 그들은 충성심을 표시나 내듯 코와 귀를 베어갔던 가장 악명높은 군대이다.
이 악명은 2차 정유재란때 전라도 지방에서 자행한 것이며 그의 군대 14,000명도 처음엔 4,000명인듯하다.
그것은 왜구가 평창- 영월을 빠저 영원상선 전투에 약 4,000명이 공격한 것으로 드러나고 호구록에 의하면 권 군수는
4일정도 미탄에서 평창으로 집결하였다는 기록에 의한 것이다.
만약 14,000명이라면 4일에 걸처서는 무리일 것이다.
소서행장이 행주산성 공격시 12명의 장수들은 모든 방향에서 처 들어오는데 고니시 유키가와(소서행장)은 현 기축
기지창쯤에서 노란 차양의 파라솔아래 작전을 개시했다 하지만, 호구록의 기록에 의하면 신림쯤에서 원주로 향할때 왜구들은
한줄로 갔으며 그중 대장은( 모리 요시나리란 표현은 없슴) 단 졸개의 복장으로 가끔음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한다.
이러한 차이를 볼떼 임란 초기엔 4,000명의 왜구들이 강원도를 짓밟았슬 것이다.
시마즈 가문의 4번대, 그들은 조선정벌 주공 루트인 부산- 문경새제- 한양길에서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우회전하며
김화-통천- 화천- 춘천-고성- 삼척-정선- 평창-영월-신림을 지나 강원도영 원주로 강원도를 한바퀴 우회하며 주변의
가지치키를 하고 정공법으로 강원도영을 침략하였다.
그러므로 강원도백의 우려의 흥원진으로 남환강을 건너 들어오리란 예상은 적중하지 못했으며. 모리의 4번대가 원주
강원강영 입성시 원주목사(시장) 김제갑옹은 이미 영원상성(치악산)으로 4,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잠적한 상태이다.
강원도영도 이미 조정의 명에 의해 대부분의 군졸들을 탄금대 전투에 대하여 차출되었으며, 4,000의 병력은 잡졸들
뿐이었슬 것이다.
왜군은 원주에 군사들이 없자 민간인을 다그쳐 원주시장이 이끄는 부대가 영원산성에 잠적했다는 것을 파악하고 다음날
영원산성에 올라 원주시장 김제갑옹과 그의 아들의 목을 베고 영원산성 전투는 무의미하게 끝나는데 이것은 내국인들의
첩자가 시장을 파악하여준 결과 쉽게 찾아 죽였기 때문이다.
임란 당시 권군수가 겪은 사실들을 바로 일기로 쓴 보름간의 행적에서 우리는 임란의 평창전사의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 가령 예를들어 노산(노성산)에서 결전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나 여만리 강변의 뙤담을 왜군이 쌓았다는 이야기들은
정사가 아닌 것이다.
응암리의 굴을 여러 이름으로 부르지만 이 응암을 매화라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매화낙지형의 지형때문이기도 하다. 응암굴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이곳이 매화낙지형이라고 하는 말이 쉽게
이해가 간다. 그리고 옛날 우리의 지형엔 역학적, 풍수적 이치의 이름이 많이 붙었다.
그런데 매화리라 하는것을 응암굴에 피난한 권군수가 상대굴(관굴)과 하대굴(민굴)과 매를 이용하여 서로 교신하였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권군수의 "호구록'에서 평창에 왜군이 들어오고 응암굴로 피난가는 상황에 매를 이용할 사유도
없었고, 그러할 시간도 없었다.또한 이곳에서 매를 기르고 피난을 대비하였다, 하지만 실은 피난길에 동촌(미탄)으로
가는 안과 응암굴로 가는 두 안에서 채택된 것이고 서둘러 응암굴로 가가 되는 것이지 음암굴에 전투 준비를 한 적은
기록에 없다.
그래서 매의 화를 입어 매화리라 하는 것은 하룻밤에 들려줄 수 있는 야사일 뿐이다.
이 이유의 논리는 평창의 문화재중 "판관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판관대는 유신 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했다는 곳으로, 율곡의 고향은 이곳 판관대인데 고향이 아니라 잉태지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후대 언젠가에 사람들이 율곡의 자기집을 잉태지라 표현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율곡이 9선장원에 오죽헌이
출생지라고 하니 이곳 고향에선 그에 비교되는 잉태지로 표현하진 않았냐 하는 추정으로 본다면..
평창군지등에 이에관한 이야기가 마치 설화처럼 감상적인 표현으로 심화되어감을 볼수있다.
역사는 검증되고 고증된 정확한 이야기만 역사로 기록해야 한다.
판관대의 이야기는 오히려 그러므로서 잉태지라고만 한다면 율곡은 고향을 상실한 역사를 가지는 것이다. 그 이유를
그려 보이겠습니다
이점 다음 평창역사에 오류들에서 자세하게 밝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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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이 제주 고씨 횡성파 이후 영월고씨로 저는 첫째 고종원의 본파 13대 후손입니다.
그리고 둘째 종길어른은 정선고씨로 됩니다.
평창에서 이야기되는 임진왜란사는 왜구 수백명을 죽인다는등 왜곡이 심하기에 다음엔 평창의 임진왜란사를
정확한 한도에서 이해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