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23편 1-6절
설교제목 : 주님은 나의 목자
평화를 갈망하나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주현절 마지막 주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봄의 기운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지만, 여전히 코로나는 무겁게 우리 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복잡한 국내외 상황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하여 온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긴밀하게 연결고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확산되면 불가피하게 물가가 요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독재자들의 전형적인 방식은 어려운 자국의 상황과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할 때 외부에 적을 두고 갈등을 유발하여 권력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전쟁에는 결코 승리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피로 얼룩진 갈등은 양측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증오를 남길 뿐입니다. 무고한 생명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얼마남지 않은 선거에서 진영의 지지자들의 양분되어 갈등하고 있습니다. 괴물 대통령이니 식물대통령이니 하면서 비난과 조롱을 일삼고 있습니다. 대중이 이런 편가르기에 진영 논리로 후보자에게 일방적이고 열렬한 지지를 보내게 될 때 그곳에는 집단적인 원형적 투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대중은 선동당하고 복종해야 하는 양으로 전락합니다. 그런 곳에는 개체와 생명은 말살될 위험에 처합니다. 이런저런 복잡함 속에서도 새봄이 우리에게 도래하길 기도합니다.
아쉬운 것 많지만
오늘 시편 23편은 기독교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노래입니다. “다윗의 노래”라는 표제를 달고 1절은 시작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저는 이 번역보다 공동번역을 선호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더 이상이 어떤 미사여구나 설명이 필요 없는 구절입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 나는 아쉬움이 없습니다.” 아쉬움이 없다는 말이 저의 마음을 늘 사로잡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쉬움 많고 부족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이 결핍의 감정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돈은 쓸수록 부족하고, 시간이 늘 모자라고, 건강도 때때로 여의치 않은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인지 다윗의 고백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이런 아쉬움을 일소하는 근원이 나의 목자되신 주님이라는 고백은 살아낸 자의 확신 같아 보입니다. 뜻밖의 은혜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주님이 나를 인도하셨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목자의 이미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양을 어깨에 메고 가는 선한 목자의 이미지는 아주 오래된 형상입니다. 구약성서 뿐만 아니라 헤르메스와 오르페우스가 목자의 상으로 나타납니다. 헤르메스는 사이코폼프psychopomp, 영혼의 인도자 혹은 목자로서 역할을 하고,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에 속한 헤르메스의 저작에는 포이만드레스poimandres, 즉 사람들의 목자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목자의 상은 그리스도의 상징성으로 발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지칭합니다.
주님을 목자로 갈망하며 노래해야 하는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쉬움이 많고 부족함이 많은 상황, 곤궁과 위기,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때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좋고, 만족스러운 상황일 때는 표면에 머무를 뿐 심층에 있는 원형적 힘과 접속하기 어렵습니다. 자아의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상황, 주님이 제공해주시는 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에 가장 강력하게 주님의 인도하고 양육하는 측면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정신의 원시적인 측면이 열리고 활성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새로운 국면의 전환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1절의 고백은 아쉬움이 없는 상태에서의 노래라기보다는 아쉬움과 결핍이 삶을 죄어오는 상황 속에서 목자를 호출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바라는 것들을 실현시킬 목자를 향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아쉬움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고, 부족함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혼이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죽음의 위협이 사방에서 깃들이고, 적들이 내 앞에 있어 두려움과 불안이 나를 향해 다가올 때야말로 우리를 이끄시고 기르시는 주님이 또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실 때라는 것을 아는 자는 씩씩하게 그 자리에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풀밭과 물가
목자는 새 힘을 주시기 위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풀밭은 양의 먹거리를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는 영역이고 물가는 양의 목마름을 해갈해주는 장소입니다. 푸른 풀밭은 새로운 생명력과 희망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물가는 생명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물가를 세례의 물로 해석했습니다. 잔잔한 물은 구원하는 물입니다. 이는 선한 목자되신 주님이 자신을 개방하고 목자에게 반응하는 자들을 생명수로 인도하고 새로운 생명력과 희망의 길로 안내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내면의 소리, 본성에 자아를 개방하면 목자와 같은 안내자는 새 힘이 다시 생길 수 있도록 자아를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내면에서, 때로 꿈에서 나를 이끌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고, 안내자의 형상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실제 개인적이고 집단적 삶에서 나를 인도하는 목자 상의 참 실체를 온전히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곳에는 나의 투사가 개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지도자상을 지지할 때 무의식적 투사가 일어납니다.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인물은 내면의 목자 상을 투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 목자가 양을 탈을 쓴 늑대나 트릭스터같은 사기꾼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개인의 삶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목자의 상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종의 객관화,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안내하는 목자 상이 내가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하는 상이 아닐 때 우리는 그 안내자를 따르지 못합니다. 그 안내자는 정해진 길이나 익숙한 방식으로 나를 인도하지 않고, 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길로 나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구릿빛 아름다운 얼굴에, 찰랑찰랑한 금발 머리에 멋진 지팡이 들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우리를 안내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불량배의 얼굴로, 일그러진 작은 난쟁이로, 길거리에 구걸하는 아이들로, 불쾌하게 만드는 꼬부랑 할머니로 나타나 낯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형상들을 내가 수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들은 변환하여 새 힘과 에너지를 다시 부여하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생명의 물가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새 힘을 주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소시키고, 생명과 희망의 길로 안내할 목자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고 또 물으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막대기와 지팡이
목자의 이미지에서 막대기와 지팡이는 아주 전형적입니다. 이런 막대기와 지팡이는 메시아의 도래에서 심판의 이미지와 중첩됩니다. 목자는 지팡이와 더불어 대부분 쇠조각을 단 몽둥이로 맹수를 막았습니다. 목자가 지닌 막대기와 지팡이는 양들에게 방향을 지시하고 맹수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로고스 측면이자 분별지의 특성을 대변합니다. 4절에 “죽음(사망)의 그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와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고 노래합니다. 보살핀다는 의미는 개정개정에서는 안위하다로 번역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위로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불안에 떨고 고난당하는 자들을 격려한다는 의미입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는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어둠, 내면의 지옥 같은 상황으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을 안위해 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두려움과 불안 앞에 있을 때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는 우리에게 어둠의 정체를 분별하여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에 있을지 일러줍니다.
1897년 인생 후반에 그린 고갱의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1.39 X 3. 75m의 화폭에 고갱은 후회와 절규 같은 그림을 담아냅니다. 오른쪽에는 과거가 투영된 세 명의 여인과 강아지, 아기 고갱이 그려져 있습니다. 세 명의 여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아이는 생명력으로 활기차 보입니다. 가운데 부분에는 매달린 열매를 따는 창세기의 주제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미 사과같은 것을 먹고 있습니다. 그 뒤는 나무는 썩어들어가어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늙은 한 남성이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한 여성은 그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주변은 황무지가 되어 있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살며 술과 진통제 없이는 하루도 견딜 수 없어서 1903년에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그에게는 막대기와 지팡이가 부재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이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안위받아 새 힘을 얻는 여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잔치상을 차려서
시편 23편에서 주님의 이미지는 잔치상을 배설하시고 초대하시는 주인으로 나타납니다. 그것도 적들 앞에서 잔치상을 베푸셔서 초대하시고 나의 잔이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연회의 이미지가 강력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서에서 대단히 중요한 상징입니다. 유대전설에는 리워야단과 베헤못이 음식으로 제공되는 메시아적 연회가 있습니다. 원시부족들과 토템 식사가 연회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정에서 유월절 식사,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기를 식탁의 내용, 무엇보다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은 이런 연회의 식탁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연회의 잔치상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콤플렉스를 동화하는 것이 연회의 잔치상입니다. 우리 자신이 동화하고 섭취해야할 내용이 식탁 위에 배정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꿈에서 식탁에서 먹는 주제는 우리가 동화해야할 심리적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또 다른 연회의 잔치상의 의미는 신성한 식탁으로 주님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주님과 연합하게 되고, 초대받고 그 음식을 먹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연회의 잔치상은 신과의 연합을 이루어 존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기름을 부우시는 것은 특별한 부름가운데 다시 소명받은 자로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잔치상을 차려주시고 우리를 초대하시어 우리에게 차려주신 음식을 먹게 하십니다. 때로 내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차려진 잔치상에서 음식을 먹는 자는 영혼은 강화되고, 다시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동화하길 원하는 음식이 무엇인가요? 잔치상을 차려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 나를 부르시는 부름은 무엇인가요? 주님의 차려주신 잔치상에 먹고 기름을 부름을 받아 주님이 원하시는 그 뜻을 이루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