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2-27온고을주일설교-황의찬목사.hwp
“평안하냐?”
마28:9~15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라면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럴 것이
다. 그런데 그 첫 마디가 “평안하냐?”였다. 평범한 인사말이라서 실망스러운가?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평안은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평안할 수만 있다면 거기에 모든 것
을 투자한들 아까울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투자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르는 것을 밝혀내는 일
이다.
평안을 위협하는 것은 ‘알지 못함’이다. 알 수 없으면 불안하다. 자식이 가출하면 부모는 평안을 상
실한다. 가정의 평안이 깨어지고 이내 지옥이 되어버린다. 왜 그런가? 가출한 자식이 어디에서 무엇
을 하는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지 못함이 평안의 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밝히려고 한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이유도, 극지를 탐험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그곳에 우리의 평안을 위협하는 불안의 씨가 있을지 모르기 때
문이다. 우주도 예외일 수 없다. 거기에 지구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면 지구는 평안하지 못하다. 그
래서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으며 우주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제법 많은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평안을 얻었다. 그러나 아직도 규
명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죽음이다.
죽음이 무엇인지 규명하지 못하는 한, 사람들의 평안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평안하냐는 인사말
에 “예”라고 대답하지만, 거기에는 생략된 말이 있다. “죽음의 공포만 없다면요!”라는 말이다. 인사
를 주고받는 사람들 모두가 이 말은 생략한다. 왜?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차변과 대변에 똑같은 상수가 있다면 생략하듯이, 사람들은 무언의 약속으로 죽음의 공포는 지우
기로 했다. 생략하기로 했다. 너나 나나 같은 거니까 생략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공포 자체가 생략되
는가? 그렇지 않다. 죽음도 인류가 밝혀내야 할 대상 중의 하나다. 그걸 규명하지 못하는 한, 불안은
상존하고,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규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학문을 발전시키고, 사상과 철학 그리고 진
화론에 이르기까지 대단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죽음의 실체는 점점 미궁으로 빠져 들어갈
뿐이다.
인류가 생명의 근원과 죽음 저편의 실상까지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교만이지 않을까? 그
렇다면 지금이라도 겸손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마디, “평안하냐?”의 의미는 이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너희의 평안을 위협
하는 죽음의 진실을 내가 지금 규명했다. 그리고 보여줬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알았느냐? 이제는
평안하냐?”는 복합 질문이다.
성경은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말한다(롬6:23)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생로병사는 죽음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보편적 현상에 대한 설명이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도외시하고 엉
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죄이다. 그리고 죄로 인해서 불가피하게 인간은 죽음을 당한다. 죄로 인
해 죽게 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죄에 대한 책임을 피해가지 못한다. 죽은 다음 분명히 심판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있다. 만약 죄가 없다면 죽음도 없을까? 그렇다. 죄 없이 살았다면 그
사람은 죽을 수 없다. 죄 없이 살았는데도 죽었다면 성경은 가짜가 된다. 죄 없이 산 자에게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사는 구원과 부활의 영생을 부여해야 옳다.
인류 역사상 죄 없이 산 사람이 딱 한 분이 계신다. 예수님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서 무흠한 생을 영위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그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성경은 폐기되어 마땅
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고, 무덤을 남기지 않고, 죽음의 권력을 깨뜨리고 승리하신다.
그것이 부활이다.
예수님 한 분만 죄 없이 살아서 죽음을 이겼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예수님처럼 의인으로 평결을 받고 부활하는 길을 하나님은 만드셨다. 그 길이 십자
가이다.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의 희생은 나의 죄에 대한 희생이다. 그 섭리를 믿고 구원을 청한 자는 예
수님처럼 다시 살게 된다. 그런 자에게 진정한 평안이 주어진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은 “평안하
냐?”고 물으셨다.
그런데 이 섭리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진리를 덮어버리고 거짓 증거의 굴레를 뒤집어 쓰는 사람들
이 있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사주에 따라 뇌물을 받고,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해, “우리가 잠자는 동안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갔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다.
왜 드러난 진실을 믿지 못하고 숨기는가? 자기들의 기득권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인데, 이는 그야말
로 소탐대실이다. 이들의 빈 무덤에 대한 위증은 ‘우선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고, 손에 쥐어진 ‘많은
돈(12절)’에 희희낙락할지 모르나 그것은 평생 거짓을 말해야 하는 엄청난 고통과 질고의 굴레가 된
다. 바로 인간이 겪는 고통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빈 무덤의 진실을 그대로 믿고 전파하는 사람들, 여자들과 제자들은 어떤가? 성경은 현장에
있던 여자들의 기쁨을 큰 기쁨, 그것도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
고 달음질 했다.(8절)”고 기록한다. 그 기쁨이 어떤 기쁨인지 실감이 난다.
평생 거짓을 말해야 하는 자의 뇌물 받은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들은 현실 세계에서는 빈한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많은 고난이 뒤따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빈 무덤의 진실을 전파하는
기쁨은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평안’이 아니던가?
호의호식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공통적으로 생략하고 사는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청빈과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는 자의 기쁨을 누릴 것인가 선택해야 한
다.
부활은 십자가와 죽음 너머에 있으므로, 믿는 자에게 십자가와 죽음은 두렵지 않다. 그래서 “평안합
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