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K. 창가. 장율은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꺼냈다. 기내 창밖엔 히드로공항의 주황빛 활주로가 흘렀고, 그의 눈동자에는 먼 여운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굿바이, 런던. 헬로우, 전쟁터.” 그때였다. “Excuse me?” (실례합니다?) 고개를 들자, 젊은 여성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한 발음, 단단한 어조. 그리고… 단정하게 올린 머리카락. 기내 조명 아래서 은은하게 빛나는 균형 잡힌 이마선, 시선을 마주치면 슬쩍 피할 법도 한데, 오히려 정면으로 받아내는 묘한 당당함. 장율은 그 몇 초 동안 자동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시선. 화장도 과하지 않고, 목소리도 낮게 깔림. 보통 사람은 아닌데… 세상 귀찮고, 사람은 더 귀찮은데… 매너는 절대 놓지 않는.’ 그녀의 옷차림은 담백했다. 민트빛 니트, 블랙 슬랙스, 가죽 시계. 하지만 어떤 디테일도 허술하지 않았다. 감각은 단정했고, 태도는 사무적이었다. 그는 순간 흥미를 느꼈다. 이런 사람은 보통 자기 감정 표현을 계산해서 쓰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녀의 눈썹. 살짝 올라간 눈썹 각도는 싸우기보단 설득을 선호하는 사람의 표식. 하지만, 설득이 안 될 경우엔 칼같이 돌아서겠다는 결심까지 담겨 있었다. ‘이건 꽤 독한 타입인데?’ 그는 살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저 눈빛을 마지막으로 본 게… 옥스퍼드 마지막 세미나 때였지. 감정 없이 날카로운 사람. 근데 이상하게 자꾸 눈에 밟히는 그런 사람.’ 그는 습관처럼 반사적으로 영어로 응답했다. “Yes?” (네?) “That’s my seat. 35K.” (그 자리, 제 자리예요. 35K요.) 장율은 탑승권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Mine too. Looks like we’re both lucky… or doomed.” (저도요. 우리 둘 다 운 좋은 걸까요… 아니면 재수 없는 건가.) 여자가 탑승권을 확인하더니,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You Korean?” (한국인이세요?) 장율은 입꼬리를 올렸다. “Fluent enough to order grilled pork belly and win an argument with my mom.” (삼겹살 시키고 엄마랑 말싸움에서 이길 정도는 됩니다.) 그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럼 그냥 한국말 하죠.” 장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전환했다. “좋죠. 영어로 싸우면 감정 전달이 잘 안 되더라고요.” “싸울 생각 없어요. 자리 좀 비켜주세요.” “어… 근데 이 자리, 제 것도 맞거든요.” 그는 탑승권을 내밀며 덧붙였다. “35K. 정확히 입력된 제 출국 티켓입니다. 전 이런 거, 숫자 안 틀리는 성격이에요.” “그쪽만 정확하다는 보장은 없죠.” 그 순간, 그녀가 탑승권을 내밀었다. 거기에도 35K. 장율은 눈썹을 살짝 들었다. “오, 대형 사고. 혹시 이 자리에 운명적으로 둘이 앉게 되는 시트콤인가요?” “무슨 드립이에요. 승무원 부르죠.” 잠시 후, 승무원이 다가왔다. “Sorry for the inconvenience. It seems there’s a system error. Both of your tickets show seat 35K. One of you will need to move to a different seat. We apologize.”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시스템 오류로 두 분 모두 35K 좌석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한 분께서 다른 좌석으로 이동해 주셔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바로 말했다. “I’ll move.” (제가 옮길게요.) 장율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오? 그쪽 스타일상 절대 양보 안 할 줄 알았는데요.” “이유 있어요.” “뭔데요?” “당신이 피곤한 스타일일 것 같아서요.” 장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진짜 피곤하진 않아요. 그냥… 말이 많은 겁니다.” 그녀는 가방을 챙겨 이동하며 조용히 말했다. “진짜 말 많은 거, 인정.” 5분 후.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Excuse me.” (실례합니다.) “Again?” (또요?) “…짐이요. 좌석 밑에 뒀어요.” 장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꺼내 건넸다. “Here’s your stuff, ma’am. Hope you had a nice walk.” (여기 짐이요, 손님. 산책은 괜찮으셨나요?) “아, 진짜… 유머로 승부 보지 마세요. 안 통하니까.” “알겠습니다. 다음부턴 외모로 승부 보겠습니다.” “얼굴로도 안 돼요.” “그럼 이제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네요. 저, 장율이라고 합니다. 성격은 유감입니다.” 그녀는 가방을 받아들며 피식 웃었다. “…재밌긴 하네요. 근데 딱 거기까지예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Ladies and gentlemen, welcome aboard flight KE902 to Seoul…” “모든 탑승객께서는 좌석 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창밖엔 어둠과 구름, 그리고 아직 풀리지 않은 과거의 퍼즐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장율은 조용히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한 줄을 타이핑했다. “이 여정, 그냥 귀국이 아니다. 이건, 봉인을 다시 여는 항로다.”